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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진리의 빛
편 집 부
인간은 왜 신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왜 신은 인간과의 접촉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는가?
인간의 세계에는 아직도 신(神)들의 활동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는 결과 속에 있는 일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세계에 많은 잘못들을 존재하게 했고 그 피해 역시 적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들에 대한 진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먼저 신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일들과 인간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간들이 신(神)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가?
생명의 세계를 벗어나서 의식체들 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신의 세계'라고 말하고, 그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체들을 '신(神)'이라고 말한다.
의식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신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4가지의 차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신들일수록 생명의 세계에 있는 인간과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접촉해 왔던 신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의 세계에 나타나는 신이라는 대상을 두고 몇 가지의 용어를 혼용(混用)하여
생명체를 벗어난 의식체-영체(靈體)를 두고 신·영혼·신령·성령·악령·귀신·잡신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한 가지의 같은 대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간혹 어떤 부류들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신은
특정한 대상의 신이라고 내세우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을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명의 활동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의식체(意識體)들 중에서 자신 속에 애착이나 한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는 영체들은 생명의 세계를 떠난 후에도 자기 속에 있는 문제에 붙잡혀서
계속 인간의 세계에 머물게 되고 인간에게 접촉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접촉을 하게 되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대체로
그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이상한 말들을 하거나 인간이 신을 섬겨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을 괴롭히거나 몸에 고통을 주는 등 여러 형태를 통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리려고 하며, 인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가진 애착이나 한을 푸는 일을 대신하도록 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신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불행한 일이며 자신들의 미래를
망치게 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
인간의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신들은 왜 인간을 통하여 자신 속의 일들을 해결하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신들의 세계를 존재하게 하고 있는 영체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며
어떻게 해서 있게 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영체는 행위의 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된 것이며 자연 속의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나
생명체에 존재하는 것과같은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 나타들은 인간의 몸으로부터 나온
영체이고 극히 일부의 것들은 오랜 시간을 통해 활동할 수 있었던 대상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영체들이 왜 인간의 의식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인가?
영체가 생명을 떠나서 장시간이 지나도록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세계에 남아서 인간과 접촉
을 시도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영체들은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영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자신의 생명활동 속에 있었던 일들에
의해서 생기게 된 것들이며, 한 번 자신에게 존재하게 된 것들은 자체 속에서 끝없이 활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신이 그 문제들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생명체는 활동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게 된 결과를 자신 속에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활동으로 있게 되는 일의
결정체를 자신의 영체 속에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 결정체에 의해서 끝없이 같은 활동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런 일을 두고 업(業)이라고 말한다.
업이 많고, 업이 큰 인간이 죽었을 때는 그 영체가 부활을 하거나 또는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는
일이 불가능하므로 영체는 그대로 인간의 세계에 남게 되어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던
일들을 계속하려고 한다.
신(神)의 세계에는 4가지의 차원이 있고 인간이 죽으면 그 영체는 삶 속의 활동에 따라 4가지의 차원으로
각각 가게 되는데, 높은 차원의 세계일 수록 자신 속에 업의 활동이 매우 적거나 없어야 갈 수 있게 되며,
자신 속에 큰 애착이나 한이 없는 영체들은 윤회를 통해서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 속에 애착과 한이 커서 인간 세계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영체들은
인간의 세계에 그대로 머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죽어서도 인간의 세계에 머무르는 영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이러한 영체들 중의
일부는 인간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체들은 인간과 접촉을 하기 위해서 제각기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일단 인간과 접촉이 성사되면
자신이 접촉한 대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위한 시도를 한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자신이 접촉한
인간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여 영체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신들의 대부분은 이제까지 설명한 것과 같거나 유사한 형태의
영체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신의 영체로 인해
자신에게 미치게 되는 영향을 아는 일이다.
실제적으로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신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붙잡혀있으며 특히 종교를 찾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신을 받아들이고 신에게 붙들려서 그들의 의도대로 조종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진정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이 하고 있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확인해보지도 않은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현상계의 근원은 있는 일과 있게 되는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일은 법칙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체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현상계의 근원과 법칙 속의 일들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런 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자신이나 세상의 앞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지금까지 인간 세계에 나타났던 신들이 인간에게 축복을 줄 수 있었다면 그 근거로서 인간
사회에 세상의 진리적인 부분이 이미 밝혀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것도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 동안 인간들이 접했다는 신들은 현상계의 일이나
진리 속에 있던 일들에 대해서 모르는 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인간 세계에서 신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평가하고 대우하는 척도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질문이 있었다.
"신은 인간의 삶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대답은 이렇다.
