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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산악회 장거리 종주 팀, 지리산 거대종주 계획 A 코스인 '거림탐방지원센터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장터목대피소 → 천왕봉 → 중봉 → 써리봉 → 치밭목대피소 → 무재치기폭포 → 대원사 → 유평탐방지원센터 → 유평주차장'의 24km 구간을 12시간 동안 달릴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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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국립공원
1967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 국립공원공단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가장 넓은 산악형 국립공원인 지리산은 서쪽 끝 노고단에서 동쪽 끝 천왕봉에 이르는 주 능선의 길이만 25.5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다. 물론 노고단이나, 천왕봉도 일단 올라야 하니, 실제 주 능선 종주 거리는 40km가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접속 구간 선택에 따라서는 가장 짧은 성삼재에서 시작해 중산리에서 끝내는 성중 33.6km 구간도 있고, 가장 긴 미수산에서 시작해 덕두산에서 끝내는 태극 92.4km 구간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차를 타고 성삼재까지 올라가는 게 무슨 지리산 종주냐고 취급하지 않는 예도 있으나, 두 꼭짓점을 잇는 걸 종주라 여기는 산꾼이 많은 만큼 성중 또는 그 역 또한 종주임은 분명하다.
물론 천왕봉에서 다시 장터목으로 내려와,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성백 또는 그 역인 백성 또한 종주다. 과거에는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으로 바로 내려가는 종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 아쉽다. 하지만, 지리산을 좋아하는 고집 센 산꾼은 화엄사에서 시작해 대원사에서 끝내는 화대가 아니면 지리산 종주 취급하지 않기도 한다. 어쨌든 노고단과 천왕봉의 두 꼭짓점을 잇는 종주가 아니라, 안내산악회가 활성화되면서, 천왕봉이 포함된 산행은 다 종주라 칭하고 있다. 그래야 등산객에게 상품을 팔 수 있어, 이해는 한다. 해서, 백무동에서 시작해 중산리로 하산하는 백중, 그 역인 중백 또한 종주라는 이름으로 산행 신청을 받고 있다. 뭐 그러려니 하는데, 와중에 안내산악회 산행 게시판에서 거림에서 시작해 대원사에서 끝내는 ‘거대종주’라는 걸 발견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2023년 5월 산방이 끝나자, 무박으로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달리는 화대가 아니라, 그 역인 대원사에서 화엄사까지 달리는 대화가 유행해, 거의 매월 산악회 버스가 출발했다. 어떤 때는 두 대가! 물론 그 종주에 구미가 당기기는 했으나, 무박으로 주어진 시간 내 화대든 대화든 종주할 자신이 없어, 그 산행 신청자들의 놀라운 체력에 감탄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열기도 9월이 지나 사라지더니, 갑자기 거림에서 대원사까지 달리는 ‘거대종주’라는 이름의 산행이 등장했다. 해서 안내산악회 과거 기록을 확인해 보니, 최초의 거대는 2021년 6월로 전혀 새로운 산행은 아니다. 다른 건 관심 없으나, 천왕봉에서 대원사 코스는 1989년 이후 달린 적이 없어, 늘 한 번 다시 가 보고 싶었던 구간으로 안내산악회 게시판만 주시하고 있던 차라, 거대를 발견한 2023년 9월 14일 바로 신청했다.
와중에 주행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흥수와 둘이, 2023년 10월 1일~2일 벽소령 대피소에서 1박 하며,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벼르고 별렀던, 화대를 달렸다[산행기]. 고로 ‘거대종주’라는 이름의 산행은 필요가 없어, 화대 직전 취소했다. 그런데, 화대를 다녀온 이후 종주에 자신이 생겼고, 천왕봉에서 대원사 구간을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어, 다시 ‘거대종주’를 신청했다. 그리고, 거림에서 대원사까지 24km를 12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을지 사전 테스트를 위해, 2023년 11월 11일 거림에서 삼신봉을 거쳐, 고운동재까지 달리는 낙남정맥 1구간 산행에 참여했다[산행기]. 낙남정맥 1구간 산행은 지리산 외삼신봉에 오르는 게 첫 번째, 거림에서 세석까지 2시간 30분 내에 올라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게 두 번째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2시간 10분이 걸려 세석 대피소에 도착해 거림에서 대원사까지 12시간 내에 주파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이후 산방 등 다양한 이유로 몇 번의 연기를 겪은 후, 해를 넘긴 2024년 1월 8일 심야에 서울에서 출발해, 거림으로 간다. 덕분에 신년 산행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2024년 청룡의 해 두번째 산행으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다는 건 나름 의미 있는 산행이다. 그런데, 거대가 몇 번 연기되는 바람에 화요 무박으로 지리산을 다녀오고, 수요일 하루 쉰 다음 천고지인 인제 한석산을 올라야 하는 최악의 일정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를 취소하기에는 두 산행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크다. 해서 아직 성원을 채우지 못한 ‘거대종주’가 그대로 다시 한차례 연기되기를 바랐으나, 선배 산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원을 채우는 바람에 정상 진행이다.
