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론강단-409 선구자의 순교(마태복음14장1-4절)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제 14장 1절에서 4절까지 봉독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개운하지 않은, 즉 이런 일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목숨을 걸어야 했었는가..
혹시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어차피 회개도 안 할 사람들인데..
그래서 참 여러 번 그런, 세례요한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늘 마음에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위대한 인물이 너무 하찮은 일에 희생이 되었단 말이죠.
[마태복음 14장]
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분봉왕’이란 말은 우리가 잘 안쓰는 말인데, 성경에만 나오는 말이죠.
‘테트라 아르케스라’는 말은 ‘4분지 1의 통치자, 4분지 1의 머리가 되는 자’, 이렇게 나라를 4분해가지고 4등분해서 한부분을 통치하는 그런 사람이죠.
이 헤롯은 ‘헤롯 안디바’라고 하는 사람인데, 헤롯 집안은 이름도 전부 어떻게 헤롯을 붙여가지고 ‘헤롯 안디바, 헤롯 아그립바, 헤롯 아켈라오, 헤롯 빌립’하니까 로마원로원에 가서 헤롯 집안을 보고하면 다 누워 잔다는 거야. 원로원들이..
누워 잘 때 그냥 땅땅땅 하면 통과..
그렇게 헤롯 집안은 복잡해요.
저도 평생에 헤롯 집안과 씨름을 하는데, 아직도 해결이 안 났어요.
얼마나 이름이 복잡한지..
그래서 여기 ‘헤롯 안디바’라고 하는 사람은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는데, 이 헤롯 집안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굉장히 정치적으로 수완이 뛰어나다는 거예요.
그것도 좋게 뛰어난 것이 아니고 못되게 뛰어났는데, 아부를 얼마나 잘 하고 아첨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것도 로마에..
로마에 아첨과 아부를 잘 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잘 보일려고 하고 하나님은 없고 그저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잘 보일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는 제가 지금까지 역사를 그런 대로 여기 저기 좀 살펴보는 중에 있는데, 탁월한 인물이예요.
로마 원로원이 그저 헤롯의 손에서 다 놀아나고 로마 황제들이라도 헤롯 손에 걸리면 꼼짝없이 그저 놀아나는 그런 정도의 인물들이 헤롯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헤롯’을 ‘헤로대’ 하는데 우리는 ‘헤롯’, 영어로 ‘히어로(hero)’ 하는 말 있죠? 영웅..
영웅의 아들들이다. 하여튼 이 영웅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예요. 이름대로..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거기다가 위에는 아주 굉장히 아부하면서 아래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그런 면도 있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인물들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로마에서는 지역 통치에는 아주 적격이다.
로마사람들이 욕을 덜 먹고 욕은 헤롯이 다 먹게, 이렇게 할 때 아주 로마가 좋아하는 그런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개 이 세금을 거두는 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다가 헤롯 가문 사람들이 세금을 제일 잘 거두는 거야.
만약에 세금을 잘 안내는 지역은 다 불싸질러 버리고 이런 일을 서슴치 않게 해내는 사람들이 이 헤롯 가문이예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결국은 로마의 인정을 받은 그런 가문인데, 지금 세례요한을 죽게 한 것은 조금 이전의 일이고, 오늘 첫 부분에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는 거예요.
..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겁을 좀 먹은 것 같죠?
그러니까 또 이 정치인들이 대개 겁도 많으면서 영웅심도 있다니까..
그래서 아주 무지막지하게 겁도 없고 이런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정치하는 사람들은 민중을 겁내는 거예요.
여러분 본디오 빌라도 봐요.
민중을 겁내 가지고 그런 엉터리 재판을 하는데, 이 사람도 민중을 겁을 내면서 또 세례요한을 죽이고 나서는 아마 어떤 죄책감과 함께 두려움도 그 마음을 계속 옥죄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어떤 권능이 나타난다니까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다.
어때요?
세례요한은 권능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이적 하나도 안 베풀었는데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 이적 기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어떤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니까, ‘세례요한이 되살아났는가 보다’ 이런 죄의식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주 옛날에 에덴동산 시절에 가인과 아벨을 보세요.
