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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9-16절.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고 세례를 줌
9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ose who were with me saw the light, to be sure, but did not understand the voice of the One who was speaking to me.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οἱ δὲ σὺν ἐμοὶ ὄντες, τὸ μὲν φῶς ἐθεάσαντο,
those then with me being, the indeed light beheld
‘있는’(ὄντες)은 현재분사이고(being), ‘보면서도’(ἐθεάσαντο)는 부정과거로서(beheld) ‘보았다’는 뜻이고, 분명히 본 것을 가리킵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τὴν δὲ φωνὴν οὐκ ἤκουσαν τοῦ λαλοῦντός μοι.
the but voice not did they hear of the (One) speaking to me
직역하면 ‘그러나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그들이 듣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는’(λαλοῦντός)은 현재분사이고(speaking), ‘듣지 못하더라’에서 동사(ἤκουσαν)는 부정과거로서(did they hear) 듣지 못한 과거의 분명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울과 함께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던 군사들은 예수님의 임재로 인한 큰 빛은 보면서도,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동행자들이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는데, 9장 7절에서는 <동행하는 사람들이 소리만 들었다>고 한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즉 동행자들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우레 소리 같이 들었으나 무슨 말씀인지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동행하는 군사들은 정오의 햇빛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초자연적인 빛과 우레 같은 소리는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만일 군사들이 예수님이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었다면, 바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소리를 듣고 바울을 배신자로 체포했을 것이고, 아나니아도 체포해서 바울이 기독교인 아나니아와 내통하여 유대교와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 나라를 배반했다고 고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많은 군사들이 있었지만, 바울만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집단적으로 부르신 경우도 있지만, 성령님께서는 각자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르십니다.
특별히 바울의 경우는 많은 군사들이 함께 있었지만, 주님이 바울만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때 바울을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님 믿었다는 군인이 없습니다.
10절.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said, 'What shall I do, Lord?' And the Lord said to me, 'Get up and go on into Damascus, and there you will be told of all that has been appointed for you to do.‘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εἶπον δέ, Τί ποιήσω, Κύριε;
I said then, what should I do, Lord?
직역하면 ’주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라고 그 때 내가 말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리이까‘에서 동사(ποιήσ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이고(should I do), ’내가 말했다’(εἶπον)는 부정과거로서(I said) 확실하게 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ὁ δὲ Κύριος εἶπεν πρός με
the then Lord said to me
직역하면 ‘그러자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동사(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said) 분명하게 말씀하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Ἀναστὰς, πορεύου εἰς Δαμασκόν,
having risen up, go to Damascus
‘일어나’(Ἀναστὰ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risen up) 단호하게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고, ‘들어가라’(go)는 현재 명령형으로서(go) 다메섹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κἀκεῖ σοι λαληθήσεται περὶ πάντων ὧν τέτακταί σοι ποιῆσαι.
and there you it will be told concerning all that it has been appointed you to do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너에게 지정된 해야 할 모든 것에 대해서 네가 듣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너에게 지정된’에서 동사(τέτακταί)는 완료 수동태이고(it has been appointed), ‘해야 할 모든 것’에서 동사(ποι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do) 꼭 해야 할 것을 가리키고, ‘네가 듣게 될 것이다’에서 ‘네가’(σοι, you)가 강조되어 있고, 동사(λαληθήσεται)는 미래 수동태입니다(it will be told).
1.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즉시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님을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즉 바울이 <주님>(Κύριε)이라고 부른 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אדני: my Lord: 나의 주님)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을 감히 직접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호칭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시자, 바울은 즉시로 나사렛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 아도나이:אדני) 즉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대반전입니까?
예수를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생각했었는데, 바로 그 분이 구약시대부터 섬겨온 ’‘호와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정말 180도 대반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박멸하려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러고선 바울은 주님께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오순절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즉 오순절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회개하면서 <어찌할꼬?>라고 했고,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한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늘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주님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회개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그대로 다메섹에 가서 성령 받고 새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만일 주님이 복수의 하나님이라면, 바울에게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가서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한 후에 유대인들을 강제적으로 예수 믿게 하고, 안 믿는 사람은 잡아 가두든지 죽이든지 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믿음을 갖게 하시지, 강제적인 방법으로 믿음도 없이 기독교인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예수쟁이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에 들어갔으나, 거꾸로 예수 믿고 성령 받으려고 다메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전이요 반전입니까?