성원을 채워 출발은 확정됐으나, 갑자기 산행 당일 전국적인 비나 눈 예보다. 물론 지리산은 눈이다. 해서, 안내산악회가 다시 한차례 연기하기를 바라며, 차라리 대설경보나 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기를 바라는 중이다. 하지만, 일요일인 1월 7일 산악날씨에 의하면, 산행이 끝난 후인 20시부터 눈이라, 이틀 사이에 커다란 변동이 없는 한 산행과는 무관한 눈이다. 어쨌든 출발은 기정사실이고, 당일 기온은 영하 4도에서 영상 4도, 바람은 2~3m/s, 종일 구름 낀 날씨라, 전망은 꽝일 거로 예상된다. 20시부터 눈이라는 예보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천고지라 심설에 대비해 준비한다. 그리고 산에서 해결해야 할 두 끼 중, 한 끼는 불광역표 김밥, 다른 한 끼는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물론 산행 후 거대종주 산행이 정상 출발하게 한 선배 산꾼 셋과 유평에서 늦은 점심을 겸해 하산주를 마실 계획이다. 그래서 셋이 손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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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박 산행이라, 달리는 버스에서 깊이 자기 위해, 수면제와 함께 저녁을 먹고, 22시 45분경 집을 나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을버스를 타고 불광역으로 달려, 22시 55분 불광역에 도착해, 김밥집으로 바로 가, 아침을 될지 점심이 될지 모를 김밥을 샀다. 이후 역으로 내려가, 23시 5분 열차를 타고, 사당역에 23시 45분경 도착해, 바로 출구로 나갔다. 그리고, 숙면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 들른 후 국립외교원 앞으로 가, 지정석에서 건너편 등산객을 관찰했다. 24시 정각에 국립외교원 앞에서 떠나는 산악회 심야 버스는 ‘지리산 종주’와 ‘100섬&산의 연대도’ 두 대라,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11시 57분 앞창 LED에 '지리산 종주'가 반짝이는, 타야 할 버스를 선두로 두 대가 들어왔다.
출발 몇 시간 전, 단독 좌석에서 두 자리가 빈 옆 좌석으로 자리를 변경해, 배낭을 짊어진 채 '지리산 종주'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친숙한 인솔 대장과 선배 산꾼들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로 가, 배낭을 옆자리에 벗어 둔 후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이후 가장 편한 자제로 잠을 청했다. 와중에 휴게소에 20분 쉬겠다는 인솔 대장의 방송이 있었으나, 무시하고 계속 잤다. 물론 많이 잔 거 같아, 실눈을 뜨고 버스 전면의 시계도 몇 번 봤으나, 실제 잔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도착 예정인 4식까지 많아 남아, 이후는 모든 걸 무시하고 잤다. 그리고, 도착 20분 전쯤 실내등이 들어오고, 인솔 대장이 도착이 멀지 않았으니, 몸을 풀고, 등산 준비를 하라는 방송에 눈을 뜨고, 등산화로 갈아 신은 후 끈을 조이고 스패츠를 착용했다. 4시 정각 버스가 들머리에 도착해, 배낭을 둘러메고 차에서 내린 후 등산 앱을 기동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야, 작년 11월 11일 외삼신봉에 오르기 위해 비슷한 시각에 도착했으니[산행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다시 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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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선두를 보며, 미리 기동한 앱으로 현재 고도를 확인했다. 630m, 작년 11월 11일은 600m! 앱이 문제인가, 핸드폰이 문제인가, 아니면 GPS? 어쨌든, 천왕봉이 1,915m니, 1,300m를 올려야 한다. 1,300m면 한국에서 19번째로 높은 옥갑산 높이와 같다. 어쨌든 새벽 4시라, 랜턴 빛에 의지해 올라가는 거라, 보이는 게 없어, 찍을 것도 없어, 그저 앞만 보고 세석평전으로 향해, 4시 8분 거림 탐방센터를 통과한 후, 5시 10분경 더위를 견디지 못해 바람막이 안에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5시 23분경 첫 번째 쉼터에서 '탐방로 안내'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계속 올라가자, 들머리에서는 눈은커녕 어름도 보지 못했는데, 고도가 1,200m 넘자, 주위가 온통 하얗고, 등산로 곳곳이 빙판으로 바뀐다. 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아이젠을 꺼내 착용했다.
