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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지연전(공군 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전쟁 발발 당시에 우리 공군은 숫적 열세가 문제가 아니라 공격기를 한대도 보유하지 않았다. 전황정찰 및 연락임무를 하는 정도의 수준이였고 7월 2일에 일본에서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F-51 전투기 10대를 대구기지로 이동시켰다.
그러니 북한군의 공군은 폭격기라 하면 우리는 훈련기라 조종사가 손으로 포탄을 들고 적에게 투하하는 웃기는 작전으로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포탄을 소모하는 수준이였다. 그러다 F-51 전투기기 역사적으로 7월 3일 첫 출격을 하여 대지공격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초기부터 북한공군은 남한의 주요 비행장과 철도역 등 교통시설을 파괴하여 왔다. 이에 맥아더 사령부는 6월 29일 38도선 이북까지 항공작전지역을 확대하고 미 제5공군과 해군 7함대 소속 제77특별 기동대가 함재기로 평양과 온정리 비행장을 타격한다.
미극동 공군은 일본의 이다즈케, 아시야기지를 활용하여 항공작전을 지원하고 대구, 포항, 수영기지 활주로를 확장하였다. 7월 10일에 대구에 제51전투비행대대를 창설하여 7월 15일부터 출격하고 7월 16일에는 F-51무스탕기로 기종을 전환한 제40전투요격대를 포항기지로 이동시켜 항공작전을 하도록 하였다.
미 극동공군은 7월 8일에 요꼬다기지에 포격사령부를 창설하고 미 전략공군의 2개 폭격전대와 미 극동공군의 1개 포격전대 및 1개 대대를 배속시키고 F-51무스탕기 145대 등의 항공 전력이 한국에 전개 되었다.
제 2 절 북한공군 작전
전쟁 발발 당시 북한 공군은 병력 2,800명, 전투기 조종사 약 80명, 전투기 84대, 저공습격기 113대, 기타 29대였으며 이에 반해 국군은 별력 1,897명, 조종사 64명 경항공기 22대(L-4 8대, L-5 4대, T-6 10대)의 전력으로 대단한 열세였다.
1. 북한공군 활동
북한 공군은 지상군과 해군이 38도선을 넘어 전면적인 남침공격을 개시한 지 6시간이 지난 6월 25일 10:00경 YAK전투기 2대가 여의도와 김포기지 상공을 정찰 비행하고 정오가 되면서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항공작전을 개시하여 여의도와 김포기지, 용산역, 서울 철도공작장, 기관사 운전 사무소등이 파손 되었다. 이때 김포기지의 미항공수송단 C-54수송기 1대, 여의도기지의 T-6ㅣ 1대가 파손 되었다.
6월 26일부터 27일어간에도 공군기지와 철도역에 대한 공습은 계속 되었고 6월 28일은 YAK전투기 14대가 김포와 수원기지를 공습하여 미 공군기 9대를 파괴하였다. 특히 29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전용기인 "바탄"호로 수원기지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수원농대에서 상황보고를 받을 때에 야크기 4대가 수원기지를 공습하였고 미 제22공수대대 소속 C-54수송기가 파괴되고 또 1대가 격추되는 등 피해를 입혔다.
이와같이 북한공군은 첫 5일은 남한의 비행장과 교통시설을 공격하여 약간의 성과는 거두웠으나 객차를 이용한 철도수송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2. 북한공군의 김포전개 및 전술변화
미 공군의 북한내 공습은 미 공군 B-26경폭격기 18대가 이날 16:15에 처음으로 평양기지를 폭격하고 제20공군 B-29중폭격기 10대가 7월 2일 연포기지를 그리고 해군 제77특별기동부대가 7월 3일과 4일 평양과 온정리 비행기지를 강타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7월 초 김포기지를 복구하고 YAK전투기 일부를 위장하여 김포기지로 전진 배치하여 7월 10일에는 진천지역의 국군 제19연대를 공습하고 7월 11일에는 청주 북방에서 지상군을 공격하고 일부는 미군 F-80전투기 편대를 공격 하였다.
7월 12일에는 북한공군의 활동이 최고조로 야크기 7대가 서울근교의 군사목표를 공격 중인 미 제19폭격전대를 공격하여 B-29 1대가 격추되고 15:00경에는 조치원 부근 전선에서 기총공격중인 미군전투기를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미극동공군은 7월 15일 제5공군과 포격사령부 항공전력을 투입하여 김포기지를 다시 사용 못하도록 파괴 하였다.
