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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매구 - 각묵스님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불교 2600년사를 통해 전개되어온 불교주류의 가르침은 이를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초기불교는 오온무아와 제법무아를 천명하였으며, 아비담마도 제법의 보편적 성질(共相)로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였고, 반야중관은 아공법공을 외쳤으며, 유식도 인무아와 법무아를 주창하였다. 이렇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조건발생(緣已生)이요, 그래서 무아라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아의 가르침은 오온, 12처, 18계로 정리되는 존재의 배후에 자아니 절대아니 참나니 순수이성이니 이데아니 창조주니 하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대사자후이며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여래장’ 불교교학 혼란 야기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어 스스로를 대승 중의 대승이라고 자처하게 된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는 연기와 무아를 설하기는 하였지만 아울러 마치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의 배후에 있는 양 일심을 천명하였고, 여래장이나 불성이 상주하는 듯한 언어표현을 즐겨 구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래장에는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이나 여래장이 불공이요, 존재의 배후에 일심이 상주불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스스로가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불교이해가 수승한 것이라 외친다.
물론 특정 교파의 주장이 특정한 시대에 등장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성향이나 시대정신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이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이것이 중국불교의 주류가 된 데는 이 사상이 그 시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어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지대한 영향 하에 놓여온 한국불교도 그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과학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현대에는 오히려 연기와 무아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초기불교 등 불교주류의 가르침이 더 적합할 것이다. 불교사 전체로 보면 방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비불교적 언어표현을 즐겨 사용하여 불교교학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온 여래장 사상에 더 이상 우리 불교가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양머리 걸고 개고기 파는 격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고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양두매구육(懸羊頭賣狗肉)의 준말이요, 직역하면 ‘양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좋은 물건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나쁜 물건을 팔거나, 표면으로는 그럴 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면으로는 좋지 않은 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벽암록〉등의 아주 많은 중국불교 선어록에서 잘못된 견해를 질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마지 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것은 혹시 아닐까?
[불교신문 2336호/ 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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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매구’를 읽고 - 이평래교수
연기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처럼 마음(na-ma, 名)과 몸(ru-pa, 色)도 그렇다는 것이다. 명색(名色)이란 ‘na-ma-ru-p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수작용(vedana-, 受).추상작용(sam.jn~a-, 想).의지작용(sam.ska-ra, 行).인식작용(vijn~a-na, 識)을 가리킨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구성요소(Pan~ca skandha-h., 五蘊)’라고 한다. ‘다섯 가지 구성요소’는 변화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변화를 속성으로 한다. 무상(anicca, 無常)이다. 현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늘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왜 변화하는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아(ana-tman, 無我).공(u-nyata-, 0, 空)이다. 초기.부파.대승의 어느 시대의 불교를 막론하고 연기와 무아를 변함없는 진리로 섬긴다. 불교신자는 이것을 믿고 외도는 안 믿는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이인가. 그렇다. 무엇으로 깨달았는가. 마음으로 깨달았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분별기(vibhajya-vya-karan.a, 分別起)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죽은 이는 모두 윤회하는가?” “번뇌가 있는 이는 윤회(sam.sa-ra)하며, 없는 이는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고따마 붓다의 전유물인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다섯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으므로 사람에게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생.노.병.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생.노.병.사의 필연성을 깨닫는 길을 도(ma-rga, 道)라고 한다.
도를 닦을 때 무엇을 도구로 삼는가. 못을 박을 때는 망치 그리고 나무를 켤 때는 톱을 도구로 삼는 것처럼, 도를 닦을 때 마음을 도구로 삼는다.