"수학의 문제는 공식을 통해서 답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문제를 정확히 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좋지 않는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있는 일이 우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은 있는 일의 진실을 앎으로서 자기 속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신과 접하고 있는 자들에
의하여 또 다른 사람들의 의식에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인들이 신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의식 속에 있던 일을 투시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 있게 되는 길흉화복을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신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신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하게 된다면 그 사람도 신의 조종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신에 의지하고 신의 조종에 따르게 되면 현실의 일을 무시하게 되는 때가 많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해도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
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왜 자신이 신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을 접하고 조종을 받게 되었을 때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번 신에게 붙잡힌 자는 누구도 그 신의 조종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인간의 세계가 보아 온 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 신에 대한 확인이 어렵고 불가능했던 것은 인간 세계에서 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신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이 될 때까지는 그 사람과 신에 대한 경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신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는 일이 어떻게 해서 있게 된다는
진리적인 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믿음만을 강요할 뿐이다.
악마의 영체(惡靈)를 가진 신의 사주를 받고 있는 자에 의해서 신에게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받고 그대로 행한다면 사람들마다
악마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인간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신들이란 대부분이 인간의 몸으로 살았을 때
의지가 매우 부실했던 자나, 탐욕과 애착이 컸던 자나, 풀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죽어서
그 의식체가 인간의 세계를 떠도는 것인데 이러한 영체들이 인간 세계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던 사회에서는 인간과 신의 접촉이 크게 성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부정했고 신에게 있던 일에 사람들의 일을 의탁하려는 풍조가 만연했다.
세상의 일들이 잘되고 잘못되는 것은 인간과 접한 신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의식이
세상의 일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잘 행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성과를 얻을 수도 있고 그
결과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들이나 신들 속에 인간을 축복할 수 있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인간 사회에 그 가르침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신을 접하고 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신의 말들이 현실의 일들과 같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할 것이며, 인간 사회에 필요한 정보나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가르침을 말해야 한다.
그럴 듯한 말과 듣기 좋은 소리, 있지도 않는 이야기와 확인할 수 없는 말들은 인간 세계에서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참된 삶의 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좋은 가르침이란 있는 일의 진실을 밝혀서 좋고 나쁜 결과를 있게 하는 과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좋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인간들의 삶에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 성인들이 나타나서 인간들을 깨우치려 했던 이유는 인간들이 있는 일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있는 일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먼저 확인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하나의 원칙에 의해서 해답을 갖고 있고 이 해답은 있는 일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그것에 연결된 문제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며 어떤 문제라도 원칙으로 확인하면 그
해답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이로운 일보다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만들게 되는데 왜 인간 사회는 신을 숭배해왔으며
신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고 알고 있는가.
모든 신들이 인간에게 피해만을 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 머무르는 신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무지를 깨우치지
못하여 자신 속에 있던 일들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
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신들은 인간의 세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계통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남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이런
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진실을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이적(異蹟)을 보였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계통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적을 행한다는 자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상한
일들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관(器官)들과 그 기관들의 활동에 의해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을 신이 인간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인간 사회에 왜 병원이 필요한
것이며, 왜 인간이 원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생명을 잃는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에게 실제로 이적이 일어난 사례가 있었다면 그것은 신에 의한 고의적인 장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동차의 기관과 그 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자동차를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자동차의 한 부분에 의도적인 장애(障碍)를 만들어 놓으면 그 자동차는 운행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애를 없애고 원래대로 해놓으면 정상적인 운행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신이 어떤 사람과 접촉하여 육체의 한 기관에 고의적으로 장애를 만들어서 그 사람에게
이상(異常) 증상을 일으켰다가
다시 원래대로 해놓으면 이상 증상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이적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신을 내세워서 인간으로 하여금 신과 가깝게 하고 현실의 있는 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있다.
예수를 내세우는 종교가 인간들에게 축복을 주고자 한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데 그 종교는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자신을 구원받고 또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세상 속에 있던 일을 통해서 확인해보면 '하느님' 그 자체가 세상의 어떤 일에도 조금의 영향력도 끼친 예가 없다.
종교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왔다.'고 하지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써 밝혀진 것은 아직까지 아무 것도 없는 실정이다.
법률에 의해 판결하는 재판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사안(査案)은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종교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근거로써 기록을 내세우고 어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같은 기록을 통해서 간단하게 사실 확인을 해보면 된다.
기록에 의하면 아기(예수)를 낳은 장소에는 산모와 한 남자가 있었다. 산모와 남자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산모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게 된 것은 남자와 아직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처녀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의 신분으로 산모가 되어서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아기가 하느님의
자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지금도 우리 나라에는 하느님의 자식들이 수없이 잉태되고 있으며 산부인과의
의학 기술이 없다면 수 없는 하느님의 자식들이 탄생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한 사실여부는 있는 일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가 세상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예수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자신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인간들이 실제로 중요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건 사람의 아들이건 간에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일이 자신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예수가 인간의 세계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고 양심이 큰 좋은 사람이었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들 앞에 나섰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수가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세상의 원칙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자신 속에 있던 일로 인해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을 구할 수 없다.'
