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 노블일지에 기록된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의 죽음
세상에 부족한 것은 단 하나 사랑이다!
우리 사는 세상은 자원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은 식량과 에너지 위기를 알리는 언론과 각종 홍보 매체에 날마다 노출되고 세뇌되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나라의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이 물, 식량, 에너지, 기타 원자재 확보를 위하여 전쟁과 폭력을 불사하는 것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수긍한다. 전문가들의 말대로 과연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 식량, 에너지가 부족한 것일까?
성서는 이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한다.
천지가 창조•형성되는 초기 과정부터 지구가 인간이 살만한 곳으로 완성되어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경탄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빛, 하늘, 물, 땅, 해, 달, 별, 바다, 식물. 동물’ 등은 지구 자원의 충분함과 다양성과 재생산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따라 인간이 사는 지구별이 지속 가능하도록 공생공존하며 지구생명공동체. 생태공동체를 일구어 왔다. 인간이 출현한 이래로 지구별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사람들의 집이고 밥이며 옷이었다.
문제는 사람이다! 소위 성서가 말하는 영웅들이다. 힘이 센 자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이웃마을과 도시를 파괴하며 대대적으로 학살하며 살아남은 자들을 노예삼고 땅을 빼앗아 사유화 하였다. 지구별은 무한 탐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나뉘고 찢기며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었으며 원수를 증오하고 약자를 괴롭히며 권모술수를 써서 승자가 되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며 출세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자체가 사랑의 식탁이므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만나처럼 세상은 말씀대로 거두며 함께 나눌 때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약육강식 논리에 사로잡힌 인간의 사회는 창조의 에너지인 사랑을 거부하고 탐욕과 경쟁을 일삼아 자원을 낭비하며 사랑으로 선 순환하는 자연생태계 파괴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악과 죄악의 에너지가 하늘과 땅과 사회에 만연하여 기후 이변과 지구 내부 활동의 가속화 되며 폭우, 폭설, 폭풍, 폭염, 혹한, 가뭄이 몰아치고 화산과 지진과 쓰나미가 빈번해진다. 게다가 그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미생물들이 번성하여 지구차원의 전염병이 창궐한다. 사람들은 지구를 흔드는 불안과 공포, 불확실과 불투명 때문에 더욱 이기적이 되어 자기 자신과 가족, 자기 집단과 기업, 자기 민족과 나라만을 위하며 더욱 경쟁적으로 십 년, 이십 년, 백 년 먹을 것을 저장하면서 눈앞의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을 외면한다. 집 없고 병든 자들을 무능하고 게으른 자들로 매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빈곤과 죽음으로 황금의 바벨탑을 쌓으며 모든 자연 재해와 이변에도 안전한 자신들의 천국을 구축한다. 그리고 언론과 각종 홍보 매체를 이용하여 자원부족을 설파하며 물, 식량, 에너지 확보를 위한 전쟁과 강탈, 테러까지도 미화시키며 정당화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의 승자들이 만든 약육강식의 세계, 탐욕으로 지옥이 된 세상에 오셨다. 사랑의 부재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세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오셨다. 그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세리와 창기, 실패자와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다가 사랑 때문에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죽으셨다. 그의 십자가 사랑이 무너지는 파괴에 직면한 우주 질서를 바로 잡았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의 피 값으로 죄악에서 벗어난 새 사람들, 치유와 회복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사랑을 거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세상에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행렬을 이루었다.