여래장은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일뿐
여래장의 空해석 초기불교-중관사상과 달라
불교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마음’이라고만 불렀는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여래장(tatha-gatagarbha, 如來藏) 또는 불성(buddhadha-tu, 佛性)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일부학자는 왜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가. 연기와 공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여래장은 연기와 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공여래장(空如來藏).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rl-ma-la-devl--sim.ha-na-da-su-tra,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대정장(大正藏)> 12-221c) 또는 “공진여(空眞如).불공진여(不空眞如)”(<대승기신론>/<대정장(大正藏)> 32-576a)는 번뇌의 존재여부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공은 초기불교나 중관사상에서의 공과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공여래장.공진여는 번뇌가 0%(u-nyata-, 空)라는 말씀이고, 불공여래장.불공진여는 지혜와 자비가 100%(au-nyata-, 不空)라는 말씀이다.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과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으로 풀이한다.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잘 갈고 닦으면 과로서의 여래장이 된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보디나무(Bodhitree)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와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여러 깔빠(kalpa) 동안 갈고 닦던 보디싸ㅅ뜨와(bbodhisattva, 菩提薩)이고, 후자는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증장해버린 붓다(Buddha, 佛陀)이다.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성숙한 붓다에게는 탐.진.치(ra-ga.dves.a.moha-)의 삼독이 모두 소멸해 버려 번뇌가 0%(空)이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넘쳐흐르는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라는 논리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 뜰에는 감나무에 짙푸른 감이 매달려 있다. 이 짙푸른 감을 잘 가꾸면 가을에는 짙붉은 감이 될 것이다. 떫고 짙푸른 감(땡감)이나 달고 짙붉은 감(단감)이나 모두 감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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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 유감 - 각묵스님
<승만경>은 여래장을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다.(如來藏常住不變 是故如來藏)”라고 정의하고 있다. 힌두교의 정전인 <바가왓기따>는 읊는다. “칼날이 그것(자아)을 상하게 할 수 없고 …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 그것은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이다.”(BG.ii.22~25)
그렇지만 여래장을 신봉하는 자들은 여래장은 자아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며 영혼(命)이 아니고 인(人, 진인)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만일 여래장이 자아라고 하면 그것은 즉시 외도의 가르침이 되는 줄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천창 교수의 고백처럼 상주불변하는 여래장과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인 자아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승 <열반경>은 한술 더 떠서 적극적으로 “자아란 곧 여래장을 말한다.(我者是如來藏義)”라고 설한다. 상주불변하는 여래장을 설한 가르침을 두고 진정한 대승이라든지 일승이라든지 최상승이라든지 한다면 그토록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신 우리 세존 부처님이 어찌 통탄하실 일이 아니겠으며, 이 어찌 현양매구(懸羊賣狗)가 아니겠는가.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법’을 중심한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중관-유식의 불교 주류의 가르침이 결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강조한 ‘믿음의 종교’일 뿐이다.(<인도불교의 역사>, 하 148~9 참조)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여래장이나 불성이나 일심에 대한 믿음보다는 초기경이 강조하고 있는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면 충분하다.
여래장이 마음이면 상주불변 불가
여래장 경론은 외도성행하던 시대의 산물
혹자는 여래장을 마음이라 강변한다. 그런데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마음(心)을 식(識)과 동의어라고 설한다. 그리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오온 외에 절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강조한다. 식은 오온의 하나의 구성요소이며, 오온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조건발생(緣起)이라는 것은 불교의 상식중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래장이 마음이라 한다면 여래장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다. 절대로 상주불변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만일 오온 외에(非卽非離蘊) 일심이나 여래장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나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외도적 발상이며 현양매구일 뿐이다.
유식의 식은 전변(轉變)하는 것이다. 안혜는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 하여 아뢰야식을 비롯한 모든 식을 ‘찰나생 찰나멸’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의 식은 상주불변이 아니다. 오히려 유식은 식이 조건발생(依他起, 緣起)인 줄을 모르고 자아라고, 상주불변이라고 거머쥐고 있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분명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가 외도의 가르침이 성행하는 때였기에 외도적 성향을 가진 하근 중생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상주불변의 여래장이나 불성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불교 2600년의 전개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 시대에서까지 비불교적이요 외도적 사유를 마구 해대는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에다 일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면서 목을 매달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무아를 역설하는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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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 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불교신문 2345호(7월21일자)에 보도된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과 충남대 이평래 명예교수의 쟁점토론 ‘여래장사상- 주장과 반론’ 이후, 여래장사상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본지는 경북대 강병조 교수와 인도 뿌네대에 재학 중인 허정스님이 최근 보내온 반론문을 소개한다. 이와 함께 동국대 김호성 교수로부터 여래장사상의 의미, 초기불교와 여래장 사상 간의 논란이 이는 이유 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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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性과 人性 겸한 중생의 ‘이중성’ 개념
