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夢龍(이몽룡)과 成春香(성춘향)의 팔자춘산(八子春山)
우리들은 누구나 李夢龍(이몽룡)과 成春香(성춘향)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 對해 잘 알고 있다. <春香傳(춘향전>은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진행이 되고 이 問題視(문제시) 되는 만남의 現象(현상)과 當爲性(당위성)를 보여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春香傳(춘향전)>의 내용을 그대로 믿거나 이것이 歷史的(역사적) 실제라 생각하였다. 傳統時代小說(전통시대소설)에는 事實(사실)과 虛構(허구), 眞實(진실)과 誇張(과장)이 適切(적절)하게 섞여 있어 그럴듯한 이야기로 전개 된다. 조선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능력이 아니라 출생이나 학력, 용모 等에 依하여 차별을 받았다(물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과연 <춘향전>에는 어떤 사실이 숨어 있고 어떤 虛構的(허구적) 상황이 숨어 있을까?
<춘향전>은 退妓(퇴기)의 딸 春香(춘향)과 南原 副使(남원 부사)의 아들로 兩班家(양반가)의 선비 夢龍(몽룡)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이몽룡은 英雄的(영웅적) 救援者(구원자)로 그려진다.
우리들은 아직도 靑春男女(청춘남녀)의 만남을 떠올릴 때 먼저 결혼을 염두에 둔다. 몽룡과 춘향도 마찬가지다. <춘향전>의 몽룡과 춘향은 同甲(동갑)으로 二八靑春(이팔청춘)이었다. 오늘날에는 결혼을 엄두도 못낼 나이이나 조선 시대에는 法的(법적)으로 혼인하는 데 全혀 瑕疵(하자)가 없었다.
조선 시대 科擧制度(과거제도)는 3年에 한 番씩 뽑는 式年試(식년시)와 특별한 경우 실시하는 別試(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룡이 춘향과 처음 만남을 가진 뒤 1年 餘 만에 과거에 壯元及第(장원급제)를 한 것을 보면 그는 조선 후기에 널리 시행되었던 별시에 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과거 시험을 본 뒤 바로 임금이 及第者(급제자)를 시상한 것이나 몽룡이 進士(진사)나 生員(생원)을 거치지 않은 것을 보면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놀 거 다 놀고 연애까지 하였는데 1年 餘 만에 수석 합격을 하다니. 몽룡, 너란 남자 진정 엄친아구나!) 또한 장원급제한 뒤 몽룡이 바로 暗行御史(암행어사)가 되는 것은 무척이나 例外的(예외적)이다. 그가 남원에 파견된 사례는 小說的(소설적) 허구라 할 수 있다. 암행어사가 緣故地(연고지)에 파견을 나가면 안면 있는 벼슬아치의 청탁을 받아 공정한 업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相避制(상피제)를 적용하여 자신의 出身地域(출신지역)에는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조선 시대에도 守令(수령)이 함부로 司法權(사법권)을 집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기 守廳(수청)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은 더더욱 집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춘향전>에서 卞學道(변학도)는 고을 수령으로서 권위를 내세워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한다. 조선 시대의 法典(법전)인 <經國大典(경국대전)>에 따르면 三審制(삼심제)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던 까닭에 이런 행위는 不可能(불가능)하였다(인권 보호를 爲한 각종 法的(법적) 제도가 완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춘향전>에서는 변학도의 殘酷性(잔혹성)을 부각시키고 後에 통쾌한 복수로 연결하기 爲해 恣意的(자의적)이고 任意的(임의적)인 法 집행과 고문을 일삼는 인물로 사또를 묘사하였으나 이러한 설정은 조선 사회에는 인권 보호를 爲한 조치가 없었던 것처럼 인식되게 하고 있다(물론 법률의 死角地帶(사각지대가 분명 존재했겠지만 말이다).
변학도도 이몽룡처럼 兩班(양반)의 지위를 이용하여 춘향을 불러들이나 그녀를 對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이몽룡은 남자로서 춘향을 여자로 對하였지만 변학도는 양반으로서 춘향을 賤妓(천기)로 對하였다. 이몽룡은 변학도와는 다르게 양반의 체면과 권위를 버리고 비천한 신분의 춘향과 동등해졌다. 그처럼 체면과 권위를 쉽게 버리고 비천한 신분과 동등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양반은 흔지 않았다.
小說(소설)은 제한된 공간에서 시대의 不條理(부조리)와 모순을 과감하게 폭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代理滿足(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춘향전>에서 설정된 장면들은 전부 歷史的(역사적) 사실은 아니고, 劇的(극적) 효과를 담아내기 爲하여 과장되고 虛構的(허구적)인 장면들을 곳곳에 배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사또 子弟(자제) 이도령이 나이가 二八(이팔)이요, 풍채는 唐나라 杜牧之(두목지)와 같으며, 度量(도량)은 창해같고, 지혜 활달하며 문장은 李白(이백)이요, 필법은 王羲之(왕희지)와 같았다. 이때 月梅(월매) 딸 춘향이도 또한 詩書音律(시서음률)이 능통하니 天中節(천중절)을 모를소냐. 몽룡이 廣寒樓(광한루) 섭적 올라 사면을 살펴보니 경개가 壯히 좋다. 1年 가운데 가장 좋은 시절이다.
