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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청주] 눈이 열렸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5, 27ㄴ - 32. 40ㄴ - 41
† 독서 : 묵시 5, 11 - 14
† 복음 : 요한 21, 1 - 19(또는 21, 1 - 14)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을 모른다며 배반한 적이 있고 아직 믿음도
부족한 그를 끝까지 신뢰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늘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더욱 활짝 엽시다.
★ 대사제가 최고 의회에서 사도들을 신문하며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게 위협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포기하지 않는다(제1독서).
★ 파트모스의 요한은 환시를 통하여 천상 교회의 모습을
본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과 살해된 어린양에게 경배한다
(제2독서).
★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갔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같은
물음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대사제에게 신문받는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18,12-27 참조).
비록 당신을 배반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죄를 따지시기보다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에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양 떼를 맡기기에 앞서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너무나 중요하므로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그런데 양 떼를 돌보는 사람의 자격 기준이 양을 치는 기술도
아니고, 양에 대한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양 떼의 참주인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만 사랑한다면 충분히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볼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말의 원문을 통하여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아가페’
(agape, 신적인 사랑)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두 번 다 ‘필로스’(philos, 우정)로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필로스’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해하는
사랑의 정도에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당신을 모른다며 배반하였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부족한
베드로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그만큼 베드로를 신뢰하고 계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눈이 열렸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 21,1-19<또는 21,1-14>
눈이 열렸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셨다.’
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대개는
머리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새기고 손발로 움직여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머리에서 머무는 믿음은 삶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앞날만 걱정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문제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환난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만 믿음의 눈은 기회로
포착합니다. 그야말로 문제는 최선을 다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실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구세주께서 힘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시쳇말로
끈이 떨어졌으니 앞날이 막막합니다. 이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체념한 듯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가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동거
동락하던 예수님과의 생활을 내려놓고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경황이 없는 그날 고기가 눈에 보였겠습니까?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힘들고 지친 상태인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못잡았다.’는 것은 자기들의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자리입니다.
바로 이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하였더니 감히 생각지도 못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 법입니다. 또한 순명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말씀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고 놀라운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눈이 뜨인 것입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육적인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눈 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듯이 여러분도 말씀에 순명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22). 우리를 구원할 힘이 하느님 말씀에
있는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기를 주저하십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했을 때 정말 축복이 주어질까?’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지금당장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귀한 말씀이
주어져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사도5,41)
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함께 사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에페6,6).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구워주고 빵을 주시는 행위는
바로 우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고기를 끌어올리기 전에 이미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수고로 잡은 고기를 보태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아침상을 준비해 놨는데
너희가 보탤 것이 뭐 좀 있느냐?’ ‘내가 나눌 음식을 준비했으니
너희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우리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 더욱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기운을 북돋아 주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그분을 보고 누구도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비합리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원들이 선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군대는 오합지졸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늬만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명하는 가운데 주님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곳에 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내치지 않았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9-10).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시며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
말씀 그대로 행하여 그물을 가득 채워서 당신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가르치신 주님, 몸소 생선과 빵을 들어 나누어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는 생명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해지길
기도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믿음의 순명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10년째 강의 노트를 바꾸지 않는 교수에게 학생이 물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찌 10년이 넘도록 똑 같은 강의 노트를 그대로
사용하십니까?”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그것도 모르나? 진리는 영원한 거야!”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한주간 되기 바랍니다.
신부님 두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과속을 하셨습니다.
교통경찰이 웬만하면 봐 주려고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천천히 다니십시오. 사고 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신부님께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십니다.” 그 말은 들은 경찰은 “그럼 스티카를 끊겠습니다.
3명이 타면 위법입니다.” 예수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뜻은 사랑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이렇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올립니다.
우선 13일 동안 잘 다녀왔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특별히 성모님 성지에서의
소중한 체험들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더불어
더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여러분 앞에 감히 해 봅니다. 이러한 결심을 갖고 오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일대의 성지순례를 하면서 엄청난
성당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당을 짓는
기간이 거의 100년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후대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성당은 정말로 으리으리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보통이 1년 이내입니다. 성당을 짓겠다는 봉헌의
마음도 한 2~3년이 지나면 거의 사라지지요. 거의 본당 신부만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에 놓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전의 선조들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으며
또 어마어마하게 성전을 지은 것일까요? 바로 주님께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것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보다는 이 정도로도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최선을 다해 봉헌했던 것입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 주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좋은 시간을 허락해주셨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은총을 주셨는가?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비해
내 자신이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순명입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순명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예전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베드로를 비롯해서 몇 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고기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가 있는 배 오른쪽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명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따르는 철저한 순명을
원하셨고, 그렇게 순명할 때 차고 넘치는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뒤 이어 나오는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명에 철저히 순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주님의
넘치는 은총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마치 문과 같아서 매우 작은 열쇠로도 쉽게 열릴 수
있답니다. 그 열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고맙습니다.”
