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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한 여인의 시체가 울진의 왕피천 끝자락에서 건져올려지면서 시작한다. 첫 목격자를 비롯한 낚싯꾼들은 재수 나쁜 날이라면서도 구경을 멈출 줄 모른다. 주변 식당 주인들은 소문이 퍼져 지역의 유명 낚시터와 관광지에 발이 끊일까 이 불미스런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기로 합의한다. 입을 열 필요도 없이 눈짓만으로 이루어진 합의다. 사건에 도착한 경찰은 모여든 사람들을 쫓아내며 시체에 꼬인 파리와 구더기로 보아 물 밖에서 부패한 뒤 던져진 것으로 관찰한다.
지역 관광지는 호수에서 가까운 동굴이다. 이 동굴의 관리소장 또한 여인의 시체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중 하나다. 관리소장은 시체의 체격, 입고 있는 빨간 터틀넥이 휘하에 있던 여사원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 여사원, 강양은 전부터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 그는 복잡한 수사에 연루되기 싫어 이를 제보하지 않는다.
주인공 여자는 동굴 입구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걸어서 십 분 가량 떨어져 있는데도 호수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시체의 감각을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있다. 그녀는 호수 밑바닥에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시체들이 쌓여있으리라 생각한다. 여자의 남편은 며칠 전부터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는 남편이 실종되어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맞았길 바란다.
그녀의 일은 동굴을 직접 순찰하고 돌보는 것이다. 관리소장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그녀는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축축한 기분에 늦게 일어나 지각한 데다가, 소장은 직원이 동굴 앞에 앉아만 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폐장 시간 즈음의 동굴은 한적하다. 그녀는 동굴 안 선녀암을 향해 출구 쪽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맹수나 귀신, 박쥐 따위도 없는 동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왕피천과 이어진 동굴 속 호수로 시체의 일부가 떠내려오는 상상을 한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 형상의 바위, 선녀암 주변의 종유석은 사람의 손을 타 새까맣게 변색되어있다. 이 동굴은 옛 왕조의 전쟁 때 500여 명 주민들이 피신했던 곳으로, 당시 적군은 입구를 바위로 막아버렸다. 동굴 내에선 줄곧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관리소장은 도청, 군청에서 사람이 찾아올 때를 빼곤 동굴 안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동굴에 대해 가진 지식은 입장료 구분 뿐으로, 동굴 내 조명 등 시설물을 관리하는 건 여자다. 그녀는 선녀암이 있는 동굴 광장의 석순과 종유석들이 유해가 분해된 뼛가루로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마시는 공기에 뼛가루가 섞여 있다고 상상하며, 조명을 끄고 선녀암에 기대앉은 그녀는 삶과 죽음 사이 헷갈림을 느낀다.
관광객들은 어둠 속 그녀의 존재를 지나친다. 그녀는 동굴에 있어야하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종유석을 자르곤 했다. 톱을 구해다 준 것은 벽돌공이던 남편이다. 무거운 벽돌을 지느라 어깨가 푸르스름한 남편은 2년째 마라톤에 빠져 4시간 안 풀코스 주파를 삶의 목표로 삼았다. 서울의 코스로 향한 그는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오늘이야말로 실종 신고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마라톤의 까마득한 거리에 비해 구체적인 시간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여자는 그게 실존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한때, 남편은 제니퍼라는 고양이를 길렀다. 남편은 나비라고 부르지만 여자는 “아무 이유 없이” 제니퍼라 부르곤 한다. 남편은 제니퍼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죽여 돌아왔다. 제니퍼가 야생 고양이에게 물려 고통스러워 하길래 죽였다는 것이다. 제니퍼의 머리를 내리치던 것처럼 남편은 여자의 머리를 내리치곤 했다. 그의 폭력은 규칙이나 인과가 없었다. 여자는 그럴 때마다 비명을 지르지만 아프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이다. 여자는 남편에게 자신을 사랑해서 때리는지 물었다. 계속되는 폭력에 그녀는 명확한 이유가 없는 행동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여자는 제니퍼를 쳐다보다가 남편에게 목을 졸려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축축한 지린내 속에 깨어나 남편이 떠난 것을 확인했다. 그가 서울로 떠났으리라 믿는 여자는 더이상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머리가 멀쩡한 제니퍼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고양이의 파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제니퍼를 끌어안고 친숙하나 기분 나쁜 축축함을 느낀다.