6시 4분 세석평전에 들어선다는 '세석교'를 지나자, 아랫배가 슬슬 아파진다. 처음 생각은 세석 대피소에 도착해, 큰일을 치를 생각이었으나, 도저히 더는 못 갈 상황이라, 등산로에서 벗어, 숲으로 들어가 일을 치렀다. 그리고 6시 29분 청학동 갈림길 이정표를 통과하고, 6시 37분 세석 대피소 아래, 보조 식수대에 도착해, 준비한 혈압약을 먹었다. 이후 다시 길을 재촉해, 6시 41분 세석대피소 갈림길에 도착해, 대피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세석에서 아침은 너무 이르고, 여기서 먹었다가는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어, 장터목에서 먹기로 하고, 대피소를 지나쳐, 6시 43분 세석 갈림길에서 우회전해 촛대봉으로 향했다. 촛대봉 옆으로 보이는 초승달을 기록으로 남기며 위로 가자,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이 어둠 속에 동영상을 촬영해 봐야 의미도 없어, 그대로 올라가, 7시 정각에 촛대봉에 도착했다.
촛대봉 명패를 붙이고 있는 이정표를 지나, 장터목 방향으로 향하자, 저 멀리 구름에 쌓인 천왕봉이 보인다. 늘 욕을 먹더라도, 일기예보가 그런대로 맞는다. 그것도 기록으로 남기며 계속 가자, 오른쪽으로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다. 기대하지 않은 일출이라, 가던 길을 멈추고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무명봉에 올라서, 뒤를 돌아보니, 구름에 쌓인 반야봉이라, 그 모습을 파노라마로 남겼다. 이후 다시 진행 방향으로 보니, 연화봉과 천왕봉 오른쪽 옆으로 해라, 그 모습을 파노라마로 남겼다. 정말 기대하지 않은 일출이다. 그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기고, 지리 10경 중 연하선경으로 유명한 연하봉으로 향하다, 가끔 뒤로 돌아, 지나온 촛대봉의 모습을 감상하고 그것도 기록으로 남기며 가는데, 7시 51분 앱이 연하봉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촛대봉처럼 이정표 기둥에 명패가 붙어 있는 연하봉을 기록으로 남기고, 제석봉과 천왕봉을 바라보며 전진해, 7시 59분 장터목대피소 0.4km 이정표를 지났다. 주어진 12시간 내 거대종주 주파에 자신이 없어, 산행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8시 30분경 장터목을 떠날 수 있으면, 장터목대피소에서 아침으로 라면을 끓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광역표 김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피소까지 남은 거리가 400m에 불과하다면, 늦어도 8시 10분에는 도착할 수 있어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버스에서 인솔 대장이 중산리 중탈 마감을 천왕봉 기준 9시 30분이라고 못을 박았고, 그 기준이다. 사실 작년 화대종주를 통해 장터목에서 대원사까지 구간별 소요 시간에 관한 경험이 있어, 대장이 언급한 중탈과는 무관하게 하산주 시간 1시간 30분을 고려해도, 10시까지 천왕봉에 도착하면 된다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앙상하나,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장터목대피소와 제석봉, 천왕봉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며 전진하는데, 8시 7분경 앱이 반응을 보인다. '응, 정상도 아닌데, 무슨 배지?' 궁금해서 폰을 꺼내 앱을 확인했다. 장터목 반경 50m 내란다. 대피소도 인증 대상인가? 어쨌든 그걸 캡처하고, 앞에 보이는 장터목대피소 또한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오른쪽으로 보이는 남해와 지난 목요일 다녀온 하동 금오산의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8시 9분경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리고, 기상 후 혈압약 외에는 먹은 없고, 와중에 장을 깨끗이 비워, 당이 부족했는지, 갑자기 양발 종아리에 쥐가 나,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해서, 취사장 조리대에 앉아, 종아리를 주물러 쥐를 쫓아내고, 부족한 당을 채우기 위해 서둘러 라면을 끓일 준비를 했다..