'저 건너 花柳(화류) 가운데 오락가락 희뜩희뜩 어른어른 하는 것이 뭔지 자세히 보고 오거라.'
도련님이 엉겁결에, '壯히 좋다!'라고 하였다. 通引(통인)이 말하길, '어미는 妓女(기녀)이오나 춘향이는 도도하여 기생 구실 마다하고 百花草葉(백화초엽)에 글자도 생각하고, 女工才質(여공재질)이며 문장을 兼全(겸전)하여 閭閻(여염)집 처자와 다름이 없나이다.'라고 하였다.
'사또 자제 도련님이 광한루에 오셨다 너 노는 모양 보고 불러 오란 令이 났다.'
'도련님이 나를 어찌 알아 부른단 말이냐?'
'잔말 말고 건너 가자.'
춘향의 도량한 뜻이 緣分(연분)되려고 그러한 지 홀연 생각하니 갈 마음이 나되 母親(모친)의 뜻을 올라 默默(묵묵)히 한참이나 말 않고 앉았더니, 춘향 母 썩 나 앉으며 정신 없게 말하되, '꿈이라 하는 것이 아주 全혀 허사는 아닌 모양이다. 들으니 사또 자제 도련님 이름이 몽룡이라 하니 꿈 夢자, 용 龍자 신통하게 맞추었다. 잠깐 가서 다녀오라.'한다.
臙脂(연지) 품은 듯 아래 위로 고운 맵시, 어린 안개 석양에 비는 듯, 푸른 치마 아롱지니 무늬는 銀河水(은하수)의 물결과 같다. 춘향이 고운 태도로 얼굴을 단정하게 하여 앉은 모습 자세하게 살펴보니 白石(백석) 창파 새로 내린 비 뒤에 목욕하고 앉은 제비 사람을 보고 놀라듯 別로 단장한 일 없이 천연한 國色(국색)이라. 神仙(신선)은 내 알 수 없으나 瀛州(영주)에서 놀선 선녀가 남원에 귀양 와서 사니, 월궁에 모여 놀던 선녀가 벗 한 사람을 잃었구나. 이때 춘향이 秋波(추파)를 잠깐 들어 이도령을 살펴보니, 이 세상의 호걸이요, 塵世(진세)의 奇男子(기남자)였다. 이도령이 입을 열어, '성현도 姓이 같으면 장가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네 姓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라고 하였다. 춘향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八字春山(팔자춘산) 찡그리고 丹脣皓齒(단순호치) 잠깐 열어 나직이 여쭈되, '소녀의 姓은 成이요, 이름은 춘향이며, 나이는 이팔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이도령의 거동 보소.
'네 나이 이팔이라 하니 나의 四四(사사) 16과 正同甲(정동갑)이요, 姓氏(성씨)를 들어보니 나와 天定緣分(천정연분) 분명하고나. 우리 둘이 만났으니 萬年樂(만년락)을 이뤄 보자. 네 집이 어데냐? 오늘 밤 退令(퇴령) 뒤에 너의 집에 갈 터이니 恝視(괄시)나 부디 마라.'
이때 도련님은 춘향을 哀然(애연)히 보낸 뒤에 잊을 수 없는 생각 둘 데가 없어 冊房(책방)으로 돌아와 만사에 뜻이 없고, 다만 생각은 춘향뿐이었다.
