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집 제37권 / 갈명(碣銘) / 자족당 남공 묘갈문〔自足堂南公墓碣文〕
공은 휘가 극주(極柱)이고 자가 천경(天擎)이며 성이 남씨(南氏)이다. 남씨는 중국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에서 시작하였으니, 김충은 당(唐)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영해(寧海)에 정박하였는데, 신라의 왕(王 경덕왕(景德王))이 그가 남쪽에서 왔다는 것으로써 남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바꾸고 영양현(英陽縣)에 봉하였다. 고려 때 휘 군보(君甫)가 있었으니 의령(宜寧)을 관적으로 하였고 관직이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몇 세대를 지나 휘 을번(乙蕃)에 이르렀으니, 을번은 시중(侍中) 벼슬을 하였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렬(敬烈)이다. 이분이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지고 판상서사(判尙書事)를 지냈으며 시호가 강무(剛武)인 휘 은(誾)을 낳으니, 은은 우리 태조를 도와 개국 원훈(開國元勳)에 책록되었고 태조 묘실[太室]에 배식(配食)되었다. 후세에 좌윤에 증직된 휘 예석(禮錫)에 이르러 비로소 문희(聞喜 경상도 문경)에 거주하였다. 이분이 휘 영(嶸)을 낳으니 호가 고산(孤山)으로, 서애(西厓) 선생이 효행으로 천거함으로써 군수 벼슬을 하였고,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제향을 받았다. 이분이 진사 휘 창우(昌宇)를 낳으니, 창우는 돈독한 학문으로 향당의 사표가 되었으며, 곧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의 후손 신구(申謳)의 따님으로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17) 7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9세에 증사(曾史)를 수업함에 날마다 두 번 배우면서 공부한 바를 마음을 다해 정진하였고, 비록 어렵고 뜻이 깊은 글이라도 반드시 꿰뚫어 통해야 곧 그만두었다. 17세에 증광 향시에 합격하였다. 23세에 선공(先公)의 상을 당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에 선비(先妣)의 상을 당하였다. 정묘년(1687)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신미년(1691)에 고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임호서원(臨湖書院)을 건립하여 4선생을 제향하고, 학규(學規)를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해 두어 많은 선비들이 의귀(依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임오년(1702)에 아들 령(坽)에게 명하여 영천(靈泉) 가에 누각을 짓게 하고, ‘자족(自足)’으로 편액을 걸었다. 기축년(1709)에 의논하여 종손(宗孫) 집에 조천(祧遷)할 별묘(別廟)를 건립하였고, 뒤에 제전(祭田)을 들이고 제기(祭器)를 구비해서 해마다 양정(兩丁)의 제향을 행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경인년(1710) 7월 모일에 졸하였으니 72세를 살았다. 문희현(聞喜縣) 서쪽 대현(大峴)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순하며 행실이 도탑고 후덕하였으며, 깨끗한 지조와 근면한 재주를 지니고, 여기에 학문의 힘을 더하였다. 바야흐로 해제(孩提)의 어린아이 때 어머니가 유방의 부증(浮症)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는 젖을 빨지 않았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병이 심하여 습렴(襲斂)에 임할 수 없었는데, 이를 죽을 때까지 애통해 하면서 평생 화려한 옷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을 다하도록 질대(絰帶)를 벗지 않았으며 모든 상례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숙부 섬기기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하였으니, 송종(送終)에 이르러 모두 극진하게 하여 남은 한이 없도록 하였다. 큰누이가 죽자 그의 세 아들을 데려다 길러 주었으니, 막내는 곧 태어나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았기에 자신의 아이와 젖을 함께 먹여 양육하였다. 외종가(外從家)에 삼상(三喪)을 당한 이가 있었으니, 그 외로이 남은 아들이 겨우 네 살이었는데, 공이 재물을 내어 장사 지내 주고 마음을 다해 돌봐 주고 보호하였다.
을해년(1695)에 큰 흉년을 당하여서는 맛있는 것을 끊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주어서 가까운 이웃의 유리걸식하는 이들을 구휼하고 구제하였으니, 여기에 힘입어 산 사람이 많았다. 이윽고 소성(小成)하자 벼슬에 나아가기를 권하는 자가 있으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종질인 승지 후(垕)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당시에 당의(黨議)가 매우 치성하였고 예송(禮訟)도 또한 일어났다. 공은 시를 지어 그를 면려하였으니,
어찌 가을 잎이 바람 따라 떨어짐을 따르겠는가 / 肯從秋葉隨風落
스스로 겨울의 푸름이 사계에 일관되게 보전하라 / 自保冬靑貫四時
라는 구절이 있다.
공은 평소에 논리를 견지함이 방정하였고, 일에 처신함이 자세하고 치밀하였다. 더욱이 현인을 존중하고 학문을 흥기하는 일에 도타웠으니, 계책을 드러내고 생각을 표출함에 그때마다 모두 원대하였으므로 원근의 선비들이 공을 향하여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전후로 경영하여 건축한 것은 공이 모두 창도하여 이끌고 주관했던 것이다.
