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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neowave
연변은 친일파들의 락토(乐土)인가?
김관웅 (연변대학)
목차:
1. 요즘은 신친일파 김문학이부터 로친일파 류치환인가?
2. 재만기시기 류치환의 친일경력
3. 류치환의 산문“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의 친일경향
4. 류치환의 시 “수(首)”의 친일경향
5. 류치환의 시“전야" 에서 보이는 친일경향
6. 류치환의 시“북두성" 에서 보이는 친일경향
7. 항일선렬들의 피로 물들은 연변땅은 친일파들의 락토(乐土)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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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즘 화제는 신친일파 김문학이부터 로친일파 류치환인가?
며칠 전의 일이다. 한 지인이 필자한테 전화를 걸어 와서 다음과 같이 조롱조로 말했다.
“여보게, 요즘 연변 항간의 화제는 신친일파 김문학이부터 로친일파 류치환이로 바뀌였던구만. 당신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연변의
직능부문에서 신친일파 김문학이나 로친일파 류치환이를 다 지지, 성원하더군. 권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네들이 떠들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늘에 장대 겨룸이지. 연변땅이 언녕 친일파들의 락토로 변할줄도 모르고 설치지를 말게나, 하하하”
이 지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일본 극우세력의 대표 아베가 일본정치권력의 정상에 등극한 뒤로부터
일본에서는 극우세력의 망언과 군군주의 복벽의 조짐이 날로 가시화되여 가고 있고 요즘 중국과 한국에는 반일정서가 점점 더 팽배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연변이란 고장은 이런 국제정세와 국내의 보편적 정서와는 무관하게 친일파들을 비호하고 두둔하고 심지어는 찬양하는 세력이 조금도 기가 죽지를 않았다.
이 지인의 말대로 연변은 언녕 친일파들의 락토로 변했단 말인가? 그리고 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친일파 류치환의 치부를
들춰내는것이 부질없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리고 친일파 류치환을 기리는 엉뚱한 굿판을 몇년 동안이나 벌려온 개별적인인 사람들더러
낭떠러지에서 말을 멈추라고 준절하게 권고하는것이 과연 부질없는 짓거리란 말인가?
이런 큰 시비를 캐기 위해서 다시 한번 친일파 류치환의 북만에서의 친일행적을 세인들에게 명백하게 공포하는것은 절실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재만기시기 류치환의 친일경력
청마 류치환(柳致环, 1908—1967)은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출생하여 통영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오야마중학에서 수학했고,
1927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1년 24살나던 해 《문예월간》에 시“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의 시들은 동양적인 관념을 노래한것들이 많았다. 그의 출세작은 1936년에 발표한 시 “깃발”이다. 그 뒤 류치환은 일제
통치의 암흑기인 1940년 전후부터 1945년 광복 직전까지 5년 남짓한 동안 북만에서 지냈다.
그는 광복 후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탐색을 주로 하여 순수서정, 지적자아를 노래했다. 그가 생전에 낸 시집으로는
《청마시집》(1940년),《생명의 시》(1947년), 《울릉도》(1948년),《청령일기》(1949년), 《보병과
더불어》(1951년), 《예루살렘의 닭》(1954년), 《제6시집》(1957년), 《류치환시선》(1958년), 《동방의
느틔》(1959),《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년), 《미류나무와 남풍》(1964년) 등이다. 그는 1967년 차사고로
사망했다.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에 의하면 북만에서의 류치환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烟首县, 마땅히 延寿이여야 함) 이주하여 농장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신산을 맞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绝岛)’, ‘수(首)’,‘절명지(绝命地)’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제17권, “유치환”, 1996년판, 140페지)
그런데 북만에서의 류치환의 이 리력은 아주 소루하다. 이 “유치환”이라는 조목을 작성한 이가 류치환의 이 한 단락의 력사를
모르거나 아니면 류치환 본인이 생전에 자기의 불미스러운 친일행적을 감췄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본인이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지지 않는것이 자기가 만들어 놓은 력사이다.
1944년 김소운이 조선의 시를 일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조선시선》에 류치환의 시와 함께 실린 류치환의 략력에 할빈 협화회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는 분명히 시인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신분을 밝힌것으로 사료된다.
