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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동이족문자 (註釋)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9.5.7
책소개
한자가 동이족의 문자임을 주장하는 책.
한자는 통지의 육서략, 오음과 칠음원리에 의거하여 창제된 문자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동이족이 창안한 글짜로 해석된다고 강조한다.
한자는 실담어를 음역한 것이며, 중화대륙의 독창적 문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또한 불교철학의 근본언어가 실담어이며, 실담어를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민족이 동이족이었으므로
불교는 동이족이 창건한 종교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 : 강상원님
姜 相 源
1938년 12월 10일생
1963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1989년 6월 뉴욕 시립대학교[서양철학석사].
1994년 3월 동국대학교[동양철학박사학위취득].
원효대사의 중도사상연구.
경 력
주한 미국 대사관 근무.
뉴욕 평생교육대학 학장 및 뉴욕 티비영어강사.
전 중앙 승가 대학교/ 한국 불교 대학/ 동국 대학 강사 역임
한국세종한림원 총재(2005년 5월 ~ 사단법인 현수 복지 재단 부설)
저 서
1. 천축 실담 상형 문자 주석
2. 한글 고어 사전 주석
3. 왕손 정통 언어 복원 실담어 주석
4. 훈민정음 28자 어원적인 신 해석 주석
5. 한자는 동이족의 문자 주석
6. 우리말 뿌리 훈민정음 불교어 사전 (근간 예정)
7. 금강경 영역 (근간 예정)
8. 법화경 영역 (근간 예정)
목 차
1 서론
1.육서략과 칠음서
2.실담어의 연원과 중천축국강역
2 동국정운과 중국한자고금음표기의 차이점
1.동국정운에 의거한 표기
2.한자의 고금자모표기
3 훈민정음의 위대한 철학사상
1.문장의 구성과 묘사력
2.훈민정음의 23자음체계
3.훈민정음해례
4.훈민정음의 음양오행
천인지 삼재의 원리
훈민정음의 합용병서
4 한자의 자모체계
1.광운, 운경, 홍무정운 36자모도
5 범본오십자모 실담장
1.실담어의 특성
2.실담어자모와 훈민정음
3.실담어 오십자모품
4.실담장의 종성팔성법과 정음의 초중종성과의 관계
5.범본오십자모 대일경자륜품체로 표기
6 결론
본문해설
1.한자와 실담어 음운과 개념비교
2.육서략의 기일성문도의 부수가획원리
3.한자와 실담어 비교해설
출판사 서평
漢字(한자)는 東夷族(동이족)의 文字 註釋(주석).
“한국의 歷史를 왜곡하고 잇는 중국의 東北工程(동북공정)을 破碎(파쇄)하며,
10억 중국사람의 氣(기)와 혀(舌)를 꺾어 정당한 文化와 歷史를 바꾸는 萬古(만고)의 古典!”
At last, 10 billions of Chinese people's tongue tied up with by this book!
“日本, 中國을 비릇하여 각국에서 所藏(소장)하고 잇는 우리 문화재와 書籍(서적)을 즉시 천하에 공개하고
즉시 掠奪(약탈) 文化財(문화재)를 返還(반환)하라!”
누천년을 내려오면서 <漢字(한자)는 東夷族(동이족)의 文字(문자)>라고 닐러왓스나,
오날 드디여 漢字(한자)의 비밀을 세상에 밝히노니, 漢字(한자)는 확실히 우리 文字(문자)>이다.
宋(송)나라 鄭樵(정초)가 찬술한 歷史書(역사서) <通志(통지)>에 기록된 六書略(륙서략)의 五音(오음)과 七音書(칠음서)와
梵本五十字母品(범본오십자모품)을 비교 분석하고,
실담 상형문자와 비교하여 發音(발음)과 意味(의미)가 일치하는 예문을 들어 漢字(한자)가 중원의 전통문자가 아니라,
동이족이 살던 西域(서역)에서 일어난 制字原理(제자원리)를 模寫(모사)하여 맹글어진 東夷族(동이족)의 文字(문자)임을
確證(확증)하엿스며, 영어로 註釋(주석)하엿다.
이와 같은 歷史的 事實(사실)은 甘肅省(감숙성) 蘭州大學(란주대학)의 生命科學院(생명과학원)의
謝小東(사소동) 敎授(교수)가 硏究(연구)한 사실과 일치된다.
*參考. 中央日報 2007년 2월 16일자, “중국에 한족은 없다.”
예컨대,
*鉢(발). , ba^ra: 승려의 바루. 밥끄릇. monk's food ware.
*智慧(딯). , dhi^: wisdom, intelligence.
*爲(위). , u^hiya: 보살피다. 사랑하다. 遂行(수행)하다. attend, wait upon, take care of, subsist, serve.
*倍達(배달). -, veda-artha: (베다)지혜에 精通(정통)한. 빼여난. well versed in wisdom, excellent, intelligent.
*罷(파). , pa: 직위를 罷(파)하다. 解雇(해고)하다. dismiss, discharge, quit, abandon, vicious, to be quitted.
*告祀(고사). , ghosa: 죽은 영령께 제사지내다. offer a ritual service to the spirit of the dead.
*歿(몰). , mri: die, kill, hunt, destroy.