에덴 동산이 낙원이었는데, 바로 그 뒤에 낙원을 잃어버리는 마음이 뭐냐 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렇죠?
그 때 누가 사람이 있는 것도 확인 안했잖아요. 그렇죠?
자기들 말고 사람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데, 심리가 그렇다는 거죠.
죄를 지으면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니까..
자기 발자국 소리에 놀라고..
그리고 괜히 벼락만 치면 놀래고..
그런 것처럼 지금 도둑놈이 제 발 저리다고 이 세례요한을 그렇게 억울하게 죽게 한 후에 이 마음 상태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해설을 붙이는데, 세례요한을 죽게 된 경위를 이 헤롯의 심리상태에서 소급해가지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3절에 ‘전에’ 하면서 이야기가 거꾸로 돌아가죠?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우리 같으면 제수죠. 제수..
제수뻘 되는 헤로디아를 빼앗았어. 거. 참..
왕쯤 되면 그런 여자 아니라도 많을텐데 하필 동생의 여자를 빼앗아가지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죠.
‘헤롯! 회개하라!’ 그러니까..
헤롯도 기분 나쁘지만 그 여자가 더 못된 여자예요.
서양 속담에 ‘여자는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못하는 짓이 없다.’
여자가 무서워요.
여자가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못하는 짓이 없다는 거야.
왜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성적으로 일하기보다는 확실히 여자는 감정적으로 일하는 수가 많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에는 못하는 짓이 없으니까 조심해야 돼요.
특히 헤로디아 보세요.
이런 여자,
..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죽이고 싶었지만,
..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가만히 놔두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옥에 가둔 거야.
가만히 놔두자니 자꾸 떠들 것이고, 놔두면 계속 할거거든..
죽여버리면 바로 폭동이 날것 같으니까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감옥에 가둔거야.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꼭 보면 세상 사람들은 잔치 끝에 불행이 오죠.
에스더 당시 수산궁에 잔치도 잔치 끝에 불행이 오는 거예요.
..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그러니까 내가 춤추지 말라고 하잖아.
몸짓이라는 게 대개 우리가 흥겨워서 춤을 출 수 있는데, 몸짓이라는 게 여자들의 잔치자리에서 몸짓이라는 게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것이예요.
그러니까 가뜩이나 자기 동생 아내도 빼앗아오는 이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으니까 뭐가 따라왔어. 그렇죠?
덤으로 따라온 게 살로메라는 딸이 따라왔다니까..
그게 열 몇살 되고 하니까 이제는 동생 아내 헤로디아는 별 볼일 없고, 점점 그 시선이 그 딸 살로메에게로 기울어지니까 지금 헤로디아라는 여자가 아주 참 심리가 복잡한 여자예요.
이게 지금 세례요한도 밉지만 자기를 데려다놓고, 자기는 외면해버리고 계속 시선이 자기 딸 살로메에게로 끌리는 이 헤롯에게 보복한다는 심리이고..
그래서 이때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게 해서 천벌이나 받아라.
이런 심리가 헤로디아의 마음속에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참 무서운 사람이죠.
..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이것도 문제죠.
아무리 여자 아이가 귀엽고 예쁘다 할지라도 뭐든지 말만하면 다 주겠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특히 남자들은 조심해야 돼요.
어떤 무엇에 감동했다고 너무 헤프게 맹세를 했다가,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아이고 세상에..
지금 여자 헤로디아도 할 짓이 아닐뿐 아니라, 그 여자 아이가 몇살인지 몰라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
9 왕이 근심하나,
근심이 되죠.
..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체면은 있는 거라. 그렇게 감정적으로 아니면 술김에 맹세했다손 쳐도 맹세한 것은 한것이니까..
또 근심이 되는 거야. 또..
..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그냥 한마디로 ‘주라.’ 그랬더니 그 길로 마케루스라는 성에 있는데 꽤 멀겠죠. 밤을 도와서 가는 거예요.
