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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장 12-17절 버가모교회에 주시는 말씀-분별력이 없는 교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편지를 보내시는 버가모라고 하는 도시는 에베소에서는 북방 160km, 서머나에서는 북방 110km 위치한 도시로써 아시아 지방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큰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곳은 로마와 그리스인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중심지로서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제우스(zeus)를 비롯하여 승리자 아테네,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등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황제숭배까지 성행하는 곳으로 오늘날 사우디나 인도처럼 각지에서 오는 순례객들로 언제나 번잡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버가모에는 다른 어느 도시들보다 먼저 카이사르인 황제의 신전이 세워졌고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를 주(Lord)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Lord)라고 불렀기에 자연히 핍박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 속하여 진리를 고수하고 전하면서 살 때 비웃거나 탄압을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버가모교회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편지를 읽어보면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열심은 있지만 그 방향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좋은 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고, 또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빈야드교회를 일으켰던 존 윔버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누가복음을 강해하면서 치유사역을 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한 여성도의 방문을 시작으로 치유사역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시작하여 많은 눈에 보이는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방언의 역사나 방언통역, 예언의 역사같은 일들이 병고침의 은사와 더불어 일어난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 주장은 그렇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교회가 조심할 것은 사탄도 뒤따라 하나님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에게서 눈에 보이는 은사로 방향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이 빈야드교회에서 파생해서 나간 다른 교회들에게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행하는 중에 짐승울음소리가 일어나고, 성령웃음이라고 해서 바닥에 데굴데굴 둥글면서 배를 잡고 웃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베니 힌 목사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는 교회 천장에서 금가루가 뿌려진다고 하고, 어떤 날은 하늘에서 다이아몬드가 떨어진다는 등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최면과 조작입니다.
한국교회도 한 때 방언을 받아야 성령을 받은 것이며,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방언을 받으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의 목적과 성령의 침례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오해에서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인 정립이 잘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써 온 세상의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구원하시는 일을 교회를 통해 이루시며 그리고 또 다시 온 세상의 심판자로써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적으로 신앙을 정립하고 신앙생활의 기초와 믿음의 집을 세우는 데 있어서 성경을 균형있게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실 것입니다. 바르게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성경을 균형있게 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별하고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도 역시 균형있게 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많이 읽는 다고해서 다 그렇게 성경을 균형있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있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는 데 은사나, 표적이나, 귀신이나,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방법을 찾거나 하는 등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그 일에만 집중하면서 성경을 본다면,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수많은 것을 놓치고 자기가 관심을 갖는 분야에만 두드러지는 이상한 형태의 신앙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분야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서 성공을 할 수도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놓치고 편협된 신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런 편협된 신앙으로 이끌고 가지는 않으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균형잡힌 신앙으로 예수님의 몸인 여러분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교만에 빠지기 쉽고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른 권고를 해줘도 새겨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우 심각합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나, 신사도 운동가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바로 성경을 그런 방향으로 읽고 해석하는 경향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성경을 치우친 시각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데로 빠져버린 사람과 단체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역시 편협된 시각이 그들이 이단이 되게 했습니다. 버가모교회에 역시 이단은 아니지만 바로 그런 편협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버가모교회가 한 때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킨 성도들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을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버가모 지역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버가모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기에 힘든 곳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상숭배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갖가지 각종 우상숭배와 황제 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악한 곳에서 참되고 바른 신앙을 가진 안디바라고 하는 지도자가 그 도시에서 죽임을 당할 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를 살았던 터툴리안이라는 교회의, 지도자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안디바는 커다란 놋쇠 솥에 넣고 밑에 불을 피워서 구워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박해가 잔인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런 박해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며 온갖 어려움을 견뎌낸 버가모교회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교회입니까?
버가모교회의 이름 뜻을 보면 ‘결혼’ 혹은 ‘연합’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을 보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하고 침례요한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와 같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예수님이 아닌 또 다른 자와 연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불륜’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적인 용어는 ‘음행’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버가모교회는 충성스러운 증인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할 때도 믿음을 지킨 교회입니다.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마치 삼손이 드릴라의 부드러움에 넘어간 것처럼 부드러운 육체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본문 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강한 핍박에는 능히 견뎌 이기는 교회가 부드러운 여인의 음란한 향기에 취해서 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태풍에도 잘 견딘 나무가 전혀 표시도 안나는 작은 벌레들에 의해 썩어 그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과 같이, 또 강한 비바람에도 잘 견디던 집이 작은 쥐들에 의해 구멍이 나고 점점 썩어 들어가는 것과 같이 그들의 신앙은 니골라당의 음란한 교훈에 잡아 먹혔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쪽은 두드러지게 강하지만 다른 한 쪽은 맥없이 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니골라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이 당파는 교회 안에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로인해 사탄의 권좌 앞에서도 당당하게 믿음을 지켰던 교회가 경건을 잃고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니골라당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음란한 우상숭배의 교훈에 맥없이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입에서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 나오는 예수님께서 잘 한 것과 잘못한 것을 정확하게 잘라 내십니다. 예수님은 버가모교회에게 정확히 잘라내야 할 두 가지 잘못된 교훈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황제숭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했던 교회가 니골라라고 하는 사람과 그를 좇는 추종자들의 육체를 자극하는 이방종교의 제사법을 가지고 교회를 유혹하자 그 우상숭배와 음행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생겼고 급기야는 온 교회가 그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로인해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바람이 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짝하여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고 그들이 행하는 음행을 행하는 사람과 교회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5장 11-13절을 보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순서를 볼 때 버가모 교회는 이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밖에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음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를 구원하실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해 그들과의 사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죄에 동참한다면 그들은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이 그 죄에 빠지고 신앙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음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 대하여 관용하지 말고 내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양날의 이한 검의 판결은 그들을 내쫓음으로써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가모교회는 그들을 내쫓지 않음으로 점점 더 그들에게 흡수되었습니다. 경건과 거룩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버가모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를 우상숭배와 음행, 이 두 가지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기는 사람에 대해서도 역시 두 가지의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첫 번째는 감취었던 만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드러내시지 않고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심으로 교회가 경건하게 세워져가며, 또한 받은 자들만 알 수 있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지역에는 검은 돌들이 많아 큰 건물을 건축할 때 검은 돌들로 짓는 집들이 많은데 그 돌들 사이에 희고 커다란 명패를 그 검은 돌 사이에 글자를 새겨서 박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돌에는 그 집 주인의 신분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도 역시 이 흰돌이 쓰였는데 무죄를 선언할 때 흰 돌을 내주면서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버가모교회를 의롭다고 인을 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흰 돌의 비유를 통해서 박해를 견뎌 이기고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의 미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는 예수님과 여러분들만 알고 있는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값진 하얀 진주를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수님과 여러분들만 아는 신비한 비밀이 이기는 교회에 전해진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면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번에 날선 검이 무엇인지 들으셨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하고 말씀하십니다. 속에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셔서 그 죄를 징치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분별이 왜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강한 능력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박해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다가오는 은밀한 죄의 유혹 역시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물리치고 순결을 지키는 교회는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듣고 읽고 연구하며 묵상하고 암송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긴 성도는 균형있게 성장합니다. 그로인해 사탄의 다양한 공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물리칠 능력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무장시키시고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공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사탄의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달콤한 유혹과 신비한 기적들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중요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이며 하늘의 창고에 감추어두었던 신령한 만나와 같은 말씀과 흰 돌과 같이 값진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8절을 통하여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예수님과의 둘 만의 깊은 교제 속에서 감취었던 말씀들을 공개하시고 또한 예수님이 주시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하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로부터 오는 이 은혜가 여러분들을 복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