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영 시인의 시집 『그 길이 불편하다』(푸른사상 시선 189). 2024년 5월 20일 간행.
조혜영 시인은 자신의 급식 일을 토대로 노동 현장을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현시대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노동해방을 향한 시인의 노래는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 시인 소개
1965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고, 제9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천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인천작가회의 회원이다. 시집으로 『검지에 핀 꽃』 『봄에 덧나다』가 있다.
■ 시인의 말
내가 거리에서 광장에서 함께할 때는 사람도 깃발도 희망이었다.
지금은 그리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닥친다.
내가 서 있는 곳과 가야 할 길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때론 버겁다.
따지고 보면 자주 혼란스럽고 버거웠다.
웃으면서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세월이 흘렀다
슬픔 속에서 잔잔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보듬고 한 시절 가고 싶다.
■ 시집 속으로
그 길이 불편하다
조혜영
나를 불안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길은 저만치 멀어져간다
끝내 한 걸음도 딛지 못한 발바닥에
달라붙는 진흙 덩이가
내 한숨과 비겁의 흔적이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길은 다시 저만치 멀어져간다
한 걸음만 함께 걸어요
그 보폭에 당신도 장단 맞춰주세요
깃발을 따라오세요
길 위에서 이어지는 발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올 즈음
하루의 긴 노동이 끝나고
나른해지는 저녁이 불편하다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이 불편하다
그 길을 걸으며 손을 흔드는
훤히 아는 사람들의 손짓이
불편하다
■ 추천의 글 중에서
조혜영의 시집은 세상을 축소시켜놓은 삶의 현장이다. 현장은 구호나 선동이 아니다. 기억이다. 그의 시는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결이 다른 현장이다. 현장에는 ‘청소 노동자’ ‘배달 노동자’ ‘멈추지 않은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새벽을 가르는 사이렌’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된 집’ ‘아버지의 노래’가 살아 숨 쉰다. 시는 그들을 불러내어 위로한다. 기교도 수사도 없다. 감정의 과잉 없이 투박한 묘사가 더 아프게 온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자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무기고인 급식실’에서 급식 노동 30년째. 아줌마, 이모님, 어머니로 불리는 분분한 호칭. 급식 노동자의 정당한 이름 ‘조리 실무사’를 얻고자 30년을 싸우는 동안 산재보험도 안 되는 수술이 수차례.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건/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급식 노동자」). ‘산재 판정을 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과 대결한 시간이 30년 노동의 시간보다 길고 아팠다.’ 밥하는 노동자를 하대하는 사회의 인식. 견뎌야 하는 건 모두 개인의 몫이었다. 알은체했지만 몰랐던 급식 노동환경과 급식 노동자의 실태가 그려졌다. 「급식 일지」 연작은 치열한 일상에 익살이 고루 스며들어 울림이 아주 크다.
― 김사이(시인)
■ 작품 세계
1990년대를 거치며 우리 사회의 산업구조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소득 수준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을 무렵,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먹고사는 일 너머로 계속 유혹했다. 자신 안의 욕망에 더욱 솔직해지라는 달콤한 유혹. 사람들은 점점 그 유혹에 빠져들었다. 노동해방을 꿈꾸기보단 신분 상승을 꿈꿨으며, 노동의 가치보다는, 더 높은 효율과 더 많은 임금을 숭상했다. 물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여기에 넘어갔다. 사회의 절대다수가 욕망의 세계에 진입한 이상, 변혁의 중심축은 더 이상 노동해방이 아니었으며, “붉은 깃발은 다 어디”(「전염병 시대」)론가 사라졌다. 깃발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동안 우리는 IMF 사태를 겪었으며, 노동에 대한 인식과 노동의 가치는 달라졌다. 나는 세상이 점점 달라질 즈음에 태어나 과거의 유물을 바라보듯 노동과 노동해방에 대해 배웠다. 그러니 노동해방은 내게 언제나 과거의 것, 삶의 뒷전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조혜영은 노동해방에 대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노동해방과 노동의 가치가 과거와는 달라졌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혜영은 묻는다. 그것이 달라졌다면, 지금 시대의 노동과 노동해방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찾기 위해 조혜영은 자신이 해왔던 노동운동에 대해 회상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을 노스텔지어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거를 자신의 현재에,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이렇게 묻는다.
― 진기환(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