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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수필의 개념과 특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높다고 좋은 산은 아니다. 낮아도 산신령이 살고 있다면, 좋은 산이리라. 깊다고 좋은 바다가 아니다. 낮아도 용이 살고 있다면 충분히 좋은 바다이리라.
I. 열며
본격수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 개념을 정리하는 것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본격수필의 개념은 본격수필의 특성을 가장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격수필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본격수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정의의 방법 중에서 가장 엄격한 것은 분류적 정의다. 분류적 정의는 정의되는 말, 정의되는 말의 상위 개념, 정의되는 말의 동위 개념과 특성을 포함한다. 수필의 개념을 분류적 정의에 따라 정의하면,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내려진 어떤 수필의 정의보다 정의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본고의 목적은 본격수필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수필에 대한 기존 개념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본격수필의 개념이 성립되는 과정과 본격수필이 주는 기능을 살핌으로써 본격수필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II. 펼치며
신라시대 설총이 쓴 한문수필 <화왕계>」를 효시로 하는 수필은 지금껏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1930년대 발표된 수필 이론에 의거해서, 모호하게 정의되어져온 수필에 대한 개념으로 수필은 문학이면서 문학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제대로 된 이론체계가 서 있지 않은 탓이었다. 수필을 일컫는 개념부터 잘못되어 있었으니, 이론이 제대로 정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흔히 인용되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와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는, 본격수필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하며, 수필을 다른 종류의 문학과 구별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런 정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잘못 쓰고, 잘못 쓰면서도 누구나 쉽게 쓰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정의를 내린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금과 옥조처럼 여겨온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면. 본격수필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란 한문의 '수'와 '필'을 번역한 것으로 뜻이 불분명한 정의다. 정의는, 정의되는 말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이해되도록 진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정의는 비유로 표현되지 않아야 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는 의미가 불분명한 비유적 정의다. 이러한 정의는 본격수필에 속하는 작품과 본격수필에 속하지 않는 작품을 구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격수필을 써본 사람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관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이라면, 이것을 붓 가는 대로 써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흔히 한국 문학자들은 위와 같은 정의를 내리면서,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중국 남송 시대 홍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뜻은 문학의 한 종류를 뜻하는 수필의 뜻과 같지 않다. 홍매는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나, 이 말을 문학의 한 종류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를 살펴야 하는데,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 사람들은 '형식'이 무엇을 뜻하며,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며, 형식이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어로 구성되는 작품에서 형식이라는 말은 작품 쓰기의 규칙을 가리키는 수가 있다. 평시조는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이 한 연을 이룬다. 평시조를 쓰는 사람은 이 규칙에 따라서 작품을 짓는다. 그래서 평시조의 형식은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을 한 연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식적인 설명문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공식적 설명문 쓰기의 규칙으로서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말은 수필에는 쓰기 규칙이 없으므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 중에는 일정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것이 많고, 현대 소설도 대부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창작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대시나 현대소설 중에는 형식이 자유로운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수필을 현대시나 현대소설과 뚜렷하게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른 편으로 잘 쓰여진 수필은 작가가 설정한 규칙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발전하도록 구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수필을 형식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수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도 수필과 수필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애시당초 분명치 못한 정의 자체가 우리 수필을 오도해 온 결과로 오늘날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격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거나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반드시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글은 붓이 쓰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사상과 느낀 감정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써지는 것이다. 그 의도를 표현함에 있어 수필은 일정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쓸 수 있으며, 그 형식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격과 품격에 의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인 주제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내용을 작품 속의 화자와 일치하는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나 제재 중심의 문학”으로 정의된다. 본격수필은 이러한 수필의 개념에 ‘본격’이라는 에피쎄트를 붙인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고급수필’이다. 본격수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필에서의 주제는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본격수필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었으니, 이번에는 본격수필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본격수필의 특징에 대한 이해 없이 본격수필을 창작한다는 것은 사업가가 시장 조사 등등의 사전 지식 없이 사업에 착수하려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시나 소설과 달리 본격수필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본격수필은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인간치료제다. 감동을 생명으로 삼고 있는 수필이 작가의 인품과 융화되어 문학성을 가질 때 한 편의 시보다 한 권의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본격수필만이 갖는 매력이다. 본격수필은 경험하지 않고서 체하는 ‘체함’의 문학이 아니라 가치 있는 ‘체험’의 문학이다. ‘본격수필은 허구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어느 문학보다 감동의 전달력이 강한 문학이라는 데 이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답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할 수 있다는 이 자연스러운 지각,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면서 미각적 감각에서 오는 진 선 미 이런 것들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존재를 인정받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생명은 원색의 덩어리다. 반짝반짝 광채가 나고 살아 움직이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 눈동자는 검고 푸른 빛나는 색깔을 지니고 있으며 머리카락 또한 흑색이나 황금색의 싱싱하고 윤기 흐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식어가고 있을 때 그 광채를, 그 색채를 점점 잃어간다. 나무를 불태우면 회색빛으로 남듯이 본격수필은 이러한 인간의 식어 가는 생명을, 잃어 가는 정신을 보충하여 주는 끝없는 인생의 이정표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운데는 헝클어진 많은 사상들이 널려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은 희비가 엇갈리며 고뇌하고 번민하면서 우리 조상이 살아간 그 길을 살아간다. 경우에 따라 이 말을 듣고 저 말을 들으면서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자기 충돌을 빚으면서 수많은 날들을 고뇌의 사슬에 매일 때도 있다. 본격수필은 이러한 인생의 진로를 빠져나가도록 안식을 주는 문학이다. 물론 소설이나 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은 간편한 것을 좋아한다. 씻어서 만들어 먹는 식품보다는 물만 붓고 끓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을 찾고, 오랜 시간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소설보다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텔레비전을 선호한다. 더욱이 시는 독자를 외면한 지 이미 오래다.
