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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9 - 오사카성 천수각에 들어가 구경하고는 전망대에서 시내를 조망하다!
2024년 11월 25일 오사카 미도스지선 난바역 (御堂筋線なんば 駅 ) 에서 지하철을 타고
혼마치역 (本町 본정) 역에서 환승해..... 다니마치 욘초메역 (谷町四丁目)
에 내려서는 걸어서 오사카 역사 박물관을 지나 오사카성 (大阪城, 대판성) 에 도착합니다.
여기 넓은 해자를 두른 웅장한 오사카성은 봄에는 분홍빛의 벚꽃이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가을에는
붉은 빛의 단풍이 그 역할을 하는데.... 가을 풍경을 보고 천수각에 올라 오사카
시내를 바라보고 성 뒤편의 선착장으로 가면 놀잇배를 타고 여유롭게 단풍놀이를 즐길수 있습니다.
넓고 깊은 해자를 지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오사카성에 들어가니 다시 2차 해자가 나타나고
지그재그로 난 성문을 통과해 오사카성 혼마루에 들어가니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저만치 날렵하게 생긴 오사카성 텐슈가쿠 (천수각) 가 보입니다.
나는 여기 오사카성이 네 번째이고 울 마눌은 세번째 방문인지라 저 천수각은 벌써 2번씩
이나 입장해서 구경을 했으니.... 오늘은 느긋하게 바라보며 이전에 방문해
천수각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전망대에 올라 오사카 시내를 조망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천수각으로 들어가면 내부에 풍신수길의 일대기는 알겠는데..... 왠 도쿠가와의 일대기가 더 많으니 주객이
전도 되었다고나 할까요! 원래 오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것인데,
1615년 도쿠가와가 이 성을 공격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죽이고 도쿠가와 가문이 차지한 탓이기 때문입니다.
오오사카성 텐슈가쿠(천수각) 에서 세키가하라 전투등 전쟁도며 그림과 미니어처등을 구경하는데.....
화재 예방을 위한 것인지 엄청 큰데다가 금으로 도금한 물고기 모양의 호치사코가 우리 눈을 끕니다.
1932년에 이곳 오사카성에는 일본 육군 4사단 사령부가 있었고 그 뒤쪽 해자 건너편으로 헌병대와 포병대,
사격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으니.... 1932년 11월에서 12월에 윤봉길 의사가 순국 직전 마지막
한달을 보낸 형무소 자리였다고 하는데, 몇년전에 당시 항공사진과 실측도가 일본 현지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윤 의사는 텐슈가쿠 부근에 위치한 형무소에서 다시 가나자와 (金澤) 주둔 9사단으로 이송되어 12월 19일 처형
되는데...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 (虹口) 공원 천장절 행사에 일본군 지도부에
폭탄을 던졌으니, 당시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가 왼쪽 다리를 잃었던지라 9사단이 처형장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또 여기 오사카성 자리는 원래 정토진종 겐뇨의 “이시야마 혼간지” 절이 있던 자리로 혼간지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 요시아키의 "반 오다연합" 호소에 응해 아사쿠라, 아사이씨 연합에 호응해 궐기했으며 또 잇코잇키의
본산 이시야마 혼간지에 가담한 세력은 네고로지 절의 무장 승려 네고로슈와 용병 집단 사이카슈가 있었습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또 서부일본 6개국을 지배하는 히로시마의 모리 가문과 동맹을 맺고는 오다 노부나가
에 대항해 싸움이 벌어지는지라 전투는 무려 10년을 끌게 되는데.... 노부나가는 혼간지의
배후인 모리씨를 치기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를 주고쿠 공략 총지휘관에 임명해 모리 가문을 공격합니다.
1570년경 여기 오사카는 셋츠로 불렸는데, 에치젠(후쿠이) 의 아사쿠라씨와 오미(비와호수) 의 아사이씨 연합군
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맹군과 격돌한 아네가와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 (石山本願寺) 및 히에이잔 (比叡山) 승병대 (僧兵隊) 와 손잡고 오다 노부나가군에 대항합니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 요시아키를 적대시하던 미요시 3인방이 마음을 바꾸고 오사카(셋츠) 의 노다성
(野田城) 과 후쿠시마성 (福島城) 에서 거병하니 8천이라....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기후에서 출진해 오사카 남부 텐노지 (天王寺) 에 4만 대군의 본진을 설치합니다.
