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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6일 사무국에서 버스로 대관령 마을 휴게소 도착...(09:50)
대관령(大關嶺)은 실제 강릉의 진산이다.
강릉에서 이곳을 넘으려면 무려 13km에 이르는 아흔아홉 굽이의 고개를 올라야 한다.
옛날 사람들은 평생 이 산을 넘지 않고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왔을 정도다.
호랑이와 도적이 있던 시기에 이 고개에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렸겠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매년 음력 4월 15일이면 이곳에서
강릉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는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를 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장군 김유신이 산신, 강릉출신 나말여초의 고승 범일이 국사성황신이다.
강릉사람들은 이처럼 대관령을 오랫동안 영산靈山이고 신산神山으로 여겨왔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쾌적한 숲길을 따라 1.7km 거리의 국사성황사에 올라 둘러본 후,
비탈진 숲길을 200m 더 올라 KT송신소 앞에서 선자령길과 합류한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르는 선자령 풍차길(바우길 1구간)과
동쪽의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올라온 대관령 옛길(바우길 2구간)이 수평과 수직으로 만나는 곳이다.
백두대간 선자령을 오르는 등산인들 뒤쪽으로 곤신봉에서 소황병산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반정으로 내려서면 주막 터도 나오고,
하제민원과 원울이재를 거쳐 대관령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반정이란 이름은 대관령 초입에 있는 구산역과 대관령 위에 있는 횡계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이다.
강릉에서 영서로 나갈 때면 구산을 지나 굴명이, 원울이재, 제멩이, 반젱이, 웃반젱이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 다녔다.
이 옛길에는 원님이 고갯길이 험해서 울고 넘나들었던 원울이재, 겨울이 되면 관원행차나
양반들을 위해 눈을 밟아준 답설꾼과 가마꾼인 교군 이야기,
선행을 베푼 사람에게 돈을 벌게 해 준 서낭당이야기 등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특히 산 아래 반정半程에는 신사임당이 38세 때 대관령을 넘어 시댁으로 돌아가던 중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그 애절한 심정을 읊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을 새겨 놓은 사친시비가 서 있다.
주디 님과 키키 님 (오늘 옛길을 걷고 내일 울트라 3구간에 도전하는 대단한 철녀(鐵女) 들...)
우리나라의 등줄기 '백두대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매달 무박 2일로 2번씩 구간별로 종주해
정확하게 1년 6개월 만에 백두대간을 완주한 미수기님....(도상거리:690km , 실제거리: 1,100km)
얼마 전 바우길을 무려 8년 만에 완주했다 (서울서 내려와 엄마와 함께 한 이쁜 딸..)
신시아 님, 하비님, 감자아빠님, 나그네님....
산두꺼비님 , 칭런님
국장님 인사말....
참석한 바우님들에게 강릉시 제공 팔토시를 선물한다.
대관령 옛길 2 구간지기 왕~초보님 인사말...((09:56)
2구간 발걸음을 힘차게 출발한다...(09:59)
숲으로 들어 서니.. 상당히 습하고 무더웠다.
많이 훼손되었던 언덕길은 탄탄한 나무 계단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있었다.
양 떼목장...(10:21)
운 좋은 날은 이렇게 입장료도 안 내고 양과 가까이 조우( 遭遇) 할 수 있는 찬스를....
갈 수 없는 나라....
털을 깎아서 인지 조금은 날씬하고 시원해 보이는 양 님들...
입장료가 없어서 철조망 밖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바우님들...ㅎ
허브님 뒤에 사람들 모두 stop!....
도깨비부채
신록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간다....
선자령과 성황당 갈림길에서 잠시 휴식을....(10:46)
숲에 가려진 국사성황당 앞에 도착해서...
대관령산신 大關嶺山神
대관령 산신이 된 김유신(金庾信) 장군에 대한 설화.
[개설]
강릉 단오재 때 제사하는 대관령 산신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내용은 허균(許筠)이 쓴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竝書)」에 들어 있다.
[채록/수집상황]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는 신화적 근거는 강릉 출신 허균이 1603년(선조 36)
직접 대관령 산신제를 보고 행사를 주관한 사람에게 물어서 알아낸 내용이다.
[내용]
허균의 「대령산신찬병서」에서 언급된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묘년(1603) 여름 내가 명주[강릉]에 있었는데,
그 당시 명주 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였다.