여래장이라는 이름의 인간들 / 김호성 동국대 교수
부처와 중생 ‘사이’…절대불변의 ‘실체’ 없어
무아. 공과 ‘一音性’ 확인하는 노력 축적해야
여래장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경전의 하나인 <여래장경>에는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의 질문은 “누가 여래장인가”, 혹은 “무엇을 여래장이라 부르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야 옳을 듯하다. 모든 중생, 그 속에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실 모두 여래장이다. 여래로 태어날 수 있는(부처가 될 수 있는) 태아를 수태(受胎)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때 ‘태아’라는 말 역시 하나의 비유이다. 그저 불교의 인간관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은 부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직은 가능태로서만 말한다. 겉으로 볼 때, 중생은 번뇌가 가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볼 때 부처.여래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부처로 현실화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중생(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말하는 개념이 여래장이다. 여래장 속에는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다. 여래장이라 불린 인간은 이렇게 부처와 중생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부처라 할 수도 있고, 중생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그러니까, 여래장의 개념에는 애시당초 절대불변의 실체라는 관념은 들어올 수 없다. 그렇게 되려면, 번뇌로서의 존재라고 하는 측면은 말해져서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래장 사상을 설하는 경론에서는 번뇌로서의 측면보다는 부처로서의 측면에 대한 서술이 더 많은 것 같다. 왜 일까? 번뇌의 얼굴을 한 인간에 대해서는 바로 앞 시대에 유식불교 경론들에서 집요하게 설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여래장사상은 불교심리학인 유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중생세계에만 집착하는 현실고착을 타파시키고, 부처를 향하여 저 높은 길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를 위하여 당시 여래장 사상이 성립하였던 시기의 힌두교 사상으로부터 많은 표현들이 차용되었던 것 같다. 또 그러한 표현으로 인해서 실제로 여래장 사상을 실체론으로 오해했던 사례 역시 전혀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아.연기.공을 말하는 입장에서는 “여래장사상은 불교(초기불교의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그러한 비판은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여래장 사상 안에 이미 부처와 중생의 이중성을 갖고 있는 만큼(이중적 존재는 절대불변의 실체가 아니므로), 무아나 공을 여래장이라는 개념과 아울러 말하고 있는 경론 역시 존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체론적으로 표현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측면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동시에 연기.무아.공과 여래장이 사실은 한 목소리(一音)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중생의 오온이 모두 무아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을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 역시불교의 핵심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은 번뇌 덩어리의 중생이다”라거나, “모든 중생은 지금 그대로 부처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보다 온당한 인간관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여튼, 초기불교에 입각한 여래장 사상 비판과 초기불교의 관점을 보다 확충하여 여래장 사상 안에서도 무아.공을 발견하여, 양자 사이의 일음성(一音性)을 확인해 가는 노력 모두를 축적해 갔으면 싶다. 이때 주의할 것은 비판 역시 주석이나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결코 대체나 지우기를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어느 경우에나 자기철학의 개진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지금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우리 뒤에 올지 모를 눈 밝은 선지식들의 판단을 위해서는 그 모든 자료들이 다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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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묵스님의 주장을 지지하며
‘실체 없는 마음’ 현대 과학으로도 증명
이평래 교수는 기능적으로만 마음 파악
강병조 경북의대 정신과 교수
‘마음’을 연구하고 있는 정신과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외람되게 필자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마음’이란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때와 장소(경우)에 따라서 기능적(functional)으로 사용할 때도 있고 실체적(identity)으로 사용할 때도 있다. 또한 개념적(concept)으로만 사용될 때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평래 교수가 말하는 ‘마음(여래장)’은 애매모호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는 개념 내지 단어만 같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연기, 사성제, 무아, 공, 중도 등의 이치를 깨달은 후의 뇌는, 뇌의 구조나 기능면에서 깨닫기 전의 것과는 다르다. 깨달은 후의 뇌의 기능은 욕망과 애착이 적고 자비로 충만한 뇌로 바뀐 것이다. 땡감(깨닫기 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단감(깨달은 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모두 감(뇌의 구조나 기능)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이나 단어)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 뇌의 구조나 기능이 달라진 점)으로는 불일(不一)이다.
이는 여래장(불성, 마음)을 실체적인 면으로 본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나 개념적으로만 보시고 말씀하신 것 같다. 감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 내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감의 본성이란 것도 없으며 단어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떫은 감과 단감은 그 성분이 이미 같지 않다. 물론 도를 깨치기 전의 싯다르타나 도를 깨친 후의 싯다르타는 같은 싯다르타이다. 그리고 떫은 감이나 단감도 같은 감이다. 같은 유전인자(DNA)가 있기 때문에 같다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DNA도 연기로서 생긴 것이고, 무아이며 무상이며 불변이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부처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째, 각묵스님이 주장하는 ‘마음(여래장)’은 마음을 실체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 같다.
