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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역사
실질적인 런던의 역사는 로마 점령기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런던 다리에서 콘힐에 이르는 그레이스처치가는 로마 점령 당시 런던 다리로부터 로마인들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를 세웠던 론디니움의 중심부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지 17년 후 부디카 여왕이 이끄는 이케니족(族)이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약탈했다. 그들이 방화한 흔적을 따라가 보면, 당시에 이미 서쪽 월브룩을 지나 훗날 세인트폴 성당이 들어선 언덕까지 촌락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화사건이 있은 이후에, 중앙통로 길이가 약 150m에 이르는 보다 큰 규모의 바실리카풍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교회가 서 있던 자리에 지금은 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1881년도 작품 레든홀마켓이 자리잡고 있다.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북서쪽 경계에 크리플게이트 요새가 지어졌으며, 성벽은 2세기말에 비로소 건설되었다. 지금도 바비칸(런던월) 경계지역과 타워힐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에 가면 그 당시 성벽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이 성벽들이 중세에 재건·확장되면서, 성문의 추가 건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드게이트, 올더스게이트·비숍게이트·크리플게이트·루드게이트·뉴게이트 등과 같은 로마 시대 성문들은 그대로 보전되었다. 로마 군단은 5세기초에 로마로 철군했는데, 이후 2세기 동안 런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2세기 동안에도 로마인들이 건설한 거리의 양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에 건설된 칩사이드가와 캐논가는 로마 점령기의 동서 도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런던이 언제 어떻게 색슨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는 전혀 없으나,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로마에서 영국으로 파견한 597년에 이미 런던은 다시 중요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켄트의 왕인 애설버트 1세는 세인트폴 성당을 지었으며, 604년 멜리투스가 이 성당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음 세기에 성인 비드는 런던을 육지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런던은 1세기 이상 앵글로색슨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알프레드 대왕(849~99) 시대 및 데인족과의 전쟁 기간중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런던의 재정적·군사적 중요성과 이에 따른 정치적 중요성은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1066) 시기에 분명해진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취한 첫 조치들 중 하나는 런던 시민들에게 참회왕 에드워드 밑에서 누렸던 것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허용하고, 런던 시민에 대한 어떤 음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장에 서명한 것이다. 그가 런던 성벽 바깥 쪽에, 런던 탑에 딸린 위협적 아성으로 노르만 양식의 화이트타워를 세운 것도 그만큼 런던의 잠재적인 힘을 중시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였다. 화이트타워는 높이 27m 가량의 4각형꼴(가로 35m, 세로 32m 가량) 건축물이다. 성벽의 바닥 두께는 약 4.5m이고, 꼭대기 두께는 약 3.3m로, 각 모서리마다 탑들이 서 있다.
리처드 1세는 새로운 축성법을 익혀 십자군원정에서 돌아와 이 아성 중앙탑 둘레에 일정한 간격으로 동심형 탑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작업은 헨리 3세 때에 완료되었다. 이후 사실상 모든 왕이 자신의 재임기간중 런던 탑에 조금씩 손질을 가해, 이 성채는 거의 모든 시대의 영국 건축양식이 종합된 건축물이 되었다. 제임스 1세 때까지 공식적인 왕의 거주지였던 런던 탑에는 왕립 조폐소, 왕립 동물원, 공문서 보관소, 천문대, 병기창 등이 들어서 있다. 흔히 이곳을 역사가 오래된 처형장으로 생각하나, 실제 런던 탑의 1,000년 역사 중 이곳 감옥에서 집단 처형이 있었던 것은 겨우 6번뿐이다. 그밖의 모든 처형식은 엄밀히 말해 런던 탑 성벽 밖에 있는 타워힐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채는 예로부터 늘 국사범들을 투옥하는 감옥역할을 해왔다. 처음 이 감옥에 투옥된 국사범은 더럼 주교(1101)이며, 마지막은 나치 독일의 제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제2차 세계대전중 투옥)였다. 이곳에는 현재 왕실 보석들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국의 무기·갑옷·투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1135년 헨리 1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런던 시민들은 직접 영국왕을 선출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해 스티븐을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3주 후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1136년경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런던의 많은 목재가옥과 세인트폴 성당이 불에 탔다. 복구사업이 진행되면서 석조 및 타일로 된 가옥들, 포장된 거리, 뚜껑이 없는 하수구, 도랑 등이 건설되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거리가 정화되었다.