'우연하게 광한루에서 춘햐을 暫間(잠간) 보고 戀戀(연연)히 보내기로 探花蜂蝶(탐화봉접) 醉한 마음, 오늘 밤에 온 뜻은 춘향의 母 보러 온거니와 자네 딸 춘향과 百年言約(백년언약) 맺고자 하니 자네의 마음 어떠한가? 大丈夫(대장부) 먹은 마음으로 박대하는 행실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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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母 이 말을 듣고 이윽히 앉았더니 夢兆(몽조)가 있는지라 연분인 줄 짐작하고 흔연하게 허락하여, '鳳이 나매 凰이 나고 장군 나매 용마나고 남원의 춘향 나매 梨花春風(이화춘풍) 꽃다웁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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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丈母(장모), 慶事(경사) 술이니 한 盞 먹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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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춘향과 도련님이 마주 앉아 놓았으니 그 일이 어찌 되겠느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洞庭七百(동정칠백) 月下初(월하초)에 巫山(무산)같이 높은 사랑, 目斷無邊水(목단무변수)에 如天滄海(여천창해)같이 깊은 사랑, 玉山顚(옥산전) 달 밝은데 秋山千尖峯(추산천봉) 翫月(완월) 사랑, 曾經學舞(증경학무)하올 적 借閭吹蕭(차문취소)하던 사랑, 悠悠落日(유유낙일) 月簾間(월렴간)에 桃李花開(도리화개) 비친 사랑, 纖纖初月(섬섬초월) 粉白(분백)한데 含嬌含態(함교함태) 숱한 사랑, 月下(월하)의 三生(삼생) 연분 너와 나와 만난 사랑, 銀河(은하) 織女(직녀) 織錦(직금)같이 올올이 이은 사랑, 靑樓美女(청루미녀) 寢衾(침금)같이 혼솔마다 감친 사랑, 시냇가 垂楊(수양)같이 청처지고 늘어진 사랑, 南倉北倉(남창북창) 露積(노적)같이 담불담불 쌓인 사랑, 銀欌(은장) 玉欌(옥장) 장식같이 모모이 잠긴 사랑, 映山紅綠(영산홍록) 봄바람에 넘노나니 黃蜂白蝶(황봉백접) 꽃을 물고 즐긴 사랑, 綠水淸江(녹수청강) 鴛鴦鳥格(원앙조격)으로 마주 둥실 떠 노는 사랑, 年年(연년) 七月(칠월) 七夕夜(칠석야)에 牽牛織女(견우직녀) 만난 사랑, 六觀大師(육관대사) 性眞(성진)이가 八仙女(팔선녀)와 노는 사랑, 力拔山(역발산) 楚覇王(초패왕)이 虞美人(우미인) 만난 사랑, 唐나라 唐明皇(당명황)이 楊貴妃(양귀비) 만난 사랑, 明沙十里(명사십리) 海棠花(해당화)같이 娟娟(연연)히 고운 사랑, 네가 모두 사랑이로구나,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어화 내 ??(간간) 내 사랑이로구나.’
몽룡은 父親(부친)이 內職(내직)으로 陞差(승차)하여 漢陽(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자 춘향과 헤어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慘憺(참담)한 마음으로 춘향의 집으로 가서 이별을 告하였다. 춘향 母女(모녀)는 어찌하여 盟誓(맹세)를 지키지 않느냐며 發惡(발악)을 하였다.
'처음 만나 백년언약 맺을 적에 大夫人(대부인) 사또께옵서 시키시던 일이오니까?'
두 사람은 이몽룡을 원망하였다.
‘모질도다, 모질도다! 도련님, 참으로 모질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尊卑貴賤(존비귀천)이 원수로다! 애고, 애고! 내 일이야!’
결국 몽룡은 열여섯 살에 南原(남원) 광한루에서 춘향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그 다음 해 열일곱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가 同副承旨(동부승지)로 임명되어 그곳을 떠났다. 몽룡은 名家(명가)의 자손으로서 立身揚名(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망은 춘향과의 結緣(결연)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不可不(불가불)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런 선택은 춘향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나 한양으로 올라가며 장원급제한 뒤 꼭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여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후 몽룡은 여러 聖賢(성현)의 말씀을 탐독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한 뒤 곧바로 암행어사가 되어 南大門(남대문) 밖에서 출발하여 靑坡驛(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南太嶺(남태령)을 넘어 남원으로 내려왔다. 한便, 몇 달만에 新官(신관) 사또 부임하였는데, 이름이 변학도였다.
'너 같은 娼妓輩(창기배)에게 수절이 무엇이며 정절이 무엇인가! 대답이 그러하고 살기를 바랄소냐!'
玉 같은 춘향 몸에 솟느니 流血(유혈)이요, 흐르느니 눈물이라.
‘그년 말 못할 년이로고, 큰칼 씌워 하옥하라!’
‘쑥대 머리 鬼神(귀신) 형용, 적막 獄房(옥방) 혼자 앉아 생각나니 임 뿐이라.’
옥중의 춘향이 이도령을 애타게 그리워하나 그는 一字(일자) 소식이 없었다.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한 張 소식이 없는 몽룡을 變함없이 그리는 것은 약속이 꼭 이루어지라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꼭 돌아오겠다는 그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움에 사무쳐 꿈조차 꿀 수 없다. 迂餘曲折(우여곡절) 끝에 몽룡은 거지 꼴로 춘향 앞에 나타났다.
‘내일이 본관 사또 생신이라. 취중에 酒妄(주망) 나면 나를 올려 칠 것이니 형문 맞은 다리 杖毒(장독)이 났으니 수족인들 놀릴손가.’
몽룡은 변학도의 생일 잔치에 출두하여, 변학도를 封庫罷職(공고파직)하였다. 이후 춘향은 貞節夫人(정절부인)이 되었고, 몽룡은 吏判(이판), 戶判(호판), 左右領相(좌우영상)에 자리까지 오르고 두 사람은 百年偕老(백년해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