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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원문보기 글쓴이: heaven
사해두루마리란? |
제1절 사해두루마리란? 기타 종교적 문헌을 말한다. 제2절 사해두루마리의 발견된 경위와 발견된 내용물
1947년에서 1956년 사이 예루살렘에서는 동쪽, 여리고에서는 남쪽에 있는 사해 근방 와디쿰란(the wadi Qumran) 그리고 키르벳 쿰(khirbetQumran)과 와디 무라바이트(wadi Murabb'at) 등에서 구약의 사본을 비릇하여 여러 가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외경들, 그리고 Qumran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엣세네인으로 추정)의 기록과 그 사회의 규범 등의 문헌이 발견되었다. 유대광야의 '와디 쿰란' 지역의 가파른 암벽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무서워서 그 날 하산했다가 다음날 친구와 함께 용기를 갖고 동굴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파피러스(papyrus: 종이 대신 사용했던 갈대로 만든 것) 두루마리들이 기름칠한 헝겁으로 쌓여진 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이것들이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두루마리를 갖고 하산하였다.
즉 7개의 두루마리를 첫 번째 동굴(CaveⅠ) 에서 발견했다. 이것을 학술용어로 (Q1)이라 한다. 마르 아라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Nar Athanaasius Yeshue Samue은 그 두 소년으로부터 7개 중 4개의 두루마리를 샀다. [상기 (b)의 (1)(2)(3)(4)] 대학교 팔레스틴 고고학 전문가의 슈케닉(Eleazer L. Sukenik) 교수가 베들레힘의 중간 상인으로부터 매입 했다. 미국학교(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earch)에 4개의 두루마리를 보내서 연구소장 서리 John C. Trever(존 시트레버)와 Willim Brown Lee(윌리마 브라운리) 박사가 연구해 본 결과 고고학적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당대 유명한 히브리 고고학자이며 고대 셈어(semitic)의 최고 권위자인 John Hapkins(존 합킨스)대학교의 윌리암 에프 알브 라이트(Willim F. Albright) 박사에게 이사야서 두루마리 일부분을 35mm필름에 복사하여 보냈다. 아르라이트 박사는 조사 결과 BC150년 경으로 추산했다. 두루마리는 BC 200년 -AD100년 사이의 고문서로 판명되었다.
고고학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예루살렘 고고학자들은 발굴대를 조직하여 유다의 광야의 동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답사들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치열한 전쟁을 지연 되기도 했으나 고고학자들의 집념과 노력으로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성서적 문헌이 발견되었다. 고고학 박물관 지배인 랑게스터 하딩(Gerold Lanster Harding)그리고 도미니카의 성서 학교 회원들은 1947년 아랍의 목자 무하마드 아드딥에 의해서 발견된 Cave-Ⅰ을 다시 확인했다. 그 동굴은 길이가 26피트, 넓이가 6피트 였으며 그곳에서 파피러스와 양피지 의 두루마리 부스러기 600여개와 깨어진 도기, 아마포 조각등을 발견했다. 지역이나 이 사본들이 나온 동굴은 비가 거의 안오는 유대 광야에 위치하고 있어서 참으로 건조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다행히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보존상태가 퍽 양호했던 것이다. 뻬르 드 보 교수는 발견된 40개의 큰 항아리 중에서 많은 것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혀 손상이 없었던 AD68년 경의 원상의 2개 항아리는 현재 히브리 대학에 소장하고 있다. 탐사가 시작되어 11개의 동굴에서 각 자료들이 나왔다. 약100개의 단편은 구약 성서의 사본이었다. 있었다. 특히 이사야서는 12개, 시편은 10개, 신명기는 14개의 복사판이 있었다. 발견되었다. 거대한 회의장, 수 백 개의 그릇, 대장간, 의자, 책상, 잉크병, 보석, 유골, 여자용 귀고리, 동전 750개(BC 135~AD 68) 등이다. 산화된 길이 32인치의 동판(TheCopper Scrolls)을 3개 발견했다. 이 동판은 화확적 처리되어 원문을 회복되었고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Hebron(헤브론)과 Nablus(나블러스) 사이에 200톤 정도의 금과 은으로 된 보물이 거의 60여 곳에 땅속 16피트에서 -18피트 깊이에 묻혀 있다 한다. 