와 “안녕하세요.”라는 미소 띤 말입니다(박성철).
지금도 짓고 있는 스페인의 성가정성당.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심장이 사랑을 관장하는 것처럼 생각
했었습니다. 그래서 심장 모양을 하트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심장 이식 수술을 했다고 해서
이제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슴, 심장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압니다. 사랑은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사랑을 편협한 마음으로만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슴에 다가와야 사랑을 하지.’
자신의 기준에 맞아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온 몸으로 무조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
세 번이나 물었던 것입니다.
온갖 이유를 찾으면서 사랑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보다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들을 찾으면서,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춰 서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절망의 잿빛 아침에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
요한 21,1-19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절망의 잿빛 아침에>
젊은 시절 밤낚시를 자주 다녔습니다. 오후 네 다섯 시 경
몽땅 다 싸들고 아예 큰 호수 안에 떠있는 좌대(뗏목같이
생겼는데, 바닥에 잘 고정되어 있고, 취침도 가능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밤낚시 그럴 듯 해보이지만 결과는 늘 초라합니다.
쌀쌀해진 밤공기와 싸워가며 별의 별 노력을 다해보지만
여간해서는 결실이 없습니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괜히 왔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은 더욱
허탈해집니다. 그럴수록 속은 더 쓰리고 허기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낚시터 주인이 배를 저어 이곳 저 곳 좌대를
다니면서, 아침 드시겠냐고 물어봅니다. 그야말로 복음과도
같은 소식입니다. 간밤의 허탈함을 뒤로 하고 황홀한 일출광경과
함께 하는 아침식사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군요.
간밤의 오랜 헛수고에 괴로웠던 제자들이었기에 더 간절히
아침을 기다렸겠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아침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위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승과 함께 하지
않는 하루는 무의미하여 차라리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절망의 잿빛 아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절망의 잿빛 아침, 헛수고 끝의 무기력한 아침, 무의식과
악몽의 아침, 별 기대할 것 없는 무의미한 제자들의 아침에 부활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삶의 막장에 도달한 베드로, 사방이 높은 벽에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길에서야 겨우 영적인 눈이 뜨인 베드로가 외칩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는 베드로의 외침 안에는 이런 다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내 위주의 삶의 방식을 접겠습니다. 내
스타일로 치던 그물을 거두겠습니다. 좁은 내 안목, 일천한 내
경험을 등 뒤로 내던지고 주님의 요구대로 순명하겠습니다.
이런 다짐과 더불어 내 일상의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잿빛 아침은 희망의
새아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나의 일상을 뒤덮던 우울과
헛됨의 장막이 걷혀지고 기쁨의 하루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활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제자들, 시장기로 힘겨워하는 제자들, 삶 자체가
울적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손수 준비하신
아침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따뜻한 빵과 갓 구운 물고기가
정성껏 차려진 아침식탁에 앉히십니다.
제자들의 썰렁하고 우울했던 아침이 친밀함으로 가득한 아침으로
분위기가 180도 바뀝니다.
