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를 이야기하면서 박지원을 이야기할텐데요..박지원은 노론벽파입니다..반 사도세자 세력이고요..심노숭의 부친 심남수는 노론시파입니다..박지원과 같이 이야기할 정약용은 남인중에 서학과 서양과학기술을 신봉한 남인 신서파입니다..
심노숭은 정약용과 같이 1762년생이네요..심노숭이 살던때는 18세기말~ 19세기초로 상품화폐의 발달,도시의 성장, 성리학 말폐기로, 실학적 사고의 발달과 같은 국내상황에 명,청의 새로운 사상과 문학, 서학의 유입 같은 외적요인들이 뒤섞여 사회전반이 급변해가는 시기였습니다. 문단의 동향 역시 문학 담당층의 확대. 성리학적 문학관의 이완등과 함께 다양한 면모의 양상들이 나타났고, 그 급변의 징후가 상층의 사대부 관료, 문인에 까지 나타나자..정조는 급기야 '문체반정'의 기치를 겁니다.. 당시에 유행했던 연암의 '열하일기'의 참신한 문장에 대해 소품소설이나 의고문체에서 보이는 잡문이라 규정합니다..이에따라 명,청의 각종 패사소품들의 국내반입이 금지되고, 관각의 공용문과 유생들의 과문에 순정한 문체가 요구되었으며, 조정관료들의 올바른 문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임금에게 개진해야 했습니다..
하나의 통합적 이념을 필요로 하는 봉건왕조의 시대에 문체의 다양화는 곧 의식의 다양화였기에, 재위자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거겠죠..심노숭은 이 시기 대표적 패사소품 작가들인 김려, 이옥, 강이천 같은 문인들과 성균관에서 교유하며, 그 문학적 성향에도 공통되는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한 작품성향을 오직 '패사소품'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후기 주요한 산문작가로 자리매김한 뚜렷한 개성을 지닌것은 분명합니다..
정조 연간 노론 시파벽파의 대립과정에서 노론 시파의 선봉에 섰던 부친 심낙수는 몇해동안 정치적 부침을 겪습니다. 부친의 정치적 실의와 시련외에는 그리 큰 고통이 없었던 심노숭에게 아내와 어린딸의 잇달은 죽음은 생애 처음 겪는 큰 아픔이자 찢어지는 고통이었읍니다. 그는 동갑내기 아내 전주 이씨(당시는 여자는 이름도 없습니다)를 잃고, 이후 2년여 동안 그녀를 애도하는 작품을 쏟아냅니다..''아내를 잃고 너무 슬퍼하는 자는 세상에서 비웃는 까닭에 풍속을 두려워 하여 그 슬픔을 숨긴다'' 던 조선 사회에서 심노숭은 무려 26제의 시와 23편의 문을 남겨 아내를 애도하였으니 이는 우리 문학사에 유래가 없습니다..
그가 성취한 산문의 다양한 양상 가운데 가장 꼽을 수 있는건 바로 이때 남긴 도망문(悼亡文)입니다..
''눈물은 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없이 눈 그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이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 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믈의 위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치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눈물은 무엇인가의 서두입니다..눈물이 눈에서 나오는지 마음(심장)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물으면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이어 구름과 땅과 비의 예시하면서 눈과 마음과 눈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땅한 자리에서 곡하거나 제사를 드릴때만 망자의 넋이 이르는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의 진실한 감정으로 눈물을 흘릴때만 어느 때, 어느 곳이건 망자의 넋은 이르는 것이라고 절절히 토로합니다..
그외에도 애간장 끊어지는 글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