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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흰 골짜기의 울음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자고나면 놀랄 만한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고야 마는 고국이다. 유라시아 대륙 한 쪽 끝에 주머니처럼 매달린 저 조그마한 반도의 남과 북에서 터져나온 소식들이 어느 하루, 이곳 현대판 로마제국의 주요 뉴스 화면에 서너 개 이상 안 걸리는 날이 없다. 바른 말이지 이즈음 뉴스 공간상의 노출 빈도나 관련 뉴스의 무게에 있어서 한반도는 어느덧 미국과 중국에 버금가며 심지어 일본이나 러시아 따위는 이미 별 볼일 없는 소국으로 왕따시켜 버리는 추세다.
그렇지가 않나. 그 반쪽에서는 한 동안 예사롭지 않은 불꽃놀이가 펑펑 터지는가 싶더니 이건 또 뭐야? 딴 세상 얘기네? 다른 반쪽의 어느 양가집 규수는 누가 그리 부아를 돋웠는지 참다 참다 못해 손이 떨려 탁자 위의 물잔을 엎질렀는지 내던졌는지 했다는데…, 이제 세계 사람들이 한국사람 잘못건드렸다간 물벼락 맞을 수 있음을 쉽게 알아 버렸다. 그러다가 다음날에는 진짜 빅원이 터진다.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터울이 상당한 남자 둘이 친형제처럼 다정히 손을 잡고서는 땅바닥의 조그만 시멘트 턱을 사이에 두고 왔다갔다 깨금발 뛰기를 한다. 세계사에 이런 특별하고도 정겨운 장면은 드물다. 아무튼 참 대단한 나라요 못 말리는 백성들이다. 그 뿐인가? 오는 유월 십이일에는 남쪽나라 십자성이 뜨는 적도의 섬나라 싱가포르에서 세기의 담판이 벌어진단다. 어차피 그 결말을 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야 성이 찰 테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할 핑계가 또 하나 늘었다.
이제 코리안을 모르는 세계인은 없고 코리아가 안 끼는 세계적 이벤트는 드물다. 노랑머리 아나운서가 영어에는 없는 낯선 모음, 헷갈리는 자음의 인명, 지명을 비슷하게라도 불러보려고 마이크 앞에서 애써 입술을 오므리고 혀를 공그린다.
어찌됐건 이렇듯 부러움과 비웃음, 사랑과 미움을 함께 받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한국사람들은 함께 묻어서 현대사의 주역과 조역이 되어 간다. 과히 싫지 않은 일이다.
남북정상회담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렇더라도 이것만은 아직은 좀 카메라 세례 받지 말고 우리끼리만 알았으면 하는 일들이 있다. 한국의 종교에 관한 일들이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집단, 그 종교를 대표한다고 만들어 놓은 조직, 예를 들어 그 조직에 자리를 차지하고 몸담고 있는 주요 간부들, 이른바 그 간부들 가운데 일부가 벌이고 있다는 짓거리들인데 정말 종교를 떠나서도, 한 나라 안에서도 이웃 보기에도 창피한 일들이 드물지 않다는 전언이요 짐작이다. 어차피 터질 일이라 곪아 터지고들 있기도 하다지만 여기서 구태여 말로 안 해도 뭔지는 다들 미루어 짐작하시리라 본다. 더군다나 요새는 우리글 우리말을 읽고 들을 줄 아는 세계인들도 많다니 속속들이 글로 들춤은 이쯤에서 접도록 하자.
그런데 이런 일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웃 종교의 일들은 일단 제쳐두고,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한국불교의 이러한 좋고 나쁜 모습들은 역사의 필연일까 인과응보의 당연일까? 하필 이 중요한 역사의 기틀에서, 남북과 온 겨레가 용트림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나 혹시 나락으로 떨어지려나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도와 다짐으로 기를 모으고 숨을 고르기는커녕 심심찮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 숱한 잡음들은 도대체 무슨 푸념이고 잠꼬대며 백주대낮의 술주정이란 말인가!