참으로 따뜻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순간은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인간의 고통이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밤새 헛고생만 하다가 배에서 내린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각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기를 쓰고 그 어두운 호수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각자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당신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부활 제3주일
2013년 다해 4월14일
‘졸탁동시(卒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가 알에서 부화할 때
새끼가 안에서 톡톡 쪼는 행위와 어미가 밖에서 탁탁 쪼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두꺼운 알이 깨진다는 말입니다. 안에서
새끼만 알을 쪼면 알이 깨지지 않고, 어미만 밖에서 알을 쪼면
새끼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송대(宋代)의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巖錄)에 나온 이 말은 매사에
서로서로가 적기에 힘을 합쳐야 일이 이뤄진다는 뜻인데, 이는
시기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악기를 배우거나, 서예를
배울 때 혼자서는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좋은
스승을 만나서 잠깐 배우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외국 신부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시험이 끝나고 외국 신부님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셔서 한국 식당엘 갔었습니다. 일본 신부님과
필리핀 신부님께서 한국음식을 아주 잘 드시더군요. 그런데
소주를 시켰는데 ‘참이슬과 처음처럼’ 중에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묻더군요. 저는 ‘처음처럼’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신부님께서 ‘처음처럼’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가 루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이야기 하면서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이나, 집을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올 때나 처음처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한다고 설명을 하면서 처음처럼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부모님은 자녀들이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처음처럼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런 뜻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처음 만날 때나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은 후에도 똑같이 사랑을 하는 것이
처음처럼 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국 사람은 술 이름을 지어도 참 영성적으로
만드는군요? 아마 저의 설명이 그럴듯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이야길 들으니 술 이름이 참 영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처음처럼’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처음
제자들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도 제자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처음처럼
제자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들은 아주 담대하게 주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은 오늘 제 2독서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처음 먹었던 마음이 너무도 자주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는 매일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성사를 최선을 다해서 집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처음 먹었던 마음은
타성에 젖고, 습관처럼 지나치게 되곤 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 사람이 생각보다 유능하고, 부유하면 나의 태도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이 겉보기 보다 가난하고,
능력이 없으면 처음 가졌던 느낌이 줄어들곤 하였습니다. 사람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겉모습과 능력,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능력을 떠나서, 나의 외모를 떠나서, 나의 성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처음처럼 저를 사랑하시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우리가 가졌던
신앙을, 우리가 만났던 소중한 이웃들을 처음처럼 간직하고
사랑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의 눈치를 잘 볼 줄 알아야
‘눈치’라는 말은 센스 예감 느낌 등을 쉽게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봐야할 지를 배우고 어찌
대처하느냐가 삶이기도 하고요. 눈치를 볼 줄 모르면 무지
무식 무감각 멍청 때론 바보라고까지 합니다.
국가 간의 외교나 국제사회의 흐름도 눈치의 역할이라 할 수
있지요.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눈치
챘으니 잘했습니다. 사람들과 주변의 눈치를 보지만 하느님의
눈치를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21,12)”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요한 21, 1-19)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요한 21, 1-19)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타인의 눈에 그 사람이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신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서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사업을 하거나 일을 합니다.
또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뛰는 사람도 있고, 맛난 것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가서 먹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이나.... 나름대로 쾌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찾아서 이사람 저사람을
만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도 끊임없는 허탈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그 결과는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에 희망을 걸고 최선을 다한 사람은 세상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다 나름대로 목표를 갖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기준을 어디다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릅니다. 하느님께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며 한생을 보내지만, 자신과 세상의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하느님의 일만을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조차도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대사제, 수석사제들은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기도하고 매질하기도 하고 잡아다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장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 지혜안에 머물지 못하고 하느님의 때를 알지
못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열성적인 신자이든 사제이든 주교이든 교황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도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나를 사랑하느냐?”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복음묵상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요한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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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고백을 하게
만드신다. 이에 베드로는 슬픈 마음에 빠지고 만다.
거듭거듭 다짐을 해도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사랑이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랑일지라도,
한결같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이 아름답다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둘 사이에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제법 오래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헤어지자는
여주인공의 말에, 남자 주인공이 보인 반응이 슬프도록
인상적이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향한 베드로의 고백을
의심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고백 때문에 베드로가 걸어가야
할 그 험난한 길을 생각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감히 어떻게
주님처럼 머리를 위로 하고 죽을 수 있겠느냐며,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할 것을 자처한 모습마저 그분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음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지쳐버리는 듯
하다. 물론 지칠 수 있는 것이 우리다. 하지만, 이겨내야 하고
지켜내야 한다. 최소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들을
위해서는 그 사랑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여, 참사랑을 의지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의지라고 하는 자기 싸움이고, 또 하나는
그 싸움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모자라는 우리의 삶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내맡긴영혼은>역사는흘러가며성장합니다.
- 이해욱신부
역사는 흘러가며 성장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유수처럼 흘러 왔고 또 흘러갑니다.