이곳에 묻힌 금과 은으로 된 보물이 대부분 신전에서 사용되는 도구이다. 아직 탐색대들이 이 보물을 찾지 못했으나 앞으로 계속 조사해볼 가치는 크다. 중요한 기록을 동판에 기록하고 유사시에 비밀이 땅속에 묻어 비밀리에 보존시킨 것은 기록을 중요시 여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성역의 하나이다. 두루마리를 이스라엘 정부는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양피지, 파피러스에 기록하여 에집트 장례 의식 때 쓰는 방부제와 비슷한 방부제를 발라서 후손을 위해 잘 보존시켰다. 특히 그 기록들을 방부제를 칠한 헝겊으로 잘 싸서 항아리에 집어 넣어 보존키도 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놋쇠판에 기록하여 유고시에는 땅속에 묻어 보존시켰다. 양피지나 파피러스에는 특수한 검정색 잉크나 붉은색 잉크로 기록했고 놋쇠판은 손을 직접 팠다. 일부는 미국,영국, 프랑스 등지에 있지만 대부분이 이스라엘 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국회의사당 왼쪽에 사해유물 박물관을 지었다. 그 건물 모양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처럼 만들어서 사해 유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박물관의 내부는 특수한 실린더 장치가 되어 있어 전쟁, 화재, 천재지변 시에는 모든 중요한 유물들이 자동적으로 지하에 들어가 보존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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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전쟁 [The War of the Sons of Light Against the Sons of Darkness,
― 戰爭]유대교 문서 브리태니커
BC 2세기 전반 유대 사막에 쿰란 공동체를 세운 유대교의 에세네파가 남긴 매우 중요한 문서.
에세네파는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거룩한 자들, 즉 종말에 이스라엘의 원수인 어둠의 아들들과 처절한 전쟁을 벌이게 될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1947년 쿰란의 제1동굴에서 발견한 〈전쟁 규칙 War Rule〉은 군사조직 및 전략 지침서로 전투 장비와 신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에세네파의 〈훈련 지침서 Manual of Discipline〉에 언급되어 있는, 진리의 영들과 타락한 영들에 관한 교리를 발전시킨 신학 논문이기도 하다. 그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는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간의 40년에 걸친 '성전'에는 지상의 군대뿐만 아니라 천상의 군대도 참가한다. 이스라엘의 선택된 사람들은 천사의 군대에 합류하는 반면,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다른 지상의 나라들과 한편이 되어 싸운다. 빛의 세력이 거두는 승리는 악에 대한 최후의 괴멸을 상징한 것이며, 그후에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영원히 정의롭게 통치할 것이다. 학자들 대부분은 이 전쟁 두루마리에 언급된 원수 '키팀'(Kittim)을 BC 63년에 유대를 침략하고 정복한 로마로 본다. 이 가정이 옳다면 그 두루마리의 주요부분(두루마리는 편집된 작품인 듯함)은 쿰란 공동체가 유대인 반란(AD 66~70) 때문에 추방된 이후부터 AD 68년 이전에 기록된 셈이다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 1,2부>
깃딤(B)(Kittim) 은 어디인가?
(1) 야벳의 아들 야완의 자손이 점령하고 있던 구브로 섬(창 10:4, 대상 1:7).
(2) 이사야가 베니게 백성을 가리켜서 깃딤이라 하엿다(사 23:1).
(3) 지중해 연안의 모든 섬과 히브리 소아시아 연안까지 포함(단 11:30).
깃딤 1 (!-yYITiki , Kittim) 「괴롭게 하다」
노아의 증손, 야벳의 손자이며 야완의 세째 아들인데, 그로부터 한 민족이 생겼다(창 10:4, 대상 1:7). 인종학적으로 볼 때 야완(이오니아인)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이 이름이 구브로 섬의 동남단에 있던 식민지,오늘날 라르나카(Larnaka)라고 불리우는 개항장인 키티온(Kition, 키티움 Citium)에게서 연유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일반적으로 지중해의 섬들과 연해안 제국들도 이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곳이 있다(민 24:24, 사 23:1, 12, 렘 2:10, 겔 27:6, 단 11:30).