2.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다메섹에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제 바울에게 성령 받고 새사람 되기 위해서 다메섹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바울에게 안수하고 성령 받게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시지 않고, 예수님이 택한 일군을 통해서 안수하고 말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주의 일을 하실 때, 주의 일군들을 통해서 일을 해가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자서 성령 받았다고, 정당한 신학 절차와 노회 수속을 밟지 않고, 혼자서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교회를 설립하는 사람은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어떤 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 믿었더라도, 주의 종들에게 안수도 받고, 부교역자로 사역도 하고, 훈련을 통해서 올바른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지도와 훈련만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개인적으로 받아야 하고, 또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되어야 합니다.
11절.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since I could not see because of the brightness of that light, I was led by the hand by those who were with me and came into Damascus.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ὡς δὲ οὐκ ἐνέβλεπον ἀπὸ τῆς δόξης τοῦ φωτὸς ἐκείνου,
while now not I could see from the brightness of the light that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에서 동사(ἐνέβλεπον)는 미완료과거로서(I could see) 계속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χειραγωγούμενος ὑπὸ τῶν συνόντων μοι
being led by the hand by those being with me
‘나와 함께 있는’에서 동사(συνόντων)는 현재분사이고(being with), ‘손에 끌려’에서 동사(χειραγωγούμενος)는 현재분사 수동태로서(being led by the hand) 손에 계속 끌려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ἦλθον εἰς Δαμασκόν.
I came to Damascus
동사(ἦ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I came) 다메섹으로 갔다는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햇빛보다도 더 밝은 빛 속에서 주님을 만나본 바울은 육신의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햇빛만 보아도 시력을 잃게 되는데, 햇빛보다도 훨씬 더 밝은 빛을 보았으니, 바울의 눈이 온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망막을 덮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망막을 두꺼운 막이 감싼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안구를 보호하시기 위한 보호조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세상 빛을 잃음으로써, 신령한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눈이 밝아서 맨날 텔레비젼이나 컴퓨터만 보면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고, 세상눈이 어두워지면, 늘 하늘나라 바라보고 기도하므로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들을 이끌고 왔던 바울이 이제는 군사들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과거에는 자기 힘으로 걸어가서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이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감으로써 사명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의 손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적인 것과 신령한 것은 반비례합니다.
즉 세상눈이 너무 밝으면 신령한 눈이 어둡고, 세상눈이 어두워지면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너무 지도적인 위치에 있으면,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또한 육신적으로 병들면 더욱 하나님을 찾게 되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고, 육신이 건강하면 세상 향락만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세상 재물에 부요하면 하나님께 대해서 가난하지만, 오히려 세상 제물이 가난하면,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한 것을 봅니다.
바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가 그런 사람입니다(눅 21:4).
그러나 먼저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고 난 후에 주님이 복으로 주신 건강과 재물과 지위는 축복이 되어 주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쓰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 말씀에 은혜 받아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복된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12절.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 certain Ananias, a man who was devout by the standard of the Law, and well spoken of by all the Jews who lived there,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Ἀνανίας δέ τις ἀνὴρ εὐλαβὴς κατὰ τὸν νόμον,
Ananias then certain man devout according to the law
직역하면 ‘율법에 따라 경건한 어떤 사람 아니니아가’란 뜻입니다.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μαρτυρούμενος ὑπὸ πάντων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Ἰουδαίων,
being given good report by all the dwelling Jews
‘칭찬을 듣는’(μαρτυρούμενος)는 현재 분사 수동태입니다(being given good report).
‘사는’(κατοικούντων)은 현재분사입니다(dwelling).
1. 아나니아란 사람은 원래 율법에 따라 모든 경건 생활에 흠이 없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교에 철저했던 아나니아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아나니아가 철저한 유대교인이면서도 예수님을 믿은 사실은 바울 이외에 또 다른 한 사례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아나니아의 경우는 지금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교 골수분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오순절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군중들은 ’어찌할꼬‘ 하면서 예수 죽인 일을 회개하고, 예루살렘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핍박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자기처럼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으라고 간증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처럼(행 22:18) 바울의 전도에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퍅해져서 바울도 죽이고 기독교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유대교인들은 철저한 반기독교 운동가들로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철저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극적으로 전향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잘했는데도, 성령님이 바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하니까, 가기를 무서워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확실한 것은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에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바울에게 가서 안수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는 무척 고민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을 믿고 바울에게 가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의 말씀을 믿고 바울에게 가서 안수할 것인가?