*仁(어딜 인. ). , ina: wise, intelligent
990-1
<한글은 누가 창제하였는가?>
1443년 12월 한글 창제가 공식화된 시기까지 집현전 학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글 창제의 부당함을 상소한 것도 최만리 등 집현전의 핵심 학사들이었으니, 과연 누가 한글을 만들었단 말인가?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누군가가 세종대왕의 밀지(密旨)를 받아
한글창제 비밀 프로젝트 를 주도했을 것이다. 과연 그가 누구일까?
그리고 숭유억불이 본격화 되던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서적이고,
유교관련 서적은 채 5%가 되지 않는 당혹스러운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월인석보의 첫 머리에 실린 세종의 한글 어지(御旨)가 정확히 108자며,
월인석보 제1권의 페이지 역시 불교의 상징 수인 108쪽이 된 것은 그저 우연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글을 창제한 주역은 집현전 학사들이 아니라
당시의 고승 법주사 복천암의 신미(信眉)대사(1403~1480)였던 것이다.
세조가 즉위 후 천리 길을 행차하여 법주사 복천사까지 찾아가 법문을 청한 고승이며,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한 대학자 혜각존자 신미대사는 누굴까?
학계 일각에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는 논문이 간헐적으로 나온 바 있고,
현재 복천암에 주석 중인 월성 큰스님이 신미대사의 선양작업에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신미대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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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 미스테리를 밝힌 강상원 박사.
강상원 박사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우리말의 뿌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못한 속에서,
한국어는 범어 태초의 연원이며 범어가 동서문명의 연원이라는 사실을 주장해 학계의 눈길을 모은 인물이다.
또한 불경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의 강의 내용을 다루기 전에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신미(信眉)대사의 한글 창제설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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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信眉, 사진)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이고, 속명(俗名)은 수성(守省)으로서
조선초 유불(儒彿)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맏형이기도 하다.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집안 내에서는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다고 내려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불교 승려는 무대 뒤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줄기찬 반대로 인해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단어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신미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으므로
혜각존자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인물이니까 세종 사후에도 세조(世祖)가 불교승려인 신미대사를 만나러 직접 속리산까지 찾아갔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반대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불교의 한가운데에 신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한글 창제 무렵에 간행된 국가적인 번역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24권 분량의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그렇고,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도 그렇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찬불가(讚佛歌)에 해당된다.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쉬운 한글을 만들었으면
‘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했어야지,
왜 하필이면 불경을 번역했을까.
이유는 한글창제의 주역이 신미대사였기 때문이다.
‘월인석보’는 세종의 어지(御旨)가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는 28번과 33번이다.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가 당대 최고의 범어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수온[金守溫, 1409(태종 9)~1481(성종 12)]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문량(文良)이고, 호는 괴애(乖崖)·식우(拭疣) 등이고,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이다.
본관은 영동(永東)으로, 아버지는 증영의정 훈(訓)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으나 곧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다.
1446년 부사직이 되고, 이어 훈련주부·승문원교리·병조정랑을 거쳐 1451년(문종 1) 전농소윤,
이듬해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성균사예로서 문과중시에 2등으로 급제,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에 한성부윤, 이듬해 상주목사, 1464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66년 발영시에 이어 등준시에서 다 장원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을 하사받았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어서 호조판서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책을 한 장씩 뜯어서 들고 다니며 외우다가 다 외우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한다.
신숙주의 『고문선』(古文選)을 빌려서는 한 장씩 뜯어 벽에 발랐다는 일화가 있다.
세종 때 수양대군·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信眉)대사의 동생으로
그 자신도 선학(禪學)에 탐닉하여 불교에 빠졌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불경에 달통하고 제자백가와 육경(六經)에 해박하여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문명을 다투었다.
『치평요람』·『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편찬, 『석가보』(釋迦譜)의 증수(增修), 『명황계감』(明皇誡鑑)·
『금강경』 등의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사서오경의 구결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식우집(拭疣集)』이 남아있다.
성종이 특별히 교서관에 명해서 그 문집의 간행했을 때는 24권에 이르렀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권2와 권4 두 권만이 남아있다.
현행 판본에는 여기에 후손이 수집한 필사본 보유(補遺)가 덧붙여져 있다.
그의 행적은 김우준(金禹濬)의 「식우집제발」(拭疣集題跋)을 참고할 수 있다. ......
이날 특강을 한 강상원 박사의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연구 논문들은
국내보다도 미국 하버드나 코넬, MIT, 영국의 옥스포드 등 유명 대학의 도서관에 오래 전에 들어가 있다.
강 박사는 이들 대학으로부터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감사장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고조선 역사, 72위 국가천황, 싼스크리트어 7음사성원리와 한글 등은 우리 한국인 학자들만 제대로 모르고 있지,
이미 외국의 연구기관에서는 다 꿰차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강 박사의 설명이다.
강상원 박사는 이날 강연 중에 ‘반야’라고 해석되는 ‘프라즈냐(Prajna)’에 대해 설명한다.
범어인 ‘프라즈냐’의 의미를 우리는 ‘지혜’ ‘완전한 지혜’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빠르자나(잖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강 박사에 따르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알아차리는 지혜라는 뜻인
반야=프라즈냐(Prajna)는 우리말의 ‘빠르잖아’의 음사다.
이밖에도 우리말의 ‘∼부터’의 범어 표현은 ‘Bhutia’이고,
우리말 방바닥이란 말에서 ‘∼바닥’의 범어 표현은 ‘pada puti’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어가 범어 태초의 연원이며 범어가 동서문명의 연원’이라는 주장의 근거다.