나는 수리(首吏)에게 물었다. 이에 수리가 대답하기를, ‘이 신은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입니다.’라고 했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였는데 검술을 산신이 가르쳤고,
그가 소지한 칼은 명주 남쪽에 있는 선지사(禪智寺)에서 만들었는데
90일 만에 그 칼이 완성되어 빛은 달빛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멸하고 백제를 평정했으며, 죽은 뒤에 대관령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신이 지금까지 영험해서 고을 사람들이 신봉하여 해마다 5월 길일에 번개와 향화를 갖추어
대관령으로 가서 그 신을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5일(단옷날)에 이르면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신이 즐거우면 길상이 깃들어 풍년이 든다 하고 신이 노하면 반드시 풍수의 천재지변을 준다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광경을 보았는데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며 서로 경하하고 춤을 추었다.”
[모티브 분석]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이 된 것은 행사를 주관한 책임자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모티브를 보면 강릉과 김유신은 일정한 인연을 보인다. 김유신은 어려서 강릉에 유학 왔고,
삼국을 통일한 칼을 선지사에서 만들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후에 대관령을 지키는 산신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5월 단오널에 잡희를 베풀어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이 즐거워야 풍년이 든다고 하는 영험을 보여주기에 축제의 중심신격이 된 것이다.
역사의 실존인물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강릉의 수호신이 된 것은 복합적인 분석을 요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대략 400여 년 전에는 강릉단오제의 주 신격은 김유신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강릉단오재가 산신제의 성격에서 성황제로 옮겨가는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 없고,
또한 그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서도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다.
다만 김유신 장군은 강릉 출신이 아닌데 반하여,
범일국사(梵日國師)는 강릉의 굴산사(掘山寺)를 세운 고승으로 일찍이 지방에서 존숭 되었다.
또한 강릉 지역이 일찍이 영향을 받은 바 있는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축제를 통해 지역주민의 구심체를 형성하고 이를 토착 세력화하려는 의지도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국사라는 칭호는 국사봉, 구수봉, 국수봉이라는 지명으로 전국에 퍼져 있으며,
동시에 그 뜻이 신이 좌정한 봉우리의 뜻이 있음을 감안할 때 대관령을 신성한 봉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산신제를 지낸 것이 신라 때 승려인 범일국사와 연계된 것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중심신격의 변화는 지역사회의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단오제의 신격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변화된 것은 강릉단오제의 시원이 신라 이래 고려 때에 이르기까지
대관령과 관련된 산악형 산신신앙에서 출발하였다가,
조선 중기 이후 차츰 마을신앙 형태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감에 따라 신격의 변화가 뒤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성황당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을....(10:58)
鄭氏家- 「정 씨가 의 딸」
정씨가의 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 대관령국사성황신의 배필이 되었다는 전설.
[개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이 된 정 씨는 동래부사를 역임한 정현덕(鄭顯德)[1810~1883]의 딸로 보인다.
정현덕의 본관은 동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이다.
정현덕은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고종 초에 서장관으로 정사 서형순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동래부사가 되어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대원군이 실각하여 민 씨 척족정권에 의해 파면되어 유배되었으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원악도로 유배된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정현덕은 『조선근대명가시초(朝鮮近代名家詩抄)』에 칠언절구 13수, 배율 65수가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강릉[명주]에 머물면서 쓴 시가 남아 있다.
일설에는 초계정 씨 경방 파는 현재의 남문동에 살았는데,
조선 숙종 무렵 종손인 정규완의 10대 고모가 황수정과 혼례식을 올렸으나 시댁에 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오월 단옷날 대관령에 봉안되어 있는 국사성황님 행렬을 저녁에 담 위에서 보고 있다가 호랑이에게 업혀갔다고 한다.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수색한 끝에 대관령 국사성황당에서 모발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는 상태의
시신을 발견하고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 산 303번지에 있는 생모 안동권 씨 묘계절하에 안장하였으며
세인들은 대관령국사성황신과 천상배필이라고 말해오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이 정 씨가의 딸로 밝혀진 것은 1966년의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이다.
당시 자료에는 옛날이라고만 하였으며 구체적인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고 정현덕의 한자명도 ‘鄭賢德’이라 하였다.