매일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뜨락을 말끔히 소제하고서 저녁까지 단정히 앉아 있었다. 몸은 게으르고 태만한 기운을 띠지 않았고, 귀는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도서(圖書)를 좌우에 두고서 깊이 잠기어 음미하고 풀이하였다. 자제들 및 고을의 후생들이 학업을 청하거나 의문점을 질정함이 있는 경우에 정성을 다해 말해 주어 거듭거듭 해설해 주었으며, 재품(材品)에 따라 힘을 다해 가르쳐 인도하니, 여기에 힘입어 성취한 자가 서로 이어졌다. 또 차츰 사라져 가는 고인(古人)의 하나의 선과 하나의 행실을 모두 찾아내어 표출해서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다른 사람의 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고, 또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는 그 풍모를 사모하였고 불초자(不肖者)는 그 엄함을 꺼렸다. 당(堂) 앞에 방당(方塘)을 열고 주위에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와 국화를 섞어 심어 놓고 날마다 그 사이를 소요하였으니, 그 자득한 정취를 또 어찌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바야흐로 병이 심해짐에 정신이 어지럽지 않을 때, 선조의 기제사라는 것으로 고기즙을 물리치고 내오지 않게 하며 말하기를, “한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감히 선조를 잊겠는가.”라고 하였고, 집사람에게 경계하여 “염(殮)에 화려한 옷을 사용해서 나의 불효를 더하게 하지 말라.” 하고 마침내 졸하였으니, 그 또한 군자가 몸을 마칠 때 바르게 죽는 것을 사모한 것이리라.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별제(別提) 이규영(李奎英)의 따님으로 규방의 법도를 매우 잘 갖추고 있었다. 아들은 유(堬), 륜(埨), 진사 령(坽)이 있고, 딸은 송치문(宋治文)에게 시집갔다. 유는 아들 도진(圖
), 도훤(圖楦)이 있고, 딸은 노하기(盧夏紀), 채령(蔡靈), 이인명(李寅明)에게 각각 시집갔다. 륜은 아들 도운(圖運), 도원(圖遠), 도섬(圖暹), 도적(圖適)이 있다. 령은 아들 도돈(圖
)이 있고, 딸은 김태석(金泰錫), 정수해(鄭壽海)에게 각각 시집갔다. 송치문의 아들은 송이종(宋爾琮)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D001] 서애(西厓) 선생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이다.[주-D002]
제향을 받았다 : 소양서원(瀟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양서원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 소재하는 서원으로, 16세기 가은 인근 지역에서 출생하여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연구를 한 정언신(鄭彦信, 1527~1591), 남영(南嶸, 1548~1616), 심대부(沈大孚, 1586~1657), 김낙춘(金樂春, 1525~1586), 이심(李襑, 1598~1657) 5인을 제향하였다. 1745년(영조21)에 훼철되었다가 1801년(순조1)에 복설되었다. 1871년(고종8)에 다시 훼철되었으나 1990년에 복원되었다.
[주-D003]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 1374~144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희는 시호이다. 1417년(태종17)에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고, 1436년(세종18)에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였고, 1439년 우의정에 올라 야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성 축조를 건의하였다.[주-D004] 증사(曾史) : 원(元)나라 사람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 역사서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말한다. 《십팔사략》은 편년체(編年體)로 《사기(史記)》, 《한서(漢書)》로부터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이르기까지 16종의 정사(正史)와 2종의 송대(宋代) 사료(史料)를 취사(取捨)하여 태고로부터 송말(宋末)까지의 사실(史實)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초학자의 역사 교재로 삼은 것이다.[주-D005] 임호서원(臨湖書院) : 경상북도 함창(咸昌)에 건립한 서원이다. 표연말(表沿沫, 1449~1498),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채수(蔡壽, 1449~1515), 권달수(權達手, 1469~1504), 채무일(蔡無逸, 1496~1546)을 배향하였다.[주-D006] 양정(兩丁) : 봄과 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올릴 때 매년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거행하는데, 이를 본받아 봄가을 정일(丁日)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주-D007] 해제(孩提)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말로, 2, 3세 정도의 나이로 웃을 줄 알고, 손을 잡고 안아 줄 만한 아이를 말한다.[주-D008] 습렴(襲斂) :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殮布)로 묶는 일로, 염습(殮襲)과 같다.[주-D009] 맛있는 …… 주어서 : 원문은 ‘절감분소(絶甘分少)’로,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에 “이릉(李陵)은 맛있는 것을 끊고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주었기에[絶甘分少] 사람들에게 죽을 힘을 다하도록 할 수 있었으니, 옛적의 명장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라고 한 말에서 가져왔다. 《漢書 司馬遷傳》[주-D010] 소성(小成) :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입학한 지 7년 만에 학문의 깊은 뜻을 강구하는 것을 보아 벗을 취하는 것을 소성이라 하고, 9년 만에 유를 미루어 널리 통달하고 마음의 지표를 굳게 세워 변동 없는 것을 대성이라 한다.[七年視論學取友, 謂之小成, 九年知類通達, 强立而不反, 謂之大成.]”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여, 작은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니,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말할 때 쓴다.[주-D011] 선비 : 원문은 ‘봉액(縫掖)’으로, 선비가 입는 도포의 별칭이니, 여기서는 선비를 의미한다.[주-D012] 정성을 …… 주어 : 원문은 ‘고갈양단(叩竭兩端)’으로, 공자가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물을 경우에는 그가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묻는 내용의 양쪽을 다 말해 준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말한 데서 가져온 것이다. 《論語 子罕》[주-D013] 군자가 …… 것 : 증자(曾子)가 “군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덕으로 하고, 소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구차히 편안함만 취하는 것으로 한다. 내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나는 바르게 죽을 수 있다면 그만이다.[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 吾何求哉. 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말한 데서 가져왔다. 《禮記 檀弓上》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