'나'라는 대상과 '자신'이라는 대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것은 한 가지의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히 일해서 음식을 충분히 사서 먹게 되면 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통하지 않으면 자신을 구할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있는 원칙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삶은 자신의 뜻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나 자신이 공사장에 가서 하루를 일하면 몇 만원을 벌 것이고, 나 자신이 하기 싫어서 하지 않으면 몇
만원을 못 벌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내가 일하러 가고 안가고, 나를 굶고 배부르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뜻이다.
내가 열심 배가 부를 것이고, 내가 일하지 않고 돈이 부족해서 충분히 사 먹지 못하면
내 배가 고픈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전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모두 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통하지 않고 자신을 구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세계에는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가르침이 좋은 것이며, 어떤 가르침이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구별할 줄 모른다.
거기다가 있는 일을 제대로 보지못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면 항상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결정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법칙의 세계라는 것은 있는 것과 있는 것들이 만나서 현상을 만들어 내는 일을 두고 말하며,
세상 속에는 온갖 현상들을 만들어내게 하는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해서 좋은 삶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종교에다 의지하려고 하지만 만일 그곳에 가게 되면 자신은 두 번 속게 될 것이다.
교회나 절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그곳을 찾고 남에게 의지하려 한다면 가장 먼저 사람에게 속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신에게 속게될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가 내세우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그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또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 시대에 사성제(四聖諦)를 말하고 8정도(八正道)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논하면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게 된다면 그들은 자아(自我)를
상실(喪失)해 버리게 될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다는 말은 자기를 죽이게 된다는 말이다.
자아를 상실해버리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보천치로 변해 버렸거나
또는 있는 일을 보아도 보지 못하는 더욱 캄캄한 장님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 장소에 앉아서 다른 곳을 본다거나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허공에 떠돌던 신을 자기 속에 얻어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자아상실과 자아완성(自我完成)은 말은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말이다.
자연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간 완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의 가르침이 하는 일은 세상의 일을 밝히는 일이다.
있는 일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적하고, 토론하고, 질문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이 일은 사람들에게 자아완성에 가장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있는 일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배우고, 증거를 듣고 확인해야 한다.
자연의 가르침의 내용들은 있는 일을 통해서, 있는 일 속에 있게 되는 것들이 어떻게 해서 있게 되며,
어떤 있는 일들이 어떻게 해서 인간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진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예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있는 것들을 있게 한 진리를 배워야 한다. 진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 증거를 확인할
수가 있다. 있는 일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항상 남을 말한다.
스스로 깨우쳐서 자기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나 예수나 신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부처의 원력이나 예수의 원력에 의해서 모든 것들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세상의 만물이 가진 뜻을 일으켜서 그 자체를 존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를 통해서는 원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다.
지극 정성으로 신에게 기도를 함으로써 그 신이 한번쯤 술(術)을 보여줄 수는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신기(神奇)한 현상을 일어나게 했다 해서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을 경계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에서는 이 일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종교가 죽은 사람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대로 신에 속아서 자기 몸을 신에게 빌려주고,
신이 자기 몸을 끌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삶을 사는 동안 자기를 위해서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결국 신의 삶을 대신 살아준 것밖에 없으니 남의 삶을
살아준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앞날을 내다 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일. 이것은 정말 옳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생명 활동을 통해서 인간의 세계에 났다는 것은 자기를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에 큰 영광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인간 세계는 귀신 천국이 되어 있다. 귀신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들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조종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가르침이라는 한문책을 보면 철저히 옳은 말들이 적혀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좋은 가르침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보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가르침이다.
임금을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를 다하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거기에는 좋은 말들을 나열하고
좋은 결과를 요구하고 있지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르침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우면 스스로 임금도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 완성을
위한 가르침은 아무 것도 없이 좋은 결과만 요구하고 있으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길이
없다면 인간에게 세상의 일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며,
있는 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결국 눈을 뜨고 있어도 장님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를 두고
부처는 눈 뜬 장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강오륜과 같은 좋은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을 더욱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종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자아의
상실을 가져오게 하고 있으며,
종교가 있는 일을 밝히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어리석고 무지해지고 있다.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이 시대 최고의 메시지는 '거짓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있는 일을 알아보게 되면 사람들은 사리가 분명하고 야무진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세상은 밝고
풍요로움이 넘치게 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했던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의식이라는 기운이 존재하고 이 기운은 의식활동을 통해서 자기의 의식체-영체를
만들게 된다.