시기가 정확하지 않으나 정씨가의 딸이 호환을 당한 이야기는 정씨 가문의 전승기록에도 나타나므로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강릉현 최돈목 씨 네에 동래정 씨인 정현덕 네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대관령성황신이 나타나 정씨 집에 장가들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사람 아니 성황을 사위 삼을 수 없노라고 거절했다.
어느 날 정 씨가의 딸이 노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범이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범은 산신이 보낸 사자로서 분부를 받고 온 것으로,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은 것이다.
범에게 물려 간 것을 안 정씨 집에서 국사성황을 찾아가 보니,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정신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이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 한 날이 4월 15일이다.”
[모티브 분석]
호환설화로서 사후에 대관령국사성황신과 음력 4월 15일 혼배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날을 기해 강릉단오제는 대관령국사성황신의 영신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홍제동 국사여성황사에 성황신을 함께 봉안합사하고 있다.
두 신격이 대관령과 강릉 홍제동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한 해에 한 번 만나는 상봉구조를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정 씨가의 딸」 설화는 강릉단오제의 주신격인으로 범일국사를 대관령국사성황신으로 봉안하고 있는데,
그의 부인이 된 인물설화이다. 정씨 처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으나 국사여성황신으로 신봉된 사례담이다.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에는 정현덕의 꿈에 성황신이 나타나 장가를 들겠다고 했으나
거절하자 호랑이가 강제로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 설화의 발생근거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정현덕은 실존인물로 강릉과 관련이 있으므로 호환설화의 변이형으로 파악된다.
이승사 異僧祠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
[개설]
명주장군 김순식은 936년(태조 19)에 부하 장병을 이끌고 신검을 토벌하기 위해 강릉을 출발하여
대현(大峴)[대관령]에 이르러 이상한 중을 모신 사당인 이승사(異僧祠)에 제사를 지내고
후백제와의 마지막 격전지로 향하였는데, 이곳이 현재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사’라 여겨진다.
이승사는 행정구획상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에 위치해 있지만, 관리는 강릉시에서 한다.
이승사에 모셔진 분이 바로 강릉단오재 때 모시는 ‘범일국사’이기 때문이다.
1786년(정조 10)에 편찬된 『임영지(臨瀛誌)』 속지(續誌)에 의하면,
“매년 4월 보름에 강릉부에서 임명된 호장(戶長)이 남자와 여자 무당을 인솔하고,
대관령 정상에 있는 신령을 모신 사당으로 가서 호장이 먼저 사당 앞에 나가 고유(告由)하고,
남자와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나무 가운데에서 신이 내린 나무를 찾아 모시고 오라 시키면
갑자기 나무 하나가 미친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이 나뭇잎이 저절로 흔들리면
마침내 신령(神靈)이 그 나무에 내린 것으로 알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건장한 장정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는 이를 국사(國師)라 하였다.
이를 받들고 행차를 할 때에는 뿔로 만든 아름다운 피리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고
남녀 무당들은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면서 이를 따른다.
호장은 대창역의 말을 타고 뒤에서 천천히 가면 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연도에 늘어선 인파가 마치 담장을 길게 쌓은 것 같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종이와 천을 찢어서 신목(神木)에다 거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무당들을 위로하였다.
어두워질 무렵 관아에 도착하면 뜰에 세워 놓은 횃불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이어 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정성껏 맞이하여 성황사에 안치하였다가
5월 5일에 무당들이 울긋불긋한 비단 자락을 모아 고기비늘 모양으로
여러 폭을 이어 알록달록하고 번쩍번쩍하게 만들어 긴 장대에다 거니 마치 큰 우산을 펼친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드리운 비단 자락에 제각기 이름을 쓰고 화개처럼 만들어 힘센 장정이 이를 받들고 앞장서면
무당들은 풍악을 울리며 그 뒤를 따르고, 광대들은 온갖 춤을 추며 행진하였다.
이렇게 종일 놀다가 마지막에 성(城) 남쪽 문으로 나가 소학천(巢鶴川)에 이르러 해산하였고
대관령에서부터 받들고 온 신목은 이튿날 성황사에서 태웠다.
이러한 행사는 예부터 내려오는 습관들이 생활화된 이곳 고을의 풍속으로서 그 유래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러한 행사를 치르지 않으면 비바람에 곡식이 못쓰게 되고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반정 건널목에 도착해서.....위험한 구간이라 지기님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11:38)
반젱이, 반정(半程)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대관령 중턱의 지명.