아마 아나니아는 내가 환상을 잘못 보았고, 성령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기독교인을 체포하러 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갑자기 바울이 기독교인으로 전향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인간적인 틀림없는 사실보다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다메섹 성내의 직가(strait street)란 거리의 유다의 집에 가서 바울을 만나서 안수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바울에게 충만히 임하고, 바울의 장님 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바울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감동을 순종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came to me, and standing near said to me, 'Brother Saul, receive your sight!' And at that very time I looked up at him.
내게 와 곁에 서서
ἐλθὼν πρὸς ἐμὲ καὶ ἐπιστὰς,
having come to me and having stood by,
‘내게 와’에서 동사(ἐλθὼ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ome) 확실하게 온 것을 가리키고, ‘곁에 서서’(ἐπιστὰ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tood by) 곁에 선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말하되
εἶπέν μοι
he said to me
직역하면 ‘그가 내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동사(εἶπέ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확실히 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Σαοὺλ ἀδελφέ, ἀνάβλεψον.
Saul brother, see again
‘다시 보라’(ἀνάβλεψ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see again) 확실하게 다시 보라는 말입니다.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κἀγὼ αὐτῇ τῇ ὥρᾳ ἀνέβλεψα εἰς αὐτόν.
and I the same the hour looked up at him
직역하면 ‘바로 그 시간에 내가 그를 쳐다보았다’는 뜻입니다.
‘쳐다보았노라’(ἀνέβλεψα)는 부정과거로서(looked up) 확실하게 쳐다본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아나니아는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직가(strait street)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찾아가 바울에게 안수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9:10-11).
그러자 아나니아는 주님께 바울이 자기 같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온다는데, 어떻게 바울 앞에 스스로 찾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전도자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바울에게 찾아가서 안수해주었는데, 이 때 바울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했습니다(행9:17-18).
그러자 바울은 즉시 눈이 다시 보여서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형제>라고 호칭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러 온 원수 바울이 예수 믿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로 변한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원수도 친구로 변합니다.
14절.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said, 'The God of our fathers has appointed you to know His will and to see the Righteous One and to hear an utterance from His mouth.
그가 또 이르되
ὁ δὲ εἶπεν
the and he said
‘이르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Ὁ Θεὸς τῶν πατέρων ἡμῶν προεχειρίσατό σε
the God of the fathers of us chose you
‘너를 택하여’에서 동사(προεχειρίσατό)는 부정과거로서(chose) 과거에 분명히 택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γνῶναι τὸ θέλημα αὐτοῦ
to know the will of Him
직역하면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너를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알게 하시려고’(γνῶ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now) 확실히 알게 하시려고란 뜻입니다.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καὶ ἰδεῖν τὸν Δίκαιον
and to see the Righteous One
직역하면 ‘또한 그 의인을 보게 하시려고’ (너를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보게 하시려고’(ἰδεῖν)도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ee) 확실히 보게 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καὶ ἀκοῦσαι φωνὴν ἐκ τοῦ στόματος αὐτοῦ,
and to hear voice from of the mouth of Him
직역하면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시려고’ (너를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듣게 하시려고’(ἀκοῦσαι)도 역시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ear) 확실히 듣게 하시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부정사형 동사를 결과적인 용법으로 번역한 잘 된 번역입니다.
1.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같은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조상들을 특별히 자랑하고, 조상들이 섬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청중들에게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말을 하면, 유대인들은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조상들이 섬긴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을 택하여 지도자로 삼으신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을 당신의 종으로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쌍둥이 에서와 야곱 중에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선악을 알기 전에 이미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롬 9:13).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중에 모세를 택하여 구원자 해방자로 삼으셨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할 줄 몰라서 민족 해방자의 일을 못 한다고 거절을 했어도,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자 해방자로 선택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여덟 아들들중에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택하여 사용하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바울을 택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천만인 가운데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2.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바울같이 원수로 대적하는 죄인 괴수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란 오직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노력해서 잘 지켜야만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가르쳐주신 사상은 ‘은혜주의’요 ‘주권사상’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은혜주의(복음주의)와 유대교인들의 율법주의는 항상 대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의 말대로 할례를 받지 말라고,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쓸 때 바울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구원받은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특히 바울에게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주의 신앙을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율법주의 성도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게 했고,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을 대적하여 분파운동을 했습니다.
