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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사(4)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7. 한(韓)
○ 한(韓)[註001]
1) 한(韓)[註002]은 대방(帶方)[註003]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註004] 둘째는 진한(辰韓),[註005]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註006]
2) 마한(馬韓)은 [삼한(三韓) 중(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綿布)을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城郭)이 없었다.[註007]
[마한(馬韓)의 제국(諸國)으로는]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신분고국(臣濆沽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註008]·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신흔국(臣釁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冉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辟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臣蘇塗國)·막로국(莫盧國)·점랍국(占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운국(不雲國)·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원지국(爰池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십여국(國)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로서 총(總) 10여만호(餘萬戶)이다.
진왕(辰王)[註009]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신지(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축지(安邪踧支) 분신이아불례(濆臣離兒不例) 구사진지렴(狗邪秦支廉)[註010]의 칭호(稱號)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3) [조선(朝鮮)]후(侯) 준(準)이 참람되이 왕(王)이라 일컫다가 연(燕)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王)이라 칭하고 동(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나라를 역습(逆擊)하여 주(周) 왕실(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燕)은 장군 진개(秦開)[註011]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註012]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弱化)되었다. 진(秦)나라가 천하(天下)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長城)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朝鮮王) 비(否)가 왕(王)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政略)상 진(秦)나라에 복속(服屬)은 하였으나 조회(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비(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진(陳)[승(勝)]과 항(項)[우(羽)]가 기병(起兵)하여 천하(天下)가 어지러워지자, 연(燕)·제(齊)·조(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準)에게 망명(亡命)하므로, 준(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盧綰)으로 연왕(燕王)을 삼으니, 조선(朝鮮)과 연(燕)은 패수(浿水)[註013]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盧)]관(綰)이 [한(漢)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간 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도 망명(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東)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하였다. [위만(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中國)의 망명자(亡命者)를 거두어 조선(朝鮮)의 번병(藩屏:병풍)이 되겠다고 준(準)을 설득하였다. 준(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下賜)하며, 백리(百里)의 땅을 봉(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王宮)]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準)을 공격하였다. 준(準)은 만(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4) [준왕(準王)]은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註014]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위략(魏略)>:
준(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사칭하였다. 준(準)은 해외(海外)[의 나라]에서 왕(王)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準)의 후손은 절멸(絕滅:끊어짐)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5) [한(韓)은]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朝謁)하였다.
<위략(魏略)>: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註015]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호(戶)[註016]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에 조공하는 번국(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王莽)의 지황(地皇) 연간에, 염사착(廉斯鑡)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樂浪)[註017]의 토지(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재목(材木)을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착(鑡)이 “나는 한(漢)나라의 낙랑(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하니, 호래(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착(鑡)은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含資縣)에서 [낙랑(樂浪)]군(郡)에 연락을 하자, [낙랑(樂浪)]군(郡)은 착(鑡)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가서 호래(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착(鑡)이 이때 진한(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樂浪)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진한(辰韓)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변한포(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착(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낙랑(樂浪)]군(郡)에서는 착(鑡)의 공(功)과 의(義)를 표창하고, 관책(冠幘:벼슬)과 전택(田宅)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代)를 지나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A.D.125; 백제 기루왕-百濟 己婁王 49)에 이르러서는 그로(선조의 공으로) 인하여 부역(賦役)을 면제받았다.
6)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말기(末期)에는 한(韓)과 예(濊)[註018]가 강성하여 [한(漢)의] 군(郡)·현(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註019] 건안(建安) 연간(A.D.196~220; 백제 초고왕-百濟 肖古王 31~구수왕-仇首王 7)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한(韓)·예(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7) 경초(景初) 연간(A.D.237~239; 백제 고이왕-百濟 古爾王 4~6) 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帶方)·낙랑(樂浪)의]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한족(韓族)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註020]들도 [낙랑(樂浪)이나 대방(帶方)]군(郡)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衣幘)을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註021]과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帶方)]태수(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8)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제국(諸國:여러나라)의 도읍에 비록 주수(主帥:지도자)가 있어도 읍락(邑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궤배(跪拜:무릎꿇고 절하기)하는 예(禮) 또한 없다. 거처는 초가(草家)에 토실(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장유(長幼:어른과 아이)와 남여(男女)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사용하지 않는다.[註022]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금수(錦繡:수놓은 비단)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병기(兵器)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장(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註023]
9)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중국(中國)의]
탁무(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註024]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註025]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蘇塗)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10) 그 나라 북방(北方)의 [중국(中國)]군(郡)에 가까운 제국(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가 나지 않고, 동물과 초목(草木)은 대략 중국(中國)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세미계(細尾雞:꼬리 가는 닭)가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척,尺) 남짓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문신(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주호(州胡:제주도)[註026]가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족(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11)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은 대대(代代)로 전(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나라·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辰韓)은] 처음에는 6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國)으로 나뉘어졌다.
12) 변진(弁辰)도 12국(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저국(已柢國)·불사국(不斯國)·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염해국(冉奚國)·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변[진]악노국(弁[辰]樂奴國)·군미국軍彌國(변군미국弁軍彌國)·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여담국(如湛國)·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마연국馬延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 우유국(優由國)이 있어서,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의 합계가 24국(國)이나 된다.
대국(大國)은 4~5천가(家)이고, 소국(小國)은 6~7백가(家)로, 총 4~5만호(萬戶)이다. 그 중에서 12국(國)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註028]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世襲)하였으며, 진왕(辰王)이 자립하여 왕(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魏略)>:
그들은 [외지(外地)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13) [변진(弁辰)의] 토지(土地)는 비옥하여 오곡(五穀)과 벼[註029]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위략(魏略)>: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에 나무를 가로로 쌓아서 만들기 때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변진(弁辰)의] 나라에서는 철(鐵)[註030]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鐵)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의] 두 군(郡)에도 공급하였다.
14) [그 나라의]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같고 연주하는 음곡(音曲)도 있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辰韓)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註031]
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여(男女)가 문신(文身)[註032]을 하기도 한다.
보전(步戰)을 잘하며, 병장기(兵仗器)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길을 양보한다.
15) 변진(弁辰)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성곽(城郭)도 있다. 의복(衣服)과 주택은 진한(辰韓)과 같다. 언어(言語)와 법속(法俗)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들 조신(竈神=조왕신:부엌신)을 모신다. 그 중에서 독로국(瀆盧國)[註033]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國)에도 왕(王)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衣服)은 청결하며 장발(長髮)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嚴峻:매우 엄하고 세참)하다.
8. 찬자평(撰者評)
○ [역사 편찬자인 진수(陳壽)는] 평한다. 『사기(史記)』·『한서(漢書)』에서는 조선(朝鮮)과 양월(兩越)[註034]을 기록하였고,
동경(東京)(후한-後漢)시대에는 서강(西羌)에 대해 찬록(撰錄)하였다. 위(魏)나라 때부터 흉노(匈奴)가 쇠약해지자, 다시 오환(烏丸)과 선비(鮮卑)가 나타났다. 이어 동이(東夷)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였으니 어찌 범상(凡常)한 일이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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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2. 한자(漢字)를 한글로 바꾸는데는 아래한글 프로그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3. 삼국지에는 틀린 기록도 있고, 엉터리 기록도 있으며, 거짓 기록도 버젓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