이 루락된 류치환의 북만에서의 불미스러운 친일행적을 소상하게 밝혀 놓은 이가 바로 중국조선족 소설가 김송죽이다. 아래에 김송죽의 증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마 류치환은 유명한 시 “깃발”을 발표하여서 3년만인 1939년에 고향을 떠나 만주 봉천(심양)으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북만에 들어가 살다가 1945년 6월에 귀국했다. 그는 귀국전 북만주의 빈강성(賓江省ㅡ지금의 흑룡강성)내에 있는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에다 "가신흥농회"라는 자연이민촌농장을 경영하면서 그 기간에 협화회(協和會)의 지방
연수사무처(延壽事務處)의 일을 잘 보았기에 1943년에 협화회(協和會) 하얼빈사무국(哈爾濱事務局)에 조동되여 근무를 했다.
그럼 협화회는 어떤 단체인가?
협화회는 중국 동북지역의 일부 일본 파쑈분자들이 조직한 위국가(伪国家)단체로서 일본관동군에 예속되여 있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일위(日伪) 군정요원 및 지방의 세력가들이였다. 이 조직은 일위 정권에 배합하여 공산당과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였다.
이러하기에 “공산당배격특별위원회(排共特别委员会)”를 조직하여 “공산당배격운동(排共运动)”을 전반 “국민운동”으로 진행하여 나갔다.
협화회는 또 “청년 훈계, 지도위원회(青训指导委员会”)”를 조직하여 각종 형식을 리용하여 청년들에게 반공사상을 부어넣었고,
일본과 위만주국 정권에 배합하여 병정을 잡아들이고, 불합격자들은 “국병에서 빠져나간 자(国兵漏子)”들이라고 치부하면서 이네들을
이른바 “근로봉사대(勤劳奉仕队)”에 편입시켜 탄광 같은 곳에 보내여 고역살이를 시켰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당하다가
죽어갔다. 이런 까닭에 일제가 패망된 후에 중국에서는 일제의 창귀(伥鬼) 같은 역할을 한 각급 협화회의 골간들은 모두
한간(汉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부터 류친환의 지지자들이5년 남짓한 북만에서의 류치환의 경력을 이른바 “지사(志士)적인 탈출”이라고 떠들어댄것은 완전한 인위적으로 조작해낸 허구임이 드러났다.
류치환의 형 류치진(柳致眞, 1905~ 1974)이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31년 귀국하여
곧바로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연극활동을 하다가1930년대 말 암흑기에 친일파로 전락되여 많은 친일작품을 창작하여 공연했는데
이는 류치환이 친일 활동을 했던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류치진의 국민극 《흑룡강》은 "대동아건설의 국가이념의 일단을 구상화한 것"이 주제임을 매일신보(1941. 6. 5)에 밝힌 바
있다. 류치진은 이 작품을 통해 만주를 락토로 인정하면서 조선의 땅을 버리고 개척이민으로 이주케 할 목적도 포함되여 있었다.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조선민족을 만주로 쫓아보내고 자기 민족을 다수 이주시켜 완전 일본화를 추구하려 했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일제의 음험한 의도에 부응하는 작품이였다. 이러한 선명한 친일경향은 거의 동시에 그 동생 류치환에게서도 나타났다.
3. 류치환의 산문“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의 친일경향
류치환의 친일경향은 《만선일보》(1942년 2월 6일)에 발표된 그의 산문“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늘 大東亞戰의 의의와 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 가튼 것은 수에 모들수 없는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 시국에
편승하여서도 안될 것이고, 시대에 탈리하어도 안될것이고, 어데까지던지 진실한 인간생활의 탐구를 국가의 의지함에 전개시켜가지 안으면
안될 것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산하(山河)도 있는것을 매거할수 업시 목도하고 있지 안습니까. 오늘 赫赫한 일본의 指導的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류치환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전문
이 산문은 “대동아 공영권의 전쟁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라는 두 가지 입장을 글에 담아내면서 선전한 문학이 바로
친일문학이고, 이런 작품을 쓴 이들이 친일문학가”( 김재용 《협력과 정항》, 소명출판사, 2005년, 제59페지.)라고 정의를
내린 한국의 김재용 교수가 친일문학, 친일문학의 정의를 규준으로 삼는다면 류치환의 이 산문은 단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 친일문학이요
류치환은 단 한치의 모자람도 없는 친일문학가이다.