예전에 강릉도호부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구산역을 지나 대관령 초입으로 들어와
제민원(濟民院)을 거쳐 반젱이로 오는데, 반젱이에 주막이 있어 발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반젱이[半程]는 조선시대 역원제도가 있었을 때 구산역[성산면 구산리]과
횡계역[평창군 대관령면]의 중간 지점이 되어 생긴 이름이다.
예전에 반젱이에는 주막이 있었으나, 대관령에 자동차 길을 넓히면서 없어졌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대관령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가파르게 펼쳐졌고,
이곳에는 자동차 길, 대관령 옛길, 대관령 등산로가 교차한다.
[위치와 교통]
반젱이에서 자동차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관령 정상이 되고, 아래로 내려가면 초막골과 가마골이 된다.
반젱이에서 옛길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면 허궁다리가 되고, 올라가면 대관령국사성황사가 나온다.
반젱이는 윗 반젱이와 아랫 반젱이로 나눠져 있다.
[현황]
반젱이 조금 아래 옛길 옆에는 기관 이병화유혜불망비(記官 李秉華遺惠不忘碑)가 있는데,
이 비는 이병화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위해
주막을 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감사하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大關嶺- 대굴령 옛길
신작로가 생기기 전,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영동지역]과 평창군 대관령면[영서지역]을 잇는 길.
[개설]
대관령 옛길은 대관령에 새로운 길을 만들기 이전부터 지역민들이 대관령을 넘나들던 길인데,
대관령 산허리를 돌며 길이 생긴 것은 조선 중종조,
정숙(靜叔)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때다.
그는 민력을 빌리지 않고 도로를 개설했다고 하는데,
이 도로를 개설한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청군들이 이곳을 이용하여
서울로 진군했다고 하여 죽은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고 한다.
근대적인 길인 신작로가 생긴 것은 1910년 한일 병탄 이후인데,
일제는 강릉과 경기도 이천 사이의 국도를 1917년 8월 30일에 준공하고,
그 치도(治道)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반정(半程)에 있는 바위에 준공 기념비를 새겨 놓았다.
[명칭 유래]
대관령은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사람들이 고개에서 내려올 때 대굴대굴 굴러 내려오다가
굴면이에 와서 구르는 것을 멈추었다고 하여 대굴령이라 하였는데,
그 후 대굴령이 변하여 대관령으로 되었다고 한다.
[자연환경]
대관령 옛길은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대관령 박물관에서 시작된다.
주차장을 지나면 ‘영해이씨세장동(寧海李氏世葬洞)’이라 쓴 바위가 나오고,
이곳에서 내를 건너 언덕으로 올라서면 원울이재(員泣峴)가 되고, 이 고개를 넘으면 제멩이(濟民院)가 된다.
원울이재는 예전에 강릉부사로 부임하던 신임부사와 임기를 마치고
강릉을 떠나는 전임부사들이 이곳에서 강릉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강릉 부사로 임명되어 한양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을 여러 날 걸려 험한 길을 넘고 넘어
이곳에서 쉬면서 앞으로 강릉에서 관리로 생활할 것을 생각하니 암담하고 걱정이 앞서 한숨을 쉬며 울었고,
또 임무를 마치고 강릉을 떠나는 전임 부사들은 강릉에서 생활하며
강릉의 아름다운 경치와 후한 인심에 정이 들어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싫어서 이곳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원울이재와 예전의 원울이재의 위치가 다른 듯하여
1913년 강릉 김 씨[아버지 김연학, 남편 최동길]가 서울 구경을 하고 쓴 『서유록(西遊錄)』을 소개한다.
“뒤 냇물을 건너서서 맏아이와 둘째 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아이와 넷째 아이와 다섯째 아이는 이십 리를 동행하여 안구산 성황당에 가서 집에 돌려보내고,
연아를 데리고 가군(家君)을 따라 나귀 부담하여 앞에 몰고
서를 향하여 행할 새 굴면이, 제민원(濟民院) 지내 솔정이 당하니 대관령 초입이라.
거기서 점심하고 굽이 길로 올라가니 굽이굽이 길,
치도(治道)는 아무리 잘한 들 박ㅇ 모동이 깎바르기는 벽상(壁上)같이 접족(接足)하기 어렵도다.
그 모퉁이를 간신히 올라서니 반정이 주막이라. 돌아서 망견하니 제민원이 천인강감 같더라.