영체는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 속에 입력하고 보존하게 된다. 그래서 영체 속에 있는
수 억만 가지의 일들이 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움직이게 되고 이 일은 또다시 영체에 입력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 영체에 의하여 열반이나 영생 또는 지옥과 같은 참혹한
세계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서 극진한 기도를 많이 해서 구원을 받거나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며, 절에 가서
시주공양을 많이 하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해서 극락왕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일을 알아보고 자기가 노력하면 누구든지 열반하고 영생할 수 있으며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자기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자기와 연결되었던 일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깨달음이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깨닫게 되면 그 일을
그릇되지 않게 잘 하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기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지어놓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잘못된 운명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가 좋은 운명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의식도 변하지 않는다.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행동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법칙이며 누구든지 볼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인간들이 이런 일들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자신의 삶이 자신을 위해서 소중한 일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부정하거나
있는 일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출처: 자연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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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현상 속에 있는 진실과 거짓 (영적현상의 비밀)
게시글 본문내용
심령현상 속에 있는 진실과 거짓
요즈음 매스컴을 보면 말세라 그런지 많은 영적 현상들이 자랑스러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어린아이가 배우지도 않은 승무를 아주 능숙하게 춘다던가
병을 고친다는 심령가들이 출현하여 기이한 현상으로 세상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비밀을 알게되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인데
그것을 자랑스러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이 드러나면 거짓은 저절로 사라지는 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늘날 많이 나타나고 있는 심령현상의 진실에 대해 밝힘으로써
삶의 길을 바로잡고 생명과 죽음의 세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지금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원인에는 그동안 인류가 지어놓은 어둠과 인간의 탐욕,
그리고 세상을 떠도는 영들의 한과 집착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서 생과 사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으로
완전한 하늘의 뜻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분명히 나누어
영적 현상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도록 기본적으로 구조지어 놓았다.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이 원칙으로
현재 이세상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영적 현상은 떠도는 영들이 헤메고 있는 현상으로
모두 생명의 이치에 벗어난 것이다.
심령현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 이치를 분명히 알게된다면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밝아진다.
우리는 영적 현상을 일으키는 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실상을 알고보면
그들은 잘못된 삶을 산 유혼과 접촉되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천한 자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차원에 이른 영혼들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고차원의 신성한 세계로 올라가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높은 차원의 신들도 이세상에 계속 머물게되면 생명대의 인력권으로 빨려들어
다시 힘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하기에
(모든 것은 변화속에 있고 순환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임)
이세상에 칩착이 남아 떠돌아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하느님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구차한 사연을 지닌 각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
영적 상징을 전하고 뜻을 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늘은 이미 완전하여 중생들의 습과 행태가 어떨 것인지를 모두 다 알고 있는데
구태여 형태를 나타내 인위적인 작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높은 차원의 신들은 진리로서 자신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지은 원인대로 완전한 이치로 판단하는 것이지
자기를 부르는 사람에게 가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편파적인 도움을 주는 일은 절대 없는 것이다.
특정 종교계에서는 자기들의 종교에 나타난 영적 현상들은
모두 높은 차원의 신들이 나타내는 고귀한 현상이라 주장하지만
실상의 원리에서 볼 때 그러한 심령현상들은 모두 동일한 원리에 의해 나타나는
낮은 차원의 영적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실례로 황진이를 사모하다 상사병에 걸려 죽은 머슴의 장례행렬이
황진이의 집앞을 지나가다가 상여가 그 자리에 멈춰 떠나지 않았을 때
황진이가 속곳을 벗어 걸쳐주자 떠날 수 있었다는 현상과
선불교의 개조라는 육조 혜능스님의 장삼과 가사를 자객이 강탈해 가려하자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현상은
모두 영들이 작용해 일으킨 물체의 고착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선가에서 이 말을 들으면 감히 육조스님과 황진이를 비교한다고 난리를 치겠지만
세상에 나타나는 심령현상의 원리는 그만큼 간단하고 분명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당이 굿으로 병을 고치는 것과
종교집단에서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것은
모두 같은 영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이 병을 고치는 원리는 하느님이 직접 신성하고 거대한 힘으로 나타나
인간의 몸에 붙은 악마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센 유혼들로 하여금 미약한 유혼들을 겁을 주거나 위협을 하여 도망가게 하고
또 그 한을 풀어주거나 달래줌으로써 그들을 떠나게 하는 현상인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많이 보는 점이나 사주, 무당, 기도, 제사 등 갖가지 심령현상들은
모두 이와 같이 잘못된 삶에 의해 유혼이 되어
떠돌고 있는 낮은 차원의 영들이 일으키는 의식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그곳에는 고차원의 신의 뜻과 절대적 진리가 절대 작용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들 주변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심령현상의 이치를 알게되면
우리들이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과 실상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를 점치며 영을 부리고 영적 부흥을 일으키며 안수기도를 하는 사람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지닌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낮은 차원의 유혼들과 영적 접촉을 갖고 있는
그릇된 자에 불과한 것이다.