설사 류치환이 이런 산문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류치환이 일본 관동군에 예속되어 있는 골수적인 부왜단체(附倭)인 협회회에 몇년 동안이나 근무했다는 이 한 점만으로도 친일파로 되기에 손색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전후 매락을 전혀 무시한 채 류치환의 시 《수(首)》를 이른바 “반일시의 수작(秀作)”이라고 평가하여 한국의 류치환의
지지세력으로부터 우수론문상을 받은 최룡관의 글은 참으로 그 의도와 목적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낸다.
그럼 류치환의 “수(首)”는 정말로 최룡관의 말대로 “반일시의 수작(秀作)”인가?
4.류치환의 시 “수(首)”의 선명한 반공, 친일 경향
1942년 바로 류치환이 협화회에 근무할 때 지은 시 “수(首)”는 그 타이틀로부터 시적내용이나 정서에 이르기까지 아주 섬찍한것이다. 아무튼 예사롭지를 않다.
삭막한 북방의 시가지 네거리에 높이 매달려 효수(枭首)를 당하고 있는 “비적의 머리”를 바라보는 자기의 감수를 표현한 이 시는
광복 이후의 류치환의 시창작에서의 시적소재, 시적주제나 시적추구와 시적경향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그가 후일 추구했던
따뜻한 휴머니즘과도 추호의 련관성이 없는 너무나도 살벌한 시가 아닐수 없다.
“首”라는 타이틀은 바로 잘려진 사람의 머리,즉 수급(首级)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수급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시가지의
네거리에 높이 매달려 있는 “비적의 수급”이다. 야만시대나 노예제시대에나 있을 법한 끔찍스러운 광경이 그려진것이다. 그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首
柳致環
十二月의 北海 눈도 안오고
오직 萬物이 苛刻하는 黑龍江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 네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의 模糊히 저물은 朔北의 山河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의 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이 아니라
秩序를 保全하려면 人命도 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희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威協을 意味함이었으리니
힘으로서 힘을 除함은 또한
먼 原始에서 이어온 피의 法度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險烈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는 無賴한 넋이여 暝目하라!
아아 이 不毛한 思辨의 風景위에
하늘이여 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내리고지고
그러면 “이 적은 街城 네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라는 이 시구에서 나오는 “비적”은 과연 어떤 비적을 가리킨것인가?
이 “비적”의 머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했던 동북항일련군의 머리임은 확정적이고, 항일련군 총사령을 맡았던 조상지의 머리일 가능성이
십분 많음을 이미 필자가 “비적의 머리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글에서 소상하게 밝혔으므로 이 글에서는 략한다.
5. 류치환의 시“전야" 에서 보이는 친일경향
류치환의 시“전야(前夜)" 는《春秋》1943년 12월호에 실린 작품으로서 친일론난이 있는 시작이다. 그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새 世紀의 에스프리에서
뿔뿔이 樂想을 빚어
제가끔 音樂을 演奏하다.
生 - 死 破壞 - 建設의 新生과 創設
天地를 뒤흔드는 歷史의 심포니 -.
聽覺은 神韻에 魅了되고
새 世代에의 心臟은 울어 울어
聖像아래 魔笛은 소리를 거두다.
驚異한 神技 가운데
섬과 섬이 꽃봉오리처럼 터지다
森林과 森林이 鬱蒼히 솟다.
무지개와 무지개 恍惚히 걸리다.
薔薇빛 舞臺 우에
熱演은 끌어 올라
樂屋 싸늘한 壁面 넘어로
華麗한 새날의 饗宴이 預言되다.
終幕이 내려지면
偉大한 人生劇에로 옮길
많은 俳優 俳優들은
새 出發의 그 年輪에서
征服의 名曲을 부르리니
勝利의 秘曲을 부르려니 - .