문단의 어느 대가는 <시는 너무나 독자가 없다. 그건 시대 감정을 붙잡지 못한 탓이다.> <자기가 써서 자기가 읽는 게 시다.>라고 시의 독자가 없음을 통탄했다. 그것은 시가 어렵다는 것이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의 유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처럼 오늘의 시는 새가 노래하듯이 물이 흐르듯이 노래 불리어지지 않는다. 옛날의 시는 한 줄만 건드려도 감흥을 일으키고 촌부가 읽어도 그 맛에 저절로 엉덩이 가락이 나왔다. 이러한 시를 대신할 문학이 바로 본격수필이다. 현대 문명이 가져온 사상의 혼란과 상상력의 약탈에 현대시를 빼앗겼다면 본격수필은 그것으로써 독자를 빼앗아 와야 하는 것이다. 본격수필은 짧으면서도 난해하지 않다. 그것은 이치를 이야기하며 사리의 핵심을 찌르는 빈틈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며 오늘이 내일이 아니다. 시간마다 변하고 날마다 달라진다. 그 속에 살아가자니 인간이 기계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수필가는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지루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추억하게 된다. 때문에 오늘과 내일의 시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만나는 것에는 언제나 설렘이 따른다. 본격수필의 감동이 주는 파장은 오래토록 영향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시대의 애절하면서도 간절한 인간 희구의 노래를 듣길 원한다. 이러한 욕구에 화답할 수 있는 문학이 바로 본격수필이라는 것이다. 본격수필은 우회와 왕복의 난해성보다는 솔직함과 유창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메마른 지성에 더욱 높은 차원의 정서를 부여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의 문학이 본격수필이다. 그러므로 본격수필은 미적 차원이 높은 문학적 예술로 더욱 승화될 것이다. 리처드의 말을 빌리면, 예술로서의 수필은 독자에게 생활에 대한 지배력, 통찰력, 생활의 가능성에 대한 식별별을 증진시킨다고 하겠다.
위의 특성 외에도 오늘날까지 여러 학자들이 제시해 온 본격수필의 특성을 요약하면, 대개 ‘형식의 자유성’ ‘개성의 노출성’ ‘제재의 다양성’ ‘문체의 품위성’ ‘작문의 간결성’ ‘매체의 산문성’ ‘유머와 위트성’ ‘토의의 비평성’ ‘주제의 가치성’ 등을 들 수 있다. 형식의 자유성은 수필이 다른 장르에 비해 형식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말이고, 개성의 모출성은 작가가 자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이라는 점에서 하는 말이며, 제재의 다양성은 모든 소재가 다 제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성으로 인정된다고 하겠다. 또한 문체의 품위성은 수필은 작가의 인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문학이기 때문에 품격이 있는 문체를 위해서는 먼저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겠고, 작문의 간결성은 수필의 길이나 성격으로 봐서 간결체 문장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며, 매체의 산문성은 수필이 15매 내외의 짧은 산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유머와 위트성은 짧은 산문 속에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든지 그 무슨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머나 위트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며, 토의의 비평성이나 주제의 가치성은 수필이 비평적 요소라든지, 인생의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가치가 주어지므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이다.
III. 나가며
이상에서 본격수필의 개념과 특성을 정의와 기능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본격수필은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으로서, 위에서 살핀 특성을 밑거름으로 하여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다. ‘산신령이 사는’ 산, ‘용이 사는’ 바다 같은 것을 생각하면 본격수필과 수필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문학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본격수필이 안식의 문학이라는 것은 본격수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삶의 정도라는 것이다. 수필가의 사명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 그 길을 밝혀주는 것이다. 꽃도 생태에 따라 향기를 달리하듯 수필 또한 어느 특성에 치중했느냐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다"라고 말한 괴테의 말은 드킨시가 말한 '힘의 문학'이 갖는 감동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감동은 쾌락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그것은 갈등의 해소요, 욕구의 실현이다. 이와 같은 감동을 우리는 본격수필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본격수필을 읽는 이유는 그 속에서 고상한 쾌락을 만나기 때문이다. 수필가가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서 참신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본격수필의 향기와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본격수필의 특성을 본질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수필을 고급문학으로 발전시켜 가는 일이다. 수필이 문학적 미에 의한 문학적 진리에의 작업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무용의 공염불이요, 불모의 사막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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