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에 제시된 많은 법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십계명)과 제사 제도와 관련된 의식법 그리고 건강이나 청결을 위한 법, 거기에 한 국가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시민법들이 나와 있다. 신명기 18장에서 다루는 법들은 일종의 시민법이다.
이런 법의 분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복수의 하나님으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하나님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빗나간 깨달음이다. 구약성경에는 이미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잠언 20장 22절),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언 24장 29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잠언 24장 17절),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잠언 25장 21절)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범죄를 예방하고 죄인들에게 죄지을 마음이 들지 않도록 시민법은 철저하게 상대적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각 국가의 법들이 모세의 법처럼 좀 더 철저한 형벌주의였다면 오늘날에 발생하는 범죄의 많은 부분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싱가포르를 여행해 본 사람들은 느낀다. 도시가 깨끗하고 길바닥에 오물이나 침, 그리고 껌딱지 같은 것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경범죄에 대한 범칙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 태형을 처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민법은 사회적인 질서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모세의 법처럼 강력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들은 시시덕거리며 잘만 살고 피해자는 숨도 못 쉬고 사는 사회라면 그것은 정의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법도 철저하게 오살자와 고살자를 구별하였다. 피의자는 재판받기까지 도피성으로 신속히 피신하여 복수자의 손에 죽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하였다. 법과 치안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에 도피성은 오살자와 고살자를 철저히 구분해 내는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죄인이 고의로 지은 고범 죄였다면, 그가 심지어 성소의 뿔을 붙잡고 있다고 하여도 끌어내어 죽였다. 혹이 실수로 오살하였다면 그는 도피성에서 살 수 있도록 그의 주거 공간을 마련해 주어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도록 허락되었다. 그는 도피성에서 나가지 말아서 그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했다.
이 표상적 도피성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영혼의 원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분 밖으로 나오기를 숨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죄인들로서 그분의 은혜의 날개 아래 피신하여 있는 사람들이다. 고의든 실수든 우리의 죄 값은 십자가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되갚아졌다.
그러면 영적인 도피성에서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은혜를 받고도 다시 타락하는 경우이다(히6:6). 하늘의 비를 받은 땅이 계속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르게 되는 이치와 같다.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은혜 안에 머무른다는 사람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은혜를 헛되게 할 것이다. 죄는 마귀의 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의 죄를 허용해주는 보자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죄를 다시 짓는 행위는 사단 앞에서 하나님을 민망하게 하는 행위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삶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피성에서 살아야 한다. 그분의 은혜 안에, 그분의 사랑 안에, 그분의 날개 아래 머물러야 한다. 그분이 창조해 주신 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날개를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저희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시고 원수의 유혹에서 건져주소서. 은혜받은 자의 모습처럼 은혜를 베풀고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