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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돈, 飛錢
고대인간은 왜 1년을 360일로 정했을까? 지금 1년 365일이란 숫자는 5와 73으로만 나누어 떨어진다. 그러나 360은 2로 나누어 전 후반으로, 3이나 4로 나누어 3,4반기로 5, 6, 8, 9, 10으로 나눌 수 있고 15, 20, 24, 30, 36, 45, 60, 90, 120, 180으로 나눌 수 있어 편리하다. 1년을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덟, 아홉,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도 우수리 없는 수량으로 떨어진다. 실용적인 수학이 된다. 1년을 360일로 치면 이자 계산이 간편하다. 오늘날도 회사채나 지방채의 이자는 1년을 360일로 친다. 수메르어로 이자를 가리키는 단어인 ‘미시’는 송아지를 의미한다. 이자의 개념은 가축의 자연 번식에서 나왔음을 의미한다. 서남아시아의 쐐기 문자는 인류 최초의 문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3000년 넘게 발달했다. 오랜 역사 동안 경제 금융 회계 계약 법률이라는 토대에서 발달한다. 따라서 금융과 국가 간 관계모형을 하나만 적용해서는 분석이 맞아떨어질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어로 은행을 ‘토라페자’trapeza라 하는데 이 말은 은행업자가 영업하던 탁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보듯 은행은 건물 같은 장소가 아니라, 조그만 가구 위에서 돈을 세거나 계산을 하는 영업이었다. 실제로 부와 추상적인 부를 대조한 코언의가설 그대로, 최초로 등장한 은행이 이름을 따온 대상조차도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 일어났던 도구였던 것이다. 로마시대에 제작된 대리석판인 ‘살라미스’ 서판은 19세기에 키프로스 섬에서 발견되었다. 서판 표면에는 가로 방향 직선여럿이 위아래로 그러져 있다. 은행업자는 세로로 보는 자리에 앉아서 탁자 양쪽에 쓰인 분수와 배수롤 보아가며 셈 돌을 놓아 계산을 하는 도구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중국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발명된 주판은 ‘살라미스’ 서판을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셈 돌을 한 줄에 엮어 흩어지지 않게 한 것에 불과하다.
재물이 보관된 장소는 그리스에서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이 보는 파르테논 신전은 침략을 막아 낼 강력한 무기, 바로 돈을 보관한 금고이기도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큰 방에는 엄청나게 큰 아테나 신상이 있는데 위급할 때는 신상에 도금된 금을 벗겨 내어 돈으로 주조할 수도 있었다. 신전 후문은 금고로 통했다. 금융사에서 로마가 돋보이는 이유는 지배층의 엄청난 부를 지탱한 금융체계가 꼽힌다. 로마에서는 재산이 없다면 정치력도 없었는데, 재산을 키우는 것이 투자이다. 로마의 금융체제는 발전을 거듭하여, 소수가 부를 과점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본투자 기회를 제공했다. 정복에 참여한 상류층끼리 경제적 이익을 나누고, 복잡하게 펼쳐지는 정치투쟁을 해결할 때 금융균형을 이용하는 유연하고 전략적이 수단이 발전했다. 로마를 통치하는 계급은 원로원과 기사계급인데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25만 데나우스를 넘는 재산을 가져야 한다. 기사계급은 말을 소유하고 말과 병사의 유지비를 내기에 충분한 재원이 있어야 하는데 대략 10만 데라우스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했다. 원로원 의원은 이익을 내는 사업에 직접 참여는 않으나 재산을 유지해야 하므로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바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금융체제가 발달한 것이다.