혼자서 훈장질하는 것 같아 좀 내키지는 않지만 한 마디로 말해 지금 우리 한국 불교의 불자들, 말이 좀 심한지는 모르겠으나 재가나 출가를 불문하고 너무 복에 겨워 천신만고의 지난 일들을 까마득히 잊고 있지나 아닌지 자성이 든다. 그 얼마만에 찾아온 생존의 자유, 활동의 자유, 포교의 자유인가! 저오백 년 억불숭유의 핍박과 모멸을 깡그리 잊은 것은 아닐테고. 이나마의 불법을, 오늘의 불교를 있게 한 저 고난의 긴 세월을 견디며 뒤를 잇고 사라져간 스님들을 잊었는가. 굶주림과 헐벗음, 업신여김과 으름장 속에서도 기어코 마음에 모셨던 그 정성을 땅에 한 번 내려놓지도 않고 끝끝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구절양장 두멧길을 마다 않고 찾아 찾아…, 불전에 저쑵고 공양물을 올리며 더불어 불교를 먹여 살린 저 선남선녀 수많은 조상님들의 지극정성이 이제 와서 다 헛되었단 말인가.
설사 남의 나라 일이었어도 다시 돌이키기가 답답하고도 마음 아프겠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오백 년이라고 해도 엊그저께 일어났던 생생한 일이다. 잊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이제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앙갚음의 심정에서가 아니라 올바름으로 나아가려는 한 순간의 깨달음을 위하여 억불과 척불, 배불과 훼불로 점철된 조선의 지난날들을 훑어보자.
먼저 되새겨야 할 것은,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지금 한국불교의 활짝 펴지지 못하는 처지와 위상이 전적으로 남탓만은 아닌 것처럼, 불교가 당한 조선 오백 년의 시달림도 일차적으로는 고려 불교 오백 년의 교만과 퇴폐의 댓가라는 점이다. 더러워져 가는 세상을 맑히려고 절치부심한 스님들과 불자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많은 승려들과 재가자들은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바로 그것,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으로 날밤을 지새우며 물욕, 명예욕에 젖어 흥청망청하기 일쑤였으니 그 과보가 조선 오백 년을 내리 뚫어 오늘에까지 미치지를 않는가.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가장 단순한 계율부터 간단히 범해 온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아무튼 이리하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짐에 불교의 ‘불’자도 제대로 이해 못하던 정도전 따위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불교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욕을 해대어도 변변하게 대꾸 한 마디 못하고 저들이 휘두르는 사회개조의 칼날에 그저 순순히 목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힘은 당당함에서 나오는데 이토록 당당할 수가 없는 처지에 몰리니 지난날의 헛된 이름이 다 무슨 소용이랴. 사회의 맨 윗층에서 노닐던 스님들이 이제 난간 아래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질 차례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를 자빠뜨리고 조선을 세움에 있어서 이성계는 스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본래 태고(太古) 나옹(懶翁) 등 고승을 떠받들고 무학(無學) 대사나 자초(自超) 대사와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 등 불교 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권력을 잡자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속으로 간직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했던지라 불교계의 폐단을 일부 없애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을 줄이는 수준으로 얼마간의 억불은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성리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던 태종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앉자마자 제대로 불교를 깔아 뭉갰다. 나라에서 정한 절에만 일정한 수량의 땅과 종들을 허락하고 나머지 절들은 싸그리 헐어서 없애 버렸다. 온 나라에 11개 종단, 242남짓의 절만 남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가 않나? 절에서도 종을 부렸다니! 이것부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적폐였으니 따지자면 절이 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 세종이다. 한글을 만들고 선정을 베푼 성군으로 칭송 받고 있지만 억불정책을 드잡이 한 임금이다. 그만큼 신진 사대부의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방증도 된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이제 이 유교 세력을 경계하고 견제해야할 지경에조차 이르렀다. 임금은 그 방편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이를 써서 민중의 불교 세력을 다시 일으켜 힘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아들인 수양대군의 도움으로 석보상절,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등 불교 작품을 한글로 지은 연유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그다지 성공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세종 6년에 기존의 7개 종단을 다시 선ㆍ교의 양종(兩宗)으로 통합하고 사찰의 수를 선ㆍ교 각각 열여덟 곳만 남겨 두게 되는 처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세종은 내쳐 내불당을 폐지하고 스님들이 서울 사대문 돌구멍을 들락거리지 못하게 막았다. 소도 가고 개도 가고 종들도 병신도 거지도 들락거릴 수 있었으나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중’들만 출입이 안 됐다. 짐승취급도 못 받은 것이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갑오경장 때에 와서야, 그것도 한국불교를 삼키려는 일본불교의 음모적인 힘을 빌어서야 겨우 승려의 도승출입 금지를 풀 수 있었다.
