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국화빵
송학 김시종
국화는 한 나라의 상징으로 품종이 다양하여 꽃의 빛깔이나 모양도 여러 형태로 가을의 대표적인 꽃이라 한다. 국화빵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옛이야기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땅에 마땅히 먹을 것은 없다 보니 밀가루를 물에 풀어 국화꽃 모양의 판에 밀가루 물을 붓고 그 속에 팥소를 넣어 구운 빵이 국화빵이다.
우리나라는 동족 간에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6· 25 동란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할 때 대구 시내 모든 초등학교는 군 병력이 주둔했다. 학교 운동장은 징집 및 신병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모든 교실은 국군 장병에게 제공하고 어린 학생은 나무 그늘이나 잔디밭이며 기와 굴을 찾아 공부했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저녁을 먹고 백구 마당에 가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피아간에 동쪽 밤하늘을 붉게 물 드리는 광경을 수없이 보았다. 북괴 정예부대는 남반부를 적화 통일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할 때였다.
대구역을 폭격하기 위해 쏜 대포알이 신암동 논바닥에 떨어졌다. 대구에 주둔했든 수도도 부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한 조병욱 박사는 대구가 인민군에 함락되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니 대구를 사수해야 한다고 하셨다. 조 박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구를 지켜야 한다는 굳은 집념으로 1사단장 백선엽 대령, 미군과 학도 의용군 또는 보국대로 징용된 대구 시민과 더불어 낙동강 교두보 사수에 최선을 다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시기에 유학산 고지를 탈환하고 빼앗기는 숨 막히는 전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고, 전우의 시체는 구릉을 만들었으며 계곡의 물은 핏물로 가득했다. 53일간 치열한 공방전은 세계 전사에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투는 계속되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괴군 총사령관 김책은 인민군 정예부대 4개 사단 병력으로 총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최후의 교두보인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다. 대구 시민도 누구 할 것 없이 피난 보따리에 미숫가루를 넣어 어깨에 메고 수성교 다리를 건너 청도 방면으로 피난 행렬이 늘비했다. 다행히도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낙동강 줄기를 따라 융단 폭격으로 인민군 정예부대 4개 사단이 괴멸되다 십이 초토화 되고 말았다.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교두보가 대구를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은 민관군의 합동 작전 성공이었다.
그러므로 더글러스 맥아들(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나,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1951년 해임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괴군의 보급로가 차단됨으로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다행히 대구 시민도 피난길을 멈추고 귀가할 수 있었다. 전시라 집집이 방공호를 파 두었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가족들의 일념이 강했다.
10월 1일 유엔군과 국군이 38 도선을 돌파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구신천 변에는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당시 식량은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미국에서 주는 밀가루로 손국수나 수제비가 유일한 식자재였다. 혹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운 밀가루 떡이 식자재를 대신하기도 했다. 그래도 형편이 나은 집 아이들은 국화 빵으로 간식거리로 요기를 때우는 일도 있었다.
당시 10환이면 국화빵을 몇 개 살 수 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육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 국화빵은 오직 추억 속에 가물거릴 뿐이다. 그 당시는 국화빵 인기가 대단하였다. 간식거리가 없다 보니 밀가루 냄새가 나는 국화빵이 그렇게도 맛이 좋았던 기억이 새삼스럽기도 하다.
지금은 길거리 노점상에게 붕어빵으로 길목을 내어 주고 있으나, 중앙 통 농협 옆 골목 입구에는 아직도 중년의 여인이 향수를 느끼게 하는 “추억의 국화빵”이란 간판을 세우고 빵을 굽고 있다. 어쩌다가 미도 다방으로 가는 길에 그 옛날을 회상하며 국화빵을 사 들고 길을 걸으면서 맛있게 먹을 때가 간혹 있다. 눈물 젖은 국화빵은 배고프고 추운 날 호호 불던 그 시절은 그래도 인간의 마음도 순박하고 정이 많았던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련한 심기의 발동인지 모른다.
첫댓글 松 鶴 金 時 宗님! 추억의 옛 생각이 떠오릅니다. 論山에서 靜 巖.
그렇지요. 67년 전에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송학.
ㅎㅎ 추억에 국화빵 정말로 먹고 싶어도 돈이 없던 그시절이 생각납니다. 그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가끔 사먹어 봅니다.
지금도 맛있습니다. 추억에 국화빵~~그립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 당시 배가 고파도 간식꺼리는 없다 보니
밀가루 냄세 나는 국화빵이 그렇게도 맛이 좋았지요.
방문과 댓글 감 합니다. 송학.
감사합니다.
감했습니다.
고맙고요. 송학.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