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7. 9. 14. 목요일.
초가을 하늘색이 맑고 푸르다. 높은 구름이 살짝 드리웠어도 하늘빛깔이 엺다.
조금 열어제킨 남쪽 유리창 넘머로 강남구 대모산 꼭대기가 높이 올려다 보인다.
대모산 쪽을 바라보면 서해안고속도로로 가는 길이 있다.
오늘은 서울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고속도로를 타고 서해안 지역으로 내려간다.
충남 보령지역으로 내려 가야만 한다.
모레는 토요일. 친척들이 모여서 산소 풀을 깎아야 한다. 세 군데.
나는 종손이기에 서쪽 서낭댕이 뒷산에는 십여 대의 윗 조상 무덤이 있고, 오촌당숙과 사촌동생은 북쪽 신한재에 산소가 있다. 벌초는 함께 모여서 해야 한다.
지난해 고향 앞뜰과 앞뜰이 일반산업단지로 조성되는 바람에 종산 무덤을 모두 이장해서 내 개인 산에 옮겼다. 몇 군데의 묘역도 옮겨서 한 군데로 집결했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새 무덤은 사각형으로, 한 뼘 높이로 만들었다.
유골 모두를 화장해서 한 곳에 합장하자는데도 나는 매장을 고집했다. 유골을 수습해서 작은 석관에 모시었다. 봉분 크기는 작게, 높이는 낮게, 간격은 가깝게 조율했다.
시향조 한 분만 석물로 치장하고는 나머지 개별적인 석물은 모두 해체해서 내다버렸다.
고향과 대전에서는 한때 알아주는 석공장을 운영했던 집안이라서 돌치장물이 얼마나 거창했으랴. 그런데도 모두 없앴다. 한문으로 된 비석. 빗돌만 모아서 한 곳에 두 줄로 나란히 세우고는 나머지 석물들은 모두 없앴다.
내 친척은 너나 할 것이 모두 자손이 귀했다.
조상 대대로. 지금도 그렇다. 아들이 하나 둘이거나 아예 없기도 했다. 아들이 있다고 해도 객지에 흩어져서 사니 추석 전 벌초할 때나 음 10월 초 시향(시제) 지낼 때에는 시골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게 무척이나 어려웠다. 생업이 바쁘고, 이런저런 이유로 참가하기가 어려웠다고들 말한다.
그래도 세 집안은 늘 함께 했다.
올해 여든 살인 큰당숙, 일흔 살인 나, 예순두 살인 사촌동생이 주동이 되어서 협조했다.
모레인 토요일에는 서울, 대전 등지에서 자손들이 내려와 벌초 일을 거둔다.
예초기로 풀 깎는 일은 일꾼이 하고, 친척들은 베어낸 풀을 갈퀴로 긁어 거둬내야 한다.
친척 가운데 일할 남자가 적으면 때로는 내 아내도, 사촌 제수 씨도 일했다.
벌초 행사는 각 지역에서 사는 일가를 합치는 데에 좋은 모임이며, 기회가 된다.
이날 만나서 얼굴을 익히며, 안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그런데도 자꾸만 힘이 든다.
자손도 줄어들고, 또 큰당숙이나 나도 나이가 해마다 많아지기에 더욱 그렇다. 중년이거나 젊은 사람들은 생업과 다른 일이 있다면서, 하루를 짬내어 시골로 내려오는 것을 꺼려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지난해 산소를 옮길 때, 새로 묘역을 확장할 때 모두를 화장해서 한 무덤 안에 합장해야 했었나? 하는 후회가 자꾸만 든다.
산소 관리하는 일이 자꾸만 힘이 들어간다. 수십 년 전, 예전이야 산지기네가 세 곳이어서 이들이 알아서 풀 깎고, 늦가을 시향 제수물을 짊어지고 산으로 왔다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산지기네 한 군데만 남고, 그마나 과수댁이다. 벌초하는 일은 수십 년 째 나와 친척들이 해야 했고, 시향도 크게 축소해서 사촌네 사랑방에서 지낸다.
내 시골집에서 지내야 하나 집은 너무나 낡았다. 1957년에 재보수한 함석집. 근동에서는 알아주는 집이었으나 이제는 세월 따라서 낡고 보잘 것없는 농가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오랫 동안 빈 집으로 남기고는 나는 대부분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다. 엄니를 땅 속에 묻고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 낡은 옛집은 더욱 그랬다.
별 수 없이 사촌네 신식집에서 시향제사를 모신다. 올해에도 그럴 계획이다.