영어의 게임(game)은 이리 가고 저리 간다는 ‘가메’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이며,
시간을 뜻하는 타임(time)은 우리말의 ‘틈’이 어원이라는 주장이다.
결정을 의미하는 디사이드(decide)는 우리말의 ‘됐어’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거시기’는 영어에서 추측을 의미하는 ‘guess’로 변했으며,
여자(女子, niye-ja)는 ‘니’라는 우리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니’가 문장 앞에서 사용될 때에는 왕을 의미하는 극존칭이었으며,
이것은 여성중심의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모계사회에서 여자는 왕 또는 하느님과 통했으며,
우리가 윗사람과 대화할 때 사용하는 ‘네, 네’(ni, ni)는 ‘왕이여, 왕이여’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대답을 할 때 ‘예, 예’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고 ‘네, 네’가 맞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또 훈민정음에서 韓을 표기할 때,
‘ㅎ’을 ‘ㆅ’, 즉 전탁음(全濁音)을 사용한 것은 ‘ㆅ’=kha, 즉 ‘칸’을 말하는 것이며,
칸은 ‘징기스칸’에서 보듯이 왕을 의미하고, 즉 한국이란, 왕의 나라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므로 한글의 표현은 ‘ㆅ'을 사용한 한글이 맞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이처럼 우리말의 원리가 산스크리트의 뿌리와 닿지 않으면 우리말이 전혀 풀어지지 않는다며,
그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상원 박사는 실담어(범어)도 훈민정음처럼 음소교합문자를 이루며,
또한 평행하거나 상하로 자유로이 교합하여 글짜가 이루어진다며,
영어의 알파벳이나 일본어의 알파벳은 나열하는 특성만 갖고 있을 뿐 교합문자가 못된다고 지적했다.
강 박사는 훈민정음 28자와 실담어, 라틴어는 자모체계가 거의 일치한다며 특히 한자도 중국의 독창적인 문자가 아니라
하나라때 서역에서 유입된 실담어를 모방하여 고안한 한민족의 문자로 해석된다고 주장했다.
강박사는 우리 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만고의 고전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의거' 상고 시대부터 우리민족이 연면(連綿)히 사용해온 전통 토속어인 사투리,
즉 왕족언어의 뿌리를 실담어로 복원하므로써 우리 한민족의 언어가 동서문명의 뿌리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증하였다.
1527년(중종22)당대 한학의 석학 최세진 선생의 저술인 훈몽자회 속에서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전통토속어의 뿌리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한문만을 숭상한 나머지 우리말과 문화, 역사의 뿌리를 외면하면서
방언(方言)이니 사투리라 하여 경멸하여 온갖 문화의 뿌리가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질시와 경멸을 당해도 끈질기게 우리들의 혀 밑에서 은거하면서 말의 뿌리가 보존되여 왔다.
다시말하면 범어가 인도의 고대어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상고(上古)시대의 언어요
오늘날까지 우리 국민의 혀밑에서 나오는 사투리(왕족언어)라는 반증이다.
세계 학계에서는 우리 한민족 언어의 근원인 실담어의 한갈래 범어(梵語), 산스크릿뜨)를
인도 유럽언어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자의 뜻을 주석한 그 전통 토속어가 바로 왕족의 실담어임을 보여주는 예문은 다음과 같다.
수(水 물슈, mrsu:Water)
부(父 아비부, avai:father)
왕(王 님금왕, nimekam:king)
화(花 꽃화, kosi, kosa:flower)
이상의 예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자의 주석은 모두 일만여 년전의 실담어와 일치하며
범어(데바나가리어)와 상응한다는 사실이다.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훈몽자회 는 민족의 뿌리를 찾을 수 있게 저술한 우리민족 최고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동서문명의 뿌리를 찾도록 제시한 찬란한 문화의 횃불이다.
560년전(1443, 세종25년) 세종대왕께서 독창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동국정운 등을 펴내시어
80여년(1527년 중종22)만에 훈몽자회를 편찬하여 훈민정음의 문법을 익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그 속에 서린 민족의 얼을 높이 흠모하고 세종대왕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경배 하면서 '왕손정통언어복원 실담어주석'을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
6. 평 론
동서 철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강상원 박사는 20년전 심오한 불교 교리에 심취되어
법화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 과정에서 범어사전을 참고하는 등 연구를 하던 중
수천년 동안 해독하지 못한 일만년(一萬年) 전의 실담상형문자(悉曇象形文字)를 해독(解讀)해
우리 언어와 사상의 뿌리를 발견하고 확증하여 우리말이 세계 언어중 으뜸으로 최고의 말이며
실담어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국문학자와 인류학자 그리고 철학자들은 정확하게 우리말이 어디서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언어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우리말의 뿌리(연원 淵源)을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가 매우 미흡하였다고
한다. 그런 것을 이번에 끈기 있는 집념으로 한국어는 실담어의 태초의 연원이며
실담어는 동서문명의 연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불경(佛經)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의 발견이라 하겠다.
우리 한글의 뿌리를 찾는 일에서 '훈민정음 28자회 신미대사학회'를 창립하고 ,
한자를 실담어로 음역한 저서 "한자는 동이족문자 주석"을 발간하였고,
세종대왕 창제 훈민정음의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 라는 책을 발간하여 신미대사가 당시 산크리스트어(실담어)를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관여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하여 학회의 지대한 관심을 기울리게 하고 있다.
