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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다면 # 0 8 . 기다림
wirtten by ; Doros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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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8 . 기다림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브레이크 타임이 되서야 허리를 펴고 앉은 한결은 두건을 벗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그의 손이 지나간 방향으로 넘겨진 머리카락이 곧은 이마를 드러냈고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평소와는 다른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찡그리며 인상을 쓰고 핸드폰을 쳐다보는 한결에게 담배를 피우러 갔던 원영이 돌아와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티를 건넸다.
"핸드폰을 사줬으면 연락을 해야지"
"으차. 누구요?"
"어? 아냐."
"서주연이요?"
"아냐. 주방정리 다했냐?"
"네. 서주연 핸드폰 사줬어요?"
"어. 어? 아니 근데 이새끼가 자꾸 서주연 서주연. 서주연이 니 친구야?"
"예"
"뭐?"
"동갑이잖아요"
"아...어, 그렇네"
당당하게 되받아치는 원영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한결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짧은 진동에 핸드폰 화면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져 우당탕 큰 소리가 났지만 허둥지둥 의자를 정리하는 한결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야"
"네 형"
"아이스티 너무 달다. 너 다 마셔"
반도 남지 않은 잔을 확인한 원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한결을 바라봤지만 이미 그는 매장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한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원영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서렸다.
"..재밌네."
순식간에 매장 뒤 공터에 들어선 한결은 휴대폰을 꺼내 주연에게서 온 문자를 다시 한 번 읽었다.
'찌개 맛있어요'
이게 뭐라고, 겨우 찌개 맛있다는 이 간단한 문자에 신이 나 여기까지 뛰어와 하마터면 통화버튼을 눌러 고맙다고 할 뻔 했다. 어제 일에 많이 놀랐을까. 먼저 연락해볼까. 무례함에 화가 나 집을 나가진 않을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상처를 받진 않을까. 오랜만에 나와 일을 하는것임에도 반나절 내내 넋이 나가있었다. 그답지 않게 메뉴오더를 헷갈려 실수를 하기도 했다.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고 다행이다 싶으니 어제의 키스가 떠올랐다. 자길 친척동생이라고 설명한것에 주연이 토라져 있었다는 걸 알게된 순간 눈에 들어온 주연의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흔들리며 다른 곳을 흘기는 반쯤 감긴 눈, 작고 동그란 코, 오물거리듯 말하는 핑크 빛 조그만 입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녈 오롯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귀여운 아기를 보면 깨물어주고 싶다고 말하듯.
그러게, 친척 동생에게 이런 기분을 느낄리가 없잖아. 저도 모르게 입술을 부딪힌 한결은 말캉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을 타고 온 몸에 전해지는 짜릿한 그 느낌을 더 느끼고 싶어 입을 벌려 깊숙히 밀어붙혔다. 입안에 사탕이라도 머금고 있었던건지 달콤함에 전율이 느껴질정도였다. 밀어내는 손길도, 숨이 차는 듯 애타게 내뱉는 신음도 금세 달아오른 자신을 막지 못했지만 볼에 떨어진 그녀의 눈물에 스파크가 일어난 것 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그 눈물이 아니였다면 술과 그녀에게 취해 이성의 끈을 놓을 뻔 했다. 평소 자신을 에워쌌던 외로움은 술과 잠으로도 이겨낼 수 없을만큼 괴로운 감정이었지만 그에게 있어 외로움이란 단순히 남녀와의 관계사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연애도 해볼만큼 해봤고 그간 여자가 없었다고 힘이 들거나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제의 일은 스스로에게도 이유를 찾기 힘들만큼 의외에 전개였다.
설마.
"...큰일났네. 서주연 여자로 느껴지네"
침착하게 앉아 생각을 해보려던 한결이 넋이 나간듯 허공에 중얼거렸다.
-
"어머"
빨래를 털어 널다 화들짝 놀라 옷가지를 떨어뜨렸다. 던지다시피 떨어뜨린 건 그의 남색 팬티였다. 같이 살며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 속옷빨래는 서로 이용하는 화장실에서 하기로 했는데. 옷에 묻혀 함께 돌려진 듯 싶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꿋꿋이 집게 손가락을 해서 그의 속옷까지 널고 베란다에서 나왔다.
바닥 청소에 창문닦기,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쉴틈없이 집안일을 해서 그나마 빠르게 흘러간 시간은 일곱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가 없는 하루는 너무 지루하고 느리게만 가는 것 같았다. 아저씨랑 있을 때는 밥먹고 수다만 떨어도 다음 식사 때가 되어있는 것 같았는데. 중얼거리다 허리를 피려 소파에 드러누워 휴대폰을 들었다.