각묵스님의 주장은 분명하며 필자도 동감한다. 여래장(마음, 자아)이 상주 불변이라는 것은, 무상, 고, 무아, 연기를 강조하신 석가모니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음(여래장)은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이는 석가모니의 생각과 일치되며 현대과학으로 증명되었다. 여래장 사상이 나온 것은 죽음의 불안에 떠는 낮은 근기(根機, 과학이 덜 발달된 시기)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음은 뇌의 기능 또는 활동이다’는 사실이 최근 20여년 사이에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밝혀졌다. 우리 불교도 하루 속히 이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드려 이것과 상치되는 교리는 수정하여야 한다. 아니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초기 불교의 교리로 돌아가면 이 과학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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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평래 교수의 글을 읽고
연기와 공엔 어떤 실체도 발 붙일 수 없어
‘방편’ 쓰지 말고 ‘붓다의 언어’로 말해야
-인도 뿌네대 빠알리어학과 석사과정 허정스님
각묵스님의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글에서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 마지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일이라는 글에 대하여 이평래 교수님은 “여래장 사상도 불교의 핵심인 연기와 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여래장사상을 몇 가지로 설명하였다.
즉, “공여래장(如來藏)은 번뇌가 0%(空)인 상태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은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여래장을 인과로 나누어 설명하면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은 정각을 얻은 붓다이다. 이 둘의 관계는 본성(本性)으로는 불이(不異)이며 위상(位相)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마치 땡감과 단감은 동일한 감(不異)이지만 땡감(因)은 떫고 단감(果)은 달듯이(不一).”
그러나 위와 같은 이 교수님의 반박 글에서 과연 “여래장 사상과 연기와 공이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그분의 주장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왜 그런가? 먼저 이 교수님의 설명을 따르자면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란 과(果)로서의 여래장을 설명하는 측면이기에 여래장이 연기와공임을 설명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공과 불공의 의미는 번뇌의 없음(空)과 지혜의 있음(不空)을 설명이고 그것은 붓다가 번뇌가 없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래장을 인과로 나누어 불일불이로 설명하는 것 또한 여래장이 연기와 공의 뜻이란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연기와 공이란 존재란 서로서로 조건 되어 생멸하고 있고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그것이 마음이라 불리어지고 여래장이라 불리어지더라도 서로서로 조건 되어 있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연기와 공이란 그 어떤 실체도 발 붙일 수 없는 철두철미한 언어이다. 대승에서 마음을 인과로 나누고 이사(理事)로 나누고 체상용(體相用)으로 나누어 그 관계성을 불일불이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주불변하는 실체를 인정하는 이교도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실체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힌두교의 전변설(轉變說)이 그것이다. 그들은 주장은 영원불변하고 모든 것의 근원인 브라흐마(Brahma)가 있는데 그 브라흐마(Brahma)가 각각의 아트만(Atman)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마(Brahma)가 아트만(Atman)이고 아트만이 브라흐마여서 서로의 관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不一不二)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다.
일부 여래장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사와 체상용의 방법을 상주불변하는 여래장, 진여, 참나를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승만경>의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다.(如來藏常住不變 是故如來藏)” 라는 표현도 불자들은 외도와 다른 연기와 공의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내적인 이유를 많은 불교학자들은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언어를 사용하는 불교집단이 나타나서 불교가 힌두화되었기에 불교가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여래장사상이 그 시대에 필요했던 방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편 때문에 불교는 사라져 간 것이다. 나는 지금 인도의 뿌네대학에 다니면서 힌두교를 굳게 믿는 교수들 밑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들은 서슴없이 불교와 힌두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왜 불교가 힌두교와 같은가라고 물으면 그들이 답하는 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여래장, 불성)이 같다는 것이다. 우리(불교인)가 아무리 그들과 같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불교와 힌두교는 같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변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오해받지 않을 붓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교신문 2352호/ 8월18일자]
자네는 천성을 얼마나 쓸 수 있게 되어 있길래 ? 내 천성이 못쓰겠다고 그러나 !
비단금 말마따나 코를 공부를 시켜야 할까 ? 아니면 족을 더 공부시켜야 할까 ? 아니면 내장을 더 공부를 시켜야 할까 ? 마음이란 넘은 형체가 없으니 공부시키기도 그렇고 ! 나가 헛소리 않는 것만도 훌륭한 것이여. 공부는 무슨 얼어 죽을 공부 비단금 처럼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인데. 비단금 자네 맘에는 안 들어두 나 이 모습으로 살라네. 어쩌겄나. 내가 내 좋으니 ...
그대에게 좋다고 좋은 것은 아닐세^^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