한국세종한림원 훈민정음 28자회 신미대사학회 명의로 발간한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 저서는 우리말 뿌리,
불교어 실담어 등 동서문명의 연원을 탐구하여 우리 겨레 언어의 뿌리를 찾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저서는 유네스코를 비롯한 미국 하바드, 예일대학교 및 각 연구소 등
세계 유명 대학 도서관과 국내 100여개 대학 도서관에 기증 되었다.
* 북극성(北極星. 폴라리스. 제네시스. 게네시스)
작은 곰자리의 맨 끝이 북극성이다.
북극성은 산스크리트로 마가(Magha)라 하며, 한자로는 파사(婆娑)라 하며 빠사라고 말한다.
한글은 반짝반짝 빛나다의 뜻이다.
경상도 말에 ‘빠삭하다’의 말은, 빛나므로 이미 다 안다는 의미다.(빠삭하게 안다)
북극성을 마고성(麻姑城)이라 하는데 고(姑)의 뜻이 시어미 고로써 할미가 된다.
즉, 마고할미가 북극성란 말이 된다.
북극성은 만물을 관장한다. (북두칠성도 관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북극성까지 가는데 49일이 걸린다고 한다.
고로 49재(齋)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 놓고 비는 모습은 우리의 전통사상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것을 모두 미신으로 취급했다)
몽골반점이란 태반에서 애기가 박차고 나가라고 마고 할미가 애기 엉덩이를 때렸다.
그래서 퍼렇게 멍던 것이다.
7만년전 마고시대는 재물이 넘치는 곳 즉, 풍요로운 시대였다.(에덴동산)
그 시대는 땅에서 우유가 나왔다고 하여 지유(地乳)라 불렀다.
그러나 인구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 지유는 줄어들었고, 서로 땅따먹기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하늘의 진리는 무시하고, 사람들은 점차 악에 물들고 민족의 분열이 시작 되었다.
훗날, 공자님이 나타나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을 회복하자고 부르짖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마고할미라 불리는 마고(麻姑)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단군왕검은 마고의 계보(족보)를 정립하고 제족을 방문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단군조선은 단국(배달)을 계승하였고,
단국은 환국(桓國)을 계승하였으며,
한국은 마고의 나라를 계승하였다.
우리 선조는 주로 江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성을 지어 살았다.
(강강수월래가 여기서 유래된다. 江으로 달려가라는 뜻이다)
서기전 3,500년경부터 시작되는 황하문명은,
단군시대 제후국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의 나라가 이룬 문명을 시작하여
제후국인 염제 신농국(단웅국),
제후국인 황제 헌원국(유웅국),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요, 순, 하, 은, 주나라의 문명이 된다.
고대 요하문명은 서기전 6,500년경부터 시작되어 단군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황하문명을 이은 고대중국의 문화는 물론,
수메르지역과 인도지역에 우리 동이족의 문화 역사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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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동이족 후손이다.
중국의 삼황오제, 공자, 석가모니 부처님도 동이족 후손이다.
수만년 전에는 히말리야 산 부근의 민족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는데, 산스크리트는 왕족이 쓰던 말이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신분계급) 중 제일 높은 크샤트리아((Ksatriya)에서 K가 묵음이 되면 샤트리로 발음된다.
샤트리가 변형되어 사투리로 발음되니 곧, 우리나라의 팔도 사투리다.
고로, 우리의 사투리가 바로 산스크리트요 왕족의 민족임이 증명된다.
우리 동이족이 중국 원주민을 몰아내고 남북 2만리, 동서 5만리의 엄청난 제국을 이룬 위대한 민족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지구의 거의 절반)
한자도 역시 우리 동이족 선조님들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며,
세종대왕님이 한자의 발음을 누구나 알기 쉽게 한글로 만드신 것이다.
영어는 바로 산스트리트에서 빌려온 것이다. 즉 우리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된다.
그래서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한국어를 잘 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한국어를 잘 하려면 당연히 한자를 먼저 알아야 한다.
즉 산스크리트를 표시한 것이 한자요
한자를 표현한 것이 바로 한글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를 알면 우리 한글의 올바른 어원(語源)을 알 수 있다
불교 경전이 산스크리트로 쓰여졌고
이를 한자로 한역되어지는 과정에서 뜻과 소리의 괴리가 이미 발생되었으며
산스크리트를 연구한 고승(신미대사 등)들은
소리나는 대로 음가를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통하여
한자로 변역된 불경의 한자음을 산스크리트 발음으로 다시 되돌려 표기한 것이
동국정운이므로...
그런 이유로 그 당시의 중국 발음과도 다르고 조선(東國)발음과도 다른
이상적인 음가 표기(고대 동이족의 말소리)를 재현시킨 것이라 추정된다
<<동국정운 東國正韻>>
1448년(세종 30)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 등이 세종의 명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편찬/발간 경위
세종의 언어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혼란상태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1447년(세종 29) 편찬이 완성되었고, 이듬해인 1448년 10월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편찬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실록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세종조의 운서편찬사업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종조의 중요한 운서편찬사업으로는
『사성통고(四聲通攷)』·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동국정운』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1444년 2월부터 동시에 착수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그 이듬해 2월 14일에 의사청(議事廳)에 물어
훈민정음으로써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다.
