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배우기 -375- 기별하다
오늘은 평소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기별하다'에 대해 사투리로 줏개 봄시더.
한자로는[ 奇別- ]이라 쓰제요.글채요. 생성시기는 조선, 1789년(정조 13년)쯤이라카니더. 알리껴. 알았재요.
유래를 살피면, 조선시대에 왕명을 대신 내는 승정원에서 전날에 처리한 일을 적어 매일 아침마다 돌렸는데,
이것을 ‘조보(朝報)’라고 캤니더.
이 조보(朝報)를 승정원 소속의 기별서리 (奇別書吏)가 적어 돌리면 이것을 사대부 나 지방관의 서울 대리인인
경주인(京主人) 등에게 배달하는 기별군사 (奇別軍士)가 있었니더.
기별군사로부터 조보(朝報)를 받은 경주인(京主人)과 영주인(營主人)은 이 신문을 지방에 배포했니더.
경주인은 전국 각 군(郡) 또는 현(縣)에서 중앙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설치한 경저(京邸)를 맡아 운영하는 사람이고,
영주인은 각 도의 감영(監營)이 역시 서울에 설치한 영저(營邸)를 맡아 운영하는 사람이시더.
경주인과 영주인들은 문서의 전달, 서울과 지방, 지방과 지방 간의 연락, 지방의 상납물을 서울에 전달하는 등의
업무를 했니더.
조보(朝報)의 내용은 국왕이 통치상 내리는 명령과 지시들인 전교(傳敎)가 대부분이고, 관리의 임명과 해임, 관리가
왕에게 올리는 상주(上奏), 국왕의 처결사항을 비롯하여 궁중의 동정과 지방 관리의 보고사항 등이 기록되었니더.
이런 과정에 기별서리가 적어 돌리고 기별군사가 배달한다는 의미에서 조보를 ‘기별(奇別)’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잔니껴. 안글리껴?
이처럼 궁중에서 발행하는 공식 관보로는 조보(朝報)·저보(邸報)·통문(通文) 등 세 가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조보(朝報)는 고려시대부터 발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년)에 설치된 춘추관에서 각 관청에 돌리는
조보를 발행했고, 세조 때 이를 바꾸어 승정원에서 담당하게 했다고 하니더.
이 기별(奇別)이라는 어휘는 이의봉(李儀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1789년) 27권과 28권의 「동한역어(東漢譯語) 」에
나오니더. 즉, 조보를 기별이라고 부른 것은 1789년에 처음 보이니더왜요.
한편 ‘조보(朝報)’란 말은 훨씬 더 오래 되었니더. 1178년(고려 명종 8년) 이전부터 경저제도가 있었다고 하며, 조보에
관한 기록은 1508년(조선 중종 3년)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국가제도 로 확립되었을 것으로 본다 카니더.
또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시대에 조보와 비슷한 경보(京報) 또는 저보(邸報)가 존재했다가 송(宋)나라 때에는 조보가
국가제도로 확립되었고, 일본에서도 17세기 초부터 ‘요미우리〔讀賣〕’, ‘카와라반〔瓦版〕’ 등의 소식지가 발행 되었니더.
우리나라의 조보는 188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가 발간되던 때까지도
존재했니더. 그래서 조보의 기사가 「순보」와 「주보」에 인용되거나 전재되는 일이 많았니더.
개화기에는 한국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에서도 조보를 구독하여 궁중의 소식을 접했다카니더. 조보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던 것이시더. 조보는 1894년 8월 초 조선 정부가 정식으로 인쇄된
관보를 창간 하면서 발행이 중지되었니더. 잘 알리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