이렇게 산소와 시향을 줄이고 간소화했어도 그래도 심적 부담은 남는다.
나는 또 그 흔적을 줄이고 싶다.
나와 아내는 종가 종손이며 종손 며느리이니 어쩔 수 없이 내려간다지만 큰아들, 작은아들은 나름대로 바쁘다며 핑계를 댔다. 어린 손녀와 손자가 있는 큰아들한테는 무어라고 말을 못했다. 결혼하지 않은 둘째아들한테만 풀 깎으러 가자고 강요해서 겨우 승락을 받았다.
해마다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무덤을 옮기면서 봉분을 낮게 썼으나 앞으로는 그냥 다 밀어내서 평장형태로 만들었면 싶다. 더 나중에는 땅 속의 유골을 꺼내 화장해서 한 군데에 합치거나 아예 나무 밑에 묻는 수목장이나 바람에 날리는 풍장으로 처리했으면 싶다.
먼 선대의 조상 흔적을 더 지우고, 자식으로 이어지는 끈을 나는 더 줄이고 싶다.
변화의 속도가 무척이나 더딘 고향에서도 옛 무덤을 축소하고, 없애고, 또는 화장해서 수목장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슬기로운 조치라고 본다. 허례허식에 가까운 장례문화와 시제문화를 더욱 축소하거나 없애야 할 것 같다.
국내 곳곳에 흩어지고, 더 멀리는 해외에서 사는 세상이다.
문화란 시대와 공간,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변질되게 마련이다.
내 어린시절에 보아왔던 장례, 제사, 벌초, 시향(시제)문화가 점차로 사라지고 잊혀진다.
축소지향주의처럼 줄어드는 게 맞다.
목요일인 오늘 서울의 날씨는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이다. 이대로 며칠간만 좋았으면 싶다.
나는 내일과 모레 날씨가 걱정이 된다.
주말에 제주도 근방에 온다는 태풍이 일본 쪽으로 살짝 비켰으면 한다.
내가 산소 벌초하는데 한울님, 조상님이 부조 좀 했으면 싶다.
이빨이 아파서 오늘도 치과병원에 다녀 온 늙은 아내는 내일 함께 시골로 함께 내려 갔다가 다음 주 중에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나는 고향에 남아서 텃밭을 가꾸고 싶은데도 아내가 서울 함께 올라가자고 우길 것 같다.
이런 저런 핑계와 구실로 내 시골집은 자꾸만 빈 집이 되고, 텃밭은 온통 잡목과 잡초만 극성을 부린다.
시골 산은 자꾸만 울창하다.
나무가 자랄 수록 먹을거리가 부족했을까? 멧돼지, 고라니가 마을로 내려가 밭을 마구 헤치며, 작물을 파 먹는다. 이들이 지나간 밭은 쑥대밭이 되고, 일년 농사를 망친 농사꾼은 한숨이나 푹푹 셀 게다.
가을은 자꾸만 짙어간다.
들녘의 벼는 익어서 노르스름하고, 이삭은 고개를 숙일 게다. 그 너른 들판에는 일꾼은 없고, 대신 커다란 농기계가 벼를 베기 시작할 게다. 볏짚조차도 다 걷어낸 들판은 텅 비었을까? 허무만 가득 찼을까? 아니다. 긴 머리카락을 깎은 것처럼 단정해진 들판에는 가을 풀씨앗이 싹을 틔워서 자라기 시작할 거다.
나는 '가을은 시작하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텅 빈 것 같은 들판에도 또다른 생명이 들어서기에.
그런데도 나는 올해에는 가을김장 채소인 배추 한 포기조차도 심지 못했다.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올라오면 나는 건달농사꾼, 게으른 농사꾼이어서 텃밭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늘 시골로 내려가 있다.
촌사람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하였기에...
2017. 9. 14. 목요일.
오늘 오후에 농협지점에 들러서 종중 돈 조금 인출했다.
일꾼 품값 주고, 식사 비용, 기타 잡비를 지불하고,
미혼인 자손들이 벌초 작업에 동참하면 용돈이라도 조금씩 나눠주어야 하기에.
생기는 것 하나도 없는 종손은 늘 걱정이다.
첫댓글 저도 이번 토요일이 친정 산소 성묘도 하고 벌초를 해야 하는데
저는 국보문학 등단식에 참석 하려
친정 성묘를 못가네요
아쉽네요
님은 착한 따님이군요.
친정 산소도 찾아보고, 벌초행사에도 참가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