깃딤 2 (!yTiKi , Kittim)
구브로(키프로스) 섬을 지칭한다(사 23:1, 12, 렘 2:10, 겔 27:6). →구브로. `깃딤'은 구브로 섬의 동남 해안의 성읍 기디온(Kivtion)에서 연유한다. 기디온(현재`라르나가' Larnaca)은 BC 9-8세기 이래 베니게의 중요한 식민지였는데, 베니게의 비문에는 ytk(Kty)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람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깃딤은 앗수르와 에벨을괴롭힌다고 하였다(민 24:24).
여기서 깃딤이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이 말씀의 연대 나름이다. 만일 이 말씀이 매우 오래된 것이라면(BC 13세기) 깃딤은 `바다의 민족' (Sea-people)을 가리킬 것이다. 만일 8 내지 7세기의 것이라고 하면 구브로 도민일 것이다. 만일 훨씬 후기의 것이라고 하면 알렉산더 대왕의 병력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라틴어역(Vulgata Editio)은 `이탈리아에서'(de Italia)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는"깃딤(로마)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리아 사람)를 학대하며 에벨(히브리인)을 괴롭게 하리라…"(민 24:24)의 의미로 된다.
이사야서에서는 두로에 관한말씀(23장) 중에서 두로, 시돈, 다시스 등과 같이 깃딤에도 언급되어 있다(1, 12절). 이 경우는 BC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로와 다른 베니게의 제성읍을 공격하여 시돈 왕 룰리(Luli)가 구브로 섬으로 도망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겔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두로에 관한 애가(哀歌, 27장)에서 깃딤에도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는 두로 배의 갑판에 사용할 재료의 산지로 되어 있다(6절).
예레미야서에서는 동쪽의 게달에 대하여 서쪽의 대표로서 깃딤을 들고 있다(2:10). 이것은 구브로 섬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깃딤 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1:30). 이것은 안디오코스 Ⅳ세 에비바네스(Antiochus Ⅳ Epiphanes, BC 175-164)가 두번째의 애굽 원정 때 애굽의 호소에 답하여 로마가 집정관(執政官) 라에나스를 파송하여 안디오코스를 애굽에서 철수시킨 것에 관련하고 있다.
70인역은 깃딤Rwmaivoi(로마인들)로 번역하고 있다. 동시에 여기서는 발람의 하나님의 말씀(상술한) 성취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카비 1서에서는 깃딤은 마게도니아를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1:1, 8:5).
사해 사본에서 깃딤이 언급될 경우 로마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이설도 있다).
하박국서 주해에서 갈대아 사람이 깃딤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사해사본의 비밀:전쟁두루마리
[The War of the Sons of Light Against the Sons of Darkness, ― 戰爭]
BC 2세기 전반 유대 사막에 쿰란 공동체를 세운 유대교의 에세네파가 남긴 매우 중요한 문서.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D%95%B4_%EB%AC%B8%EC%84%9C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7468&cid=799&categoryId=3270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동굴
전쟁두루마리(좌)와 찬양집(우)
사해사본중 전쟁두루마리
전쟁두루마리의 대부분은 미공개 되어있슴
내용
탄소 측정법과 문서에 대한 분석, 글씨체에 의해 사해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대선지자 이사야 문서는 기원전 335년에서 기원후 107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사해 사본 이외에는, 십계명이 담겨 있는 이집트의 Nash 파피루스 정도가 이에 비견할 만한 오래된 순서였다. 비슷하게 쓰인 문서들이 근처, 특히 마사다 요새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일부 문서는 파피루스에 쓰여 있고, 많은 문서들이 갈색 동물 가죽 위에 쓰여 있다. 탄소 계열의 재료로 만들어진 잉크로 새의 깃털촉으로 쓰였다. "구리 두루마리"라 이름 붙인 문서는 종이처럼 얇은 구리판에 기록되어 있다. 사해 문서 가운데 80% ~ 85%는 각각 고전(또는 성서) 히브리어, 사해 문서 히브리어와 원시 탄나이트(미쉬나) 히브리어로 불리는 3개의 히브리어 방언들로 쓰였다. 일부 문서는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이기도 했다.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
발견 과정, 각 동굴의 문서들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들사해사본은 1947년에 한 베두인이 쿰란 지역 동굴에서 처음 발견을 하였다. 그 사실을 안 E.L. 수케닉(E. L. Sukenik)고고학자는 사해사본을 베두인에게서 샀다.