이에 여기 오사카성 자리에 있던 정토진종 이시야마 혼간지의 겐뇨 (顕如) 스님이
봉기하자 전황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전개되는지라 장기전이
되니, 결국에는 오다 노부나가는 셋츠 전선(摂津戦線 오사카) 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3만명의 아사이・ 아사쿠라씨 대군이 남하하자 비와호 우사산성을 지키는 모리 요시나리는 병사
500명을 선발해 비와호수 사카모토구치 (坂本口) 로 가서 시가 (志賀) 에 잠복해
기습을 하나 19일 겐뇨의 요청을 받은 비와호수 히에이산 엔랴쿠지 (延暦寺) 승병들이 일어섭니다.
서쪽에서 엔랴쿠지의 승병, 북쪽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이 협공해오자 요시나리,노부하루,
시게쯔나등은 분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전사하니 오다 노부나가는 세가 불리한지라 고개를
숙이고 일왕 (천황) 과 아시카가씨 쇼군에게 읍소해서는 간신히 휴전을 맺고 철수하지만.....
다음해 1571년 히에이잔 엔랴쿠지를 공격해 불태우고 모든 승려와 신도들을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오사카성에 터를 잡은 혼간지는 광대한 사원 토지를 소유하고 전국에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강력한 세력으로... 오사카성이 최대 무역항이었던 사카이에서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신문물
도입도 활발해서 조총부대를 가장 먼저 운용했으니..... 신무기를 보유한 강력한 군대로
전국에 신도를 거느려 지원을 받을수 있는 혼간지는 노부나가 조차도 미루던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10년 전투 끝에 1580년 4월 노부나가군의 공격에 견딜수 없게 된 혼간지는 오기마치왕(천황) 의 칙명을 따르는
형식으로 노부나가와 화해하고 오사카에서 퇴거하니.... 노부나가의 부하 무장이었던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허물고는 이 자리에 7층 천수각을 건설한게 오늘 우리가 보는 오사카성 입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중에 죽은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 동서 18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많은 가문이 멸망하여
낭인이 된 무사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오사카성에 집결하면서 점차 불온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심성이 많은 이에야스는 시간을 벌기위해 새로 일본을 차지한 도쿠가와 가문과 옛 주인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히데요리에게 손녀인 센히메를 시집 보냈으나......
당연하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인물들은 이에야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1614년 도요토미 가문의 명복을 비는 절 호코지(方廣寺) 가 재건되었는데 이때 범종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과 ‘군신풍락(君臣豐樂)’ 의 글자를 새겼으니, 도쿠가와 측은‘이에야스를 나누면 나라가 평안하다’
그리고 ‘도요토미를 군주로 삼으니 즐겁다’ 라는 의미가 포함된 저주의 문구 라고.... 억지 해석을 합니다.
이를 꼬투리삼아 1614년 10월 오사카성을 공격하니 겨울전투로 12월 오사카성 해자를 메우고 요새 사나다마
를 허무는 조건으로 화해했으나 이듬해 4월 다시 싸움이 벌어졌고.... 5월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죽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으니 센고쿠 시대 이래 영주들 간에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전란은 종결된 것입니다.
7월에는 연호를 겐나로 바꾸었으니 겐나언무(무기를 무기고에 넣다) 라 부르는데, 이에야스는 무사를 대상으로
한 무가제법도 (武家諸法度) 와 일왕(천황) 과 공가(귀족) 를 대상으로 한 금중병공가제법도
(禁中並公家諸法度) 를 제정하여 막부의 기반을 확립하고는 1년후 1616년 4월 17일 75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런데 오사카성 전투에서 맹활약을 해서 일본 제일의 무사로 알려진 무장이 있으니 사나다 유키무라
(真田幸村) 로도 알려진 사나다 노부시게인데 그는 1600년에 우에다성(上田城) 성
을 지켜냈으며 오사카성 전투에서도 5천으로 사나나마루에서 하루만에 도쿠가와군 1만을 몰살했습니다.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해자와 요새가 없어졌으니 오사카성을 나와 불과 3천으로 도쿠가와 본진으로 3차례나
돌격해 거의 이에야스를 죽일뻔 했으니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영웅인데....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 전철에 게시된 무슨 게임 캐릭터 같기도 한 사진이 이제 보니 바로 사나다 유키무라 (真田幸村) 입니다?