성자들은 항상 진리에 의존하였으며 신비스런 힘을 쓰는 것을
크게 경계하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신비현상으로 점이나 사주, 무당에 의한 신풀이가 있다.
그 중 사주는 인생과 세상의 흐름을
1에서 10이라는 숫자에 대비해 흥망성쇠를 점치는 수리적 논리로서
주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흔히 주역을 완전히 풀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본다고 이야기하지만
생생한 삶의 실상을 숫자로 완전히 해석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주역이나 사주를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각 생명체의 몸과 마음의 수리적 차원과
집안환경의 수리적 차원, 사회적·역사적 환경의 수리적 차원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완전한 혜안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은 수리적인 공부로서는 불가능하며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속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역이나 사주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욕심이 많은 이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비밀을 풀고자
자신의 부족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 영적 힘을 빌리러 산기도를 하러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영이 붙으면 눈동자에 신기가 감돌면서 남의 마음을 맞추거나
일반인이 알 수 없는 기이한 소리를 자주 하게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이들은 영이 공간에 제약을 받지않은 특성을 이용하여 남의 마음을 훔쳐보고
기이한 소리를 잘 하여 인기를 끌게되지만
그들의 소리는 유계를 헤메고 있는
병든 영들이 환상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함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 말속에는 결코 삶의 길과 이치가 없는 것이다.
영은 결코 세상의 일을 보지 못하며 인간을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
만약 영들이 인류에게 밝은 길을 전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준다면
세상 속에 그렇게 많은 영들이 나타나 암시를 준 이 세상이
이토록 말세가 되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에 의한 사주나 작명 등을 믿게되면
그사람은 어두운 영의 영향을 받게되어 좋지 않은 운명을 맞게 된다.
따라서 좋은 운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훌륭한 삶을 살아온 분에게 작명을 부탁하거나
인생의 지침을 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올바른 삶을 살아온 분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속에서
가장 이치에 부합한 생활을 해온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심령현상이 야기하는 더 큰 문제는 죽은 유혼들이 산자들 속에 섞이게 되면
생사의 혼동이 일어나 생명의 세계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유혼들이 사람들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산자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혼들은 떠돌아 다니는 생활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산자의 몸속에 들어와 평안하게 지내며 자신의 욕망과 한을 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의 몸에 들어오면 자신의 집을 얻고 지독한 환상과 고통에서 벗어나
매우 편하게 되기 때문에 한번 들어오면 절대 스스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영들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인연에 따라 몸속에 스며들어와
무의식적으로 의식에 영향을 주며 몸에 이상한 현상을 일으킨다.
영이 스며든 본인은 이를 느끼지 못하나 주위의 사람이 보면
달라진 것을 확연히 느끼는 것이다.
매일 종교집단에 철야로 밤을 지새도 기운이 넘치고
이상한 영적 현상을 보며 절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무언가 불안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지하철이나 역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큰 소리를 외치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영들 중 탐욕이 많고 집착이 강한 악영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일정한 계기에 산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어 대접을 요구하며 괴롭힌다.
이러한 독한 유혼들이 산자의 몸을 지배하는 계기는
사람의 몸이 자기의 마음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유혼들이 상대의 기운을 제압할 수 있을 때 들어온다.
그래서 대개 신이 들리는 경우를 보면 큰 병을 앓았거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거나 금식기도나 고행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 자를 괴롭혀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고 접신행사를 벌여 자신을 받아들이면
그제서야 비로소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인간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집단에서 영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백일기도나 금식기도와 같이 몸을 허약하게 만들어
유혼을 받아들이게 하는 우매한 관습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더구나 영이 하나 집안에 들어오면 그와 인연이 있는 영들은 항상 같이 따라 들어오기 때문에
그 집안에는 우환이 끓고 불행이 겹치게 되는 것이다.