낮에 그 사형을 집행할려면 또 민중이 들고 일어날테니까 밤에 가서 목을 달랑 가져온거야.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러니까 재판의 절차도 없이 그냥 옥에서 목 베어 가지고 온 거야.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참 씁쓸하죠. 아침부터..
마케루스라는 성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러니까 몸은 거기 놔두고 머리만 가져온거야. 머리만..
지난번에 시리아에 가니까 다마스커스에 굉장히 큰 회당이 있는데, 그 회당 안에 세례요한의 목만 갖다가 장사한 거야.
몸은 저 요르단 땅 마케루스 성에 장사지냈는데, 머리는 저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장사되었으니까 키가 제일 큰 사람이죠.
세상에 그렇게 비참하게 세례요한이 목숨을 버린거야.
이 사건을 두고 생각해볼 때 세례요한 입장에서 헤롯이 그런 악한 일을 하는데, 말 안할 수가 없었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무슨 심방도 안 가고 면회도 안 가고 건져내주지도 않고 가만히 계셨어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이런 여자들, 헤로디아와 그 딸 살로메..
그리고 헤롯 그런 회개할 위인도 아니고 어차피 그것은 전혀 희망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 말해봤자 아무 씨도 안먹힐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가지고 목이 달아나야 했었느냐? 비참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때 품위있게 죽어야 할 것 아녜요..
그래서 또 너무 젊은 나이게 아직은 그 때 세례요한이 30산 안팎밖에 안 되었을 텐데..
아깝지 않아요? 그 위대한 인물이 아깝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땅에서 볼 때 그래요. 땅에서 볼 때는 그런데..
예수님이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게 죽었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더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는 것이고..
또 우리가 볼 때 인간적으로 볼 때 애석한 마음이 있지만, 그는 자기 할 일을 다 했어요.
자기 사명을 다 완수한 거예요.
그가 할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회개케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내는 것, 그게 자기 사명이니까..
사명이 끝났단 말이죠.
여러분 세례요한만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어때요.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거룩한 분이신데, 33살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리고 짧은 삶을 끝냈어요.
우리는 33년이 아니라 66년을 살고도 다 이루었다 하기 어려울텐데, 33년 사시고도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이고, 세례요한은 30년 남짓 사셨는데, 자기 할일 다 하신 거예요.
저도 오랫동안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믿음이 더 무모했는지 모르겠는데, 죽음이 그렇게 절박하거나 겁이 안 나고 아무리 봐도 죽을 것 같은데,
자다가 주먹만한 피를 두번씩이나 토하고..
그 때는 의료보험도 안 되고 할 때인데, 그런데 아내는 많이 염려를 했겠지요.
그런데 가느다란 믿음이라할까 뭐가 있는데, ‘사명이 있는 한 죽지 않을 거다. ’
또 사명을 다 이루었으면 가야지..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갖고 있었어요.
그 때는 성경도 잘 모르고 신학도 불안하고 했는데, 신학교 2학년때 그랬거든요.
성경학교 2년 공부했지만 신학교 들어가서 2년째, 공부를 4년째 하고 있을 때 피를 토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 때 믿음이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오래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 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는 그 사람의 삶은 길이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삶의 길이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스데반 같은 분은 공부도 열심히 한 분이고 역사에도 율법에도 밝은 분인데, 아깝지 않습니까?
좀 더 일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빼돌려서 사는 길을 마련할 수 있었을덴데 그렇게 한 게 아녜요.
야고보는 순교하게 두고 베드로는 빼내고 그렇게 하는데, 그러니까 일을 다 알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렵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세례요한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아마 어쩌면 세례요한이 계속 살아계셨다면 잘 모르겠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는 거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안 가고 세례요한파가 오래토록 요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지 않겠나..