조카인 단군을 목졸라 죽이고 사륙신을 베어 죽인 수양대군, 곧 세조는 이러한 죄의식 때문인지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선대에 비해 불교정책이 조금 느슨해졌으나 성종대에와서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신진 사림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진 사림을 포함한 모든 성리학자들은 당시 조선에 있는 만여 곳 사찰에는 십만여 명의 승려들이 무위도식하고 있어 나라의 병폐가 된다고 하면서 더 적극적인 불교 억압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성종은 서울의 염불소를 헐고 세조가 불전 간행을 위하여 만든 간경도감을 없앴다. 또한 세조대에 편찬이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승려에게 불리한 규정을 넣었다. 세조는 본래 <경국대전>으로 승려들의 신분과 역할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불교를 공식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종은 도첩의 발급마저 중지시
켜 새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잡아다가 군대에 보내 버렸다. 도첩이란 나라에서 발급하는 승려 자격증이었는데 어찌나 까다로운지 따기가 만만치 않았고 돈도 많이 들었었다.
수국사 극락구품도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한 술 더 떴다. 서울의 두 비구니 절을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전국의 많은 사찰에게서 땅을 빼앗고 스님들을 환속시켰다.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없애니 이에 선교 양종은 광주 청계사로 옮겼지만 승과도 실시할 수 없어서 실질적으로는 해체된 것과 만찬가지였다.
연산군은 원칙도 없이 즉흥적으로 폐불을 시행하곤 했지만 여우굴 피하니 호랑이굴 만난다고, 중종반정으로 사림들이 정권을 잡자 성리학에 입각한 완전한 폐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중종은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경국대전>에서 도승조(度僧條)를 아예 삭제하여 불교의 법적
존재 근거를 지워 버렸다. 이는 공식적인 폐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이제 스님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고 절에 딸린 땅과 종들은 완전히 몰수당하게 생겼다.
남아 있는 스님들에게는 도첩 대신 호패를 주며 환속하라고 윽박질렀다. 그게 싫으면 도망쳐야 했다. 대낮에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두막 절을 짓고 어찌어찌 모여든 몇몇 스님들과 함께 풀뿌리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으며 근근이 수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산 속에 숨어들었던 불교는 명종 때가 되어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뒤를 봐줘서 한 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잡았었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 스님을 선종판사로 등용하면서 선교 양종을 재건시켰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였는데 당연히 사대부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동안 시행되었던 정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부분 다 없애버렸고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고문을 당하다 순교하였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유교가 주도를 잡아 지방에까지 유림의 횡포가 만연하였다. 경치 좋은 산골짜기의 절은 기생들까지 끼고 노는 선비들의 놀이터가 되기 일쑤였고 스님들은 이들의 시중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어, 저 ‘중놈’들 산 속에 살더니 힘이 좋네. 너 이리 와서 가마 좀 메어라. 스님들은 양반들 금강산이며 온갖 유람 행각에 가마꾼으로 불려 갔다. 어, 저 중놈 내버려 두었더니 살아남으려고 스스로 일도 잘 하네. 너 이리 와서 성 좀 쌓아라, 다리 좀 놓아라. 스님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강제 노역에 불려나갔다. 보수는 물론 없었다. 세금은 평민들의 몇 배나 거두면서.