12세기말에 덴마크 상인들이 들끓던 런던에 독일인들 수효가 늘어났다. 독일인들은 1598년까지 템스 강변 스틸야드에 자신들의 무역거점을 갖고 있었다. 그밖의 중요한 무역상들로는 프랑스 가스코뉴인, 플랑드르인, 북부 이탈리아인 등이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은행가로서 지위가 확고해지자, 1290년 유대인들을 약탈·투옥·추방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런던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1400년 110개에 달한 런던의 동업조합들은 빈궁한 군주들을 돈으로 매수해 점점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해나아갔다. 그들은 왕이 자신들의 일에 간섭치 못하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런던 시의 자치권을 얻어냈다. 1192년 최초의 런던 시장인 헨리 피츠에일윈이 시장업무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332년부터 시의회가 있었다는 정확한 증거자료가 남아 있다. 나라 전체가 불안하면 런던의 안정도 깨어지기 때문에, 런던은 강력하고 안정된 중앙정부를 지원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에드워드 2세(1327 폐위)와 리처드 2세(1399 폐위)의 폐위, 영국 농민의 반란(1381), 잭 케이드의 반란(1450) 등과 같은 사건에 강력하게 작용했다.
16세기 중엽에 런던은 무역과 인구 면에서 급성장했다. 1530~1600년 런던 시민의 수효는 3배로 증가했다. 초과 인구의 경우 처음에는 종교개혁 당시 헨리 8세에 의해 몰수되었던 종교기관 부지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런던 시는 종교단체들의 자선이 끊김으로써 생겨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1547년 빈민구제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기근 때에는 빈민들에게 곡물을 배급해주었으며, 5개의 왕립병원인 세인트바돌로매·크라이스트·베들레헴(베드램으로 알려진 정신병원)·세인트토머스·브라이드웰 병원을 새로 만들거나 재건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민간 자선시설들은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무역업은 무스코비사(1555), 후에 레반트사로 바뀐 터키사(1581), 동인도회사의 독점사업으로 인해 더한층 번창했다. 1605년에 런던의 인구는 놀랍게도 무려 7만 5,000명이 되었으며, 인구억제법이 있는데도 런던 성벽 밖에 또 15만 명이 모여 살았다. 원래 런던 다리 가장 끝에 있는 사우스워크는 런던의 26번째 자치구가 되었다. 비단 직조, 유리 및 마졸리카 도자기 제조 등과 같은 새로운 업종들이 대부분 동업조합의 제한규정을 벗어난 곳인 성문 밖에서 생겼다. 헨리 8세가 남쪽 제방 뎁트퍼드에 해군 공창을 건설하자, 북쪽 제방 강기슭에 있는 웨핑 여기저기에 오두막이 들어섰다.
1529년 헨리 8세가 울시 추기경의 요크 저택을 화이트홀 궁으로 개조하고 들판 너머에 세인트제임스 궁을 짓기 시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시는 왕궁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의 윤곽이 보다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 시와 런던 시 사이에는 귀족들의 대저택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대저택들은 강가 쪽으로 정원이 있었고 각기 자체 수문이 달려 있었다. 이 저택들 반대편 스트랜드가에는 법원 개정기간중 마을에 머무는 지체높은 사람들의 고상한 임시 거주지들이 늘어서 있었다. 런던이라는 지명은 오래지 않아 런던 시와 웨스트민스터 시, 인가가 빽빽히 들어선 그 중간 지역 모두를 포함하는 지명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기간(1558~1603)중 런던은 전 영국을 지배한 전성기를 맞는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런던의 시민군·재력·후원 등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1585년과 1589년 해외파병 인력의 1/4을 조달했고, 스페인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한 자체 '시민군'을 조직했다.
