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교내를 걷다가 인하대학교 국토대장정 대원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현수막을 보자마자 국토대장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의 여름방학 계획이 생겼다. 대학생의 방학은 중요한 시기라며 누군가는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스펙을 쌓기 위해서 자격증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크게 와닿지 않아 방학에 대한 아무런 계획을 생각해놓지 않은 나는 아주 적절한 방학 계획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으로 방학에 무엇을 해야할지 계획이 생겨 많이 들떠있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국토대장정 관련 블로그글을 찾아보며 새벽에 잠이 들었다. 국토대장정을 떠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첫째, 부모님께 허락받기, 둘째, 서류 접수하기, 셋째, 국토대장정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적금깨기 였다.
이 계획은 첫 단계부터 막혔다. 언니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로 자라나 부모님께는 아직 어린 막내딸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다. 아마 그 당시에는 아직 어린 막내딸이 덩치만한 가방을 메고 걸으며 아무데서나 씻고 아무데서나 자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서류를 작성해놓고 마감일까지 무작정 조르기 시작했다. 아침식사 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국토대장정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절대 ‘그래 다녀와라’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시절 여름방학에 무엇을 하고 보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국토대장정을 가지 않았다고 해서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자격증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각자의 여름방학을 보내는 친구들의 모습을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던 것 같다. 속상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는 성격이 아니라 금세 잊어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1년 뒤 다시 학교에는 국토대장정 대원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또다시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부모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왠지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서류를 먼저 제출해버렸다. 서류제출 후에 면접도 보고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을 가지고 19박 20일 동안 신을 신발을 사러갔다. 이 모든 것들은 부모님께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는 정말 말씀드려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을 때 부모님께 다시 한번 허락을 구했다. 이미 서류 제출을 했고, 떠나는 시기가 정해졌다고 말씀드렸다. 막무가내여서 화를 내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허락을 해주셨다. 사실 흔쾌히 허락을 해주신 건 아니였다. 마지막 짐을 싸는 순간까지도 꼭 가야하는 것인지 물어보시며 걱정을 하셨다. 부모님을 더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19박 20일 동안 힘들다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간절히 바라던 국토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19박 20일 동안 정말 걷기만 했지만 하루에 적게는 30km부터 많게는 40km까지 땅 만보고 걸었다. 고개를 들면 햇빛이 따가워 고개를 푹 숙이고 5kg정도 되는 가방을 메고 밥차가 보일 때까지 걷기만 했다. 새끼발톱이 빠지고 발바닥은 물집 투성이 되었다. 어느 날은 발목에 물이 차서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든 적도 있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했다. 쉬는 시간엔 가방을 베개 삼아 바닥에 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공중화장실에서 5분 안에 차가운 물로 샤워와 빨래를 모두 끝내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엔 비를 맞으며 빗물이 가득담긴 점식식사를 한 적도 있었다. 먹고 싶은 걸 맘껏 먹을 수 없었고, 마시고 싶은 걸 맘껏 마실 수도 없었다.
억지로라도 울지 않으려 했고,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 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몸은 지쳐있었지만 마음이 지치진 않았기 때문에 웃으며 연락을 드릴 수 있었다. 힘든 경험을 하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같이 걸었던 팀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 몸이 힘들어 예민해질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지친 팀원을 위해 서로 짐을 나눠 들어주고 노래도 부르며 잊지 못할 시간들을 보냈다. 20일 동안 함께 한 팀원들과 인하대학교 정문을 통과했던 그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또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번째로 국토대장정에 떠나겠다고 다짐했을 때 평소처럼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단계별로 처리해나가려 했다면 나는 값진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친구들처럼 방학동안 자격증을 따고, 토익을 공부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남은 ‘스펙’은 없었지만 나에게 있어 3학년 여름방학은 절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