일단 마시기 위해 가져온 500mL 생수를 코펠에 부어 물을 끓이는 동안, 빈 병에 마실 물을 채우기 위해, 지난 화대종주 때 보고 놀란, 취사장 옆 식수대로 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식수대가 없어졌다. 겨울이라 동파를 염려해 아예 철거한 거 같다. 해서, 40m 아래에 있는 식수대로 내려갔지만, 수도관이 얼어 물이 안 나오는 대신, 식수대에는 매점에서 생수를 판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겨울 장터목에 많이 왔지만, 식수대가 얼어 물을 받지 못한 건 처음이다. 국립공원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시판용 생수에 모든 걸 맡기고, 식수 관리를 엉망으로 한다는 방증이다. 어째 나라가 갈수록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거 같아 씁쓸하다. 세석의 보조 식수대처럼, 아예 관리라는 걸 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 두면 얼지도 않고 24x7 연중무휴로 약수가 흐르는데! 40m 아래 식수대가 있음에도 취사장 옆에 식수대를 만드는 뻘짓하는 걸 보고 예측한 바지만, 그 예상이 적중한 게 짜증 날 뿐이다[산행기].
그렇다고 대피소 매점에서 생수를 살 인간이 아니라, 어차피 물도 거의 안 마시고, 집에서 뜨겁게 만들어 온 차가, 보온병에 있으니, 그걸 믿고 일단 치발목까지 간 이후, 혹시 물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계곡물로 생수병을 채우기로 했다. 어쨌든 마실 용도로 들고 온, 500mL 생수로 라면을 끓여, 면을 다 먹은 후, 테스트용 작은 햇반을 남은 국물에 넣고, 다시 팔팔 끓였다. 그리고 남은 김치를 다 넣고, 돼지죽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나자, 당을 채워서 그런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종아리의 아픔이 싹 가셔, 살짝 놀랐다. 이후 식탁 겸 조리대를 깨끗이 치우고, 배낭을 둘러메고, 취사장을 나와 제석봉으로 향했다. 그때 시각이 8시 42분으로 천왕봉까지는 50분 거리다. 그럼, 대장이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9시 30분쯤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10시 도착이라도, 2시까지는 대원사에 도착할 자신이 있어, 다리 상태를 고려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쉬면서 간다기보다는 철저히 페이스에 맞춰 급경사를 올라가자, 등산 앱이 제석봉 반경 50m 내라고 음성으로 알려준다. 현재 시각 9시 정각! 물론 제석봉 정상은 비탐구역이라 갈 수 없고, 전망대 입구의 표지목과 이정표 기둥의 명패가 정상석을 대신한다. 10m가량의 시야를 제공하는 눈구름 속이 아니라면, 전망대로 가 주변 절경을 감상하고, 기록도 했겠지만, 지금은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게 똑같다. 해서 굳이 전망대라는 곳에 갈 이유가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가자, 통천문 직전 갑판 계단이다. 지난 화대종주 때는 보지 못한 거 같아, 당시의 기록을 찾아봤다. 이 계단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럼, 그사이에 설치한 건가? 어쨌든 그 갑판 계단으로 위로 오르자, '통천문' 명패가 붙은 이정표가 반겨준다. 현재 시각 9시 19분, 사실 통천문에 도착했으면 다 온 거다.
통천문을 통과해 하늘로 오르려는 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 반대편에서 등산객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위로 올라가는 등산객은 못 봤으나, 내려오는 등산객은 어린애를 포함 대여섯 있었다. 일출을 보고 오는 등산객인가? 그들의 출발지를 추측하며, 계단으로 통천문을 통과해 하늘에 오르자, 전혀 인기척이 없다. 천왕봉에 아니 지리산에 홀로 남겨진 기분으로, 2021년 12월 8일 마고할미의 석상을 보기 위해 천왕봉에 오른 후 3년만인가[산행기]? 그런데, 평일이니 다른 등산객은 모르겠지만, 같은 버스로 온 일행도 안 보인다는 게 이상하다.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후미였고, 장터목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는 동안,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행으로 보이는 산꾼이 먼저 천왕봉으로 떠나는 건 봤다. 물론 이후 장터목 취사장으로 들어온 일행은 없었다. 그럼 내가 마지막?!