시민군의 전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찰스 1세는 무역으로 생기는 런던의 이익을 감소시키는가 하면 의회에 대해 그러했듯이 런던의 특권을 경시하다가 1642년 런던을 공격했으나, 턴엄그린에서 런던 시민군에게 저지당했다. 요새화된 도시 런던은 왕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가장 강력한 의회편이 되었고, 왕당파와의 싸움에서 의회파가 승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색인 : 영국내란).
1664~65년에, 1348년의 흑사병 이래 자주 런던을 괴롭혀온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런던 시민 7만 5,000명이 사망했다. 그 이듬해에는 9월 2일부터 9월 5일까지 계속되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4/5를 불태웠다. 도시 북동쪽과 서쪽 끝 모서리의 불타지 않은 지역들에서부터 복구사업이 시작되었다. 합리적인 거리 복구계획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구가로들을 따라 새로 건설된 거리는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곧아졌다. 1667~71년 대부분의 새 주택들이 건설되었다. 이때의 집들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목골조 건물은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다. 규모가 작은 많은 행정교회구들이 합병되었고, 일부 교회들은 화재로 인한 피해를 면해 50개의 교회만이 재건되었다. 세인트폴 성당은 새로 건설되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들 설계와 건설 감독을 맡은 사람은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로서 비공식적으로 건축을 배운 크리스토퍼 렌 경이었다(→ 색인 : 런던 대흑사병, 세인트폴 대성당).
세인트폴 성당 안에는 렌 경이 새겨넣은 "낭독자여, 기념물을 찾으려 한다면, 그대 주변을 둘러보라"라는 문구가 있다. 런던 시 전체는 거대한 렌 경의 기념물이다. 그가 건축한 교회는 소박한 네덜란드풍의 교회로부터 고딕 양식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한데, 거의 모두 고전양식을 자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통일된 건축 이념을 토대로 한 웅대한 일련의 변주곡처럼 모두 동일한 섬세함과 샘솟는 듯한 활력이 담겨 있다. 세인트폴 성당의 둥근 천장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것 중의 하나로, 성당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바로크풍의 우아한 분위기가 깔린 고전양식이 기조가 되고 있다. 대화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기념기둥은 렌 경의 설계기법이 인용된 것으로, 처음 화재가 발생한 왕의 제과점이 있던 푸딩로에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그는 런던 시 밖에 4개의 교회를 지었으며, 첼시에 있는 로열 병원, 켄징턴 궁의 일부, 그리니치 병원, 그리니치 왕립천문대, 햄프턴코트 궁 등을 건설했다.
찰스 2세 재임기간중에 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런던 시의 권리가 회복되었다. 제임스 2세 또한 1688년 자신이 도피하기 이전에 박탈했던 런던 시의 권리들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런던 시민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성직자와 세속 영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렌지 공 윌리엄(이후에는 영국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충성을 런던 시청에서 맹세했다.
169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40명의 런던 상인이 모여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런던의 자금시장은 영국의 국사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영국 전체에 미치는 런던의 또다른 영향력은 훌리트가에 모여 있는 전국적 규모의 일간지들에서 비롯된다. 1785년 블랙프라이어스가 안쪽에 세워진 〈타임스 The Times〉 건물은 1974년에 새로운 건물로 옮겨졌다.
현대도시의 발전
조지 4세가 왕위를 계승한 1820년에 이르면, 런던의 전체적인 성격도 많이 변화한다. 인구는 11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660년에는 도심지 사람들이 여름 행락지 정도로 여겼던 마을이나 교회도 없는 조그만 마을들이 인구밀집지대로 바뀌었다. 건물들 중 일부는 대지주들의 잘 계획된 작품이었고, 일부는 탐욕스런 소지주들의 볼품없는 작품이었다. 베드퍼드·포트맨·파운들링 등의 지역에는 거리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가로와 광장들이 들어섰다. 반면 동쪽의 스테프니 및 베스널그린 지역 일부에는 잘못 지어진 연립주택들이 들어섰다. 현재의 킹스크로스와, 세인트팽크러스 기차역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아거 시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 색인 : 도시화, 도시계획).