—유치환“전야” 전문
이 시에 대해 박태일 경남대 국문과 교수는 "일제 전쟁 승리 향한 설렘과 바람 담겨있다"고 그 친일성향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를 유치환이 생시 저작물에 올리지 않은 일은 극히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전야”,“북두성” 두 작품을
시집에 올리지 않은 사실이 갖는 뜻 또한 뚜렷하다. 둘이 지닌 부왜(附倭)적 됨됨이를 두려워했다는 뜻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
제2주년기념대회”를 기리고, “학병출진”,“문화결의앙양대회”를 화보로 내세우면서, 지원병에 대한 추김글로 메운《춘추》 특집호에
올린 시가 “전야”이다. “대동아공영”의 역사가 비롯하려는“전야”에 느끼는 유치환의 설렘과 바람, 그리고 믿음을 담은
부왜시(附倭诗)다.
시인은 극장에서 한 편 새 가극을 공연하는듯한 짜임새를 마련했다. 처음과 끝 도막에 서곡과 종곡을 앉혀두고 그 사이 본곡 네
도막을 깔아 “심포니”가 되게 이끌었다. “신기”를 다해 “신운”을 자아내는 배우, 음악가들처럼 새로운 “인생극”의 “열연”을
바라마지 않는 갈구가 “역사의 심포니"로 표현된 한 편 가극을 빌려 표현되였다.
가극의 진행과 역사의 진행을 하나로 묶은 입체적인 짜임새다. '수'에서 볼 수 있었던 율/비율, 질서/무질서의 맞섬과 극복 방식이 전체/부분, '역사의 심포니'/하찮은 '마적의 소리'로 바뀐 채 되풀이한다.
그러니 “신운”과 “신기”를 다해 부를 "정복의 명곡", "승리의 비곡"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전쟁'”승리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새 음악 건설, 새 미래 건설, 새 세대의 도래가 그것이다. 지원병과 학병, 징병까지
부추기는 새로운 역사 “전야”에 만주국 협화회의 사상공작, 홍보문예의 수준을 나라 안팎으로알리기 위해 만든 작품과 같이 공을
들였다.
“일본황군”의 위세를 떠벌리며 그 전과와 무공이 불러올 “화려한”미래를 내다보는 상징적울림은 “성전” 승리를 단선적으로
노래했던 부왜(附倭) 국책시들과 다른 품격을 드러낸다.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 통영 출향과 만주국, 그리고 부왜시문”,
《어문학》 98집한국어문학회, 2007. 12.)
6. 류치환의 《북두성》의 친일경향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발표된 류치환의 《북두성(北斗星) 》은 그가 일제가 거의 망해가고 있는것도 모르고 일제의 이른바
“대동아성전”을 노래하고 일본이 인류를 이끄는 “북두성”이라고 추어올린 친일시이다. 그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북웅(北熊)이 우는
북방(北方) 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별이
슬픈 계절
이 거리
저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구비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난
한낱의 푸른 별이어니!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천만년 흐른 꿈이
내 맘에 장미처럼 고이 피다
구룸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를 지고
달도 기우러
밤은
어름같이 차고
상아같이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의 산맥 넘에서
동방의 새벽을 이르키다.
ㅡ유치환 시 '북두성(北斗星)' 전문.
이 시는 류치환이 북만을 떠나서 고향에 돌아가기 석달 전인 1944년 3월에 발표되였다. 이 때는 멸망에 박두한 일제가
단말마적으로 발악하면서 조선청년들을 대거 대포밥으로 삼아 군대로 끌어가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는 일제의 전쟁동원에 맞춰서
조선청년들에게 용감하게 전쟁터에 나가라고 고무하고 추동한 시라고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시는 비록 수려한 수사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시의 화자는 현실을 암흑으로 보고 있고 그 자신에 대해서는 그 암흑을 떨치고 빛나는 "새벽"을 준비해야 할 젊은 청년 중의 한
사람 ("한낱의 푸른 별")으로 이해하고 있다. " 두병(斗柄)을 재촉"한다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을 촉진하려는 마음의 표현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 '두병'이란 북두칠성의 일곱 번 째 별로서 24절기를 정하게 하는 기준별이기 때문이다.
