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1월 5일 일요일 맑음
“아빠, 내일은 학교 안 가요”
‘호오 그래. 늘어지게 자도 되겠다’ 기대가 컸었지.
모처럼 늦잠을 자도 되는 일요일인데 눈이 떠지네.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창밖이 뿌얘지려면 아직 솔찬히 기다려야 되는데.... 늙어갈수록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도 늙어가는가 ? 새벽에 눈이 떠진다는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였는데 나도 따라가나 보다.
내가 잠이 안 와 부시럭대니 옆의 마누라도 눈이 떠지나 보다.
“여보, 어제 당신이 한 얘기 말야. 12일 날, 1분회 번개팅으로 정산 창고 보러 온다는 거 미뤘으면 좋겠어” “왜 ?” “충희가 수능 보기 전에 큰 일 벌이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어” “수능일이 며칠이지 ?” “16일 목요일이야”
‘하이고, 애비라는 사람이 아들 수능일도 모르고 있었다니 누가 알까 무섭네’
“그래, 당신 말이 옳아. 우리 말고도 수능 보는 자식을 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짹 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말았다.
내 참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남부끄러운 일이네.
괜히 남사스러워 거실로 나와 TV 채널만 돌려댔지.
오후가 되니 잠도 잘 만큼 잤고, 좀이 쑤신다. ‘어디 바람 쏘일 데가 없나 ?’
“여보, 시장 가자” “왜 또 ? 나가면 돈 써야 돼” “자바라 사야 돼” “자바라가 뭔데 ?” “응 석유를 옮길 때 쓰는 거 있잖아. 매실 액기스를 항아리에 옮길 때 있어야 돼” “혼자 갔다 와” “나 혼자면 심심해. 당신도 나랑 같이 다니는 거 좋아하잖아” 옆구리를 찔렀더니 따라 나선다.
흥화에 가서 자바라를 사고 시장구경을 나섰지. “참, 창고 방에서 쓸 빗자루랑 쓰레받기도 사야 하는데....” “걸레로 그냥 하면 되지” “걸레로만 어렵지” 마침 옆에 다이소가 있었다. ‘이왕 나온 김에’라고 생각했는지 안사람이 이것저것 주어 담는다. 화장실 신발, 비누그릇, 휴지통.... 나도 화장실 변기 청소하는 솔을 추가로 담았고, 이것저것 늘어서 있으니 살 것도 많더라.
“여보 이 의자는 어때 ?” 프라스틱으로 간단하게 만든 의자가 눈에 띈다.
“다이소가 확실히 싸긴 싸구나. 오천 원이면 거저잖아” “싼 게 좋은 게 아냐. 여기 물건들은 한 번 쓰고 버릴 것들이 많아요” “그렇겠다” 이럴 땐 마누라가 나보다 훨씬 속이 깊어 보이더라.
나는 먼저 밖아 나와서 안사람이 계산 끝내길 기다렸다.
그런데 저만큼 옆에서 나이 많으신 할머니께서 박스에 붙인 테이프를 끊으시려고 칼질을 해대신다. 옆에 놓인 카터에 박스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니 폐지를 주으러 다니시는 할머니시다. 그런데 칼날이 아니라 칼등으로 그어대시니 테이프가 잘라질 리가 있나. 결국은 발로 꽉꽉 밟아 우그려트린 다음 카터 위로 올리신다. 그것도 어려우신지 털퍽 주저앉아 가쁜 숨을 들이쉬신다. 딱해 보이고, 우리 엄마 생각이 나더라. 할머니께 다가갔지.
“할머니 여기가 칼 날이고, 아까 자르신 데는 칼 등이예요” 알려드렸다.
“하하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칼이 왜 안 드나만 생각했지. 눈도 잘 안 보여.” “왜요 ? 시력이 나쁘셔요 ?” “하루 열 개도 넘는 약을 먹어서 그런가봐. 저기 보이는 것도 요만큼으로 좁게 보이고.... 빨리 죽어야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 “고마워요. 젊은이”
‘허, 젊은이라는 말, 들어본지 얼마 만이냐’ 눈이 잘 안 보이시기는 안 보이시나 보다. 안사람이 계산을 끝내고 나와서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지.
‘세상에는 왜 이리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냐 ?’ 자꾸만 마음에 걸리더라.
‘저 할머니께는 자식들이 없나 ? 하긴 자식들이 편히 쉬시라고 해 대도 저렇게 움직이셔야 사는 맛이 나시겠지’ 우리 엄마나 장모님도 똑같다.
나도 늙으면 그럴 테고.... 그 게 얼마나 남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