제 3 절 한국공군 작전
1. 부대철수 및 재편성
공군은 6월 27일 정오경 여의도기지에서 트럭 10대와 지프차 1대를 이용하여 공군본부를 출발 수원중학교에 도착하고 28일 북한군에 서울이 함락되자 다시 수원역을 출발하여 17일 대전으로 이동하고 여기서 다시 7월 15일 대구로 철수한다.
공군비행단은 이근석 대령이 6월 26일 F-51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다른 9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출발하자 김정렬 준장 공군참모총장이 비행단을 직접 지휘하고 여의도기지에 위치한 비행단은 북한군이 미아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까지 출격을 계속하다 6월 27일 19:30분경에 수원기지로 이동하고 후방요원들은 트럭에 분승하여 수원중학교로 향했다.
여기서 6월 28일 T-6건국기와 L-형 항공기를 분리하여 작전하기로 결정하여 대구로 이동하게 되는데 미국 무쵸대사의 전보를 받고 수원으로 올라온 김정렬 총장은 미공군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T-6기는 대전에, L-형 항공기를 수원에 배치하게 되며 북한군의 진출에 따라 축차 이동하게 된다.
이후 공군은 7월 2일에 대구기지에 도착한 10대의 F-51전투기를 지원하기 위해 비행단은 대구기지로 이동하게 된다.
한편 6월 28일 공군 헌병대는 수원기지 경비업무를 수행하던중 20명의 대원으로 이른비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의도기지"를 공격하여 탈취하고 태극기를 올리기도 했다.
2. 항공작전
가. T-6 및 L-형 항공기의 작전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은 T-6기를 3개 편대로 편성하여 전선일대를 정찰한 후, 6월 25일 19:00부터 연습용으로 확보하였던 30파운드(15kg) 폭탄을 싣고 해주, 포천, 동두천, 및 개성 방면의 북한군 전차, 차량 및 병력 등에 목측으로 폭탄을 투하하였다.
6월 27일 포탄 274발을 모두 사용함에 따라 6월 28일부터는 부득이 정찰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비행단은 6월 29일 육군으로부터 한강철교 폭파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6월 30일에 이강화중위가 육본 정보국장 이종국 대령을 T-6기 후방석에 탑승시켜 여주 방면 전투 상황을 정찰한 후에 용산 상공으로 진입하여 한강인도교는 파괴 되었으나 한강철교는 중앙에 있는 경부선복선철교는 아직 파괴않았음을 알려주고 기수를 영등포 방면으로 돌리는 순간 북한 YAK기 3대의 추격을 받았으나 그 순간 미 공군 F-80전투기의 출현으로 수원기지에 불시착하는데 성공한다.
6월 30일에는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가 L-5기 1대에 동승하여 노량진 일대의 적정을 정찰하다 적의 대공포탄에 피격되어 애기와 함께 산화하였다. 이는 공군 조종사 중 최초의 희생이었다. 지금 한강 인도교 중앙 난지도에 우뚝하게 서 있는 동상이 바로 고 이경복 상사 상이다
나. F-51전투기의 인수 및 작전
현재 보유중인 비행기로는 남하하는 적 전차를 파괴할 수가 없다. 북한군 T-54전차를 파괴할 무기는 5"로켓포나 250kg 폭탄을 투하할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6월 26일 수원기지에 도착한 미 극동공군 사령관과 참모들과 협조결과 10대의 전투기를 지원받기로 하고 10명의 조종사를 미 공군 C-54수송기 편으로 21:00에 수원기지를 이륙하여 일본 규슈지방 이다즈케기지로 갔다.
여기서 간단한 이론 교육과 실전조종훈련을 악화된 기상으로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미군 측에 요구하여 7월 2일 오전 10대의 F-51전투기를 조종하여 대구기지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7월 3일 한국공군 사상 최초로 태극표식을 한 F-51전투기로 역사적인 출격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제1차로 10:30분에 시흥으로 출격하여 북한군 대열에 기총소사를 하고 14:15엔ㄴ 이근석 대령이 직접 4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노량진에 있는 탄약집적소를 공격하고 적 전차와 병력수송 트럭을 살상하였다.
7월 4일에는 육군의 요청으로 서울 서빙고, 시흥지구 북한군을 공격하였으며 11:00에 안양일대에 북한군 전차가 집결한다는 정보를 받은 이근석 대령 팀은 목표상공으로 출격하였다. 먼저 기총사격을 하며 급강하 하는 도중에 대공포화가 이근석대령 애기에 명중하여 이근석 대령은 화염에 휘감긴 애기와 함께 적진에 돌입, 전사하였다.(현충원 장군 묘지에 안장 되어 있음)
이때까지의 우리는 기총만으로 북한군을 공격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7월 3일부터 14일까지 총 60소티를 출격하여 탱크 4대, 차량 9대, 탄약집적소 5개소, 연료집적소 4개소 등을 파괴하고 적병 205명을 살상하였다.