노부시게 (유키무라) 는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 의 참모 사나다 유키타카 (真田幸隆) 의 손자 이자 마사유키
(真田昌幸) 의 아들로 사나다 10용사를 이끌고 대적 도쿠가와에게 대항하는 천재 군사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전인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망하자 노부나가를 섬기지만 그가 암살되니 영지를 지키려고 분투합니다.
도쿠가와와 싸우기 위해 우에스기 가문에 인질로 보내지고 이후 히데요시를 섬기는데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지자 서군에 가담하니 아버지 마사유키와 함께 2천으로 우에다성(上田城) 에서 농성해 나카센도로
진군해온 동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만5천 군세를 맞아 성공적으로 방어 함으로써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집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하니 유키타카는 할복당해야 했지만 도쿠가와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도노와 결혼했던 친형 노부유키가 동군에 참여했던지라 탄원한
덕분에 부친과 기이 구도잔(九度山) 에 유배 되는데 불문에 출가해 고하쿠라는 법명을 얻습니다.
1614년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가 히데요시의 아들 오사카성의 히데요리를 치려고하자 다급해진 요도기미가
낭인을 모으니 유키타카는 법복을 벗고 구도잔을 탈출해 아들 유키마사와 함께 오사카성 (大坂城) 에
입성해 군장을 빨간색으로 통일한 “사나다의 아카조나에 (赤備え)” 라는 부대를 조직해서 성을 사수합니다.
유키타카는 오사카성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별성을 건축하고 철포부대를 이용해 에치젠의 마츠다이라 부대,
가가의 마에다 부대를 격파했지만 도쿠가와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어리석은 아녀자 요도기미가
휴전을 하면서 강화조건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게 되니 이때 별성인 사나다마루도 같이 허물게 됩니다.
도쿠가와군은 오사카성 해자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내 강화를 깨고 오사카 성을 다시 공격하는데 유키타카
는 직속부대를 이끌고 도쿠가와 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고 센다이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의 군대를 긴 창부대를 매복시켜 싸우는 전법으로 격파하여 또 다시 일본에 명성을 떨칩니다.
그러나 결국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게 되자 도쿠가와의 본진으로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는데 돌격
은 3차례에 걸려 이루어졌고 도쿠가와의 본진이 돌파당해 총대장의 위치를 알리는 마인이 짓밟히고
이에야스가 자결 직전까지 몰리게 되지만, 중과부적으로 시텐노지 근처 야스이 신사의 경내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총대장
모리도 수행했을 것이니 전투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높았고, 이후 1615년의 오사카성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도도노(요도기미)는 2번에 걸쳐 자식의 안위만을 염려해 허락하지 않아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으니.....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운명을 걸고 악티움 해전을
할때 처참한 전투현장을 보고 겁에 질린 클레오파트라가 자기 함대를 끌고 달아나자
전선에서 싸우던 이집트 함대 40척도 돌아서니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순식간에 괴멸당하고 말았지요?
두 여성이 전투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려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는데,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대접받지 못했으니 시나 소설을 쓰는 것 마저 탐탁치 않게 여겨졌는데 그마저 시인이 아닌
여류시인이고 소설가가 아닌 여류 소설가라 불렸으니 "표정훈의 호모부커스에 최초의 여성 작가" 가 떠오릅니다.
“최초 여성작가는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로 아홉권의 시를 썼다지만 전해지는 것은 몇편 되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처용가등 향가(鄕歌) 는 1075년 균여전에 11수와 1281년 삼국유사에 14수등 25수 가 전하지만,
일본은 759년에 편찬된 만요슈에 노래가 4,516수 실려있으니 누카다 오키미 額田王(액전왕) 가 빼어나다고 합니다.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은 11세기초에 활동한 일본의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 (源氏物語 원씨물어)’
로.... 당시 귀족사회를 무대로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사랑과 삶 이 70여년 세월에 걸쳐
400명 넘는 인물들이 400자 원고지 2,600장에 펼쳐지는데.... 우리말 번역은 2007년에 전 10권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문집을 남긴 최초의 여성 시인은 16세기 허난설헌이니 그녀는 자신의 글을 불태우라 유언했지만
동생 허균이 누이의 작품을 모아 1608년에 ‘난설헌집’ 을간행하였으니... 오늘날 전해지는 내용은 1692년
동래부에서 중간한 판본에 바탕을 두며 ‘난설헌집’ 은 중국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1711년 일본에서도 간행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발표한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은 박화성이 1932년 동아일보에 청전 이상범 삽화와 함께
연재한 ‘백화(白花)’ 로 여성 작가 최초의 연재니 고려말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이 시련
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이야기 입니다만 당시 작가가 여자일리 없다는 소문도 떠돌았습니다."