우리 일행 중 나의 위치를 추측하며, 천왕봉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가자, 등산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다른 봉우리는 모르겠지만, 천왕봉은 동영상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에 동영상으로 촬영하면,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정상석 5~6m 직전 얼어붙은 바위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꽈당’했다. 와중에 셀카봉에 있던 핸드폰이 날아가 바위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뛰어 일어나 핸드폰을 있는 곳으로 달려가, 폰을 주워 이상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액정 보호 필름에는 약간 상처가 났으나, 핸드폰은 멀쩡하고, 여전히 촬영 중이다. 해서,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셀카봉에 거치해 촬영을 이어갔다. 이후 주변에 아무도 없어,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다양한 위치에서 정상석의 앞뒤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셀카봉이자 삼각대를 이용해,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기려 했는데, 강한 바람에 삼각대가 쓰러져 인증 남기는 것도 쉽지 않아, 배낭을 세우고 거기에 삼각대를 꽂고 인증을 찍었다.
오랜만에 천왕봉을 독점하고, 해야 할 일을 다 한 후, 9시 45분 대원사로 가기 위해, 천왕봉을 떠나 중봉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인솔 대장이 코스 설명을 하며, 천왕봉 도착이 9시 30분이 넘으면, 중산리로 탈출하라고 했었다. 그 시각 이후에는 4시까지 대원사 아래에 있는 유평 주차장까지 도착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난 이미 15분이 초과했다. 하지만, 지난 화대종주 때 2시까지 대원사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후라, 고민 없이, 대원사 방향인 중봉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심설이 앞으로 가로막아, 아이젠도 필요가 없다. 아이젠은 얕은 눈, 빙판에나 효과가 있지, 심설에는 제 구실을 못한다. 어쨌든 걷기보다는 미끄러져 달리듯 중봉으로 향하자, 10시 8분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3분 후인 10시 11분 천왕봉과 같이 역시 무인지경인 중봉에 도착했다.
2023년 10월 화대종주 때는 한 쌍이 중봉을 차지하고 있는 바람에,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지리산에 나만 있다고, 착각할 정로도 인적이 없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삼각대를 이용해 인증을 남기는 것도 바람이 강하게 불어, 천왕봉에서와 같이 배낭을 이용했다. 끝으로, 천왕봉에서 중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이전과는 달리 심설이라, 등산지팡이 없이는 갈 수 없어, 그나마 한 짝밖에 없는 지팡이에 의지해 중봉에 올라, 그 기념으로 그것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심설의 급경사를 내려가, 10시 24분 중봉 무인 대피소를 통과했다. 대피소를 지나, 선두가 러셀 한 덕(날머리 식당에서 선두와 하산주를 마실 때까지 이렇게 알고 있었다. 사실은 주말 화대종주한 종주꾼이 한 러셀임)에 그나마 쉽게 심설 등산로로 가다가, 갑자기 1989년 1월 이 구간 첫 산행이 떠올랐다. 작년 10월 화대종주 때, 1989년 당시의 기억을 더듬고 싶었으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새록새록 기억난다. 과거 산행의 복기는 같은 코스도 중요하지만, 계절 또한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지난 화대종주 때, 앞에 보이는 암봉을 넘을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암봉을 이번에는 사진으로 남겼다. 처음 힘들게 느껴진 길도, 길을 알고 있으면 쉽게 갈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어쨌든 그 암봉을 우회하고, 써리봉으로 향하는데, 등산로 심설 속에 아이젠 한 쪽이 떨어져 있다. 분명 우리 일행의 발에서 빠진 거라, 그걸 주워 배낭에 넣었다. 써리봉 또는 치발목대피소 정도에서 앞서간 일행을 추월할 수 있을 거로 예상해, 한 쪽만 아이젠을 착용한 일행을 찾아 주거나, 하산 후 인솔 대장에게 주인을 찾아주라고 넘겨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암봉을 우회하면, 써리봉이 멀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써리봉에 오를까 말까, 고민하며 가는데, 앱이 정상 반경 50m 내라고 알려준다. 써리봉이다. 눈구름 속이라,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써리봉에 올라가 봐야 의미가 없어, 써리봉 명패를 붙이고 있는 이정표만 기록으로 남겼다.