그래서 빨리 세례요한이 사라져 줌으로서 예수님께로 와서 그 그룹들이 아마도 12제자 말고 70인 그룹 70인 제자 그룹 정도로 동역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할 수 있어요.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그때가 ‘벳새다’라고 하는 곳인데, 벳새다라는 곳은 ‘물고기의 집이다, 어부의 집이다’ 그런 뜻인데, 그 들녘인데, 그 벳새다 들녘에 몇번 가봤는데,
여자 외에 남자만 5천명 하면 대개 할일 없는 여자가 더 많을 것이고, 대개 할일 없는 여자와 아이들 둘셋 따라다닐 것이고, 그러면 어쩌면 1만명보다 더 많을 것인데, 벳새다 어디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인가..
정확하지 않아요.
우리가 보통 여기가 벳새다 들녘이라고 하는데,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을도 쬐끔만한데, 몇천명이나 만명이 빵 사먹을 곳이 어디 있어요? 빵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알아서 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것 같은데,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황당한 얘기죠.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제발 여자도 한번 세어보지 그래.. 몇명이나 되는지..
꼭 여자는 안 세고 아이도 안 세고..
처음에 교회에 갔을 때 이런 이야기는 참 황당하더라고.. 진짜..
그래서 이런 것은 빼든지..
말이 좀 되게 해야 되지..
5천명이 아니고 다섯명이 먹으면 좀 남겠죠.
다섯명이 먹어도 12광주리는 안 남는 거죠. 그렇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처음에 내가볼 때..
그런데 놀랍게도 4복음서에 다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이적기사 중에 4복음서에 다 나오는 것은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다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한참 지나고 제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렇죠?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5천명이면 어떻고 5만명이면 어때요? 문제가 안 돼요.
그래서 저에게서 결론이 어떻게 났느냐?
이것은 이런 책을 써가지고 누구를 속일려고 했다면 이런 것은 뺏을 거예요.
전혀 누구를 속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니까 이렇게 썼다는 거죠.
네 복음서의 내용이 거의 같거든요. 내용이..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대개 해석하는 분들이 내게 있는 것 다 바치면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바친다고 그런 이적 일어나는 것 아니야.
지금 예수님께서 예배당에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바쳐봐요.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너희가 순종하면 최소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 염려안해도 하나님은 책임 질 수 있다는 거예요.
맞습니까?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있는 대로 갖다 바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런 본래 말씀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없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고 있는 것이라도 드리면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죠.
그런데 이 본문에서 원래 말씀할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충분히 책임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앞에 마태복음 6장에서 봤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래서 이것은 사람이 꼭 무슨 밀농사 보리농사 벼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인구 불어나는 것 한번도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옛날에 모세때에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했을 때도 그 때는 이런 식으로 한 게 아니야.
그 때는 만나를 내려가지고도 믿은 사람이 5천명이 아니잖아요.
603,550명의 남자인데, 그렇게도 먹일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저렇게 간에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순종한다면 최소한도 우리에게 억만장자 백만장자 이런 것 약속하지 않지만 일용할 양식은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22절입니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러니까 지금 이 때가 세례요한이 순교했다 하는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벳새다 들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 제자들을 다시 배를 태워서 보내고 예수님은 혼자 따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시는데,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다는 거예요.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여러분 갈릴리 호수라는 곳이 사실 바다라고 하기에는 작고, 호수중에서는 제법 큰 호수인데, 지난번에 한번 가니까 꽤 바람이 몰아치는데 배도 별로 크지 않고 위험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이야 동력선이니까 낫지만, 옛날에 동력이 아니고 노를 의지한다든지 바람에 의지하면 위험하죠.
25 밤 사경에,
‘밤 사경’이 몇시죠?
새벽입니다. 우리가 보통 새벽기도할 때가 사경인데, 3시에서 5시 정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충 그 정도야.
밤을 네 토막으로 1에서 4경 나눕니다.
삼경이 제일 깊은 밤이죠. 제일 깊은 밤을 삼경..
사경이면 밤이 새어갈려고 하는 때죠.
예수님께서 해가 질녘쯤 되어서 오병이어가 있었고, 그리고는 노를 저어서 가는데 제법 가는 거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파도와 풍랑만 해도 무서워죽겠는데, 유령까지 나타나봐..
얼마나 놀랐겠어요?
..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남자들 하고는.. 그렇죠?
혼자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확실히 베드로다운 말이야. 그렇죠?