이 『운회』는 원(元)나라의 웅충(熊忠)이 고쳐서 다시 지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뜻하는데,
이 번역본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
『동국정운』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운회』의 번역본을 탈바꿈시킨 것이 『동국정운』일 가능성이 있다.
즉, 『운회』의 반절음을 우리나라 음으로 번역하여 훈민정음으로 표음하고,
훈민정음의 초성 차례에 따라 글자들의 배열을 바꾸어놓은 것이 『동국정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배열 순서는 『동국정운』이 작시(作詩) 위주의 운서가 아니라
심음(審音: 음을 탐구함.) 위주의 운서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비하여 『홍무정운역훈』이나 『사성통고』는 작시용이므로,
세종조의 운서편찬사업이 작시용과 심음용의 이원화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지적 사항
6권 6책. 활자본. 국보 제71호(간송미술관 소장, 권1·권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완질)가 있다.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숙주·최항·성삼문(成三問)·박팽년·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曺變安)·김증(金曾) 등의 9인인데, 이들의 분담업무는 감장(監掌)은 동궁(東宮),
그 보좌로는 진양대군(晉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주무(主務)는 신숙주와 성삼문,
우리나라 한자음의 사정은 최항과 박팽년, 중국음에 대한 자문은 조변안과 김증,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동국정운』은 신숙주가 쓴 서문만이 전해 오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의 두 책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간송문고에 있다.
그뒤 중종 때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의 집안에 전해 오던 6권 6책의 전질이
1972년에 강릉 심교만(沈敎萬)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송문고본은 전 6권 가운데 두 책만이 남아 있으나,
권수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날인되어 있고 제목이 있는 표지도 본래의 것으로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판심제(版心題)는 ‘正韻(정운)’이라고 되어 있다. 활자 중 본문의 한글과 한자 대자(大字)는 목활자(木活字)이고,
소자(小字)와 서문의 대자는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이다.
자체(字體)는 본문 대자가 수양대군의 글씨와 비슷하고, 묵개(墨蓋)의 음각한 글이 안평대군의 글씨와 비슷하나
편찬자의 한 사람인 강희안의 필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건국대학교 소장본은 간송문고본과 같은 인쇄본인데,
선장본(線裝本)을 포배장(包背裝)으로 개장하면서 책의 위와 아래를 약간 절단하였고,
‘선사지기’가 없으며,
제전(題箋) 아래에 차례를 나타내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묵서(墨書)로 가필한 점이 다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동국정운』은 1958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하였고,
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1973년에 영인하였다.
내용
신숙주의 서문에 의하면 『동국정운』의 편찬은 세종이 지시한 4대기본방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기본방침은,
첫째 민간(民間)에 쓰이는 관습을 널리 채택할 것,
둘째 옛날부터 전해 오는 서적을 널리 상고할 것,
셋째 한 글자가 여러 개의 음으로 쓰일 때는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기준으로 할 것,
넷째 옛날부터 전해 오는 협운(協韻 : 어떤 음운의 글자가 때로는 다른 음운과 통용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고려할 것 등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① 91운 23자모의 체계를 세우고,
② 반절(反切) 대신에 훈민정음으로써 표음(表音)하고,
③ ㄷ입성(入聲)은 민간의 발음에 따라 ㄹ로 바꾸되, 입성의 자질을 살리기 위하여 ‘ㅭ’과 같이 표기하였다.
권1의 권두에 신숙주의 ‘동국정운서(東國正韻序)’와 ‘동국정운목록(東國正韻目錄)’이 있고 그 다음에 본문이 있다.
이 본문은 권6에까지 이어지는데, 각 권은 26운목(韻目)의 배열 차례에 따라 나뉘어 있다.
본문은 먼저 운목을 운류별로 표시한 뒤 행을 바꾸어 자모(字母)를 음각(陰刻)으로써 표기하였고,
자모 바로 밑에는 훈민정음으로 음을 표시하였다.
한 자모 아래에는 평성(平聲)·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의 순서로 그 자모에 속하는 한자들을 배열하였다.
각 글자의 뜻은 풀이하지 않았으며, 한 글자가 여러 음을 가질 경우 그 글자 바로 밑에 세주(細註)를 붙였다.
『동국정운』의 편운체계는 신숙주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91운 23자모로 되어 있다.
이 편운체계는 운서의 성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골격이 되는 동시에
당시의 국어 음운체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체계는 당시의 우리나라 한자음을 명확히 구현하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대(宋代) 등운학파(等韻學派)들의 이론체계나 명대(明代) 『홍무정운』의 언어정책을 지나치게 중시한 결과,
다분히 현실과 맞지 않은 인위적인 요소가 작용하게 되었다.
91운의 차례와 내용은 위의 [표 1] 과 같다.
〔표 1] 의 분운(分韻)과 차례는 중국의 어떤 운서와도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것이다.
분운의 유형은 훈민정음의 자질에 따르고, 차례도 훈민정음의 종성과 중성에 따른 것이다.
이 표를 종성과 중성의 자질과 차례에 따라 재구하면 위의 [표 2] 와 같다.
내부의 분운으로서,
·는 ㅡ·ㅣ·ㆎ ·ㅢ를,
ㅚ는 ㅟ·ㆌ를,
ㅐ는 ㅖ·ㅙ·ㆋ를,
ㅗ는 ㅜ·ㅛ·ㅠ를,
ㅏ는 ㅓ·ㅑ·ㅕ·ㅘ·ㅝ·ㆊ를 포함한다.