써리봉을 떠나, 치발목대피소로 향해, 대피소가 1km 남은 지점에서 일행이라 생각한 등산객을 볼 수 있었다. 그 등산객을 추월하며, 발을 보니, 아이젠 두 쪽을 다 차고 있다. 그런데, 그 등산객이 추월하는 내게 거림에서 왔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몇 명이나 되는지 다시 물어, 19명이라고 알려줬다. 고로 이 등산객은 우리 일행이 아니다. 어쨌든 그를 추월해 치발목으로 향하며, 급경사는 걸어 내려가는 걸 포기하고, 주저앉아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며, 러셀 하느라 고생하는 선두를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발자국을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앞서간 사람은 10명을 넘지 않는다. 다른 등산객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우리 일행이 19명이니, 최소 9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해서, 그 9명은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탈출했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내가 꼴찌라고 생각한 까닭에, 뒤에 누군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11시 21분 앙상하나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치발목대피소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동영상을 촬영하며, 대피소로 향하며 보니, 등산객 한 명이 지도를 보고 있고, 요원은 대피소 주변을 점검하고 있다. 현재 시각 11시 27분 배가 고프지는 않으나, 심야에 불광역 부근에서 산 김밥을 그냥 들고 가봐야, 버리기만 할 뿐이라, 비록 얼음과자일 망정 대피소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해서, 야외 식탁을 살펴보니, 요원이 치웠는지 앉을 수 있는 상태라, 거기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김밥을 꺼내, 보온병에 든 뜨거운 차와 같이 먹었다. 예상대로 김밥은, 얼음과자 수준은 아니나, 얼기 직전이다. 하지만, 뜨거운 차와 같이 먹으니, 의외로 괜찮아 놀랐다. 한겨울에도 뜨거운 차만 있으며, 김밥도 먹을 만하다는 걸 발견한 순간이다. 그렇게 김밥을 먹고 있는데, 주변을 돌아다니던 등산객이 '좋은'인지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여기서 주차장까지 거리와 마감 시간 내 도착할 수 있을지 다시 묻는다. 우리 일행이다. 해서, 2시까지는 대원사에 도착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걸 시작으로 이번 산행과 다음 주 같은 날 출발하는 설악산행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 설악산행도 신청했다가, 연 이주 무박 산행은 무리라는 생각에 취소한 산행을 이 일행도 신청했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그러다가, 내 옆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에너지바를 꺼내 먹으며, 아이젠 한 쪽을 잃어버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고, 남을 길도 걱정이라는 말을 한다. 해서, 두말하지 않고,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주자, 깜짝 놀라며,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고, 바로 착용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출발하고, 조금 있다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치발목대피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11시 43분 대원사로 출발했다. 언젠가는 여기서 1박하기는 해야 한다. 앞서가는 일행을 보며, 12시 정각, 대원사 6.8km 거리의 이정표를 지나, 갑판 계단을 내려가자, 지난 화대종주 때는 보지 못한 이정표라, 있어 확인했다.
'무제치기폭포 84m'다! 지난 산행에서 폭포를 찾기 위해 계곡을 다 뒤지고 다녔는데, 이 안내를 보지 못해 벌어진 촌극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폭포까지 왕복할 시간이 없다. 해서 올가을 단풍철, 치발목대피소에서 1박 하기로 하고, 미련 없이, 하산을 계속해, 12시 12분 새재 갈림길을 지났다. 그리고, 12시 25분 유평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능선이 보여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역시 길을 안 다는 건 산행을 쉽게 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전감을 더한다. 능선을 넘어야 하니, 갈수록 계곡과 멀어지는 건 당연하나, 빈 생수병에 물을 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대피소 식수대는 거리가 멀어 계곡에서 물을 채울 생각이었는데, 깜빡했다. 해서, 등산로 중간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로 채운 후, 그걸 마셔보았다. 생각보다 물맛이 좋다. 그리고 뜨거운 차와는 달리, 아주 차가운 물이라 더 좋았다.
