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의 일생
멕시코로 이민 온 독일 출신 사진 작가인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태생인 마틸데 칼데론 사이의 셋째 딸로 멕시코 코요아칸 '푸른 저택'에서 태어난다.
풀네임: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
1913년(6세)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간 방에만 갇힌 채로 살았다. 외로운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말라빠진 오른쪽다리를 혐오하게 되었다.
1921년(14세)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해서 서클 '카츄사즈' 활동을 하면서 독서를 끊임없이 했다. 또한 그녀는 카츄사즈를 통해 남자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정을 실현해 나가는 동지적 성실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 서클에서 그녀의 첫 사랑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난다.
1925년(18세)
알레한드로와 프리다가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서 알레한드로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심한 참상을 당했다.(하복부와 척추뼈에 철골이 들어가고, 심한 출혈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는게 다행인데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1926년(19세)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며 알레한드로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나머지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 그녀의 가족들은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 주고, 침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줬다. 그렇게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첫 번째 그림 '자화상'을 완성한 후 알레한드로에게 보냄.
1928년(21세)
알레한드로와의 이별, 그러나 이후에는 친구 사이로 평생 서로를 지켜보게 된다. 그해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망명하고 있던 쿠바의 공산주의자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는 티나 모도티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리하여 프리다는 티나와의 교류를 통해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그녀는 공산당이 조직한 문화 행사 및 정치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이 때, 두 번째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1929년(22세)
42세의 디에고와 결혼했다. 친구들은 스무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디에고의 복잡한 여자 관계를 들먹이며 반대하지만 프리다의 아버지는 그녀의 치료비 지출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터라 승낙했다. 결혼 후 그녀는 그림을 그만두고 남편을 위해서만 봉사한다. 그녀는
1930(23세)
첫 번째 임신,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골반 이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 중절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디에고가 부르주아화 되었다면서 비난하고 결국 스스로 탈당을 하게 되었다. 디에고의 미국에서의 벽화 작업으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1932년(25세)
두 번째 임신,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아들을 선사하고 싶었지만, 그는 아이를 원치 않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유산. 낙태라는 고통을 알게 된다. 프리다의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하고 디에고는 플레이 보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방종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프리다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1934년(27세)
세번째의 유산, 디에고가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르고, 더 이상 테우아나 전통의상도 입지 않았다.
1935년(28세)
멕시코로 돌아와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알게된다. 디에고의 협박으로 그들의 만남은 끝났다. 프리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7년(30세)
망명 생활로 떠돌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를 도와주게 된다. 트로츠키는 프리다에게 매혹되고 둘의 만남은 사랑으로 발전되었으나 오래가지 않고 관계를 청산하였다.
1938년(31세)
프랑스 초현실주의 거장 앙드레 부르통을 만났다.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지게 된다. 브르통은 그녀를 "뛰어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뉴욕에서 젊은 사진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39(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서도 역시 칸딘스키,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극찬을 받는다. 남미 화가로는 최초의 루브로 박물관에 그녀의 그림이 소장된다. 머레이와 이별하고,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이혼한 후,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1940(33세)
멕시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2인의 프리다 상처받은 식탁'을 출품하고, 디에고는 여자 관계 정리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립성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 리베라의 54세의 생일에 재결합한다.
1941(34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죽음,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4(37세)
석고와 가죽 코르셋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해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기에 이른다.
1946(39세)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으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50~51에는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는다.
1953(46세)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의 회고 전시회가 열렸는데 개막식날 침대에 실린채 참석했다. 결국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1954(47세)
폐렴이 겹친다. 7월에 휠체어를 타고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했고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각본을 만들기 위해 다시금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7월 12일 일기
"내가 거리로 나간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1954년 7월 13일 자살
1958년 푸른 저택의 프리다 박물관으로 개장.
"자살"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며 일생을 지냈던 프리다 칼로.
그녀의 그림을 보면 그녀의 눈물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남편 디에고는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이지만, 끊임없는 외도로 그녀를 상처입혔죠.
심지어 그녀의 여동생과도..
워크투리맴버RachealLampa_-_If_You_Believe.mp3
첫댓글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