영은 삶의 이치를 몰라 헤매는 중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쉽지만 더 좋게 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무당이나 사주, 작명, 종교집단의 영적 현상은 가급적 멀리 하는게 좋으며
멀리하면 할수록 그만큼 심령현상과 멀어지고
마음이 맑아져 자신의 행동을 바른 이치에 따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유혼들은 생에 대한 집착으로 세상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일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짓으로서
유혼은 세상속에 자신의 형체를 나타내거나 심령현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유혼이 산자와 같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되면
생의 결과로 갖게 된 자신의 한정된 진기를 고갈함으로써
그 영혼의 기운이 매말라 자신의 근기를 보존할 수 없게되고
영혼이 피폐하여 지옥의 고통과 나쁜 후생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콩을 그대로 갈무리했다 싹을 틔우면 온전한 콩이 나지만
그곳에서 기름을 짜내고 심는다면
다시는 싹을 피우지 못하고 상해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높은 차원의 영들은
자신의 기운을 모두 소모해버릴 현생에서의 영적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한과 집착에 사로잡힌 불행한 유혼들만이 생사의 이치를 모르고
마치 살아있는 듯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에
심령현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심령현상은 세상에 집착이 남아 떠돌아다니는
어리석은 유혼들이 빚어내는 환상이며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밝히는 것에 대해 종교계의 반발이 심하겠지만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당하는 세상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고
세상에 미치는 해악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한 동안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진리가 사라진 어두운 세상,
국민의 정신이 밝음을 잃고 망해버린 세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역사에 있어서 심령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나라들은 반드시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그랬고 인도인들이 그랬고 몽고인들이 그랬다.
인류역사의 발전은 항상 인간성을 간직하고 사실에 밝은 순수한 민족들에게서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산자들보다 더 많은 유혼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지난 20세기 인류는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참화와 식민지에 대한 대살겁,
탐욕과 동물성의 폭발 등으로 이미 인간이 건너서는 안될 강을 건너버렸다.
그리하여 환상과 탐욕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어도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집착과 한으로 현실속에 계속 떠돌아 다녀야 할 운명을 띠고 있어
몇 세대에 걸친 영혼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워 생명대의 순환구조를 스스로 붕괴시켜 버릴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세에는 영들이 이슬처럼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바로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영적 접촉이다.
한 개인의 정신 속에 다른 영혼이 들어오면
그는 자신의 맑은 의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안개가 낀 듯이
휘뿌연 속에서 이중적인 사고와 행동을 나타내게 되어 자신의 마음을 농사짓지 못한다.
마음을 맑게 닦는 것이 삶의 과정이라 할진데
이미 마음이 오염되어 영이 시키는 대로 하니 닦을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로 영이 한번 인간의 몸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유혼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영의 집착이나 한을 풀어주다가 자신의 인생을 다 허비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도 똑 같은 한에 얽매여 또 다시 귀신이 되어 떠돌게 되는 것이다.
무당집에 무당이 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전생의 영들이 계속 후손에게 머물러
그 정신을 병들임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육체가 불구인 자라 할지라도 고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마음을 지켜
자신의 영혼을 잘 농사지은 이는 고생한 만큼 더욱 쉽게 완성에 이를 수 있지만,
자기의 마음이 다른 영에 의해 지배받게 된 자는
자신의 영혼마저 지킬 수가 없게되며 평생을
다른 영혼의 한풀이나 해주다가 자신의 삶마저 망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종교의 영적 현상인 것이며
종교는 그만큼 세상에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인간을 진리로 이끌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병들이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종교와 진리는 영적 현상을 제거하고 올바른 이치속으로 인류를 이끌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나
오늘날의 종교는 오히려 인간을 영적으로 오염시켜
바른 정신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절이나 교회, 신흥종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금식기도나 부흥회, 백일기도 등은
무당의 강신현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광신적으로 변모했으니
그 위험성을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거꾸로 변하고 전도되는 말세의 대표적 현상인 것이다.
오늘날 종교집단에 유혼들이 들끓어 심령현상이 만발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직자들이 왜곡한 교리로 인하여
살아생전 존재하지 않은 환상과 기적을 믿고 살다가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고난 후 죽어서도 그것에 집착하여 저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계속 그 종교집단에 남아 사후의 구원을 바라며 머물고 있는 것이다.
유혼들은 살아있을 적에 자신이 품고 있었던
바램과 욕망과 집착과 한을 생전에 자신이 활동했던 곳에 가서 풀려고 하기에
기독교의 신자들은 교회에 몰려들고,
불교신자들은 절로 몰려들며, 토속혼령들은 무속인들에게 나타나
지금의 종교집단에는 수많은 영들이 우글거리며 심령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영에 가장 감염되기 쉬운 곳이
바로 종교집단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이상한 영적 현상을 자랑하며 세를 팽창하고 있는
신흥종교에 다니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에 접해있으며 절이나 교회에 다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영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얼굴이 창백하거나 검게 변하고 머리가 자주 아프며
육체적 증상이 없이 신체에 이상현상을 호소하며
이중인격현상을 공통적으로 보인다.
영이 들어와 자신 속에 의식이 두개인 사람을 이중인격자라고 하는데
그 특징은 두 개의 의식이 충동질하는 대로 행동하기에
두 가지 행동방식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병들이 병원에 가면 의학적 소진으로는 아무 원인이 없는데
까닭없이 아픈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 중 거의 대부분이 유혼이 인체에 붙은 현상이다.