다른 것들은 그래도 근근이 견딜 수가 있었다. 조선 후기로 이르자 양반들의 종이 수요가 턱없이 늘었는데 이는 모조리 절간 부담이었다. 무조건 언제까지 얼마만큼 만들어 오너라였다. 우리 스님들, 골짜기 골짜기 헤매며 닥나무 찾아 낫으로 베어 물에 담그고 껍질을 벗기고, 불리고 찧고 풀고 뜨고
펴고 고르고 말리고 접고 쌓고 묶고…, 이고 지고 간신히 갖다 바치면 그 잘난 한시 몇 자, 매란국죽 사군자 몇 점 휙휙 쳐갈기곤 어이, 다음 몇 날 며칠까지 얼마만큼 또 다시 어김없이 대령하렷다였다. 창자가 말라붙고 허리가 꺾인 스님은 대청마루 섬돌 아래에 기진하였다. 한 마디로 국가가 공인한 인간 소모품이요 싫으면 죽으라는 소리였다. 하얗게 벗겨져 골짜기에 흩어 버려진 닥나무 가지들처럼 이렇게 골골마다 기진하여 쓰러진 스님들의 달빛에 바랜 하얀 울음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게 남은 모든 역사, 그것을 가능케 한 사료가 담긴 많은 서물들과 그림들 한 장 한 장, 거기엔 이렇듯 우리 이름 모를 스님들의 피땀과 목숨이 짙게 배어 있음을 그대 아느뇨?
하지만 이 모든 희생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흉년이 닥치면 굶어 죽고 관헌과 양반들의 수탈과 압박에 짓눌렸으나 실낱같은 법맥은 면면히 이어졌고 밑바닥 인심에 뿌리내린 불심은 꺾이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얻었으니 이리하여 명줄을 잇고 살아난 한국 불교는 그래도 지금 눈에 뜨이되 그 기세등등하던 유림의 자만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튼 이토록 극단적으로 엄혹한 시기에 잠깐 비추었던 볕날에 승과를 통과하여 공식적으로 배출된 능력 있는 스님들은 훗날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지도력의 기틀이 되었다.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 이러한 경우다.
문정왕후가 죽자 함께 내려앉았던 불교계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승군 활동을 벌이면서 새로운 그루터기를 마련하였다. 공주 갑사에 있던 영규는 팔백여 명의 의승군을 조직하여 조헌이 이끄는 칠백여 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여 전쟁 발발후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의주에 도망가 있던 선조는 묘향산의 휴정을 불러 의승군을 조직하라면서 팔도도총섭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급하니까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었나 보다. 이들 스님들도 비록 불살생의 계율에는 어긋나지만 대의와 나라를 위하여 총칼을 들기로 했다. 더 현실적으로는 이로 인하여 불교와 승려에 대한 핍박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도록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이들 의승군은 군량을 나르고 갈무리하며 성을 쌓고 때우는 등 그 누구보다도 규율과 효율을 갖춘 전투원이요 후방의 지원부대였다. 유정은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여 전후 포로 삼천여 명을 데리고 오는 등 큰 역할을 담당하여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선조는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입을 싹 씻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전의 태도로 되돌아갔다. 똥 누러 갈 때와 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비굴하게 남의 등에 업히고 몸을 숨기며 살아남은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승려는 여전히 중놈이었고 누구나 마구 부릴 수 있는 최하층 천민 그대로였다. 그러면서 다함께 망국의 마지막 구렁텅이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왕조의 저녁은 힘겹게 저물어 갔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나긴 오백 년 동안, 아무리 평화와 비폭력을 사랑하는 가르침이라도 그렇지,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우리 스님들은 무슨 바보 천치처럼, 아니면 목석처럼 당하기만 하고 사신건가? 비록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종교가 정치를 결정적으로 지배한 적은 없다고 하지만 말이다. 임진왜란 때와 병자호란 때처럼 불살생의 계율을 잠시 접으면서까지 싸움터에 뛰어들며 힘을 보탰건만 권력층의 거듭된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제대로 한번 항의하거나 맞서지도 않은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스님들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백 년에 딱 세 번이다. 아니 네 번이다.
그 첫 번째는 태종 6년에 성민(省敏) 스님이 서울에 올라가 신문고를 친 사건이다. 나라에서 절의 땅과 종들을 강제로 줄이자 수백 명의 스님과 신도를 이끌고 가 목숨 걸어놓고 북을 쳤다. 하지만 태종의 묵살로 게임 끝, 헛걸음만 했다.