잠깐 쉬어 원울 고개 다다르니 이곳은 강릉원 우는 고개라.
처음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다다라 울고 하는 말이,
‘이러한 험한 땅에 원 노릇 어이 할꼬’ 또 도로 갈 때는 울고 하는 말이,
‘제일 좋은 강릉 땅을 버리고 간다’ 함으로 원울 고개라 한다더라.”
제민원은 조선시대 강릉 대창역(大昌驛)에 딸린 구산역(邱山驛)[강릉시 성산면 구산리]과
횡계역[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사이에 관원이 묵는 숙소인 제민원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면 반정에 이른다.
반정에는 주막 터가 있었고, 나그네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
이병화(李秉華)의 은공을 기리기 위한 기관이병화유혜 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가 있다.
반젱이를 지나 대관령 정상에 이르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머무는
대관령국사서낭사와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산신당이 있다.
[현황]
대관령 옛길은 예전에는 넘나들기 힘들었고, 나그네들의 애환이 많이 담겨 있는 길이지만,
지금은 많은 강릉 시민들이 아끼는 등산로이고, 또 전국 각지에서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대관령 줄기에는 능경봉, 제왕산(帝王山) 등이 있어 사시사철 등산객들이 찾아오는데,
특히 겨울철에 눈이 오면 이곳의 설경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온다.
대관령 옛길은 면적 51만 9156㎡, 해발 고도는 865m이다. 2010년 11월 15일 명승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엄마를 바우길에 모셔다 드리다... 이젠 함께 바우길을 걷고 있는 착한 따님...
대관령 옛길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11:43)
대관령 옛길로 내려선다....
대관령 / 김홍도
대관령 옛 길 중턱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12:15)
식사 후.. 출발...(12:58)
아득히 먼 옛날 대관령을 넘던 신사임당은 이 고갯마루에 올라
산 아래로 멀리 펼쳐진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향집의 노모를 떠올리고는 애틋한 마음에 젖는다.
고향인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青 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어머니의 흰머리를 학의 머리(鶴髮)로 표현한 게 특이하고,
저무는 산 위를 떠 도는 흰 구름(白雲) 조차도
어머니의 하얀 머리칼을 연상케 하는
구절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사모곡의 시다.
대관령 옛 주막터 도착....(13:43)
수정님과 하곤님...
풍접초
물소리와 함께 시원해 보이는 계곡길을 걷는다....
원추리
만개( 滿開 )하고 있는 수국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 곁을 지나간다....
원울이재 員泣峴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고개.
원울이재(員泣峴)는 옛날 대관령을 오가던 고을원이 이곳에서 쉬면서 울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원울이재는 고을원이 한양에서 강릉부사로 발령을 받고 영서에서 강릉으로 올 때 길이 험해 이곳에서 쉬면서 울고,
떠날 때는 강릉의 풍속과 인정에 정이 들고 경치가 아름다움 이곳을
떠나기 싫어 이곳에서 강릉을 돌아보며 울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원울이재는 대관령에서 내려온 야트막한 줄기로 성산면 어흘리 굴면이와 어흘리 제민원[濟民院]을 가르는 고개다.
[위치와 교통]
원울이재는 대관령 옛길 입구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내가 나오는데 그 내를 건너면 나온다. 이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아랫제명이가 된다.
[현황]
원울이재의 동쪽에는 대관령박물관이, 남쪽에는 국립대관령 치유의 숲이 있고,
북서쪽에는 가마골과 대관령휴양림이 있고, 원울이재에는 ‘대관령 옛길’ 등산로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넘나 든다.
제민원(濟民院)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에 있는 자연 마을.
제멩이[濟民院]는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출장 온 관원들이 묵는 숙소인 제민원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제멩이는 제민원이 변하여 생긴 지명으로, 제민원은 대창역[옥천동 소재]에 딸린
구산역[성산면 구산리 소재]과 횡계역[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소재] 사이에 있었다.
[자연환경]
제멩이는 제왕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쌓여있고, 마을 앞으로는 대관령 허궁다리에서 흘러온 물이 흐른다.
[위치와 교통]
제멩이는 아랫제멩이와 웃제멩이로 나눠지는데,
아랫제멩이는 대관령박물관 뒤 원울이 고개 서쪽 마을이고, 웃제멩이는 그 안쪽 대관령 옛길 주막터가 있는 지역이다.