'끝나고 금방 갈게'
낮에 아직은 익숙치 않은 핸드폰과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보낸 문자에 돌아온 답장이었다. 몇번이나 읽었지만 어느새 또 화면을 켜 그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자를 계속 보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면 보조개를 띄며 싱긋 웃는 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따스한 눈빛으로 반만 웃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좋았다. 너무 웃겨 환히 웃을 때 보다는 그 반쯤 웃는 듯한 표정이. 웃는 아저씨 얼굴을 혼자 생각하고 있노라니 웃음이 지어졌다.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여자인지 알겠지.
그렇게 누워 낄낄거리는데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하루 종일 바삐 몸을 움직인 탓에 배가 출출해졌지만 저녁은 같이 먹기로 한 그들만의 룰이 있었다.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주방으로 다가가 냉장고 앞에 선 주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렇게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주방에 들어온 지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밀가루 반죽과 씨름중인 나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럽혀진 주방 한 귀퉁이에서는 냄비가 활활 타올라 희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바닥과 식탁은 시도를 해보려던 흔적이 내가 움직인 이동경로를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할머니가 해주실 때 지켜봤다는 자신감 하나로 기억을 더듬어 아무런 레시피없이 시작한 수제비는 가관이었다. 반죽이 묽어 가루를 더 넣으면 물이 모잘랐고 물을 더 넣으면 계속 반복이었다. 양푼에 넘치려는 밀가루 풀을 포기하고 육수를 내기로 했던 냄비에 멸치와 다시다는 물이 전부 사라져 바닥에 들러붙은 잔해만 남았다.
새롭게 그릇을 꺼내 가루와 물을 아주 조금씩 넣으며 시작한 반죽이 얼추 덩어리가 만들어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됬다, 이제 육수를 만들어서…"
반죽을 그나마 덜 어지럽혀진 식탁의자에 내려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냄비를 치우려 할 때 였다. 순간 등 뒤로 차가운 공기와 프레쉬한 비누향이 다가와 날 감싸안았다. 숨을 쉬는 것 조차 잊을 만큼 놀란 내 귓가에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
"뜨겁잖아."
등 뒤에 느껴진 인기척에 돌아선 내 눈 앞엔 거친 숨을 내쉬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갑자기 돌아선 탓에 행주를 감싸 냄비를 치우던 그의 두 팔에 내가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놀라 벙찐 나도 냄비를 손에 든 그도 눈이 마주치자 정지화면처럼 멈춰졌다. 순식간에 흐르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심장이 또 미친듯이 동동거리는 것 같아.
"어..어 미안."
"..왔어요?.."
어정쩡한 자세에 가스렌지 위에 다시 냄비를 내려놓은 아저씨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사과하며 멀찍이 뒤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나 역시 뻘쭘해져 뒷걸음질 쳤다. 또 다시 낯설어진 공기.
"뜨거울것 같아서, 아직도 연기가 나길래.. 집 안에 탄내도 나고."
"아.죄송해요"
"아냐 다치진 않았지?"
"네.. 그니까..저녁준비하려구"
"그랬구나..큭"
어색함이 맴도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한결은 엉망이 된 주방을 훑어보는 듯 했다. 민망함에 고갤 숙였다가 큭큭 웃는 소리에 그를 봤다.
"주재료가 너는 아니지?"
"예?"
"반죽하려던게 이게 아니고 너 였던 거 같은데. 밀가루 범벅이 됬네"
"....헉"
망친 밀가루 반죽을 한 번 보고 자신의 볼을 두어번 두드리는 그의 행동에 그제서야 전자렌지에 비춰진 내 꼴을 확인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얼굴과 어깨 등에 밀가루가 잔뜩 묻어 엉망이었다. ......범벅 맞네.
"이거 치우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나가서 먹자"
"미안해요.."
"고마워"
"네?"
"날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던거잖아. 고마워"
씻고 나와 보니 분주히 어지럽혀진 주방을 치우는 그의 뒷모습에 미안해졌다. 피곤할텐데... 내 뜻과는 다르게 되버린 상황에 울상이 지어지려다 돌아오는 그의 대답에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음에는 꼭 성공해서 아저씨한테 요리를 해주고 싶어졌다. 아주 맛있고 따뜻한 요리를.