다른 사람들 같으면 꼭 이렇게까지는 안 할거야. 그렇죠?
‘정말 예수님 맞습니까?’ 이렇게 물어볼텐데,
바로 ‘나를 걸어서 물위로 걸어오게 하라 하소서.’ 이렇게까지 적극이야..
창세이후로 이런 사람 잘 없어요.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대단한 사람이야.
빠지거나 말았거나 일단 거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거죠? 맞죠?
저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남보다 뒤에 해보기를 원치않고, 항상 뭐든지 옳다 싶으면 안 가리고 남보다 앞서 가면 앞서 갔지 뒤에 잘 안 따라가요.
그런 성품인데 베드로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 같애.
대단한 사람이야.
..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성경에서 제일 짧은 기도라고 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시간이 없어요.
물에 빠져가는데, ‘거룩 거룩~’ 할 시간이 없으니까..
제일 짧은 기도예요.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내가 볼 때는 믿음이 대단한데 믿음이 적다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걸어본 것만 해도 대단한 건데, 예수님은 그래도 믿음이 적다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작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있는 줄 알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이 한방울도 없는 것을 발견할 거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그것은 믿겠지만, 현실 앞에 어려움과 두려움과 문제가 딱 우리 눈앞에 봉착했을 때 진짜 우리가 믿음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깜짝 놀랄정도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베드로는 믿음이 겨자씨만큼 있으니까 바다에 빠졌잖아요.
우리는 바다에 빠지지도 않고 배 위에 있는 것이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있기는 있었는데, 결국은 걸어가면서도 의심을 했다는 거죠.
전에 제가 한번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해보지도 않고 이론상으로 우리가 마음이란 게 몸을 어떻게 만드는가..
마음과 몸이 굉장히 밀접해가지고 마음이 못하면 몸도 일을 못해요.
안들은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데 필요한 길이의 넓이가 얼마쯤 돼요.
걸어가는 넓이가 얼마쯤 됩니까? 혼자 걸어가는데..
30cm만해도 문제가 없죠? 50cm이면 충분 하겠죠?
50cm좁아요? 그러면 1m.. OK..
1m길을 어떻게 하느냐? 1만m 상공에 깔아. 난간 없이..
그래서 1km만 걸어가봐..
그러면 하여튼 온갖 소원을 다 들어준다..
1m 정도면 전혀 좁지 않거든요.
갈 자신 있어요? 없어요? 못가는 것 맞죠?
긴다고.. 기어서 가봐..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요. 1m면 충분한거야.
기어가든지 누워가든지..
땅에서는 춤추면서도 가요.
땅에서는 넘어져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데 1만m 상공에서는 넘어지면 안 괜찮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가다가 무서워서 ‘나는 떨어질 거다’ 그렇게 믿어요. 그렇죠?
그렇게 믿으니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출발을 못해요.
아무도..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이 분명해도 사실보다는 내 감정을 더 믿는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이제 거기다 옆에다가 막을 쳐.
낭떠러지가 안 보이게..
여기가 1만m 상공이다 말하지 않고 통과하면 바로 점심 주겠다하면 그러면 건너갈 거예요. 그렇죠?
그래가지고 점심먹는데 그 막을 걷어봐. 점심 먹다가 다 떨어져 죽을 거야.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라는 게 우리 몸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병든 사람을 보면, 병이 들어서 병이 든 것이 아니라, 계속 염려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 몸에 병을 만들어. 우리 몸을 자꾸 약하게 만드니까..
그래서 사실도 사실이지만, 우리 감정이라는 게 두려움도 하나의 감정이거든요.
감정이 우리 인생을 망치는 수가 있어요.
우리가 참 사실을 기초해가지고 생각해야 되는데, 사실을 놓고 한다면 아까 말씀드렸지만 쉽지 않다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가 사실로 하면 1m면 충분하지만, 틀림없이 나는 떨어질 것이다 믿기 때문에, 아예 출발도 못해 볼 정도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가는 길 천국까지 가는 길에는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이 있는데, 쉽지 않다는 거죠.
