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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5편 19절-21절: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19절: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창세 전의 하나님은 아직도 죽지 않으셨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 분은 우리가 진리생명의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 들어주신다고 하는 이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시는데, 그러면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의 내용이 뭘까? 어떤 기도가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일까?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뭘 어떻게 해 주시는 거냐? ‘하나님 아버지, 이룰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거냐? 우리로 하여금 이룰구원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먼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셔서 사람이나 사건이나 환경을 만날 때마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이래야 되겠구나. 저래야 되겠구나’ 하면서 하나님 뜻에 적중하게 나갈 때 이룰구원이 되어진다. 이걸 이뤄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배가 고픕니다’ 라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밥이 뚝 떨어지는 거냐? 그게 아니라 그 배를 채워 주시기 위해서는 인간 자기에게 어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건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의 역사가 아닌 인간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을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내 몸 밖에서 되어지는 눈이 오던 비가 오던, 어떤 쓰라린 환경이던 이런 것은 내가 어떻게 해 달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여하히 이기고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신앙에 수입을 보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이게 구원의 기도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공부를 잘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듣고 자기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만 학교에 들어오게 해 주시느냐? 그게 아니라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은 다른 학생들보다 실력을 높게 하려면 열심히 공부를 하고, 배운 것을 까먹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의 실력이 월등히 올라가는 거다. 이걸 종교적 용어를 붙인다면 올라가는 게 구원이다. 실력적 구원, 지혜적 구원, 지식적 구원, 환경을 다스리는 구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구구절절이 진리 이치적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는 거고, 교회의 인도자들도 이런 면을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써먹는데 있어서는 목숨을 내대는 거다. 아무리 옳은 것을 깨달았을지라도 자기의 자연생명이 무서워서 가재처럼 엉덩이부터 디밀고 기어 들어가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없다. 가재는 굴 속으로 들어갈 때 항상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들어간다.
이룰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즉 지식 면이나, 지혜 면이나, 선 면이나, 사랑 면이나, 거룩 면이나, 진실 면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를 하라. 그러면 이런 기도를 하면 그런 것들이 하늘에 있다가 내려오는 거냐? 그 답이 성경에 있다. 기도를 했으면 성경을 보고 깨달아서 깨달은 대로 실천 실행을 하면 된다. 알고 보면 못 깨달으면 못 깨닫는 것만큼 자기는 그만큼 축소가 되고, 많이 깨닫는 것만큼 자기는 모든 면에서 확장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늘 성경을 읽어야 되겠느냐, 장롱 위에 올려놔야 되겠느냐?
성경은 안 읽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응답이 오는 게 아니다. 성경 속에는 내가 이뤄야 할 구원의 도리와 이치가 들어있다. 여기서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자기에게 채워지는 걸 말한다. 그 다음에 써먹는 것은 자기 할 탓이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거다. 말씀은 안 보고 기도만 하면 응답해 주신다? 이건 아니다. 성경에서 어긋난 거다. 성경을 한 이치라도 깨닫기 위한 기도를 해 봤느냐? 그렇게 해서 깨달았느냐? 깨달은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된 거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기도를 해서 무슨 사건이 이루어졌네, 집을 마련해 줬네. 자동차를 샀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시시한 게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을 사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산다. 이치가 물질은 물질로 되는 거다. 그래서 집을 사려고 할 때 하나님께 집을 한 채 달라고 하면 그 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돈이 있어야 집을 살 수 있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돈을 아껴서 써야 하고, 돈이 헛으로 나가지 않게 지혜롭게 살아야 하고, 부지런히 일을 해야 돈이 모이지는 거다. 이건 없이 하나님께 집 한 채를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맨날 카드나 긁는다면 언제 집을 사느냐? 이런 사람의 기도는 안 들어주신다.
부자가 되고 싶으냐? 돈을 달라고 하지 말고 돈이 나가는 구멍을 막아라. 그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면 된다. 아무리 홍수처럼 내려오는 물이라도 저수지의 둑이 터지면 그 물은 모이지 않는다. 반면에 방울방울 모이는 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저수지를 채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법칙을 거스리지 않는다. 거스릴 때는 따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도의 구원에 당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경우에만 이적 기사를 행하는 거다. 인간 내 편에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볼 때 지금 하나님께서 이적 기사를 보이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이적 기사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하신다.
자기가 일부러 지붕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나, 안 받아주나 보자’ 라고 하면서 뛰어내리면 하나님께서 이적 기사로 푹신한 구름을 보내서 받아주는 거냐? 이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다. 이런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 진리의 성도들이 매사를 이치적으로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당신이 알아서 구원에 필요한 사건 환경을 주시는 거지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룰구원을 이루고 싶으니 나에게 큰 사건을 주십시오’ 라고 한다고 해서 큰 사건을 주는 게 아니다. 이룰구원은 어떤 큰 사건을 통해서만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다 있다. 없는 곳이 없다.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이러면 미신이 돼버린다.
태고 적부터 대적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우리의 이룰구원에 관한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반대로 악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보응하신 것을 우리는 신구약 시대에 눈으로 보여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또 말씀대로 되어질 것도 믿는다.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처럼 세상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역사를 해 나가신다는 것이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의 한 구석에 자기가 살고 있고, 자기가 동참하고 있는 거다.
창세 이후 마지막 때까지 시대마다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하는데 이 안에는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고, 지금 이 시대에도 낳고 죽고 낳고 죽고 하는 가운데 성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자기도 박혀서 가고 있는 거다. 이걸 느끼느냐? 각자의 위치에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대국적인 역사가 흘러가고 있는데, 이 와중에 자기의 정신이나 사건이나 환경 가운데서 배우고 깨닫는 것에 따라 자기가 그만큼 만들어져 가는 거다. 그냥은 아니다.
