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훵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잔디를 에워싸고 있던 사철나무의 키가 아이마냥 작아져 있었다.
지난번의 폭설에 가지가 휘어져서 볼썽사나웠던 것은 사실이나 잘라내어도 어쩌면 저리 혹독하게 베어 버렸을까?
나는 나무의 반듯하게 깎인 둥치를 보고 쓸쓸한 마음에 한참을 걸음도 옮기지 못했다.
병풍처럼 마당의 잔디밭 둘레를 감싸던 커다랗던 나무.
며칠 전에 공동 청소를 할 때 전체 총무와 부녀회 총무가 쓰러진 흉물스런 나무를 두고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전체 총무는 대중목욕탕에 많이 필요로 하는 일회용품과 잡화류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서 우리 단지 내의 잡다한 일을 일일이 돌보지 못했다.
관리인도 없는 소규모의 아파트여서 전체 총무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었다.
돌보지 않으면 밖의 외등도 금방 수명이 다해 버리고 마당에 한 밤중에 들어서다보면 캄캄하여서 주차할 때마다 애를 잔뜩 먹기 마련이다.
통로 현관 유리는 아이엠에프에 열 받은 취객이 깨트려 놓았었는데 험상궂은 모습을 한동안 내내 드러내고 있다가 얼마 전에 깨끗이 갈게 되었다.
계단 보호대 격인 손잡이 봉도 아이들 자전거 묶어두느라 얼마나 흔들었는지 스테인리스로 단단하게 만들어졌던 그 손잡이는 가늘게 들어와서 부는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거렸다.
그 또한 보다 못한 부녀회 언니들이 말로 쪼아가면서 자극을 준 덕에 단단했던 제 모양대로 수리가 되었다.
여러 명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이란 이러저러하게 힘든 일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병들고 더러운 개가 주인에게 버려져서 현관에 떡 버티고 있어도 119대원이 아니면 그러한 작은 불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변태인지 정신병자 인지는 모르겠으나 앞 지퍼를 내리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에도 선뜻 나서서 그를 내어 보내는 담력 있는 남자란 드물었다.
자신의 안위에 그저 보호대를 착용하고 사는 사람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무고하다면 세상의 여하한 일은 안중에도 없는 이들이다.
차를 주차 하려다가 애매하게 비어진 공간에 몇 번을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겨우 다른 주차 차들과 엇비슷하게 자리를 잡았다.
차에서 내리려던 나는 문득 기막히게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서너 해 전에 남편에게 핸드폰 처음 선물 받았던 날이 생각났다.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 차를 주차하려 하는데 높다랗고 긴 화단에 막힌 담장 앞에 주차공간이 있었다.
화단이 차지한 우측으로는 길게 주차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맨 끝에 주차한 차 때문에 차를 들이기가 나빴다.
그 차에 친절하게도 연락처가 있었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차에 씌어진 전화번호대로 전화를 했다.
남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앞으로 조금만 더 빼준다면 좋겠다라고 상냥하게 말을 하자 그는 그러마고 쉬이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부부가 함께 나왔는데 나를 보자말자 그의 아내는 궁시랑 대기 시작했다.
뒤에 차 댈 곳이 있는데 굳이 전화로 자는 사람을 깨웠냐는 거였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작열하듯 제 빛을 쏘고 있는 시간에 잠을?
부부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화를 버럭 내었고 나는 참 웃기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다른 동네에서 와서 주차 방법을 몰라서 그리 한 것도 아닐 테고
점점 차곡차곡 대어질 차들을 생각해서 이웃을 위하여 배려를 좀 했다면 가졌다고 자랑일 수 없는 천덕꾸러기 차를 그리 얄밉게 댔을까?
어차피 그 차 덕분에 아침 일찍 서둘러서 나가는 입장이라면 아침시간에라도 전화하면 달려 나와서 빼 주어야할 형편이었다.
앞으로 칠십 센티만 더 당겨서 대었다면 서로가 말 실랑이를 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나는 내 손에 멋쩍게 들려진 핸드폰을 민망해 해야 했다.
어우러져서 살다보니 사소한 것에도 불편함이란 늘 있기 마련이다.
아내가 바람이 나서 달아나버린 2층의 어느 댁에서는 술 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린 그의 남편이 집안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온 집기들을 마당으로 내동댕이치면서 난동을 부렸다.
저녁시간.
밥 준비에 분주하던 나는 그의 이기성에 얼마나 치를 떨며 불안해했는지 모른다.
결국 112에 신고가 들어가고 경찰들이 오갔고 소방차도 두 대나 왔었다.
도시가스 회사 직원들이 만일을 대비해서 파견 나왔고 동네가 시끌시끌하도록 한 시간 삼십 여분 정도 소란스러웠었다.
그 여파였던지 그의 아내는 마음을 정리하고 되돌아왔고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전혀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아는 우리가 그녀 쳐다보기를 기피하는 편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피해란 것은 내 안에서 안겨주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내가 불편하므로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
집집마다 대부분 부부싸움들은 다 하면서 사는가 보다.
아이들 등교하는 시간대에 대문 소리 요란하게 쾅쾅 닫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바로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사네 마네 문 열라 나가라.
집 안에서 문 조용히 닫아걸고 죽이든 살리든 둘이서 너끈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온 동네를 흔들어가며 고성 지르던 이들.
결국 그들 부부는 별거에 들어가서 따로 살고 있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두 아이들이 삐뚤게 변해져 가는 모양을 보면 어미의 입장에서 참 마음이 아리는 현실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리도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부부간의 문제란 건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조금의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등 돌리고 사는 사람들보면 참 딱한 노릇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집요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혼의 선진국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참을 인(忍)자 강조하던 세대는 다 갔나 보다.
남편도 아내도 선남선녀(善男善女)여서 부러움을 샀던 삼층의 부부도 남편의 외도로 인해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통통하던 그녀가 마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돌던 풍문.
사실이었다.
그녀는 예쁘고 선하게 생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어저께도 나와 마주쳤었다.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내 말에 목례만 하고 지나쳤는데 당당한 이혼이었다면 떳떳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일 한다는 것은 집안일에 소홀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나다니는 통로에다가 한 여름 낮에 하얗게 고물거리는 벌레가 생겨난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무책임하게 내어서 거치적거리게 해두고 처리를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얼굴에다가 쏘아붙이던 그들.
누가 잘못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인식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웃이란 건 이리 불편하면서도 함께 맞대고 부딪쳐야하는 대상인 것이다.
다시금 나무의 잘려진 밑동을 잔잔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웃과의 담장보다 높아서 숲속 같은 느낌을 안겨주던 나뭇가지가 없으니 옆집 담장 너머가 훤히 다 보인다.
그냥 굽어진 부분만 자를 것을...
이내 다시 돌아봐진다.
그러나 내가 아쉬워한다고 잘려져서 모퉁이에 던져진 나뭇가지가 도로 접(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등나무 자리한 구석진 기둥에 매여진 막내의 자전거는 여전히 삼원색의 환한 빛을 바래가며 태양을 맞받고 있지만 옆에 서 있는 남편의 자전거는 의자가 누군가에 의하여 뽑혀져 버린 채 동그란 바퀴 두개를 옆으로 잔디에 누인 채 쓰러져 있었다.
첫댓글 그간 안녕하셨지요?공동주택들의 주차난 심각하지요.. 요즘은 월세 사는 사람들도 차는 목숨처럼 소유하고 있으니..양보의 미덕만이 이웃간의 정~ 하지만 함 실랑이 붙으면 진짜루 화나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