이후, 혹자에게는 지옥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대피소 지도에는 유평까지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너덜 지대를 통과하고, 12시 38분 유평마을 3.4km 이정표를 지났다. 그리고 12시 51분 능선을 넘었다. 앞서가던 일행을 추월해 능선을 넘는데, 선배 산꾼이 전화했다. 현재 대원사를 지나는 중으로 식당에는 2시에 먹을 수 있도록 예약했다며, 현재 위치를 묻는다. 그런데, 2시까지 주차장에 있는 식당 도착은 절대 할 수 없다. 해서 2시 30분 정도 도착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러셀 한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대원사에 도착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고작 10여 분 차이라 생각했는데! 어쨌든 유평마을과 대원사가 멀지 않고, 2시 반까지 식당에 도착하기 위해 한눈팔지 않고 갔다. 1시 2분 계곡을 건너는 마지막 다리를 건너, 1시 28분 유평마을에 도착했다. 대원사까지 남은 거리는 1.6km, 주차장까지는 3.6km! 약속까지 1시간 2분 남았다. 충분한 시간이다. 해서, 2시 10분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1시 30분 새재에서 내려오는 임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라, 평소대로 걸어도 5km/h 이상의 속도가 난다. 평소 페이스로 걸어, 1시 46분 대원사에 도착했다. 대원사에서 힐끗 본 이정표에 의하면 주차장까지 2.25km다. 멀어도 너무 멀다고 투덜거리며 길을 가며 생각해 보니, 거의 모든 거대 사찰 아래 먹거리 마을은 일주문에서 거리가 꽤 멀다는 게 기억났다. 시끄러운 걸 피하기 위한 게 아닐지 생각된다. 어쨌든 투덜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도로 가운데, 일주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건 기록으로 남겨야 해, 도로 가운데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길을 재촉해, 목표보다 1분 이른 2시 9분 폐가로 보이는 식당에 도착했다. 4시에 산행을 시작해, 10시간 9분이 걸린 거대종주다! 고로 노닥거리지 않고 간다면, 10시간 내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림, 천왕봉, 대원사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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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9분 겉으로 보기에는 영업 중인 식당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보이는 식당에 도착해, 주변을 유심히 살펴봤다. 폐가처럼 보이나, 선배 산꾼이 여기 있다고, 전화를 몇 번 했으니, 다른 곳에 같은 이름의 식당이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기가 맞다. 그런데, 지붕의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가 보인다. 안에는 누군가 있다는 얘기라, 오른쪽으로 돌아 정문을 찾았다. 예상대로, 겉은 폐가일 망정 정문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장 포함 다섯 명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7명이 식탁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아, 하산주를 마시고 있다. 애초 예약한 4명과 선배 산꾼이 세석에서 대장에게 자랑하는 바람에 급조된 4명이 추가된 거다. 어쨌든 나 포함 8명이 오리백숙과 오리 불고기로 안주로 이슬이, 막걸리, 맥주 등 거의 20병 가까이 마셨다.
그렇게 마시며, 대장에게 내가 꼴찌였으나, 화요일에 그가 진행하는 설악산 중주 산행을 신청한 한 사람을 추월했다고 알려줬다. 그러자,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이 현재까지 도착한 전부라는 거다. 응? 분명 내가 꼴찌인데? 그걸 강력히 주장하며, 중산리로 중탈한 사람이 꽤 있을 거라고 했다. 중탈자가 있다는 걸 부정하던, 대장이 확인차 2시에서 중산리에서 출발한 버스 기사에게 전화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6명이 중산리로 탈출했다. 고로 많아야, 3명이 내 뒤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원사 위 식당에 주저앉은 사람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고 결론 냈다. 그리고 선배 산꾼에게 러셀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하산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장이 러셀은 주말 화대종주 팀이 했고, 자신들은 편하게 내려왔다고 해, 선배에게 혼났다.
이후 3시 35분경 식당에서 나와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가, 배낭을 짐칸에 넣고, 차에 타,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차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 후 3시 44분경 버스에 타 잠을 청했다. 그리고 버스의 실내등이 들어오고, 인솔 대장의 방송에 눈을 뜨니, 버스가 휴게소로 들어간다. 그렇지 않아도 볼일이 급했던 차라, 반가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보니, 죽암이다. 볼일을 보고 돌아와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대장의 방송에 잠이 깼다. 중간 정차지인 죽전으로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죽전에 대장이 내리는 걸 보고, 슬리퍼를 벗고, 등산화로 갈아 신고, 여기저기 널린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7시 9분 양재 국립외교원 앞에 도착한 버스에서 짐을 들고 내린 후, 짐칸에서 배남을 꺼냈다.