우리에게 아무 핍박도 없고 이렇게 편안하니까 우리가 순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데, 막상 순교가 눈앞에 다가오니까 예수님도 고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것도 감탄사일 뿐입니다.
조금 있다가 보면 언제 배신할지 몰라요.
우리 입으로 하는 말들이 신앙고백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감탄사일 뿐이고,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감탄하는 감정 그런 정도일 수 있어요.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이 정점에 다다라 갑니다.
이 때쯤 최종적으로 여기 이적이 그 뒤에 몇개 더 있기는 합니다만, 이 때쯤 거의 예수님 사역의 정점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병이어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게 저녁에 볼텐데, 칠병이어 사건 이렇게 두번씩이나 연거푸 보여주면서, 제자들이 앞으로 살아갈 때 반드시 주님을 따라가는 삶 속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을 것을 다 미리 아시고 최소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 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이런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셔서 어쩌면 그 뒤로 사도들이 정말 어디가도 한가지는 확신했을 거야.
틀림없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저는 여기까지 예수님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기는 했지만 굶어서 죽었다 그런 말은 못 들었어요.
마침내 베드로가 굶어서 죽었더라 이런 말은 못 봤어요.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저도 초창기에 예수 믿고 어려움 많이 겪었지만 제가 살아 있잖아요. 그래도..
굶기는 몇번 해봤어요. 그런데 죽지는 않았거든요.
사천쪽에 갔을 때 우리 가족이 따라갈 형편이 안 되어가지고 가족이 갔으면 머리둘 방이 없는 거예요.
할머니 한분이 사는 집에 작은 방에서 사는데, 할머니가 밥을 했다가 주기는 하는데, 하여튼 보리밥을 해가지고 그것도 식었는데 냉장고가 없는 것은 기본이고 파리가 몇마리가 빨았는지..
주는데 할머니는 먹는데 나도 먹어야 되는데 사실은.. 참 먹기가 힘들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은 먹을 수 있겠지만, 그때만 해도 못 먹었어요.
그래서 그 할머니가 내 밥을 준비하는 것도 민망하기도 하고 내가 할머니 밥을 차려서 시원찮은데, 그래서 주말이 되면 늘 예배당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금식기도하는 중이다. 하고 안 먹고, 굶기는 그렇게 해봤지만 굶어서 죽거나 한 것은 없었어요.
몇번 굶을뻔 하기도 하고 또 굶고 했지만, 제가 아직도 내 옷을 가만히 보니까 평생 입어도 옷이 남겠어요.
지금 옷이 징그럽게 질기고.. 그렇죠? 안 떨어져..
떨어지면 새옷을 해 입을텐데 안 떨어져요.
신발도 요즈음은 얼마나 잘 나오는지..
신발도 평생 신어도 남겠고..
넥타이도 제가 얼마나 많은지 맨날 목을 매도 남아..
그러니까 제가 참 예수믿기 전보다 지금이 더 부자예요.
예수 믿기전에는 별로 잘 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예수 믿은 이후에 한번도 부자될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데 안될려고 했는데 가진 게 너무 많아..
지난번에 밀양에 있다가 에스라하우스로 이사를 갔는데 얼마나 이삿짐이 많은지..
아직도 풀지 않은 짐이 3분지 1이 있어요.
제가 이사간지 3년 되었는데, 풀지 않는 짐이 3분지 1이 있는데, 필요없는 짐이죠.
괜히 필요없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 거예요.
제가 동대문 시장에는 안 가보고 남대문 시장에 가봤는데, 제가 몇번 돌아보면서 저게 다 필요하나..
특히 여자들 웬게 그렇게 많은지, 토깨비가 흉내를 못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가면 그냥 억만장자 무슨 사치하고 이런 것은 보장 안되지만, 최소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 안해도 될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진리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손해보고 어떤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겠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염려하지 말라 하셨는데, 오늘 그 증거로서 오병이어 사건을 보여 주신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우리가 그런 것을 염려해서 선한 일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우를 범치않게 하시고, 세상에 살 동안에 손을 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는, 또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아름답게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