[현황]
제멩이는 대관령 줄기를 끊어 도로를 만들기 전부터 있던 길로 영동과 영서로 다니는 길목이었으나,
지금은 대관령 옛길 등산로로 이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닌다.
리빙스턴 데이지....(꽃 이름을 전혀 모르는데... 폰으로 검색해 올리고 있는 중...ㅎ)
제민원 마을을 지나 어흘리로 향하면서....
강릉 바우길 어흘리 안내센터에 도착해서...(14:46)
어흘리 於屹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속하는 행정리.
[명칭 유래]
‘어울리다’, ‘만나다’라는 뜻인 느러리, 느르리의 소리값을 빌려 어흘리라 한다.
[변천]
원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1914년에 가마골, 문안, 반젱이, 굴면이, 망월이, 제민원을 합하여 만든 행정리다.
1955년 9월 1일에 명주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에 통합 강릉시로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어흘리는 대관령을 끼고 있는 마을로 대관령에서 내려온 산 능선들이 늘어져 있고,
삼포암, 초막골, 제멩이와 같은 경치 좋은 계곡들을 끼고 있다.
[위치와 교통]
어흘리는 대관령 밑에 있는 첫 동네로 예전에는 관로가 있었고,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다.
[현황]
어흘리에는 2016년 12월 말 현재 172가구에 367명[남 193명, 여 174]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대관령 박물관과 대관령 옛길 등산로가 있다.
대관령 옛길은 2010년 11월 15일 역사성과 경관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국가 명승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에는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대관령자연휴양림이 위치하고 있어 연중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특히 400ha의 넓은 면적에 조성된 어흘리 소나무 숲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명소이다.
1920년도에 직파된 소나무 조림지역으로 평균임령 80년,
평균수고 20m에 달하는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02년도에 284ha가 문화재용 목재생산림으로 지정되어 공익적 기능과 경제적 기능을 동시에 가진 숲으로 유명하다.
2016년에는 영동 지역 최초의 치유의 숲인 ‘대관령 치유의 숲’이 어흘리 산림 일원에 조성되어 개장되었다.
어흘리 경로당은 폭설과 폭우 등 자연재해로부터
강원도 산간지역 주민들을 지켜줄 보금자리인 ‘더 안전한 공동생활터’로 탈바꿈한다.
더 안전한 공동생활터는 삼성그룹[삼성사회봉사단]과 적십자사가 마련한
‘강원도형 안전 공동생활터 표준안’을 토대로 마을에 공동생활 터를 만드는 것이다.
평시에는 어르신들이 경로당으로 이용하고, 재난에 대비해
장비 및 구호물자를 구비해 놓아 재난 시 고립 등에 대비한 공동생활 터로 이용하게 된다.
사라님과 하곤 형님 (하곤님 얼굴이 더위에 지쳐 보인다)
날씨가 습하고 무덥고... 하여, 대관령 옛 길 걷기를 보광리 까지 걷지 않고 이곳에서 멈추기로 한다....(14:58)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신 바우님들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바람과 나 노래: 김민기 / 작사,작곡:한대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 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넘어 물결 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 볼래 지녀 볼래 물결 건너 편에 황혼에 젖은 산 끝 보다도 아름다운 아 나의 님 바람 뭇 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위로 구름 따라 뭇 여행하는 그대 인생은 나 인생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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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푹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했습니다.
이번엔 레아님 사진이 없는 것 같은데...
요즘 카메라가 고물이 되어 영 시원치 않아 많은 사진들 삭제하고 있다 보니...
다음에 제대로 담아 드리도록 노력 해 보겠습니다.
오늘도 함께 여서 모두 행복했습니다.
맘모스님...안녕하세요.
찾아 보니 물매화 같은데....상당히 앙증 맞고 귀여운 꽃 같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고...바우길에서 뵙기를....^^
@걷자(서울/강릉) 네~~~돌로미테 트레킹 중에 만난 아이입니다^^
걷자 행님의 대포사진에 감사드리고...
의리^^...로 함께해 주셔서 고맙고...
내일 다시 울트라에서 뵈어요.?
구간 지기로서 봉사와 책임....
바우님들을 위한 적절한 시간 조절...
멋지고 아름다운 리딩 이였습니다.
무쟈게 수고하셨고....내일도 즐겁게 걸어 보기로...^^
여름 감기로 빠진 게 너무 아쉽네요.
걷자님 사진으로 위안삼아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