빈 물통과 보온병을 옆 주머니에 넣으며 보니, 허리띠 주머니가 열려 있고, 안이 비었다. 그리고 멜빵에 매단, 보조 가방과 술잔이 없다. 엉? 누가 훔쳐 간 거야? 그리고 누가 비상용 식량을 다 먹은 거야?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보조 파우치를 배낭에 넣으려고, 보니 들어갈 틈이 없다. 아니, 어떤 인간이 쓰레기를 내 배낭에 버린 거야? 또 미지의 대상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고는 배낭을 둘러메고, 파우치는 들고, 양재역으로 가, 열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8시 20분경 집에 도착해 일단 배낭을 아지트에 두고, 모든 걸 벗고 씻으며 보니, 오른쪽 엄지 발가락이 완전히 맛이 갔다. 이래서 목요일 산에 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씻은 후, 하산주 2치를 하며,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배낭 정리는 내일 하기로 하고 취해서 잠이 들어, 다음 날 아침에 깨, 아지트로 와 배낭을 보는 순간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의 배낭을 들고 온 거다! 브랜드와 색깔이 같아, 취해서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온 게 내 배낭이 아니다! 해서, 바로 인솔 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어제 배낭을 찾느라 난리가 났었다며, 배낭 주인장과 내 배낭을 가지고 있는 기사의 연락처를 보내준다. 해서, 배낭 주인장에게 연락해, 사과하고 오후 5시에 만나 배낭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리고 내 배낭을 찾는 건 급한 건 아니나, 어차피 목요일 산행을 위해 사당으로 가야 하니, 목요일 근무하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해, 목요일 사당에서 회수하기로 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목요 오지 팀은 7시 출발인데, 그 기사의 산행은 6시 40분 출발이라, 그 시각에 맞춰 사당으로 가야 한다는 거다. 해서, 가방을 목요 오지 팀 기사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려다,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안내산악회 장거리 종주 팀, 지리산 거대종주 계획대로 '거림탐방지원센터 → 세석대피소 → 촛대봉 → 장터목대피소 → 천왕봉 → 중봉 → 써리봉 → 치밭목대피소 → 무재치기폭포 → 대원사 → 유평탐방지원센터 → 유평주차장'의 24km(램블러) 구간을 11시간 40분 동안 달렸다. 이동 9시간 52분, 휴식 1시간 48분! 램블러 기록에는 총거리가 28km로 나오나, 두 번째 이미지와 같이 장터목에서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갑자기 GPS가 제멋대로 돌아다녀, 4km 정도가 추가. 고로 그 값을 뺀 24km가 사실에 부합한다. 휴식 1시간 48분 중 1시간 20분가량은 산행 후 하산주 시간!
1989년 1월 첫 천왕봉~대원사 구간 산행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작년 추석 연휴에 흥수와 둘이 화대종주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 실망했다. 하지만, 이번 중봉에서 치발목까지 심설을 뚫고 내려가자, 새록새록 기억난다. 과거 산행의 복기는 당시와 비슷한 환경과 계절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산행이다.
주말 화대종주를 달린 종주꾼의 러셀 덕에 중봉에서 치발목까지 힘들이지 않고 내려갈 수 있었던 게, 2시간이나 일찍 산행을 마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이다.
처음에는 거림에서 대원사까지 달리는 거대종주를 12시간 내에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으나, 유유자적 찍을 거 다 찍고, 장터목에서 라면까지 끓여 먹었음에도 10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걸 보면, 15시간 30분이 주어지는 무박 화대종주도 가능하지 않을까?
산행기를 쓰면서 전통적인 지리산 화대종주가 아니라, 그 역인 대화종주 즉, 대원산에서 시작해 화엄사에서 끝내는 종주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를 곰곰이 따져봤다. 화대는 화엄사에서 천왕봉까지 32.5km 올라간 후 유평 주차장까지 13.7km를 내려가고, 반면 대화는 주차장에서 천왕봉까지 13.7km를 올라간 후 화엄사까지 32.5km 내려가는 코스다. 고로 체력이 좋을 때 짧은 거리를 오른 후 긴 거리를 내려가면 되는 대화가 화대보다는, 같은 거리지만, 체력적 이점이 있어서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서 고집 센 산꾼들은 화대만 종주로 인정할 뿐 대화는 무시하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