사해사본 두루마리들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쿰란 주거지에서 적게는 125m (제4동굴)에서부터 1km (제1동굴)까지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살던 주거지에서 발견된 문서는 없다. 염소와 양을 치는 베두인 모함메드 아흐메드 엘-하메드 (별칭 에드-디브, "늑대")가 1947년초에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존 트레버 박사는 무함메드 에드-디브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사람과 인터뷰를 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포함한 여러 변형된 이야기들이었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들은 골동품 상인인 이브라힘 이즈하(Ibrahim 'Ijha)가 베들레헴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시나고그에서 훔쳤다는 의혹 때문에 그들에게 돌려 주었다. 그 후 이 문서들은 칸도라고 불린, 칼릴 에스칸더 샤힌(Khalil Eskander Shahin, "Kando")이라는 도굴꾼이자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갔다. 처음 베두인들이 이 문서를 발견했을 때에는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냈는데, 칸도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나중에 동굴에 다시 들어가 더 많은 문서들을 꺼내오게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칸도가 적어도 네 개의 두루마리를 불법적으로 발굴했다고 하기도 한다.
베두인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들은 제 삼자에게 흥정을 통해 넘어갔다. 그 중 하나는 시리아 정교회의 일원인 게오르게 이샤야(George Isha'ya)였고, 그는 곧 이 문서의 정체를 문의하기 위해 성 마가 수도원에 접촉했다. 이러한 발굴 소식은 메트로폴리스 주교 아타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또는 마르 사무엘(Mar Samuel)이라고 더 잘 알려짐---에게 전해졌다.
문서를 조사하고 나서 오래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마르 사무엘은 이를 사는 데 관심을 보이게 된다. 4개의 두루마리들을 곧 사게 되며 이들은 현재 유명한 이사야 스크롤 (1QIsa)과, 공동체 규칙, 하박국 페샤르(하박국 주석)과 창세 묵시록이다. 또다른 두루마리들이 고문서 시장에 나돌았으며,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이면서 히브리 대학의 교수인 엘레이저 수케닉(Eleazer Sukenik)교수가 3개의 두루말이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전쟁 두루마리, 추수감사 찬송과 이사야 문서의 단편들이었다.
1947년 말까지, 수케닉은 마르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을 사려고 시도했다. 정말 거래가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미국 동방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ASOR)의 존 트레버 박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트레버 박사는 이 문서의 구절들을 당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인 내쉬 파피루스와 비교했고 이 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트레버 박사는 아마추어 사진가로도 열정이 있었다. 그는 마르 사무엘을 1948년 2월 21일에 만나 두루마리의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어떤 사진은 사본 자체보다 보관 상태가 더 좋기도 했다. 사본들의 면 커버를 제거하고 나서 사그러졌기 때문이다.
그 해 3월에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 안전을 위해 문서들을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곧 베이루트로 옮겨졌다.
1948년 9월 초, 마르 사무엘은, ASOR의 새 소장인 오비드 셀러스에게 새롭게 얻은 사본들의 단편을 가지고 간다. 그 해 말, 학자들은 사본이 발견된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게 된다. 당국에서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셀러스는 시리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굴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셀러스가 주겠다고 한 돈보다 더 비싼 돈을 요구했다. 제1동굴은 결국 1949년 1월 28년에 국제 연합의 조사관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해사본의 비밀:전쟁두루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