-
엉망이었지만 서로에게 나쁘지 않았던 그 날 저녁 이후로 아저씨는 레스토랑이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와 저녁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집안일이나 구인정보를 보며 시간을 떼우며 그를 기다리던 나는 짧은간격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열시가 훌쩍 넘은 시간. 평소라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그는 감감무소식 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하다 결심을 한 듯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주연아'
"늦어요?"
'응? 아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됬네. 몰랐다 진짜'
"바빴나봐요, 무슨 일 있나해서.."
'미안해. 택시타고 올래?'
"어디를요?"
'매장. 와서 나 좀 도와줘'
무슨 일인지 도와달라는 말에 후드티 차림으로 집을 나와 택시를 타자 5분도 안되서 그가 설명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짙은 남색의 외벽과 큰 창, 작은 화분들이 놓인 심플하고 예쁜 매장이었지만 꺼져있는 간판불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고 잠시 주저하다 가게에 들어서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연이야?"
"네"
"잠시만, 금방 불 켜줄게"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빛이 새어나오던 문이 열리자 그곳이 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방에서 나온 그는 매장 스텐드를 켜려던 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짜잔. 여기가 내 일터.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건"
"신 메뉴 개발"
"…..?"
"오 주연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째서 가게에 아저씨 혼자 있을거라고 생각한걸까.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으니 당연히 혼자 있을 줄 알았나보다. 한결을 따라 들어온 주방에서 원영과 정우가 나타나자 당황해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채로 고개를 숙였다. 쭈뼛거리는 내게 보조의자를 가져다준 한결은 이내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세 명의 남자로 가득찬 주방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와 빠르게 흐르는 공기에 덩달아 구경을 하던 내게도 바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뭘 도우면 되는걸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 하나 둘 뚝딱뚝딱 만들어진 접시들은 어느새 내가 앉은 자리 앞 작업대에 가득히 놓였다. 보는 것 만으로 군침이 도는 화려한 음식들이었다.
"자, 신메뉴 개발을 위한 시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예에~~~"
"먼저 이건 요즘 제철인 크랩을 사용한 로제 파스타, 특이사항은 베이스에 갈릭오일을 사용했습니다"
"먹어봐 주연아"
한껏 들뜬 표정으로 파스타를 설명하는 원영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오른편에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한결이 어서 먹어보라는 듯 재촉했다. 정우가 내민 포크를 받아 한웅큼 입에 집어 넣자 짭조롬하고 부드러운 맛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무엇하나 토달 것 없는 맛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표정 없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내려앉자 원영이 예스!를 외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동갑내기 정우와 한결은 하이파이브를를 쳤다. 계속해서 내오는 수많은 접시에 담긴 가지각색의 신메뉴를 모두 먹어보고 나서야 이들만의 시식회가 끝이 났다.
한결과 정우가 식재료 발주를 하러 간 사이, 주방에 남겨진 나는 빵빵해져 곧 터질 것 같은 배를 매만지고 있었다. 언제 온건지 작업대 한켠에 걸쳐앉은 원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한결이형이 핸드폰 사줬다며"
"그런데?"
"핸드폰 뭐야?"
"그건 왜 ㅁ..?"
내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은 순식간에 원영의 손에 들려있었다. 짜증이 난 얼굴로 그를 흘겨보자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원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손에 쥐어줬다. 뭐하는 짓 이야. 잔뜩 낮게 깔린 목소리로 신경질내도 그저 실실 웃을뿐이었다.
"새로 나온 거네. 나도 이걸로 바꿀까"
"너"
"카메라 화질 어때?"
"나 아는 척 하지마"
"...큭. 뭐?"
"나 아는 척 하지말라고. 아는 척 할만한 사이 아니잖아"
"보고싶었어. 서 주연"
"…..야"
"그 때랑은 달라. 지금은 니가 날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없는 사람처럼 여겨도 니 뜻대로 안 해줘"
"여전히 이기적이구나 넌"
"서주연 좋아하는 것도 여전하고."
기다랗게 패인 원영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말문이 막힌 내가 표정없이 무신경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자 밝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주방을 나가는 원영이었다.
그래. 처음 봤을때도 넌 그렇게 니 뒷머리를 매만지고 있었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게 날 안다는 듯 내 편을 드는 니 모습이 난 너무 웃겼어. 여전히 너는 나를 웃기는구나
"정말 싫어."
질끈 감은 눈 뒤로 그 날들이 떠올랐다. 너무 어렸고 어려서 더 아팠던 그 날들이.
첫댓글 첫 키스하고 알콩달콩
본격적인 로맨스 시작이죠 ㅎㅎ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콘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