남편은 숲 속에서 제니퍼에게 쥐 사냥을 가르치곤 했다. 그는 가장 무서워해야 하는 건 자신을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이며,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먼저 덮쳐야 한다고 설파했다. 제니퍼는 거실에 쥐 한 마리를 물고와 내장을 헤집어 놓았다. 남편은 이를 지켜보는 여자에게 먹이를 핥거나 이리저리 옮겨놓는 것이 고양이의 습성이니 징그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여자가 참을 수 없는 건 죽어가는 쥐가 아니라 제니퍼의 시뻘건 혓바닥이다.
제니퍼는 이불에 누운 여자의 몸을 핥는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자신을 공격하기 전 위장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만 그 축축함에 안심하고 잠에 빠진다.
여자는 선녀암 옆에 서있다 차가운 물방울에 맞아 비명을 지른다. 순간 그녀 쪽을 본 관광객들은 이내 아무도 없다며 뒤돌아간다. 동굴 밖에 나온 여자는 관리소장과 맞닥뜨린다. 관리소장은 얼마 전부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지각에 정리도 다 하지 못했기에 고개를 수그린다.
출입구에서 안전모를 대충 정리하던 그녀에게 얼굴이 창백한 아이가 나타난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는 정말 동굴에 500명이 죽어 있는지 묻는다. 여자는 동굴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린애들을 꼬신다고 대답한다. 여자가 자신은 그들의 노래도 부를 수 있다고 하자 아이는 왜 죽은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묻는다. 여자는 아이의 입에서 익숙한 악취를 맡는다. 그녀는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인식하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산자나 죽은 자나 똑같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여자를 쳐다보다 코를 틀어막고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여자는 아이가 사라졌는데도 악취가 옅어지지 않음을 의아해한다.
사무실, 관리소장은 여직원을 하나 추천해달라며 전화를 걸고 있다. 소장은 출근하지 않는 여직원, 강양이 왕피천의 시체와 닮았다는 사실과 이를 일부러 경찰에 알리지 않은 사실을 전화에 털어 놓는다. 그는 이런 동굴 앞에서 혼자 표를 받는 신세를 불평한다. 여자는 자신이 오고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소장을 뒤로 하고 왕피천의 시체가 있던 자리로 향한다.
여자는 경찰이 이송해간 시체를 남편과 연관짓는다. 어디선가 죽었다면 남편도 벌거벗겨져 부검되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경찰이 남편의 푸르스름한 어깨만 보고 누군가에게 구타당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우는 과정을 상상한다.
여자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맞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입고 다니는 목이 긴 스웨터를 갈아입고 제니퍼가 어질러놓은 방을 정리한다. 창을 열어둔 집에서는 악취에 파리가 꼬여 있다. 금방 축축해지는 옷을 재차 갈아입다가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집 안을 뒤진다. 곳곳에서 구더기가 꼬인 쥐 사체가 나온다. 그러던 중 마라톤 중 남편의 모습이 담긴 앨범을 찾아낸다.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벽돌을 진 듯 무겁던 남편과 달리 가볍고 밝은 얼굴의 남편은 다른 사람같다고 느낀다.
마라톤을 연 신문사에 전화해보니 40km 지점 이후로 경주 기록이 없다. 그 지점까지 준수한 페이스를 유지하던 남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다른 사진들에서 도착점을 통과하는 남편은 근심없이 행복해 보인다. 행복한 모습의 사진을 꺼내려는 그녀의 손을 구더기 한 마리가 기어 오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구더기들이 그녀의 몸을 오르자 여자는 화장실로 달려가 양치질을 한다. 여자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으며, 악취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자는 웃음을 흘기며 제니퍼를 쓰다듬는다. 제니퍼가 쥐들이 소리죽여 다니는 숲으로 나가고 싶어한다고 생각한 여자는 바깥 문을 열어준다. 어쩌면 이미 밤의 숲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여자는 축축한 구더기들의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오이가든』 전체의 사상, 문학적 해설은 이미 단편집 후반에 실려있다. 특히 상징물 체계 면에선 내 감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 분석에는 최대한 「문득, 」에 고유한 요소들과 내 감상만을 담고자 한다.
한 이야기의 시작이 여인의 시체가 호수에서 건져지는 것이라면, 독자로선 살해한 범인 또는 죽음의 경위가 밝혀지는 결말을 기대할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 추리물의 방향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독자 스스로 결론지을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내려놓았다. 내가 짚고자하는 점은 이러한 복선을 주제와 연결하여 전달하는 기법이다.
나는 이 단편의 주제를 인식과 그 과정의 혼선이라고 바라본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암시할뿐만 아니라 기법에 녹여 전달했다. 줄거리를 정리하며 읽었을 때 특유의 서술 기법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시로 관리소장이 주인공 여자를 앞에 두고 여직원을 요청하러 전화하는 장면이다. 본문을 읽다보면 소장이 자연스레 여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에 강양과 호수 시체에 대한 얘기를 주인공 여자에게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다른 장면들에서도 중의적 서술로 정말 소장을 비롯한 타인이 여자를 보지 못하는 것인지 인식을 흐려놓곤 한다.