두 번째는 월경 사건이다. 세종 원년에 서른 명의 스님들이 단체로 압록강을 건너 감히 북경을 찾아갔다. 당시 명나라 명제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이들의 호소를 듣고는 세종에게 한마디 해 주기는 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세종은 듣는 척을 했지만 눈가림이었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스님 몇을 불러 들러리를 세워 놓았다가 가고 나면 그 뿐이었다. 세종 3년에도 같은 일이 벌어져 묘향산 스님 적휴(適休)가 도반 8명과 함께 또다시 명제에게 갔으나 결과는 대동소이. 아무튼 불교판 황사영 사건이라고나 할까, 외세를 빌어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했다니 성격은 좀 다르지만 요즘 걸핏하면 쪼르르 워싱턴으로 달려가는 모모 인사들이 연상된다. 아무튼 황사영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일종의 사대적 반역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의미있고 당당해 보이는 저항으로는 현종 때의 백곡 처능(白谷 處能 1617~1680) 스님의 상소 사건이 있는데 불교계의 상소로는 오백 년 통틀어 유일하다.
흰 골짜기 백곡 스님은 조정의 척불이 날로 더해감을 지켜보다가 현종 2년인 1661년, 전국의 승려를 대표하여 임금에게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부처님의 가르침을 폐하지 말 것을 간하는 상소)>라는 조선 역사상 가장 긴 상소문을 올렸다. 팔천여 자에 이르는 전무후무한 대문장으로 폐불론자들의 논거를 반박하고 척불정책의 부당함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피울음이었다. 이 상소로 간한 내용을 현종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 상소 덕분에 당장은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선왕인 효종 때부터 구상되고 실행되어 오던 폐불 계획 - 조선 불교를 모조리 없애어 완벽 무균질의 유교국가로 만들어 보려던 무모한 계획에 김을 빼고 압력을 줄이며 결과적으로 그 구체적인 실행을 일부 막을 수가 있었다.
흰 골짜기 스님의 논거를 한 번 짚어 보자.
먼저 스님이 지적하기를, 나라에서 불교를 없애려는 근거로, 불교가 중국이 아닌 오랑캐의 것이라는 것, 불교가 중국 상고시대의 법이 아니며, 허황한 윤회를 이야기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며, 승려가 용역을 피하는 것 등이라면서 임금이 이러한 이유를 들어 폐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까닭을 조목조목 들고 하나하나 깨부수었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나라 역대의 임금과 대신들 중에서 불교를 믿었던 이들을 열거하고, 폐불의 군신은 몇 사람밖에 없었음을 일깨웠다. 중국의 유명한 유학자들 중에서도 불교를 믿었던 이들이 많았음도 예를 들어 설명했다. 우리 역사에서 보자면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숭앙하여 나라가 흥했고,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크게 숭배하였다는 점, 불교가 나라를 다스림에 결코 해롭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태조 이래 조선의 임금들이 숭불하고 폐불하지 않았음과 함께 불교의 사찰이 국가의 흥망에 비보가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역대의 모든 임금과 왕후가 자수사와 인수사를 내원당(內願堂)으로 삼고 봉은사와 봉선사를 외원당(外願堂)으로 삼았는데 하루 아침에 이 절들을 없애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역설하였다.
임금은 백곡 스님의 이렇듯 당당한 논거에 딱히 맞대거리할 건덕지가 없었는지 봉은사와 봉선사를 철폐하라던 명령을 슬그머니 거두어 들였다. 아무리 이심전심이요 불립문자의 종교라고 할지라도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할 말은 당당하게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불교는 할 말을 하고 있는가? 말해야 할 때가 아직 이르지를 않았는가? 아니, 할 말 자체가 아예 없이, 말도 떠나고 글도 떠나고 꿈마저 떠난 경지에 이미 이르렀는가? 말을 디뎌야 말없음의 경지에 이르고 글을 디디고 올라서야 글이 필요 없는 누리에 닿을 수 있음은 어느 변방 덜 익은 우바새의 한가한 지레짐작일 뿐일런가.
(201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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