류치환의 재만시기의 전반 친일문의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앞의 시 “전야”에 담겼던 새 력사, 새 세대의 도래가 “북두성”에서는
“동방의 새벽'”의 도래로 되풀이한다. "아세아의 산맥"을 '대동아공영권'의 은유이다. 북두성이 보여주는 “불멸의
빛”을 이 “슬픈 거리”에 비추는 힘찬 우주 순행의 섭리, 곧 국자처럼 극형을 거듭해 새로운 질서를 일으키리라는 뜻이 그
둘이다. 북두성의 절대적 순행 질서가 “이 거리 저 광야”의 슬픔을 물리치고 멀리 “아세아의 산맥” 너머까지 "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리라는 믿음이 굳다. “대동아공영권”의 리상을 이처럼 힘차게 녹인 시는 드물다. 일본제국주의를 천체에서의 북두성 같은
존재라고 노래하고 있는것이다. 천체의 순행 질서에 복종하고자 하는 모습은 전체주의 힘 안에서 개인의 헌신과 복종이라는 유치환 시의
한결같은 주도 동기다. 그의 개성 가운데 하나인 거대 관념적 상상에다 시인의 목소리를 잘 묶은 친일시이다.
1945년 년초에 이르러 제2차 세계대전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일제가 패망의 전야에 이르렀지만 류치환은 여전히 일제가 이길것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으면서 일제에 대한 찬송가를 소리높이 불렀다.
이상의 증거만으로도 류피환의 친일문인으로서의 성격을 규명하기는 충분하다.
7. 항일선렬들의 피로 물들은 연변땅은 친일파들의 락토(乐土)인가?
조선반도의 남녘 땅으로 몰려간 만주와 이북에서 식민지 말기를 보냈던 류치환 같은 친일파들은 광복 후에는 대부분 반공극우파로
전락하였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조선전쟁기간에 류치환이 적극 탄원하여 전쟁판에 나간 사람이 어찌 친일파로 될수 있겠는가 하는 류치환
지지자들의 주장은 어처구니 없다.
우리 연변땅은 일제침략을 반대하는 수십년의 항일투쟁 중에서 수천수많의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1920년에 있었던 “훈춘사건”과
“경신참안”에서만 해도 무려 3664명의 조선족 인민대중들이 무참하게 일본군대에 의해 참살당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체포되였고, 헤아릴수 없는 민가와 재산들이 불타버렸다. 그리하여 연변땅은 말그대로 피바다로 변했다. 유관부문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항일렬사의 총수는 3301명인데, 그중 조선족항일렬사가 3204명으로서 총수의 96.8%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런 항일투사들의 피로 물들인 연변땅에서“청마축제”를 벌리면서 친일파를 위해 청승맞은 초혼곡을 몇년이나 계속 불러댔다.
더욱 한심한것은 연변지역의 문예와 선전을 관장하는 직능부문의 전 제1인자마저 나서서 친일파 류치환을 기리는“청마축제”에 참가하여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연변이 과연 공산당이 령도하는 고장이 맞는가?”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 극우세력의 간세들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품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문학을 관장하고 작가들을 지도한다는 연변작가협회는 대관절 이런 중대한 시비로 뒤전으로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연변의 공직자들의 과연 어느 립장에 섰는가?
그리고 더욱 한심한것은 연변을 비롯한 각 지역의 문인들이 이처럼 중대한 문단의 시비에 직면해서도 강건너 불 구경하듯이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마다 정의지사 김학철 옹을 기린다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기야 항일투사 김학철 옹을 산 같은 존재라고 칭송하는 시를 쓰다가 방금 돌아앉아서는 친일파 류치환의 죽은 넋을 달래는 굿판을 벌이는 진풍경이니 그야말로 억이 막혀 말이 다 안 나간다.
이보다 더한 일은 이런 한심한 일을 저지르고도 나서서 지금껏 사과 한마디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와 같은 개별적인 얼이 빠진 인간들이 당기관. 문단지도기관의 요직에 앉아 있었기에 연변에서는 10년이 넘도록 친일파
한간문인 김문학을 비판하는 정의지사들을 백방으로 타격하였고 그들의 개인적인 진로마저 막아놓아 수많은 정신, 물질적인 피해를
안겨주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10년이 넘도록 단 한마디의 반성도 없고 피해자들에 대한 한마디의 사과도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 연변의 유관부문에서는 이전의 그런 안이한 사업작풍을 버리고 경각성을 높여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서야 할것이다.
2013년 5월 30일 연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