주인공 여자는 남편에게 맞으며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사는 데 이유가 없으니 때리는 것에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며 남편의 폭력을 이해한다. 이런 대목만을 보면 그녀는 세상에 대한 인식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듯 하다. 하지만 언행을 곱씹어보면 그녀에게 인식은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동굴 앞에서 만난 아이에게-
“산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죽은 사람도 사람이야. 자기가 살아 있다거나 죽었다고 느끼는 건 어느 한 순간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아, 내가 살았구나, 아, 참, 내가 죽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구. 그 순간을 제외한다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 살고 있는거야.”
-라고 말하니, 이 대사는 결말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한 순간의 인식 속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깃든다고 믿는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인식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타인에 대한 인식은 뒤로 물러나 있다. 주인공 심리 중심의 3인칭 전지적 시점은 타인의 인식에 다가갈 수 없고, 은연중 접근을 원치 않는 그녀의 모순을 녹여낸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 아래 등장인물들은 어떤 관계를 맺을까? 먼저 타인과 평행선을 그리는 주인공의 인식체계를 보여주는 관리소장을 살펴보겠다. 단지 경찰 수사가 귀찮을까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로 한 그는 여자를 인식하러 들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여자도 소장을 그렇게 인식하며, 그녀는 마지막까지 소장을 “정신이 어디 붙었는지 사람이 오고 나가는 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라고만 판단한다. 그의 무반응이 여자의 생사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는 단서라는 사실은 독자에게만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서로 겉에만 맴돌며, 그 이상 필요도 느끼지 못한 인식의 단념을 보여준다.
여자의 남편의 관계는 주제에 어울리게 얽힌 실타래다. 그와 여자의 관계, 인식의 혼선은 제니퍼를 통해 설명된다. 둘은 집고양이의 이름을 달리 부른다. 남편의 심리는 제니퍼에게 쥐 잡는 법, 잡아야하는 이유를 가르치는 장면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그가 제니퍼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는 널 두려워하는 상대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다. 여자와 남편의 뒤틀린 관계를 단번에 요약하는 대목이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인식할 수 없기에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는 맞을 때 비명을 지르는 이유를 “아프거나 겁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고 독백한다. 이 해석 내에서 여자의 고통은 신체적 폭력 너머 서로를 향한 인식의 혼선에 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아내가 먼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포기했기 때문인지 등의 의문은 여자가 받아들인 인과관계의 부재로 이어진다. 한 인물 중심 시점으로 독자가 기대하는 객관적 진실(이야기 내 설정된 가상의 진실과 해소)에 다가갈 수 없으며, 순환원을 그리는 혼선의 연속만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남편이 마라톤만큼은 활짝 웃으며 임하는 것도 설명될 수 있다. 여자는 구체적인 시간과 까마득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거리가 한데 뭉친 마라톤을 인식할 수 없다고 독백한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혼선으로 망가진 관계 밖, 유일하게 뚜렷한 직선의 주로가 놓인 일탈인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 제니퍼는 일차적으로 여자와 남편 사이 매개체다. 여자가 남편과 달리 제니퍼라 부르는 것, 여자가 남편이 있는 동안 제니퍼에 반감을 가졌던 것 또한 서로를 받아들어야 이상적일 관계에서 뿌리뽑힌 인식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이면에 있는 관계를 살펴보자. 제니퍼는 여자가 동굴 앞에서 만난 창백한 아이와 함께 그 존재 자체가 상징물인 ‘캐릭터’의 예시다. 결말에서 여자는 입고있는 터틀넥이 물에 빠진 여인과 판박이로 축축하며, 자기 자신이 악취의 근원이며, 거울에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여자가 마지막으로 다른 존재를 위해 하는 행동은 밤의 숲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이다. 초반에 남편의 손에 죽었다는 제니퍼는 여자가 ‘죽은’ 뒤 오히려 생생히 살아난 듯 그녀를 따른다. 제니퍼는 이러한 변신 후 여자를 인식하고, 나아가 눈동자를 비춰주는 장면 등에서 그녀의 인식을 돕는 존재가 된다. 독자는 고양이의 심리가 얼마나 깊을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이라는 동질성에 여자의 상태를 이해한다 볼 수 있다. 밤의 숲은 제니퍼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이며, 남편의 시선으로 볼때 두려워하기에 두려워해야하는 쥐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제니퍼는 야생 고양이에 의해 심한 상처를 입고, 가르침을 주던 남편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여자가 제니퍼를 이러한 장소로 보내주는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 지금까지 해석 내에서도 다양한 갈래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여자가 돌이킬 수 없는 인식의 혼선과 모순에서 벗어나 죽음에 닿을 수 있도록 제니퍼를 보내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지막 주연, 창백한 아이는 작중 초월적 존재로 여자에게 홀연히 나타나 인식의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아이와 여자의 대화가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장면임은 이미 위에서 다뤘으니 아이가 사라지는 동굴에 대해선 상징물 체계 분석에서 부연하겠다.