다만 애기와 창군멤버인 이근석 대령이 산화 하였지만 그 희생이 빛을 발하여 미공군과 협조하여 7월 16일 이후부터 한.미 합동으로 이루어지고 한국 공군에 로켓탄이 보급 되었다.
제 4 절 유엔공군 작전
1. 미 극동공군의 작전준비
가. 미 극동공군의 전력
미 극동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던 1944년 6월 15일 호주에서 창설된 후 1945년8월 일본의 항복으로 9월 도쿄에 사령부를 두게 되었다.
미 극동공군의 주력부대인 제5공군은 5개 비행단으로 편성되어 6개 전폭대대, 5개 요격대대, 2개 폭격대대, 2개 공수대대를 보유하고, 제13공군은 3개 전폭대대와 1개 공수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20공군은 4개 요격댇대와 3개 폭겨개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F-51전투기로 무장한 호주공군 제77비행대대가 이와꾸니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50. 5월 31일 현재, 미 극동공군의 총 보유항공기는 보관용과 정비를 요하는 항공기를 포함하여 1,172대였다. 이중에 즉시 작전가능한 항공기는 총 보유기의 절반도 안 되는 553대다.
나. 미 극동공군의 전술부대 재배치 현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선에서 효과적인 항공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제트전투기의 항속거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 내에 있는 비행기지로 이동하는 문제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개전 직후 김포와 수원기지를 상실하게 되어 미 제5공군이 사용할 수 있는 비행기지란 대구, 수영, 포항뿐이었고 그나마 상태가 좋지 못하여 확장공사를 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미 제5공군은 한국 내의 비행장 활주로 확장공사를 추진하는 하편, 미 제24사단이 천안에서 철수한 7월 8일 F-51전투기로 무장한 전투대대를 한국의 기지에 두려는 계획을 굳혔으며, 이는 대구에서 출격하여 지상군에 적절한 항공지원 및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F-51전투기 1대가 일본 규슈에서 출격하는 F-80전투기 4대와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2. 항공작전
미 공군교리에 명시된 전술공군의 임무는 제공작전, 후방차단작전, 지상군 근접항공지원작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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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공작전
미 극동공군이 6월 27일 공수작전을 수행 중 북한 YAK기 5대가 김포기지 상공에 출현하였으나 수송기를 엄호하던 F-82전투기 5대가 이들을 격추하여 한국전 최초의 공중전 승리의 기록이 되었다. 오후에도 4대가 격추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에 미 트루만 대통령은 극동군사령곤에게 38선 이남의 공중 및 지상 군사목표를 공격할 권한을 부여 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7일 첫번째 수송기가 한국땅에 들어왔으며 김포에서 250명, 수원에서 313명, 부산에서 375명을 공수하였다.
계속되는 적의 야크기는 6월 29일 하룻만에도 6회의 공습을 가해왔으며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에서 상황보고를 받고 있는 도중에도 접근하여 수원상공에서 F-51전투기들이 YAK기 4대를 격추하였다
북한공군은 파괴된 김포비행장을 복구하고 야크기 7대를 위장하여 전개함으로써 지상군으로써 단거리에서 기습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7월 6일 한국공군의 표지기로 위장한야크기가 오산의 통신중계소를 파괴하고 7월 10일~11일에는 진천과 청주지역에서 우리 지상군에 공습을 가하였다.
7월 12일에는 좀더 적극적으로 북한공군은 서울근교에서 공격중인 B-29중폭격기 1대를 격추하고 조치원부근에서도 F-80편대를 기습하였으나 연료부족으로 유엔공군은 추격하지 못했다.
나. 후방차단작전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6월 29일 미 극동공군에게 한국군이 파괴하지 못한 한강복선철교의 폭파를 지시하였다. 또한 38도선 이북의 북한비행장을 파괴하도록 극동공군전력의 북한진입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6월 29일 제19전폭대대의 김포기지와 서울역에 대한 폭격이 성공적으로 진행 되었고 제5공군은 B-26경폭격기로 한강철교를 복개공사중인 북한군을 공격하여 복개된 복판교량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제3폭격전대는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38도선 이북의 평양비행장을 6월 29일 B-26기 18대를 출격시켜 평양비행장의 격납고와 할주로 등에 500kg 이상의 폭탄 300발을 투하하여 7대의 적 항공기를 불태우고 많은 수의 병력과 무기고를 파괴하였다.
"한국전 제1의 태형의 계곡 : 한강철교 복구지연전"
미극동군 사령부는 계속되는 적 지상군의 압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38도선 이북으로 들어가는 공군전력을 지상군 앞에 사용토록 강조함으로써 공군과의 마찰을 일의키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는 조치임에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섰다.