죽은 자의 기운은 산자에게 붙으면 생기와 다른 이질적인 기운으로 말미암아
생체에 통증을 가져오거나 정신에 이상을 가져온다.
그래서 많은 종교신자들이 이중인격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다른 의식이 자신의 의식 속에 잠재하여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신흥종교의 행태가 주기도문의 경우와 같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 마음의 양심을 밝히고
진심을 다한 회개와 세상을 향한 소망이 되지 아니하고
무당의 접신현상과 같이 광적으로 축원하며 흥분상태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들의 종교행태가 무당의 심령현상과 유사해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흥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속에 영적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흥종교에서 움직이고 있는 유혼들은 자기가 생전에 집착한 환상과 집착을 풀기 위해서
계속 주위에 있는 영들과 사람들을 감염시켜 가며 계속 자기집단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영에 오염된 신자들은 영의 작용에 의해 종교집단에 자주 안가면 몸이 아프고 불안해지며 궂은 일이 생겨 대규모 무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신흥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심령현상은
아주 특별한 천상의 배려라고 생각하겠지만
특정종교에서 많은 제사를 지내며 영을 불러들이는 영적현상,
신흥 개신교의 성령현상, 미국의 몰몬교의 영적현상은
영적 이치에서 보면 모두 동일한 영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영적 실체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속에서 많은 신비와 차이가 있다고 느낄지 몰라도
그 실체를 알게되면 모두 저급한 유혼들이
심령현상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영은 비정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영을 믿어 잘된 민족은 없다.
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며
인간이 바로 자신의 삶을 구하는 구세주인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믿으면 편안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실천으로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여 편안함을 얻었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냥 있는데
신에게 자신을 의지함으로써 편안함을 얻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나 부처님이 자신의 짐을 받아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종교에서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우주의 이법에서 볼 때 하느님은 중생의 요구에 따라 쉽게 나타나는 분이 아니며
사사로운 요구에 반응하는 편리한 존재도 아니다.
따라서 절대자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서 편안함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술이나 마약을 통해 자기를 잊음으로써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마취상태로서 영에 의한 일종의 자기상실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와 영적 감염에 의한 현실왜곡이 있기에
사람들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광신적인 종교행태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문제를 직접 풀 때 해결되는 것이지 이를 외면해서는 절대 스스로 풀리지 않는다.
만약 신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왜 성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광신적으로 신을 믿고 있었음에도
계속 더 열심히 신을 믿으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며 올바른 인간의 길과 진리를 실천하라고 외쳤겠는가?
자신을 잊는 것은 일시적으로 편안함을 얻을 수 있겠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자신을 망각하면 망각한 순간에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아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잠재된 문제에 또 다시 부딪혀 더 큰 불안과 고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함정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들은 절이나 교회에 가면 편안한데 현실에 부딪히면 다시 고통과 불안이 다가온다고 하며
다시 절이나 교회를 찾아가는 현실도피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이를 이용하여 날로 부유해지는데 개인은
더욱 황폐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종교를 아편이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각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종교에서 일어나는 영적 현상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신성한 현상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의지를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종교집단에서 그토록 많이 나타나는 성령현상이
왜 국가적으로 중요하거나 큰일을 하는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인생에 실패한자, 사업에 실패한 자, 병약한 자에게 주로 나타나는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심령현상을 일으키는 영들은 세상을 떠도는 낮은 차원의 영들일 수 밖에 없어
그들이 나타날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의 기운으로 점령할 수 있는
어둡고 허약한 기운과 정신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큰일을 하는 맑고 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적현상은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하늘의 완전한 뜻은 완전한 이치와 맑은 정신,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의 마음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지
결코 인생에 실패하고 마음이 흐리며 기운이 허약한 자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성령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완전한 하느님이 인간들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타나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절대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역사가 아니라 유혼들의 역사인 것이다.
완전한 하늘의 뜻을 예수님과 같은 성자도 완전하게 다 표현하지 못했는데
어찌 탐심이 많고 생활에 문제가 많은 부실한 자들의 영적 접촉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고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도저히 이치가 맞지 않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말을 하면 종교계의 거센 반발이 나타날 것이 뻔한 일이지만
세상의 불행을 보고도 올바른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계속 불행해질 것이며
종교집단 자체도 진실에 어긋나는 길을 가며 세상에 계속 악을 지을 것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밝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성자들이 가르친 가르침을 거꾸로 행하는 위선을 범하고 있다.