노예가 범죄를 저지르면 피해자는 노예 소유주를 고소할 것이다. 주인에 앙심을 품은 노예가 복수하려고 남의 재산에 손실을 끼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노예제도의 유한책임이 있었다. 즉 노예주는 자신이 지시한 것이 아니면 노예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개념이 확장되어 금융거래에도 적용되었다. 로마 ‘카스토르’신전 유적을 보면 ‘팔 라티노’ 언덕 아래 성스러운 우물인 ‘라쿠스 유투르나이’ 근처에 있는 신전의 터에 지금도 주춧돌과 계단이 남아 있다. 이곳은 징세인조합 주식을 거래하고 정부계약 입찰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신전을 복원한 결과 앞쪽으로 보이는 삼각형 박공 조각은 묘하게도 뉴욕주식거래소 건물의 정면부와 닮아 보인다. 매년 수백만 명이 로마 포름을 방문하지만 자신이 본 유적 중에 세계최초의 주식시장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유럽에서 서로 싸우던 도시국가들은 투자자에게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기로 약속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12세기 이탈리아에서 국체가 등장하고 13세기는 채권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은 지폐는 있었지만 채권이란 개념이 없었다. 진이 통일하기 이전에는 돈을 빌려서 전비를 충당했다. 그러나 서기 1000년부터는 상업분쟁이나 재산권 문제를 재판으로 해결했다. 국채란 장기적으로 국민에 문제를 남기는 것은 아닌가? 국채란 앞으로 거둘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니다. 금융시장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시장에서 미래를 다루는 약속이 거래된다. 그 덕분에 기업가와 국가는 예상되는 미래 현금 흐름을 지금 현금화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시장은 개인이 저축하고 금융계획을 세울 수단을 제공한다.
서남아시아 ‘메스포타미아’ 문자와 달리 중국문자는 회계기록에 기원을 두지 않았다. 하늘에 뜻을 묻기 위해 점술가의 길흉을 묻는 것에 문자의 목적이 있었다. 돈이란 가치를 측정하고 전달하는 도구이다. 가치를 측정하려면 크기와 품질이 맞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어야 한며, 가치를 전달하려면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또 돈은 얻기가 힘 들어야한다. 돈이 가치저장 수단이기 때문이다. 상나라 무덤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 세계 최초로 주조된 금속화폐다. 상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1045년 이전이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 주왕을 굴복시키고 황허에서 베이징 지역까지 다스린 나라다. 기원전 771년에 사라진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간다. 사마천의 사기에 제나라 사람은 사. 농. 공. 상. 고가 고루 모였다 기술한다. 商은 행상을 賈(고)는 가계 주인을 말하는 상인이다. 제나라는 임치에 전 씨 가문이 통치했다. 이곳에 직하학궁이 있다. 국가권력이 영합하는 학자들이 모여든 곳이다. 이곳에서 저작한 책이 管子다. 관자에서 輕重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명확하게 서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중이란 재화의 각각의 상대가격을 말하는데, 이 가격 차이 때문에 교역을 할 동기가 생겨 결국 가격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지도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복종하라고 명령하기보다는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편이 낫다. 즉 사람을 관리하고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비결이란 군대도 법령도 도덕도 사상도 아닌 바로 돈이었다.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영리한 방법은 칙령이 아니라 화폐정책이다.
중국의 화폐는 크게 나라별로 네 가지다. 서쪽 나라는 쟁기 모양 화폐와, 둥근 청동 고리를 제작했다. 남쪽 나라는 조개껍데기 모양의 청동제 의비전을 주조했다. 동쪽의 제나라는 칼 모양의 동전과 쟁기와 고리 모양의 화폐와 겹친다. 관자에 따르면 물이 들판으로 이끌 듯 동맥과 정맥이 피를 보내듯 돈은 경제활동이 영위되는 물길 역할을 한다. 물길을 장악한 통치자는 결국 국가 흥망을 장악하는 셈이다. 유럽 사상가들이 이 중국의 관자를 이해하는데 2천년이 더 걸렸다. 중국학자들은 시장이 가격 차이에 즉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액체에 비유하여 잘 개념화 하고 있다. 하지만 직하학궁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 직접 가격경쟁에 나서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았다. 화폐로는 백성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무력으로 빼앗기 않고 필요한 물건을 얻는 방법을 제시한다. 즉 “열국의 곡물가격이 10일 때 우리가 20으로 올리면 열국의 곡물이 제나라로 들어오고, 열국이 20일 때 우리가 10으로 낮추면 우리의 곡식이 열국으로 빠져나갈 것입니다” 관자는 정부가 상품가격을 통제하는 것을 지지하면서도 시장가격체제가 사회의 이익을 준다는 것도 알았다.