이것은 15운섭(韻攝)으로 통합할 수 있는데 등운학의 16운섭과 대조하면
아래 [표 3] 과 같다(윗줄은 동국정운, 아랫줄은 16운섭이다.)
성모를 나타내는 기호자(記號字)를 자모(字母)라 한다.
『동국정운』의 자모는 23개로 되어 있는데,
이는 『훈민정음』의 초성 체계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 내역은 아래의 [표 4] 와 같다.
자모자는 『동국정운』에서 실제로 나타낸 음에서 취한 것이다.
따라서 송대 등운학의 자모자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 체계는 등운학의 36자모도에서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 순중음(脣重音)과 순경음(脣輕音),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을 통합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나,
청탁에서 전탁음(全濁音 : ㄲ, ㄸ, ㅃ, ㅆ, ㅉ, ○ 등)을 분리, 독립시킨 것은 당시 국어의 현실음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처럼 청탁음을 분리한 것은 청탁의 대립이 있어야 한다는
등운학의 음운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인위적인 조작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業(ㆁ), 挹(ㆆ)·欲(ㅇ)’의 3개 자모를 분리, 독립시킨 점도 당대의 현실음과 동떨어진 것으로
인위적 조작의 한 단면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동국정운』의 한자음은 주로 불경언해(佛經諺解)에서만 주음(注音)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그 사용이 전면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국정운』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배경이나 음운체계,
그리고 각 자모의 음가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의 성격을 지닌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동국정운》은 중국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에 대해 東國(즉 한국)의 표준적인 운서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지어졌다.
《동국정운》에서 제시된 한자음은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써온 현실 한자음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한자음을 일반적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東國正韻式漢字音)이라 부른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은 현실 한자음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미대사가 당시 산크리스트어(실담어)를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관여하였다
《동국정운》 서문에 따르면 현실 한자음의 ‘잘못’은 아래와 같다.
계모(溪母; [kʰ])의 대부분이 견모(見母; [k])에 들어가 있다.
계모의 일부가 효모(曉母)에 들어가 있다.
탁음이 없다.
성조에서 상성(上聲)과 거성(去聲)이 구별되지 않는다.
입성 중 단모(端母; [t])로 끝나야 할 것이 내모(來母; [l])로 끝난다.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 중순음(重脣音)과 경순음(輕脣音),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이 구별되지 않는다.
체계
동국정운식 한자음 체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으로 나눈 점이다.
이는 중국 음운학에서 한자음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 두 부분으로 나눈 것과는 다르다.
또 한국어 표기와 달리 한자음 표기에는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이 모두 갖춰져 있고
종성이 없는 한자음이 없는 것도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특징 중 하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중국어 중고음(中古音)의 음운 체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하면서도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1297년)나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의 체계,
그리고 현실 한자음의 음형(音形)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모
아음 (牙音)
설음 (舌音)
순음 (脣音)
치음 (齒音)
후음 (喉音)
반설음 (半舌音)
반치음 (半齒音)
전청(全淸) 君 ㄱ k 斗 ㄷ t 彆 ㅂ p 即 ㅈ tɕ 戍 ㅅ ɕ 挹 ㆆ ʔ
차청(次淸) 快 ㅋ kʰ 呑 ㅌ tʰ 漂 ㅍ pʰ 侵 ㅊ tɕʰ 虛 ㅎ h
전탁(全濁) 虯 ㄲ g 覃 ㄸ d 步 ㅃ b 慈 ㅉ dʑ 邪 ㅆ ʑ 洪 ㆅ ɦ
불청불탁(不淸不濁) 業 ㆁ ŋ 那 ㄴ n 彌 ㅁ m 欲 ㅇ ∅ 閭 ㄹ l 穰 ㅿ z
성모(聲母) 체계는 훈민정음의 초성과 같은 23 자모 체계이며 중고음의 삼십육자모(三十六字母) 체계와 다르다.
자모는 중국 음운학에서 쓰이는 자모를 사용하지 않고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자모를 사용한다.
따라서 중국 음운학의 견모(見母)는 《동국정운》에서 군모(君母)가 되며 계모(溪母)는 쾌모(快母)가 된다.
성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전탁음
《동국정운》에서는 전탁(全濁) ‘ㄲ, ㄸ, ㅃ, ㅉ, ㅆ, ㆅ’을 인정하고 있다.
탁음에 관해서는 《동국정운》 서문에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
(한국 말소리에서 청탁의 구별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유독 한자음에서만 탁성이 없다)”라고 있어
한국어 ‘전탁음’은 유성음이 아니라 경음으로 파악했다.
2. ㅋ
계모(溪母; [kʰ])는 ‘쾌’를 제외하고 현실 한자음에서 모두 ‘ㄱ’로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에서는 중고음에 의거해 ‘ㅋ’로 했다.
3. 설두음과 설상음, 중순음과 경순음, 치두음과 정치음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의 구별,
중순음(重脣音)과 경순음(輕脣音)의 구별,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의 구별이 없다.