성자들은 영에 의한 잘못된 믿음이나 미신을 벗어나
이치에 따라 현실의 문제를 가장 바르게 해결하는 인간의 길을 가르쳤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신의 뜻과 목사들의 자의적인 해석,
광신적인 믿음, 위선적인 구원을 가르치며 자신들의 영광과 부귀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지장보살이나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속에 쌓인 공덕과 밝은 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공덕과 진실을 자신 속에 쌓음으로써
자기영혼이 우주의 완전한 생명법칙에 의해 스스로 받게 되는 댓가인 것이다.
인간은 올바른 진리의 길을 살아감으로써
그 마음속에 남아있는 욕망과 집착을 극복하고 순수한 신성을 완성하여 맑고 강한 빛이 된다.
그리하여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앉는 자연의 이치에 의해 맑게 정화된 영혼은
높은 차원으로 승화하고 탐욕과 원한에 얽매인 영혼은
계속 유계를 떠돌며 지옥의 고통을 받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겉보기에는 장엄하고 신성함으로 가득찬 것 같아도 그속을 들어가면
신성의 실체를 아무도 보는 자가 없고 형식과 비인간성속에서
관습에 따라 앵무새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결과 종교에 빠지면 빠질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흐려지며
정신은 애매해지고 삶이 이상해지는 결과를 맞게되는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 주위는 밝아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정신은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무질서하고 비양심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세계에서 지금 한국인은 유태인에 버금갈 정도로 비인간적이며
신뢰할 수 없는 민족으로 악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가 번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성이 붕괴되고 사회가 이토록 무지하게 변한 이유는
우리사회의 종교가 이미 올바른 이치를 잃어버리고 생명력을 상실하여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큰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종교집단에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자신을 보존하기 쉽다고 할 정도로 우리사회의 종교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탁한 세상에서 진리는 인기를 끌 수 없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삿된 욕망과 이기심과 편안함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이 살아 생전에 그토록 사람이 없이 고통스럽게 보냈던 이유는
영적 현상을 이용하지 않고 세상사람들이
그토록 귀찮아하는 바른 이치와 정직하고 힘든 인간의 길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말이 이치에 맞아 진실할 때는
세상사람들은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아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추종자들이 자신의 환상과 논리를 가르침속에 왜곡하여 집어넣자
그 달콤함에 취한 중생들이 모여들어 집단을 형성하며 체계를 갖춘 것이
오늘날 종교의 실체인 것이다.
그래서 살아생전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고생하다 죽음을 당했고
노자는 진리를 전할 데가 없어 평생을 제자하나 없이 떠돌다가 국경너머로 사라졌으며
석가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평생을 길에서 떠돌다 길옆 숲속에서 죽었던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올바른 모습이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듯이
완전하게 맑은 이치속에는 중생들이 모여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길이지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 바로 진리인 것이다.
그분들은 살아 생전 우상을 섬기며 이치를 외면하는 잘못된 믿음을 비판하고
스스로는 결코 섬김을 받고자 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종교는 다시 그분들의 재세시의 종교들처럼
그들을 우상화하고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종교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많은 관념과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그 가르침 속에 인과의 법칙이 희미해져 버린 때에
이미 그 종교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숨겨진 진실을 바로 알아야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며
자기자신의 삶을 바르게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종교들이 병들어 가고 있는 근본이유는
진실과 인간이 가야할 길을 버리고 삿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환상과 영에 대한 의존으로 자신들을 병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들에는 사심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외형과 격식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더욱 거대화되고 장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을 뿐
성자들의 진실을 본받아 신성의 실체를 느끼고
무소유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기쁨에 인생을 살아가는 성직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말세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의 실체로서
오늘날 종교집단에는 우리들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어두운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들은 어둠에 감염되어 그 실상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권력과 재물, 대중오락과 신흥종교 등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해서 그곳에 항상 올바른 가치와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탁함으로 인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맑은 곳은 거부하고
욕망과 쾌락과 요행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몰리는 곳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탐욕과 괘락과 허영과 요행이 번뜩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탁한 현상들은 오욕이 강한 중생들에게
일시적으로 편안함과 이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결국 더 큰 어둠과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며
오직 올바른 가치와 진실만이 인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여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올바른 이치에 의지하여
스스로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풀리지만
워낙 어두운 세상이라 어느 것이 진리인 줄 알 수가 없고
오히려 선하고 가치있다고 보이는 곳이 더 큰 문제가 있으니 실로 대처하기가 어려운 일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미리 보시고 진리도 오래되면 변질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말씀하시면서
진법 500년 상법 500년 말법 500년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오늘날의 세태는 겉으로는 비슷한 것 같아도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혀 있는 말법의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어두운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을 밝힐 수 있는 전리의 빛이 더욱 필요한 것이니
이글을 읽은 사람들은 부디 세상의 실체를 정확히 판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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