1999년 1월 인도 오딧사에서 불에 타 죽은 그라함 스테인 선교사가 그러하였다. 그는 오딧사에서 20년 동안 나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보듬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힌두들이 그가 시내로 나왔을 때 그의 운전사를 협박하여 도망치게 하고 그와 그의 두 아들 필립과 디모데를 차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그의 순교 소식은 전 세계로 전달되어 그의 거룩한 사랑이 추모되었다. 사람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의 아내에게 남편을 불태워 죽인 나라에서 떠나 편히 살라 권하였으나 그는 떠나지 않고 나환자들 곁에 남았다. 그는 남편처럼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전 세계에서 사랑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이 오딧사에 몰려들어 오딧사에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1890년대 조선에 온 선교사들 중에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사망한 선교사들이 여러 명 있다. 그들의 사랑으로 복음이 조선팔도에 널리 퍼졌고 드디어 1907년에는 대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노블일지⌟1)에는 1891년에 조선에 와서 1894년 11월에 소천한 윌리엄 제임스 홀 박사의 환자들을 위한 희생적인 봉사와 죽음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1894.11.21. 홀 박사, 몸져눕다
윌리엄 제임스 홀 박사가 발진티프스에 걸렸다. 몹시 걱정된다. 홀 박사는 (청일전쟁에 참전하여 죽은) 중국인들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평양에서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치료하며) 너무 과로한데다가 (전염병에 걸린 조선인들의 치료를 위해) 시골까지 무리하게 오가면서 병에 걸린 것이다. 홀 박사와 마펫 씨(말라리아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중이다), 테이트 씨는 두 주일 전쯤에 평양을 떠나 기선을 타고 제물포2)에 내려서 다시 배를 타고 이곳(마포)까지 오던 중 배가 모래톱에 끼는 바람에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너무 시달린 끝에 홀 박사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고, 결국 병상에 누워 지금까지 심하게 앓고 있다. ⌜노블일지⌟, 74쪽
#1894.11.26. 홀 박사의 죽음
홀박사가 11월 24일 토요일 저녘 6시 15분에 영면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위중한 상태였고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아직 그가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을 때 그는 아서3)에게 자신은 살 수 없을 거라고 더듬더듬 말하고는 “어린 양의 피로 닦인 문을 열고 들어가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전염의 우려가 있어서 그를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시신은 어제 매장됐다.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 다수와 많은 한국인들이 강가까지 따라왔고 그곳에서 아서의 인도로 장례 예배가 치러졌다. 스크랜턴 박사4)가 기도를 했다. 이번 주에 추모 예배가 있을 예정이며, 아서가 인도하기로 했다. 아서와 홀 부인, 버스티드 박사는 간병과 장례를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강변5)에는 현재 여덟 개의 무덤이 있다. 여섯 개는 지난 1년 반 사이에 생긴 것이다. ⌜노블일지⌟, 74,75쪽
#1898.5.12. 홀 박사의 아내, 로제타 박사 다시 조선에 오다
홀 부인, 닥터 로제타가 아들 셔우드, 딸 에디스와 함께 2일에 평양으로 왔다. 이들은 집이 다 완성될 때까지 우리집에서 머무를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배에서 설사로 고생했고, 홀 부인은 이질로까지 발전했다. 지금은 나았지만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셔우드는 말라리아를 앓고 난 뒤 회복됐지만, 어린 에디스는 이질을 심하게 앓으며 누워 있다. 지금은 아서가 살피고 있다. 폴월 박사와 웰스 박사가 들러서 돌보아주고 있다. 루스와 셔우드는 밖에서 장난을 치며 즐겁게 놀고 있고, 아기 메이는 설사로 고생하고 있다. 모두들 곧 좋아질 것으로 믿는다. 조선 사람들은 홀 부인이 돌아와서 무척 기뻐하고 있다.
⌜노블일지⌟,102,103쪽
그러나 홀 박사의 유복녀인 두 살배기 에디스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홀 박사는 사랑 때문에 죽었다.
그의 아내 로제타 박사는 그의 사후 미국으로 돌아가 유복녀인 에디스를 낳았다. 그는 의사로서 셔우드와 에디스를 키우며 미국 생활에 안주할 수 있었지만 남편이 사랑했던 평양을 잊지 못하였다. 1987년 11월, 드디어 네 살인 셔우드, 두 살인 에디스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1898년 5월 1일에는 염원했던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고 5월 23일에 에디스가 이질로 죽는 고통을 겪는다.