우선「문득, 」은 관념 추리물이라 규정하고 싶다. 이 단편에선 호수에 여인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결과에서 원인에 다다르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작가는 의도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개인이 자신 속에 갇힌 상황을 기법 자체에 녹여낸 시도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단편은 여자가 축축한 침대에서 일어나 동굴로 출근한 뒤 창백한 아이를 만나고 제니퍼가 기다리는 집에서 죽음을 인식하는 하루로 현재, 그 사이에 과거 남편과의 일화가 삽입된 구조를 띄고 있다. 오늘날 특별하다 할 수 없지만 주제의식을 짊어지며 효과와 이유가 확실한 시간 구조다. 내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주변 사물들을 연계하며 의식의 흐름이 과거로 통하는 구조이며, 외적/주제 측면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어 여자의 죽음, 남편이 떠난 곳이 서울인지, 언제 떠난 것인지 등 작중 시공간에 대한 뚜렷한 인식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다. 거듭 언급했지만 이 불확실함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로 강화된다.
현재 공간은 여자의 평소 일과라 짐작할 수 있는 집, 동굴, 다시 집으로 모아지고, 과거 공간에 밤의 숲과 남편이 떠났다는 서울의 마라톤 코스에 대한 언급으로 확장된다. 현재 공간은 일상 속에 흘러가는 듯 하지만, 중간에 들어간 밤의 숲과 마라톤 코스가 상징하는 인식의 탈출구로 인해 다른 의미가 보이게 된다. 동굴은 앞서 직접적이고 생생한 묘사로 죽음이 깃든 장소임을 확고히 하지만, 집이라는 장소는 과거를 거쳐 다른 색깔을 띄게 되는 것이다. 독자가 자연스럽게 현재의 집이라는 장소도 죽음과 통함을 깨닫게 되는 집약형태다.
다른 인물과 비교해 작가의 의식이 가장 표면화된 인물, 창백한 아이는 유해가 쌓여있는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여자 생각에 동굴은 죽은 자들, “종유석과 석순들은 그들의 뼈로 더 단단해졌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장소다. 여자는 줄곧 아이 입에서 악취가 풍긴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아이가 “코를 틀어막고”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인식의 혼선을 풀어야 함을 알려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아이는 동굴 속 죽은 자들, 또는 인식을 통한 해소를 상징한다고 본다. 그것이 타인과 성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든, 죽음이라는 개인의 종말을 통해서든 말이다.
정황 상 여자는 침대 위에서 남편에게 목을 졸려 목숨을 잃었다. 여자는 정신을 잃었다 축축한 침대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식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준점으로 여자의 인식이 새로워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침대에서 순환의 끝을 맞는다는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여자의 침대, 제니퍼의 숲과 함께 동굴은 꼬인 인식체계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 중 죽음을 상징하며, 여자에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은근히 설득하는 장소다. 위에서 언급했듯 제니퍼와 아이, 악취, 축축함도 이 범주에 속한다.
남편의 일탈, 마라톤도 벗어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지만 죽음에 비해 일시적이다. 말 그대로 해소가 아닌 일탈이기에 마라톤에서 돌아온 후에도 여자를 향한 폭력은 끊일 수 없다. 게다가 이러한 일탈은 포괄적일 수 없고 남편이라는 개인의 인식체계에만 적용할 수 있다. 이는 결말 부분에서 행복한 듯한 남편의 사진을 꺼내려다 죽음을 인식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연결되며, 사진에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든다. 웃는 남편의 사진은 개개인 신념 속에서만 이해되는 인식 탈출의 창으로, 여자가 이를 붙잡으려다 작중 영구적 해소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탈마저 곧바로 타인에게 적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편혜영의 초기작 중 「문득, 」은 죽음을 궁극적이며 완벽한 망각이요, 삶에서는 얽히고 설킨 인식을 푸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을 표현한다. 어두운 주제의식을 기법에 녹여내는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으리라, 그리고 직접 창작의 흐름을 따라가며 더욱 이해도를 높일 수 있으리라 기대해 이 단편을 필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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