그렇지만 순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에 기술이 있으며
《홍무정운역훈(光武正韻譯訓)》(1455년)에서는
중순음 ‘ㅂ, ㅍ, ㅃ, ㅁ’과
경순음 ‘ㅸ, ㆄ, ㅹ, ㅱ’,
치두음 ‘ᄼ, ᄽ, ᅎ, ᅔ, ᅏ’과
정치음 ‘ᄾ, ᄿ, ᅐ, ᅕ, ᅑ’이 벌써 사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자모들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ㆁ
유모(喩母; [j]) 3등이 《동국정운》에서 ‘ㆁ’로 나타난다.
“고금운회거요”에서 유모 3등의 반절 상자(反切上字)가 의모(疑母)와 통용되어 있어 《동국정운》도 이를 따른 셈이다.
참고로 아음 ‘ㆁ’의 자형이 ‘ㄱ’에 의거하지 않고 후음 ‘ㅇ’에 의거한 이유가
운서에서 유모(喩母)와 의모(疑母)의 혼동을 반영한 것임은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에
“牙之ㆁ雖舌根閉喉聲氣出鼻, 而其聲與相似, 故韻書疑與喩多相混用, 今亦取象於喉, 而不爲牙音制字之始
(아음 ‘ㆁ’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소리와 공기가 코에서 나오지만 그 소리가 ‘ㅇ’과 비슷하므로
운서에서는 의모와 유모가 많이 혼용되니 지금 역시 후음에서 모양을 만들고 아음은 문자를 만드는 시작으로
하지 않았다)’처럼 기술된 바와 같다.
운모
운모(韻母)는 중성과 종성으로 이루어진다.
중성에는 다음 소리들이 쓰인다.
기본 자모 ㆍʌ ㅡ ɯ ㅣ i ㅗo ㅏ a ㅜ u ㅓ ə ㅛ jo ㅑ ja ㅠ ju ㅕ jə (je)
2자 합용(二字合用)(1) ㆎ ʌj ㅢ ɯj ㅚ oj ㅐ aj ㅟ uj ㅔ əj (ej) ㅒ jaj ㆌ juj (ɥi) ㅖ jəj (jej)
2자 합용(二字合用)(2) ㅘ oa (wa) ㅝ uə (wə) ㆊ jujə (ɥe)
3자 합용(三字合用) ㅙ oaj (waj) ㅞ uəj (wej) ㆋ jujəj (ɥej)
종성에는 다음 소리들이 쓰인다.
평상거성(平上去聲) ㆁ ŋ ㄴ n ㅁ m ㅇ ∅ ㅱ mʷ
입성(入聲) ㄱ k ㅭ lʔ ㅂ p
중성과 종성을 합친 운모는 26개 운목(韻目), 91개 운으로 나뉜다.
26개 운목은 아래와 같다. 입성은 운목만 제시하고 수록운은 생략했다.
운목 수록운 운목 수록운
1 搄肯亙亟 ɯŋ, iŋ, ʌjŋ 14 甘感紺閤 am
2 觥礦横虢 ojŋ 15 箝檢劒劫 əm, jəm
3 肱○○國 ujŋ 16 高杲誥 ow,jow
4 公拱貢穀 oŋ, joŋ 17 鳩九救 uw,juw
5 江講絳覺 aŋ, jaŋ, oaŋ 18 貲紫恣 ʌ', i', ʌi', ɯi'
6 弓重䛪匊 uŋ, juŋ 19 傀隗儈 oj'
7 京景敬隔 jəŋ,jujəŋ 20 佳解蓋 aj', oaj', oj'
8 根懇艮訖 ʌn, ɯn, in 21 嬀軌媿 uj', juj'
9 昆袞睔骨 on 22 雞啓罽 jəj', jujəj'
10 干笴旰葛 an, oan 23 孤古顧 o'
11 君攟攈屈 un, jun 24 歌哿箇 a', ja', oa'
12 鞬寋建訐 ən, jən, uən, jujən 25 拘矩屨 u', ju'
13 簪㾕譖戢 ʌm, ɯm, im 26 居擧據 ə', jə'
운모는 종성의 오음(五音) 차례 ‘ㆁ(ㄱ), ㄴ(ㅭ), ㅁ(ㅂ), ㅱ, ㅇ’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운서와 순서가 크게 다르다.
운목은 원칙적으로 “고금운회거요”에 나타나는 각 운의 첫 글자이다.
운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운의 통합, 분리
예를 들어
고금운회거요의 강운(江韻)과 양운(陽韻)은
동국정운에서 강운(江韻)으로 통합되고
반대로 고금운회거요의 경운(庚韻), 청운(青韻), 증운(蒸韻)은
동국정운에서 긍운(搄韻), 굉운(觥韻), 굉운(肱韻), 경운(京韻)으로 세분화되는 등
운의 통합, 분리가 있다.
2. 합구 개음
합구 개음(合口介音)은 현실 한자음에서 아음, 치음, 후음에만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는 설음에도 나타난다.
3. 중성 ㆊ, ㆋ
중성 중에 ‘ㆊ[jujə], ㆋ[jujəi]’는 주모음(主母音)이 두 개 있는데
실제로는 이들을 1음절로 발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추측된다.
4. 종성 ‘ㅇ, ㅱ’
모음으로 끝나는 운 중에
과섭(果攝), 가섭(假攝), 해섭(蟹攝), 지섭(止攝), 우섭(遇攝)은 종성 ‘ㅇ’을 가지며
운미(韻尾)에 [-u]가 있는 유섭(流攝), 효섭(效攝)은 종성 ‘ㅱ’을 가진다.