자기 주위에서나 먼 곳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이 술을 사 먹은 사람이 술에 취해서 차에 치어 죽었다고 하면 술을 만들어서 판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고 아무 생각이 없겠느냐? 죽은 사람을 보고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이 사는 것은 전부가 연관이 되어있다. 안 되는 게 없다.
20절: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신앙 면에서의 ‘배반’이란 진리의 길을 가다가 이 진리의 길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 진리 길을 가다가 비진리로 가는 것이 배반이다. 삼상24:26을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다윗에게 약속을 해 놓고도 사울이 이 약속을 또 어겼다. 일반적으로는 쌍방이 화목을 했는데도 한 쪽의 사람이 뒤로 가서는 화목을 한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헐뜯는 것이 배반이다. 우리는 이런 일반적인 차원만 알지 말고, 또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만 알지 말고 신앙사상 면의 배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처음 볼 때 우선 외모 외형을 본다. 그 다음에 사귀다 보면 상대의 속을 알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호감이 가서 사겼는데 사귀다 보니 ‘아, 이 사람은 사귈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에는 정이 안 들더니 갈수록 정이 더 드는 사람이 있다.
신앙사상 면의 배반은 마귀의 수단 방법인데, 마귀는 교회 안의 거짓 종을 붙잡고 육신 면에, 생활 면에 듣기 좋도록 말을 한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육이 좋도록 말을 해 주니까 이 말을 참말로 알아듣고 아가페 사랑으로 알고 이 말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참 종이라고 하면서 이런 종과 화목을 잘 한다. 육신에 좋도록 말을 해 주니까 육신적으로 화목을 잘 한다. 이처럼 육신적인 것을 가지고 거짓 종과 세상 속화된 교인들이 화합하고 재미있게 돌아갈 때 그 교인들이 뒤로 가서는 그 종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겠느냐? 좋게 말을 하겠느냐?
마귀의 수단 방법이 성도의 육을 위하는 척 하면서 영적인 면을 쫄딱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발람의 수법도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발락의 요구를 거절함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위하는 것 같지만 뒤로 돌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청년들에게 미녀작전을 써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해서 청년들을 죽게 했다. 마귀의 이런 수법을 알아라.
만일 여기 섰는 목사가 성경구절을 대며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라고 하고, 육신에 관한 것, 세상에 관한 것을 자랑을 해서 성도로 하여금 이 교훈을 따르게 한다면 이 성도들은 어느 면이 망하느냐? 영적인 면이 쫄딱 망한다. 그러니 이런 목사는 누가 보낸 거냐?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참 종이냐, 세상 왕 발람이 보낸 거냐? 그 배후에 마귀가 버티고 있는 거다.
21절: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사람들에게는 속 따로 말 따로 인 게 있다. 자기에게 유익되게 하려고 상대를 위하는 척 하면서 손해를 주는 게 있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잘 알지 못해서 번번이 속는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잘 속는 이유는 자기 마음 속에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어디 가서 한 탕이라도 해서 큰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이번에 왕창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건이 있으니 나와 한 탕 안 할래’ 라고 하면 귀가 번쩍한다. 그러나 ‘한 탕’ 하는 여기에는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들어있을 수도 있다. 이건 말은 듣기 좋게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큰 전쟁을 하려는 거다.
전쟁이란 큰 싸움을 말하고, 전쟁은 사람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하는 거다. 한두 명만 죽이려는 게 아니라 한 나라의 전체를 죽이고 그 나라를 차지하려는 것이 전쟁이다. 또한 전쟁이란 아예 씨를 없애버리려는 거고, 정복을 해서 차지하려는 거다. 그래서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라고 표현을 하는 거다. 즉 사람의 마음을 살살 녹여서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거다. 이런 말에 속는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속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들어있는 거다.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왜 칼을 뽑았을까? 죽일 자를 찾았으니까 죽이기 위해서 칼을 뽑는 거다. 다시 말하면 지목을 했으니까 그 자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든 거다. 그러니까 칼집에 들어있는 칼보다 뽑힌 칼은 그 느낌성이 더 섬듯한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어느 교회가 진리로 든든히 서려고 노력을 한다면 이 교회는 사단 마귀가 전쟁을 하려고 하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한 개인의 성도가 진리 자체화로 바로 서려고 한다면 마귀는 이 성도를 죽이려고 한다. 마귀는 이런 교회, 이런 성도를 죽이려고 칼을 뽑아드는 거다. 그래서 진리로 살고자 하는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에게는 싸울 대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노리고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진리성도들에게 육적 비진리적 교훈을 하거나, 영적 기능과 지능을 죽이고, 영능의 실력을 죽이고, 진리 실상화로 되는 영적 성장 면을 죽여 들어가는 교훈은 마귀가 붙잡고 쓰는 칼들이요 악한 영들의 역사다. 그러니까 거짓 종들은 마귀가 성도를 죽이려고 들고 있는 칼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이런 면으로 말을 하고 저런 면으로 말을 하고, 그리고 여기에 따라 나오는 모습도 다 다른데,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의 여러 가지 성격 성질을 말해주는 거다. 그래서 성경 어디에서는 마귀라고 했다가, 어디에서는 사단이라고 했다가, 어디에서는 악령이라고 했다가, 어디에서는 뱀이라고 했다가, 어디에서는 용이라고 하는 거다. 이는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때와 장소와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각도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