로제타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조선을 사랑하고 평양을 사랑한 대가가 너무 컸다. 그러나 그는 남편과 딸이 묻힌 슬픔의 땅을 떠나지 않고 그들이 못다한 사랑의 몫까지 살기로 다짐하고 아무도 가려고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였다.
그는 천덕꾸러기인 맹아들을 위해 ‘평양맹학교’를 개교하였고 이어서 ‘평양외국인학교’를 열었다. 평양 광혜여원에서 근무하며 자신이 발탁하여 키운 조선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 (김점동)와 함께 오지를 순회하며 병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였다. 1908년 화재로 소실된 광혜여원을 신축하였고 1910년에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료인 박에스더를 결핵으로 잃었다. 평양농학교를 설립하였고 1912년에는 광혜여원 안에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1918년에는 조선에서 교육받은 첫 여의사 3인을 배출하였고 1921년에는 동대문부인병원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인천에 부인병원을 개원하였다. 1926년에 회갑연을 개최하였고 1928년에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발기를 하였고 해주에 구세병원을 착공하였으며 9월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원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개설하였다.
43년 동안 숨 가쁘게 사랑의 길을 달려온 그는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온 아들 셔우드와 며느리 메리언을 남기고 1933년 10월에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사랑 때문에!
로제타는 조선의 불편과 고통을 감당하였다.
조선의 가난과 질병을 끌어안았다.
조선의 여성과 맹인들을 품었다.
사랑 때문에 남편과 딸을 잃었다.
청일전쟁, 노일 전쟁에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멸망, 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조선의 여성인재 양육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탄식하지 않았고
몸소 사랑이 되어 세상을 섬기며 풍성하게 일구었다.
지구는 그리스도 뒤를 따라 사랑 때문에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포기하고 겸허히
자신을 세상에 밥으로 바칠 사람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 사람이 바로 너이고 나이길 소망한다!
2023.1.7.토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노블일지 - 1892년에 남편 아서 노블 선교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매티 윌콕스 노블이 목격한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42년간의 기록에서 발췌하여 강선미와 이양준이 번역, 이마고에서 펴낸 책이다.
2) 제물포 - 인천의 옛 지명
3) 아서(노을지) - 1892년 매티 윌콕스와 결혼하여 1892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 3년간 배재학당 교사. 홀 의료선교사 소천 이후 1896년부터 15년 동안 평양에 거주하며 선교. 평양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멸망 과정을 친히 목격한 선교사로 1934년 은퇴할 시 까지 평양 및 서울지방, 수원지방 감리사로 사역함.
그는 사역 초기에 풍토병으로 2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의 장녀 룻은 아펜젤러의 맏아들로 배재학당의 교사이자 교장이었던 헨리 다지 아펜젤러와 결혼하였고 두 부부가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4) 스크랜턴 박사 (시란돈) - 1885년 미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병원, 상동병원을 세웠고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덕기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를 길러 냈다. 1895ᅟᅧᆫ 콜레라가 대유행일 때 에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로서 성성한역통일회 회장이 되어 성서번역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 선교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해리슨감독과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난 직산, 줄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서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 1922년 소천하였다.
5) 강변 -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으로 선교사 묘원이 있다.
*에피소드 – 소년 그라함 스테인을 만났다!
2012년경에 케랄라 산골짜기에 갔는데 어떤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그라함 스테인”이라고 소개하였다. 내가 순교한 호주 선교사의 이름이라고 말하자 이름에 담긴 사연을 말해 주었다. 그는 호주선교사의 순교소식을 듣고 오열을 터뜨리고 있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순교자를 가슴에 담고 자기와 아들이 그처럼 사랑으로 살기를 사모하는 마음에 그를 잊지 않고자 아들의 이름을 ‘그라함 스테인’으로 명명하였다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하였고 십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