단편 소설은 장편소설 보다 15년 전에 나왔으니... “ 2017년은 우리 근대 여성 작가 최초의 문학작품, 김명순
의 단편 ‘의심의 소녀’ 가 발표된 지 100주년 이니, 1917년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 의 현상모집에
이광수 추천 3등 입상작으로.... 축첩 제도의 억압과 폭력 속에 대를 이어 고통받는 여성의 삶을 그렸습니다.”
“ 최초 근대 여성 작품집이자 시집도 1925년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 인데 이 책에 실린 시 ‘창궁’ 이 가을을 노래
하니..... ‘파아란 가을 하늘 우리들의 마음이 엄숙할 때 감미로운 기도로 채워서 말없이 소리 없이 웃으셨다.’”
한국 최초의 여류 작가 김명순은 일본 유학중이던 19세 때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했으니, 소설가
김동인이 왜곡해 소설화 하여 김명순의 이름은 입에 오르내리게 됐으니 이 소설이 ‘김연실전’ 입니다.
김명순은 조선 5백년간 과부재혼 금지제도를 지켜온 보수적인 시대임에도 성폭행을 당한 아픔 까지
용기있게 고백했지만, 김기진이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 에서 폭행을 당한 김명순을 “성격이
이상하고 행실이 방탕하기 때문” 이라고 언급했으니, 김명순을 추천한 최남선과 이광수
는 훗날 모두 친일파로 변절했지만.... 당시로서는 개명한 진보적인 생각을 했던 사람들인가 봅니다?
“오랜 세월 여성 문학인들은 여류 (女流) 로 일컬어졌으니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여류는
있어도 같은 맥락의 남류 (男流) 는 없었는데 여성은 전문성의 잣대로만 평가되지 않았다는 뜻 입니다”
“ 여성 작가는 역사와 사회의식이 부족하다는 편견마저 없지 않았습니다만...... 영국과 미국은 흑인과 초등학교도
못나온 문맹인 남자에게는 투표권을 주면서도 일류대학을 나온 여자 박사에게도 투표권을 주지 않았었지요? "
"그러나 이런 편견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 작가들은 현실과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오늘날 보편적 인간의 문제를 형상화 했습니다.”
조선 500년간 강고하게 이어진 제도가 있으니 “과부재혼금지제도” 인데 남자는 처녀와 재혼은 물론이고 첩을
들여 딴 살림을 차리기도 했고 기생과 놀수도 있었으며 군수로 나가면 관기들이 밤마다 수청을 드는데,
여자는 아이가 없이 남편이 일찍 죽은 청상 과부는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 제사를 지내면서 수절해야 했습니다.
여자가 평생을 힘들게 수절하면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우주고 시동생에게는 벼슬자리도
열리는데 사주단자를 받았지만 결혼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전염병으로
신랑이 죽디라도 하면..... 신랑 얼굴을 한번도 본적도 없는데도 수절을 강요 당했습니다.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길수 없으며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면 안된다며 조선 500년을 철통같이 이어져온 과부재혼
금지제도는 경복궁이 공격당해 고종이 포로되고 조선군이 항복한 1894년에 "친일파 김홍집 내각" 이 들어서
이노우에 공사 지도로 갑오개혁을 하면서 반상의 차별 철폐, 노비 해방, 천민제도 폐지와 함께 비로소 폐지됩니다.
노예 제도는 중국 청나라는 강희제때 1685년 노예제도 폐지를 발표했고 영국은 1833년 법으로
폐지했으며 미국은 1865년에 폐지했으니 이제 조선만 남아있는 실정인데..... 스스로
폐지하지 못한 것은 기득권 때문이니, 노비는 사대부 양반 지주들의 큰 재산이었기 때문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