BC221년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통일한다. 진시황은 화폐를 장악하면 권력도 강해진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경쟁국을 복속시키고 화폐생산을 표준화. 국영화하고 경쟁화폐를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구리동전에 네모난 구멍을 뚫은 화폐를 만든다. 오늘날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부패관료를 주기적으로 공개처형하는 데는 유교가 영향을 끼쳤다. 유교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에 호소한다. 모든 인간에게 올바르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한다는 가정을 근본에 둔다. 관료제라는 금융기술로 주인이 유인책으로 대리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회사의 관리자에 주는 성과급이 있다. 월급쟁이 사장이 ‘주식욥션’을 받으면 주식가치를 높이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려면 회사가 잘돼야 한다. 반면에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주주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하라며 회사관리자에게 뇌물을 줄 이유는 없다. 오늘날 사회도 최고경영자에게 고액의 보상을 하는데 매우 비판적이다. 이런 비판은 윤리에 기본을 둔 인간의 고귀한 측면에서 호소함이 대리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긍정적인 유인책보다 낫다는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전한이 망하고 新(서기8~23)나라를 세워 16년간 다스린 ‘왕망’이란 사람이 있다. 왕망과 동서가 신라에 도래한 김알지의 조상으로 역사 구석구석에서 증명되고 있는데 바로 왕망이 중국에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평가 받는다. 왕망은 노예를 해방시키고 부유한 지주에게서 재산을 빼앗았으며 채무를 탕감했기 때문이다. 왕망이 이러한 개혁을 정당화 하려고 기댄 것이 옛 황금시대, 바로 주나라이다. 그의 개혁정책은 중국역사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경제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 대상인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한 일이다. 사업을 국가가 소유해야 하느냐는 격렬한 논쟁이 한나라에서 벌어졌고, 결국 국가 소유가 승리했다. 위대한 두 문명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같은 동시대이다. 로마가 동쪽 레반트 지역(지중해 연안 서남아시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등 지역)으로 확장할 때 한나라는 실크로드로 서쪽 중앙아시아를 통해 확장을 한다. 실크로드의 시작은 ‘장안’으로 80제곱키로의 직사각형 땅에 성곽을 치고 너비 100미터의 도로를 개설한 계획도시다. 동시와 서시를 두고 전 세계에서 들어온 진귀한 물건을 거래했다. 대담한 학자 한명이 1900년에 탐험대를 이끌고 실크로드를 오간 대상처럼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길로 탐험을 한다. ‘스타인’이란 사람인데 그는 엄청난 고문서를 발견한다. 2,000년 전에 쓰인 인도 ‘양피지’ 두루마리와 둔황석굴 감실에서 엄청난 량의 고문서를 얻어낸다. 지금 이 서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격동의 중국사를 생각하면 스타인이 문서를 가져간 일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한다.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와 유대를 위해 수도에 進奏院을 두었다. 진주원은 오늘날 로비기관과 마찬가지로 지방정부와 지방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예로 상인이 四川성에서 장안으로 차를 실어다 팔고 장안 주재 사천 진주원에 수익금을 예치하면 진주원은 비전이란 영수증을 써준다. 땅위로 돈을 나르지 않아도 그 돈이 날아가기 때문에 비전이란 이름을 붙인다. 비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한 부분은 상인이 다른 한 부분은 진주원이 가졌다. 상인은 집으로 돌아가고, 장안주재 진주원은 관용문서 파발마를 이용 서류를 지방정부로 보낸다, 서류가 도착하면 영수증 반쪽을 관청에 내고 돈을 받아 왔다. 진주원은 수도에서 쓰는 비용을 확보해 좋고, 상인은 경화를 운반할 때 발생하는 위험과 비용이 줄어들어 비전제도들 좋아했다. 비전 덕분에 동전이 지방으로 유출되지 않고 나라의 상업 중심지에 화폐의 공급량이 늘어났으며 지방정부의 진주원은 무이자 대출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주원은 상인이 지방으로 돌아가 증서를 제출할 때까지 돈을 활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가끔 지방정부도 비전을 즉시 상환하지 않고 미적댔다. 재정 담당 정부나 군대 같은 관청조직도 비전과 비슷한 기능을 제공하려고 경쟁한 것도 당연하다.
