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放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충 이런 의미가 나온다. “【명사】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나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여름이나 겨울에 수업을 일정 기간 동안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방학이라는 한자 자체가 “배움으로부터 해방된다.” 또는 “배움을 놓는다.”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풀어놓은 채 배운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의 학생들에게 방학이 배움을 놓는다는 원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영어 단어인 vacation 의 어원인 vaca- 역시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휴가’라는 영어단어인 vacance나 ‘비어있는’이라는 의미의 vacant라는 단어가 모두 어원이 같다. 비어있다, 쉰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vacation 역시 우리 학생들의 방학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밤 10시까지 공부하며, 진도 나가는 ‘방학’
밤 늦도록 불이 켜진 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고등학교ⓒ뉴시스
대한민국의 학생들에게 진정한 방학이 있을까? 정말 우리 아이들은 방학에 배움을 놓고 휴가를 보내고 있을까?
고등학교부터 살펴보자면, 서울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하고 있다. 참가하는 학생들도 거의 100%에 이르는 학교부터 참가율이 낮아도 50%를 넘어선다. 오전에 보충수업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특강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보충수업을 받거나 자습실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방학인데도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있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일부 학교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학생들은 대부분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는 등 사교육을 받고 있다.
방학 계획서를 써 내라고 하면 학생들의 대부분은 수학문제 풀기, 영어단어 외우기, 부족한 과목 보충하기 등을 써낸다. 학원 가기 또는 과외 받기 같은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가끔 하루 일과 시간표를 짜오는 친구들도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거의 공부하는 것으로 일과가 채워져 있다. 물론 이렇게 사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나마 서울은 덜한 편이다. 얼마 전 경북 구미의 학부모와 아이의 방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방학 하자마자 곧바로 학교를 나간단다. 이 아이는 보충수업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외 없이 모두 해야 한다고 하면서 빼주지를 않는단다.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학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하다면서 아예 학교에서 아이로 하여금 교사가 보는 앞에서 부모님 사인을 해서 받아갔다고 한다.
그래도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2학기 진도를 나가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말이 보충수업이지 실제로는 2학기 진도를 미리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니 안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침에 하는 ‘방과후수업’, 당황하셨어요?
고등학교만 이런 것이 아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방학에 집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학교를 간다. 방과후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개설된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다. 학교에 학생들이 나오는데 교사들이 별로 나오지 않아서 학생들의 안전이 무방비상태에 놓였다는 언론보도는 이런 상황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초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고등학교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들은 오전에는 학교에 가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듣고 나면 오후에는 학원을 가서 다음 학기 선행학습을 하거나 심지어 중학교 과정을 미리 배우는 선행학습을 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아이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아이만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방학이 방학이 아닌 이런 대한민국의 이상한 방학과 같은 현상은 우리 교육 현장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지난 7월 부산교육청과 교원노조 사이에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 체결된 내용 중에 학생건강권보장을 위하여 △정규수업 전에 이뤄지는 방과후수업 폐지 △입학 예정자 대상 선행학습 금지 등의 내용이 있다.
일반인들, 특히 외국인들이 보기에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정규수업 전에 이뤄지는 방과후수업’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영어로 하면 방과후수업은 ‘after-school activity’ 정도 되는데 이걸 정규수업 이전에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규수업 전(before)에 방과후(after)수업을 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말이지만 대한민국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입학 예정자 대상 선행학습 금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겨울 방학 기간에 중학교 졸업 대상자(고등학교 입학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수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육현장에서는 Pre-school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어로 pre-school은 유치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중학교 졸업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미리 배우는 것을 이르는 말이 pre-shool이다.
고등학교 과정을 미리 배우기 때문에-그러니까 대표적인 선행학습이다.- 이 프리스쿨에 참여하지 않기는 대단히 어렵다. 심한 경우는 아예 중학교 졸업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수능 대비 문제집을 풀기도 한다.
방학을 돌려줘야 창조경제, 창의교육도 가능
지난달 18일 대전 동구 신흥동 신흥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뒤 환호하고 있다.ⓒ뉴시스
우리나라의 연간 정규수업일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수업시수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거기에 일일 학습 시간 역시 세계 최고이고, 여기에 사교육 시간도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제 이것도 모자라 방학에 보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방과후학교 수업을 하고 있고, 버젓이 학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있으며, 방학 중에도 학원수업과 과외는 끊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선행학습 금지에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바 있으며, 사교육 부담 감소는 역대 거의 모든 정부의 공약이었다. 창조경제를 말하고 창의교육을 말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학교현장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별로 없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은 말하는 박근혜 정부가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아이들에게 방학을 찾아주는 것이다. 방학 중에라도 정규 수업시간에 읽지 못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하게 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자.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창의 인성교육의 시작은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방학을 되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