1689~1820년에 있었던 변화는 특별한 계획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런던 시 당국은 자체 행정력이 확고했고 활동력도 상당했다. 중세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런던 시 경계선 밖에 있는 지역들에 대한 행정 서비스와 교통편의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력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의회로 하여금 자신들이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하는 지방세법을 통과시키게 해, 도로포장·거리조명·거리청소·경비대(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건설한 거리들은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서비스들 때문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런 서비스들은 대부분 효율적으로 관리·유지되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후세를 위해 거리를 깨끗이 하고 빈민가를 없앴다. 사회적·재정적·상업적 측면에서도 런던은 영국의 중심지였다.
런던은 동·서 인도 및 세계 각국과의 교역에서 생긴 이익으로 축적한 부를 토대로 연극, 문학, 기타 예술 분야에서 영국 제1의 도시로 군림했다. 데이비드 개릭, 올리버 골드 스미스, 새뮤얼 존슨, 조슈워 레이놀즈 경, 가구 제작인들, 은세공사들, 런던에 거주하거나 잠시 방문한 명성 높은 외국 음악가들 등이 이 도시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한정된 면적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직화·혁신·개혁
진료소가 새로 지어지고 병원도 확장공사를 하거나 새로 지어져 사망률은 떨어졌지만, 과거 강가의 도시였던 런던이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행정·교통체제·위생시설 등이 필요했다. 이 모든 면에서 런던은 1820~1914년에 점진적으로 힘겹게 발전했다. 인구가 1821년의 122만 5,694명에서 1901년에는 658만 6,269명이 되었다. 그러나 런던에는 서서히 혁신이 일어났다. 1829년에는 내무장관을 장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된 런던 경찰이 발족, 비조직화되었던 과거의 경비대와 행정교구의 치안담당관 역할을 대신했다. 희미한 석유등 대신 가스등이 들어서 거리조명을 대신하는 혁신이 일어났으며, 가스 광원(光源)과 코크스회사(1812)가 설립되었고 그뒤를 이어 런던 전역에 유사 업체들이 생겨났다. 또 합승마차(1829)가 도로 교통에 혁신을 일으켰으며, 그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철도 수송이 도입되었다. 1845년에 실시된 공중위생 검사 결과, 런던의 공중위생이 가장 밑바닥 수준임이 드러났고, 그결과 1852년에는 깨끗한 식수 보급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1855년 제정된 법령(런던 관리법)에 따라, 수많은 소규모 지방 행정단위들이 통합되었고, 잡다한 시민 참정권이 모든 지방세 납부자에 의한 직접선거로 대체되었다. 대하수관 건설과 같은 주요공사는 런던 공사국 소관이 되었다.
C. J. 블롬필드 주교, 로버트 필 경, 에드윈 채드윅(후에 에드윈 채드윅 경으로 추대됨), 샤프츠베리 백작 등의 개혁론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변화들은 그 여세를 몰아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새 교회, 새 학교, 보다 나은 치안, 대하수관,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등등이 개혁론자들의 숙원사업이었고, 트라팔가 광장, 제방, 빈민가를 가로지르는 샤프츠베리로와 채링크로스로 등이 그들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었다. 행정체제의 변화는 급격하지 않게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889년에는 런던 주의회가 런던 공사국의 업무를 떠맡게 되었고, 1899년에는 런던 행정법이 제정되어 교구들이 런던 자치구로 바뀌었으며, 1902년에는 여러 상수도회사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공공기관인 런던 수도국이 되었다.