3.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의인>이란 나사렛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인>이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자기 백성을 죄악에서 건져낼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처럼 아나니아와 바울이 예수님을 <그 의인>이라고 지적한 것은 예수님이 백성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나, 백성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의인이요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죄인으로서 저주를 받은 자인데,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의인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죄수로 오해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봄으로써 예수님이 의인임을 믿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 청중들에게도 예수님이 죄수가 아니라 의인이요 구세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4.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선택하시고,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신 데 이어서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확실히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체험한 것처럼,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 복음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고 들은 것을 바울은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중생한 체험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유대교인들이 예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핍박했을 때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시라>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4:20).
그러므로 우리들도 어떤 핍박이 있더라도, 담대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구세주라고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15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you will be a witness for Him to all men of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증인이 되리라.
ὅτι ἔσῃ μάρτυς αὐτῷ πρὸς πάντας ἀνθρώπους
for you will be witness for Him to all men
직역하면 ‘이는 네가 그 분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증인이 되리라’에서 동사(ἔσῃ)는 미래형입니다(you will be).
네가 보고 들은 것에
ὧν ἑώρακας καὶ ἤκουσας.
of what you have seen and you heard
직역하면 ‘네가 본 것과 들었던 것에 대해서’란 뜻입니다.
‘보고’(ἑώρακας)는 완료형으로서(you have seen) 이미 들은 것을 가리키고, ‘들은’(ἤκουσας)은 부정과거형으로서(you heard) 과거에 확실히 들은 것을 뜻합니다.
<그를 위하여>란 바울이 이제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란 9장 15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되도록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습니다.
뒤에 21절에서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란 말을 듣고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없애버리자고 할 정도로 이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란 말에 예민해있었습니다.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 되신 것을 본 것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 ‘네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증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증인>은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에 대해서 재판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증언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증인이 증언을 잘못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에 치명타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증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피해자는 증인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증인은 목숨 걸고 진실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요 구세주란 사실을 증언하지 않으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처럼 <증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구세주>이심을 진실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이 영생주시는 분임을 분명하고 진실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증언에는 목숨의 위험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구세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증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증인의 사명을 땅끝까지 이르러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16절.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why do you delay? Get up and be baptized, and wash away your sins, calling on His name.‘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καὶ νῦν τί μέλλεις;
and now why delay you?
’주저하느냐‘(μέλλεις)는 현재형으로서(delay you) 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일어나
ἀναστὰς
having arisen
’일어나‘(ἀναστὰ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arisen) 단호하게 일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례를 받고
βάπτισαι
be baptized
’세례를 받고‘(βάπτισαι)는 부정과거 명령형 중간태로서(be baptized) 자기를 위해서 단호하게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καὶ ἀπόλουσαι τὰς ἁμαρτίας σου,
and wash away the sins of you
’씻으라‘(ἀπόλουσαι)는 부정과거 명령형 중간태로서(wash away) 자기를 위해서 단호하게 죄를 씻으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ἐπικαλεσάμενο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calling on the name of Him
직역하면 ’그 분의 이름을 불러‘란 뜻입니다.
’불러‘(ἐπικαλεσά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 중단태로서(calling on) 자기를 위해서 단호하게 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왜 주저하느냐?
바울처럼 큰 죄를 지은 죄인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사람을 폭행하고,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이름을 모독하라고 강요했던 죄인 괴수라도 죄 용서를 받은 것은 어떤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모델 케이스>가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5-16절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2. 일어나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와서 낙심하고 크게 후회하고 있지만,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고, 용서와 사랑 가운데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너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라는 복음성가도 있습니다.
3. 주의 이름을 불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 10:13, 행 2:21).
즉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제단을 쌓는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가는 곳마다 예배의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고, 모세나 사무엘이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4.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물세례는 예수님을 주님(여호와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한 사람에게 줍니다.
바울은 이미 10절에서 나사렛 예수님을 주님(여호와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성령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으니, 물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세례는 성령세례와 죄 용서에 대한 확증으로 베풀어줍니다.
이러한 물세례는 예수님이 단번에 완전히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일생에 한 번 받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우리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항상 성령으로 속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9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핍박자요 폭행자인 바울이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세례를 받고 주의 종으로 일한 것을 보고, 우리들도 희망을 가지고 늘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주의 일을 계속 충실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를 받고, 성공적으로 살아가시며 주의 일도 충성스럽게 감당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