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드로에게 나타난 환상(행 10:9-23)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열화와 같습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 탕자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누가 말릴 수가 있습니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문을 걸어둘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탕자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방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 2:13-16에서 이 마음을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는 십자가를 통해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 택한 백성과 그렇치 못한 백성의 사이를 구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로 한 형제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로마인을 하나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화평이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을 대표해서 경건한 군인인 고넬료를 택하셨습니다. 유대인을 대표해서는 사도 베드로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만나게 하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내가 저들과 하나되게 하시고 저들과 저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베소서에도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 중에 하나는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성찬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입니다.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역사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바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자녀와 부모가 하나되어야 됩니다. 지금 정치권도 저렇게 서로 나누어 대결할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하고 하나되어야 민족통일을 말할 수 있지 지금처럼 격렬하게 투쟁하고 대립하고서야 어찌 민족통일 꿈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하나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되게 하옵소서가 전부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어떻게 고넬료가 사도 베드로를 만났습니까?
9-11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하나님은 먼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 그래서 종을 보내서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만 환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아주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보여준 환상은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가 제 육시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제 6시면 지금의 12시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 집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지금 우리 옥상처럼 되어 있어서 올라가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가 규칙적인 기도시간입니다. 베드로가 그 시간에 기도하러 갔다가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자 했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먹을 것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첫째 제자로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능력이 있는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고 죽은 사람도 살렸습니다. 환란과 핍박가운데서도 교회를 지키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는 그런 능력의 사람 이전에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요한과 더불어 제 9시에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 한 번에 삼천명이 돌아왔고 기적이 일어났지만 사실 그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후 3시에 한참 일할 시간에 하나님과 약속한 그 시간에 성전에까지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12시에는 지붕에 올라가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러가지 능력과 기사를 많이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쳤고,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강풍이 불어 죽게되었을 때 말씀 한마디로 잠잠케 하셨고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왔습니다.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런 위대한 기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예수님의 사역 이면에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기도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는 광야에 가셔서 40일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기도 하셨고,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큰 위기에 부딪혔을 때라고한다면 십자가를 앞에 두셨을 때일 것입니다. 절박한 순간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보아도 그의 활동 뒷면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1,2,3차 전도여행을 했습니다만 행 16장에 보면 기도처를 찾으려 가다가 한 여자를 만납니다. 루디아를 만납니다. 그가 빌립보교회를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기도처소를 찾다가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가서도 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의 규례대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회당이 있으면 성경을 가르칠 만한 공간이 있으면 그는 누구든지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삼 주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성경을 가르치다가 생겨난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들은 언제나 내면생활에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을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과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상과 꿈을 가진 사람과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을 합니다. 이 말을 뒤바꾸면 아무리 열심이 있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하나님이 동역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기도생활을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말한다면 기도에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내 신앙의 성공과 실패를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말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성경을 읽고 있어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넬료의 종들이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가 바로 베드로의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언제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연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내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그 성경을 통하여, QT를 하고 있을 때, 새벽에 말씀을 읽고 있을 때에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말씀이 내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가 내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나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이 설교에서 해답을 얻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QT를 하다가, 설교말씀을 듣다가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하여 내 영혼에 들어와서 내 심령을 뒤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더러운 귀신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내 병이 치료되기도 할 줄 믿습니다. 그 말씀이 내 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말씀신앙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잘 안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경을 볼려고 무진 애쓰다가 출애굽기에 모세가 120세로되 그 눈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이 눈에 확 들어 오더랍니다. 그리고는 눈이 확 뜨여졌답니다. 깜짝 놀랐답니다. 그러더니 흐렸던 눈이 그렇게 환하게 돌아왔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친히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기도 하십니다. 어느 날 어떤 순간에 성령의 설명할 수 없는 톡특한 감동을 받습니다. 성령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특이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환경을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되던 것이 안됩니다. 앞길이 막힌 것같이 답답합니다. 사고가 났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요, 거기에 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연히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환경과 역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서 동시에 체크가 됩니다. 내가 성경을 읽다가 얻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환경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고넬료에게만 주셨다면 베드로가 얼마나 당황이 되었겠습니까? 베드로가 그냥 아무 예고도 없이 고넬료에게 찾아가서 너한테 세례주라고 했다 그러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도 주시고 베드로에게도 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할 때 본문에 나타난 두 가지 원칙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언제나 양쪽에 다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 그 계시가 반드시 다른 쪽의 응답을 통하여 역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불완전한 이성과 우리의 불완전한 느낌을 보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본 환상은 무엇이었습니까? 11-13절,“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그가 시장하여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귀를 맨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이상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 안에 있는 짐승들은 이상하게도 성경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부정한 짐승들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잡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짐승인데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자기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말씀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거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내 생각과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꺽지 아니하면 절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14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규정한 부정한 짐승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레위기 11장을 살펴볼 때 거룩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한 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베드로에게 이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그것은 여기 환상속에 보이는 부정한 짐승들은 이방인을 뜻합니다.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방인입니다., 거룩한 짐승을 유대인을 의미한다면 더러운 부정한 짐승은 이방인을 의미했습니다. 15,16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두번째 소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깨끗케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케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끗케 했는데 네가 왜 못먹는다고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세번씩이나 이런 일이 반복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둘이 하나가 되어서 막힌 담을 허시고 휘장을 찢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짐승처럼 취급하고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17-18절,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번이나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깨끗하게 했는데 왜 네가 더럽다고 하느냐? 그래도 베드로가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전통의 한계입니다.
예를 들면 제사를 드려야 되느냐 아니냐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수 천년동안 해왔던 전통이기 때문에, 이 전통을 따라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느냐 하는 데는 베드로처럼 심각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한참 고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종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집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놀랐습니까?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노크를 합니다. 베드로는 비로서 성령님의 음성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19절,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무 앞서지 말고 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안에 계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다립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러면 깨닫게 해주십니다. 확신을 주십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앞에 순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20-22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그런 음성을 안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들리는 것이 문제지요. 나도 듣고 싶은데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안들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이 얼마나 엎드려서 기도를 했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까? 그런 시간은 소홀이 하고, 성경 읽는 것은 소홀이 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엎드리고 기도하면 반드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믿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고 신뢰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고 기다리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몇번이나 보셨습니까? 기도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리고 나서도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할 만큼 여러분이 기도했고 여러분이 성경을 읽었습니까?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앞에 모든 전통과 모든 문화와 모든 선입관을 포기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환상을 보았을 때는 포기를 못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가 포기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때로 어려운 일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절박한 일은 항상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여리고는 항상 우리 앞에 있기 마련입니다. 부자에게 없는 고민이 가난한 자에게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없는 고민이 부자에게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없는 지도자에게는 있습니다. 또 지도자에게 없는 고민이 직원들에게는 있습니다.
나만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불가능 앞에 서 있는 것이고,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고 한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불가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그 불가능 앞에 섰을 때 당황하고 몸부림칩니다. 당신은 삼개월 밖에 못삽니다. 당신에게 내일 큰일이 일어납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해결합니까? 문제는 오래살 건 짧게 살건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염려하지 마십시요? 안되는 것 같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으나 일곱번째 돌 때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다 되는 것 같으나 마지막 순간에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안에 있고 하나님의 뜻안에 순종하고 있다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성공해도 주를 위하여, 실패해도 주를 위하여,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아픔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잃어버린 탕자와 같은 고넬료를 찾고 있습니다. 준비된 영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처럼 전통을 따지고 내 지식과 내 경험을 앞세워 거절하고 머뭇거립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든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시간을 더 많이 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