당나라 비전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양도가 가능한 어음이었는지? 지급기한이 정해졌는지? 표준액면가로 발행했는지? 특징은 무엇이고 중국사회에서 경제. 금융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당나라는 907년에 멸망한다. 이전 중국정부처럼 중앙정부는 허약해져 지방정부의 원심력에 굴복 당한다. 당이 망한 후 송나라 시절은 전당포 종이 전표나 비전과 같은 종이 문화의 뿌리는 당나라이다. 송나라 지폐는 4색 동판 인쇄술로 찍은 최초의 인쇄물이다. 닥종이는 뽕나무를 비단 생산에 사용한 사천 지역에서 발달 완성돼, 여러 해 유통되어도 버틸 만큼 튼튼한 지폐용지였다. 송나라는 산산조각 난 당나라 영토를 군사력으로 붙여 통일은 했지만 통일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외국의 침략이었다. 송은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 기준은 수도 개봉을 포함 영토를 절반 금에 잃고 남쪽으로 옮긴 1126년부터다. 송 정부는 交子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하고 권리를 16곳에 준다. 현금을 받아 둔 곳을 ‘궤방’이라 불렸다. 고객은 수수료를 내고 무거운 철화를 받아 세금을 내거나 교환했다. 그리고 1160년부터 국가가 지폐발행을 독점한다.
‘마르코 폴로’가 남긴 기록은 중세 소설가 ‘루스티첼로’Rusticello가 Marco Polo와 함께 제노바 감옥에 있을 때 듣고 쓴 책이다. 이 책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일한 이야기다. 나무껍질로 돈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그대로 보자.
“이번에는 이 도시에서 황제의 돈을 찍어 내는 조폐소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리하면 대칸이 이 책을 통해 많은 일을 해낼 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무슨 말을 하건 진실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독자는 아마 믿지 못할 것이다. 캄발록 (원나라 수도 칸발리크) 시내에 있는 황제의 조폐소가 돌아가는 모습을 알게 된다면 황제가 연금술의 비밀에 통달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황제는 이렇게 돈을 만든다. 우선 특정한 나무의 껍질을 벗겨 오는데, 여러 구역에서 빼곡하게 자랄 만큼 수가 많은 이 나무는 누에 먹이인 뽕나무다. 속껍질인 인피를 가지고 검은색 종이 비슷한 것을 만든다. 종이를 여러 가지로 재단을 해 순금이나 순은처럼 엄숙한 절차를 거쳐 인쇄되며, 모든 지폐에는 여러 관리가 임무대로 서명날인 한다. 절차가 끝나면 칸의 권한을 위임 받은 국장이 맡은 옥새에 인주를 묻히고 종이 위에 찍어 옥새의 모양을 종이 위에 새기면 비로소 화폐가 탄생한다. 대칸은 이 화폐를 온 세상 보물의 가치와 맞먹을 만큼 엄청나게 발행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대칸은 앞에서 묘사한 과정대로 제작된 지폐를 가지고 자기가 지출한 비용을 대고, 또한 이 지폐가 자기 나라와 속구는 물론, 권력과 지배력이 미치는 모든 곳에 통용되게 한다. 자기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감히 이 지폐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사형에 처해진다. 대칸이 지배하는 땅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종잇조각이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순금으로 만든 금화나 마찬가지로 물건을 구매하는데 사용할 수 있으므로 사실은 모두 기꺼이 지폐를 받는다. 게다가 인도 같은 나라에서 온 상인은 들고 온 금. 은. 보석. 진주를 황제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다. 황제는 빈틈없고 이 분야에 경험 많은 전문가 열두 명을 뽑아 일을 처리한다.”
2019.11,16
금융의 역사2
월리엄N괴츠만 지음
지식의 날개 간행
첫댓글
류재훈님!
돈의 역사
삶의 역사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애들 성화에 못이겨
남해, 서해안으로 4박5일
늦기을 남부지방 황풍,
곰삭은 젖갈, 생선 음식 추억의 맛 되새기고
해수찜질에 푸욱 담그면서
바닷바람 쐬고 왔습니다.
그러느라
가까운
종로 경창도 놓치고...
늘
건강하세요.
좋은 곳에 다녀오셨군요
추억 여행이 되셨겠네요
맛은 어릴적의 맛이 최고입니다
그래요
어릴 적 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