‘ㅇ’은 후음이며 ‘ㅱ’은 순음 밑에 ‘ㅇ’을 연서(連書)한 순경음으로 둘다 자음에 속하는데,
실제 문헌에서는 뒤에 붙는 어미가 ‘-를’ 등 모음에 붙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운들은 모음으로 끝나는 운으로 취급되었다.
5. 종성 ‘ㅭ’
중고음의 입성 [t]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이영보래(以影補來) ‘ㅭ’으로 나타난다.
현실 한자음은 ‘ㄹ’[l]로 나타나지만, 원래 입성인 이 소리가 폐쇄음인데도
현실 한자음인 ‘ㄹ’로는 폐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입성의 폐쇄음적 특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 ‘ㄹ’에 ‘ㆆ’을 덧붙인 것이다.
입성 [t]를 ‘ㅭ’로 옮기는 것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해에
“半舌之ㄹ, 當用於諺, 而不可用文. 如入聲之彆字, 終聲當用ㄷ.
(반설음 ‘ㄹ’은 국어에만 써야 할 것이며 한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
입성 ‘彆’자 등은 종성에 ‘ㄷ’을 써야 한다.)”라고 하며
당시 학자 사이에서 견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사용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한자음의 규범(東國의 문자 발음법)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보았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한글 문헌은 모두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주음(注音)되었다.
그러나 현실 한자음을 반영하지 않은 이 한자음은 급속히 쓰이지 않게 되어
《동국정운》 반포 28년 후에 간행된
《오대진언(五大眞言)》에서는 홍무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육조법보단경 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년)에서는 현실 한자음에 따라 주음되고
16세기에 이르러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아예 쓰이지 않게 되었다.
*짱깨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의 검소한 모습을 비하하여 掌櫃에서 온 말로 금고를 꽉 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국어로 가게 주인이라는 말인 '장궤(掌櫃)'가 짜장면과 발음이 비슷한 것에서 유래된 말로,
주로 중국음식점 관련 종사자나 음식을 지칭하던 것이 중국인 일반을 지칭하는 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짱꼴라라는 것은 중국인의 중국어 발음인 쭝궈런
짱꼴라는 본래 중국인을 가리키는 ‘쭝꾸오루〔中國兒〕’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점잖게 가리킬 때 부르고 있는 호칭이다.
월인석보의 첫 머리에 실린 세종의 한글 어지(御旨)가 정확히 108자며,
월인석보 제1권의 페이지 역시 불교의 상징 수인 108쪽이 된 것은 그저 우연일까.
990-2
990-3
신미(信眉)대사
신미(信眉, 사진)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이고, 속명(俗名)은 수성(守省)으로서
조선초 유불(儒彿)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맏형이기도 하다.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쉬운 한글을 만들었으면
‘논어(論語)’‘맹자(孟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서 백성들이 읽게 했어야지, 왜 하필이면 불경을 번역했을까.
‘월인석보’는 세종의 어지(御旨)가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는 28번과 33번이다.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세종 때 수양대군·안평대군
‘반야’라고 해석되는 ‘프라즈냐(Prajna)’
범어인 ‘프라즈냐’의 의미를 우리는 ‘지혜’ ‘완전한 지혜’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말의 ‘빠르자나(잖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야=프라즈냐(Prajna)는 우리말의 ‘빠르잖아’의 음사다.
영어의 게임(game)은 이리 가고 저리 간다는 ‘가메’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이며,
시간을 뜻하는 타임(time)은 우리말의 ‘틈’이 어원이라는 주장이다.
결정을 의미하는 디사이드(decide)는 우리말의 ‘됐어’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거시기’는 영어에서 추측을 의미하는 ‘guess’로 변했으며,
여자(女子, niye-ja)는 ‘니’라는 우리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니’가 문장 앞에서 사용될 때에는 왕을 의미하는 극존칭이었으며,
이것은 여성중심의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수(水 물슈, mrsu:Water)
부(父 아비부, avai:father)
왕(王 님금왕, nimekam:king)
화(花 꽃화, kosi, kosa:flower)
* 북극성(北極星. 폴라리스. 제네시스. 게네시스)
작은 곰자리의 맨 끝이 북극성이다.
북극성은 산스크리트로 마가(Magha)라 하며, 한자로는 파사(婆娑)라 하며 빠사라고 말한다.
한글은 반짝반짝 빛나다의 뜻이다.
경상도 말에 ‘빠삭하다’의 말은, 빛나므로 이미 다 안다는 의미다.(빠삭하게 안다)
북극성을 마고성(麻姑城)이라 하는데 고(姑)의 뜻이 시어미 고로써 할미가 된다.
즉, 마고할미가 북극성란 말이 된다.
북극성은 만물을 관장한다. (북두칠성도 관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북극성까지 가는데 49일이 걸린다고 한다.
고로 49재(齋)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 놓고 비는 모습은 우리의 전통사상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것을 모두 미신으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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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누가 창제하였는가?>
<한글은 누가 창제하였는가? 신미대사>동국정운(東國正韻)-강상원 박사
<한글은 누가 창제하였는가?> 1443년 12월 한글 창제가 공식화된 시기까지 집현전 학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한글 창제의 부당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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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 -
[출처] 990. 한자는 동이족문자 (註釋)|작성자 집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