6월 30일부터 모든 공군역량을 한강북쪽의 이동목표에 집중토록 제20공군에 명령되었다. 이에 따라 제19폭격전대 B-29중폭격기 15대가 출격하고, 제3포격비행단 B-26경폭격기 18대를 서울 주변 북한군 병력과 수송행렬을 공격하도록 한다.
이날 30일 오전 서울 한강철교를 정찰하던 제31정찰대대의 정찰간 한강복선철교를 건너려고 줄을 잇고 서있는 북한군의 전차, 트럭, 차량들을 발견하고 연락하여 B-26경폭격기들이 나란히 비행하면서 모든 화력을 총 동원하여 폭격하여 복개공사가 끝나지 않아 앞으로 빠지지도 못하고 뒤로 빠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7월 1일에도 제19폭격전대 B-29중폭격기 12대가 한강철교를 폭격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지연시켰다.
7월 3일에는 최초로 전투에 참가한 미 극동해군 제7함대 항공모함 벨리포지호에서 해군 제77특별기동부대가 7월3~4일 이틀간 평양과 온정리 비행장, 대동강 교량을 폭격하였으며 계속하여 미 극동공군의 전력이 북한의 비행장, 항만시설, 탄약고 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제19포격전대의 B-29중폭격기는 4주간의 매일 폭격에도 한강철교를 파괴하지 못하고 50일 여 일만에 함재기 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었다.
이때 북한군은 게속되는 미 제5공군의 폭격 때문에 한강철교를 도하하지 못한 대신 서울 동남부에서 탱크와 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도하하였다.
공군본부, UN공간사 상권에 기술된 내용을 보면 극동군 사령부는 한국에 대한 작전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작전계획이 없었으며 미 극동공군 또한 전쟁 개시 약 1달이 지나도록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후방차단작전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동 책자에 의하면 당시의 전쟁 상황이 아군의 정확한 위치 파악도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목표를 선정하더라도 육군 연락기 조종사들이 그 지역에 아군이 있기 때문에 항공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한다.
다. 근접항공지원작전
맥아더 사령관은 미 백악관의 결정에 따라 6월 27일 18:00에 수원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미극동군 공군에게 38도선 이남의 북한군과 전차, 포 등 모든 군사목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6월 28일부터 제5공군 전술기들이 공습을 전개하였다. 6월 29일 북한군 제6사단이 김포기지를 점령하고 북한군 공군기들이 서울 남쪽의 철도역, 비행기지, 문산지역, 국군 제1사단 전투대열을 공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에 미 극동군 공군은 6월 29일 B-26경폭격기들이 한국군 지상군에 대한 근접지원을 할 것이라 성명을 발표하고 F-82전투기가 처음으로 북한군 진지에 하염폭탄 대용으로 연려탱크를 떨어트려 네이팜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피아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운 지상전투 상황 때문에 미 극동군사령부는 7월 1일 공식 폭격선을 한강남안을 따라 설정하고 이 폭격선 북쪽의 목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없이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백색 표식판에 태극기를 휴대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북한군도 같은 방법을 취하여 조종사의 주관적 판단으로 공중에서 한국군을 시별해야 했다.
결국 그러 한 불상사가 발생하여 호주공군 제7전투비행대대 소속 F-51전투기 5대가 7월 3일 오산과 수원사이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되어 공격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에 최초로 투입된 미 제24사단 스미스부대는 7월 1일 오후에 부산에 공수되어 트럭과 철도편으로 대전을 경유하여 북상하자 7월 3일 전술항공통제반이 이 부대와 합류한다.
미 극동공군은 각종 전투기와 폭격기로 한강 이남지역에서의 모든 이동목표에 대한 폭격임무를 용이하게 수행함으로써 미 지상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종사들은 주로 로켓과 네이팜을 사용하면서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였다. 이런 결과로 숫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미 극동공군의 지상군 지원이 북한군의 진출속도를 지연시키고 부산과 포항으로 들어오는 부대들의 전개 시간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에프의 보고서(1권 P194)에 의하면 "적의 항공활동 강화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는 항공기 공포증이 만연하게 되었다. 보병은 저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보유화기로 격추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에 따라 적 항공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주선인민군 대열을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군 제6사단이 천안에서 우회하여 7월 11일 이동을 개시하여 7월 12일 아침 6시에 무렵 유구리에 지역에 도달하였다. 서해 연안을 따라 에산, 홍성, 서천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3보병연대는 예산부근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적 항공기들은 제6사단의 이동대열을 발견하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였다. 사단은 야간이 될 때가지 기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