공공사업과 민간사업이 계속되면서 런던의 외양에 변화가 일었다. 1863년에는 증기철로선인 메트로폴리탄이 개통되고, 1869년에는 홀본 고가다리가 놓여졌다. 템스 강에 연이어 새로운 다리들이 건설되었고, 배터시, 웨스트민스터, 블랙프라이어스, 런던 다리 등이 개축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토론과 여론 호소 끝에, 런던 외곽 다리들이 공공관리체제로 들어갔고, 통행료 징수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또 남부의 간선철로 대부분이 북쪽으로 템스 강을 지나 런던·빅토리아·채링크로스·블랙프라이어스·캐논스트리트 역까지 연결되었다. 이 시기야말로 왕성한 창의력과 막대한 자본이 풍부한 노동력과 결합해 새로운 기술, 값싼 수송비, 막대한 자원 등을 최대한 활용한 시기였다. 기술적인 진보도 끊임없이 이루어져 런던 시민의 생활과 도시 외양을 바꾸어놓았다. 값싼 교외 열차 덕택에 사람들은 근무지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져서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1870년에 제정된 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런던 교육국은 모든 런던 시민에 대한 초등교육 의무제 시행에 착수했다. 열차와 말이 끄는 전차는 1861년 도입 당시의 시행착오를 거쳐 1870년대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20세기초에는 전기가 동력원으로 개발되면서 유력한 대도시 운동수단으로 부상했다. 이윽고 전기는 지하 교통의 동력원이 되어, 1890년 11월 4일에는 웨일스 공에 의해 킹윌리엄가에서 스톡월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지하전철이 개통되었다. 1914년 이전에 가솔린을 동력원으로 하는 버스가 등장함으로써 현대 런던의 교통체제 윤곽이 완성되었고, 여전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런던 교외 지역들에 대한 교통로도 활짝 열렸다.
런던의 발달과 함께 필연적으로 도심지역의 땅값이 치솟아 소규모 주택 대신 수많은 대규모 사무실, 공장, 창고 등이 건설되었고, 보다 나은 주택보급 정책과 거리 개량을 위해 공공·민간 자본이 끊임없이 투자되었다. 공습으로 런던에서만 2,6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발전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전쟁 후에는 오히려 그 발전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 국가의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수도였던 런던은 자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공기관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통합과 확대의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은행에서 병원, 그리고 전화교환국에서 발전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확대되었다. 1850년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교통체증이 교통당국의 교통합리화정책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는 악화되었고, 1939년에 집합도시 런던의 인구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재건
공중폭격에 의한 대규모 파괴와 주민 소개를 유발시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현대 도시 런던은 역사상 가장 큰 퇴보를 하게 된다. 공중폭격으로 3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공공건물이, 런던과 스테프니 지역의 경우에는 가로망이 모두 파괴되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국회의사당도 폭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대규모 파괴는 면했고, 세인트폴 성당과 시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반주택과 템스 강 항만시설들은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피난민들이 하나 둘 다시 돌아왔는데, 이들은 심각한 주택난과 목재의 건조부패에 시달려야 했다. 대부분의 건자재가 부족해 애를 먹기는 했으나, 이미 과거에 세워놓았던 도시계획과 각종 조사에 힙입어 복구사업이 즉각 시작되었다. 도시 및 농촌 사업계획법(1944)과 연이어 1947, 1954, 1959, 1968년에 나온 관계법들은 복구공사를 위해 유례없이 강력한 원자재 구입 및 공사 명령·통제권을 확보해주었다. 급하게 치러야 할 영국축제(1951) 때문에 로열페스티벌홀과 랜스버리가 지어졌다. 그러나 전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업들로는 새 주택건설을 위한 대규모 투자, 각종 서비스의 재개, 런던 항의 복구, 계획적인 도시경제의 전반적인 도입, 각종 산업의 런던 외곽 신도시 및 확장도시에로의 지속적 분산 등을 꼽을 수 있다. 면적:런던 시 2.8㎢, 이너런던 321㎢, 그레이터런던 1,579㎢, 인구 7,172,091(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