하느님의 섭리 속에 하느님의 계시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드러나기 시작한 지가 어언 4천 년.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은 세월 따라 몸이 자라나면서
정신과 영혼도 함께 자라나게 됩니다. 영육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2천 년의
역사도 하느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신
이래, 지금까지 계속 성장을 지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 속에는 반드시 "성장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또, 성장통이 없는 성장은 곧 진정한 참 성장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인공 재배된 채소나 생선보다 자연산을
더 선호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지금까지 내외적으로 성장해 오기 위해서 정말
많은 성장통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세우신 당신의 교회라 해서 오늘날의
부모들처럼 자기 자식만을 싸고도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교회의 몸과 영이 스스로 날로 튼튼히 자랄 수 있도록 어쩌면
방목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 스스로에게 맡겨
주십니다. 물론 성령의 보호 속에 말입니다.
교회의 외적 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완전한 성장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세상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의 영육도 날로 성장해 나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해도 "인간"으로 오신 이상 인간의
법칙에 "순명"하셨던 것이지요.
어떤 부잣집 부모들은 자기가 인간임에도 갖고 있는 돈을
믿고 자기가 마치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식들에게
"예외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당신의 아들에게 예외적인
사항 하나 없이 그대로 모두 다 "인간의 법칙"을 따르도록
섭리하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아마 사춘기를 겪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처럼 한 잔 걸치기를 좋아하셨고
슬퍼서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9)
코딱지만한 쬐끄만 마을, 나자렛에서 다른 이들의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 없으셨겠지요. 아마, 마리아도 무지 사랑해
주셨을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처럼
응가도 하셨고 말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모든 것은 다 성장하여 가는 것입니다.
"내맡긴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왕창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내맡겼다는 싸람이 뭐 쩌래?"라고
그 옛날 예수님을 먹보, 술꾼이라고 비난했던 바리사이들처럼
누가 떠들어대도 절대 눈 한 번 깜빡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을 받을수록 여러분의 영은 날로 성장해
나갑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여러분의 스승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영적인 차원도 날로 성장해
나갑니다. 토인비나 헤겔의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게
역사의 법칙입니다.
교의(교리) 하나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언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까?
400년이 지난 뒤가 아닙니까?
100년도 못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400년이라는 세월은 정말
광년(光年)입니다.
성모의 원죄 없으신 탄생, 성모 승천 등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습니까? 이 교리 하나
때문에 교회가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던 것 아시지요?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많은 교리들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한 순간에 다 만들어 주시고 승천해
버리셨나요?
그러한 많은 중요한 교리, 진리들은 교회의 영을 열어주시어
나날이 조금씩, 어떤 때는 엄청나게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도 시대에 따라 달리 그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주셨습니다. 분명히 교회의 영성도 진보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에 불변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을 본받으려는 영성은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것임을 "영성의 역사"를 보아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20세게, 15세기, 7세기,
초세기의 영성을 들이대며 부르스를 추라고 해서 그것에
따른다면, 그 사람은 영적성장이 더뎌질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의 영성이 현대에 다시 새롭게 필요하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영성이 "성령 쇄신 운동"입니다.
성령운동은 교회 시작의 영성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지금 알리는 영성,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참으로 이 시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적합한 영성입니다.
사실 이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모든 영성의 원조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신앙의 원조인
"마리아"와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에 철저히 내맡기셨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원조, 본보기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 한국 신앙 원조들의 "순교 영성"으로
2백 수십 년을 살아왔다면, 이제 우리의 후손들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으로 신앙을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저와 저의 식구들을 통해 이끌어 주심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중입니다.
식구들께서는 더욱 내맡김을 실천해 그분의 뜻에 더 적합한
삶을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많이, 내맡긴 영혼들을!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요한 21, 1-19)
2013년 다해 4월14일 부활 제3주일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요한 21, 1-19)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타인의 눈에 그 사람이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신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어떤 사람은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서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사업을 하거나 일을 합니다.
또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뛰는 사람도 있고, 맛난
것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가서 먹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이나.... 나름대로 쾌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찾아서 이사람 저사람을 만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도 끊임없는 허탈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그 결과는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에 희망을 걸고 최선을 다한 사람은 세상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제자들은 밤새 그물질을 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다 나름대로 목표를 갖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기준을 어디다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릅니다. 하느님께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며 한생을 보내지만, 자신과
세상의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하느님의 일만을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조차도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을 박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대사제, 수석사제들은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기도하고 매질하기도 하고 잡아다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장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 지혜안에 머물지 못하고
하느님의 때를 알지 못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열성적인 신자이든 사제이든 주교이든 교황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도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물을 던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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