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어떤 것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바그너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신예술에 모든 것을 마쳤는데, 이것이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사회적인 탄압, 재정적인 곤궁, 심지어는 정치적인 탄압까지 받아가며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을 도망자, 망명자로 살았다. 오페라 공연을 앞두고는 극장 앞 광장에서 지지자들과 반대파 수십 명이 한판 주먹다짐을 벌여 경찰이 마차 수십 대를 동원해 이 ‘예술 패싸움(?)’을 뜯어말리고 해산한 일까지 있었다.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에서 바그너가 받았던 조롱과 멸시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 대신 당대 파리지엥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지금은 악보로만 남아 구시대의 화석처럼 여겨질 뿐이다.
바그너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목마름만큼이나, 혁신이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폭력적인 거부반응을 자주 그리고 직접적으로 목격하고 체험해 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오페라 <탄호이저>는 어둡고 암울하다. 비너스의 동산에서 새로운 사랑의 세계를 경험한 시인 탄호이저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인 바트부르크의 궁정으로 돌아온다. 거기엔 동료 예술가들이 있다. 단단한 회원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던 주류 예술가 집단은 그저 추상적인 언어와 현란한 비유로만 가득 찬 사랑의 시가를 노래한다(구 예술). 이에 발끈한 탄호이저가 ‘친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에는 알맹이가 없다’며 자신이 비너스의 동산에서 직접 체험했던 육욕의 세계를 대담한 화성과 끈적거리는 리듬으로 노래(신 예술)한다. 좌중은 경악하고, 동료들은 분노한다. 비난과 멸시, 경악과 공포의 반응이 쏟아지고, 급기야 탄호이저는 집단에서 퇴출되어 살해위협까지 당하는 신세에 내몰린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또한 신구 예술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탄호이저>만큼 암울하고 절망적이지는 않다. 이미 장년에 접어든 바그너가 느긋한 심정으로 써내려간 따뜻한 느낌의 작품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입지를 굳힌 바그너의 여유가 묻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대립하고 날카롭게 대치하던 신예술과 구예술이 여기서는 아름답게 화합하는 가운데,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황홀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주류를 형성한 ‘구(舊) 예술계’(정교한 규칙으로 세련되게 다듬어져 있지만, 동시에 신선함은 없다)의 최고 대가인 한스 작스는 신(新)예술(아직은 거칠고 조악하지만, 그 반면 신선한 에너지가 넘친다)을 대표하는 발터 폰 슈톨칭의 젊은 열정에 주목한다. 그는 에파와 야반도주를 하려는 발터를 불러 세워 놓고는 본선대회가 열리는 날 아침까지 열심히 개인지도를 해주며 발터를 돕는다. 결국 발터는 천부의 자질과 예민한 시인의 감수성으로 무장한 탁월한 노래 위에, 한스 작스의 지도를 받아 더욱 깊이있게 다듬어진 정교한 예술언어를 가미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시가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바로 제3막의 본선무대, 페그니츠 강변에서 열리는 성 요한 축제 당일의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그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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