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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믿음의좋은글 스크랩 66강. 인자와 엄위
jtr28114 추천 0 조회 24 16.09.14 09: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6강. 인자와 엄위 (롬 11:16-24)

 

롬 11:16-24=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 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원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신 분의 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선택하신 분 손에서 좌우 되는 됩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구원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리 높여 강조하는 것은 제발 구원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열심으로 지켜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조건으로 잘려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늘 미혹해요.

어떻게 미혹을 하는가 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걱정 하게 합니다.

구원에 대하여 마치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처럼 미혹해요.

구원해 주신 그 은혜 감사하며 사는 일은 간과케 하고, 구원이 될까 말까 라는 헛 싸움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린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어요.

그리스도와는 이방인이었고 구원에 대하여 몰랐어요.

내가 죄인인지도 모르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어요.

구원을 얻고 난 후에서야 비로서 내가 죄인인줄 알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비로서 구원에 대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아! 이런 것이 구원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구원을 했구나!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을 입었구나!

이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어요.

고민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고민을 한다고 해서 우리 힘으로 구원은 이룰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구원이 주어져요.

 

이건 창세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창세전에 약속을 하신 것에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은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사란? 구원이에요.

그런데 그 구원이라는 은사에 후회하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 구원은 완전한 겁니다.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허튼 소리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란 뜻입니다.

후회란? 일을 해 놓고 이건 아닌데! 라고 자기가 한 일이 틀렸다고 자책한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이 후회한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후회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진리는 없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한다면!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도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건 아니겠지요.

만약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실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에요.

온전하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완벽하다 온전하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어패가 있는 말이지만 굳이 우리의 언어로 표현을 한다면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진리가 되고 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기 전에 언약을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하셨어요.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때는 피조물이 없었어요.

창조주만 계셨어요.

 

창조주가 스스로에게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을 위하여 만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게 창조에요.

그래서 창조(創造)란 말이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 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전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는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한시적이란? 용도가 다하면 폐기 된다는 말입니다.

즉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시면 철거를 하신단 말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이 뭔고 하니 자기 백성을 예수의 피로 구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이 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천국에서 세세토록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 예수를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자기 백성을 예수가 구원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럼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언약을 하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린 그 혜택을 입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게 너무도 고마우니까 감사하며 주께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혀진다고 한다면 어찌 진리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가 아니면 믿을 수가 없어요.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진리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덕을 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는 거짓말을 못하시고, 다른 하나는 식언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을뿐더러, 한 번 뱉은 말은 취소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민수기 23장을 봅시다.

 

민 23“19절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라고 하지요.

이는 창조주란 말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허튼 소리를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을 일컬어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변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성(完成)이고, 완료(完了)고, 완전(完全)하다는 말입니다.

 

완전하고 완료이고 완성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허튼소리를 할 수가 없고 또한 하신 일을 후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번 작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리라고 맹세하시고 기어코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말씀에 묶어 놓은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입으로 뱉은 말은 자기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뱉어진 말씀은 그 자체가 완료이고 완성이고 온전한 것로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을 거듭남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창조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셨으면 창조와 같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6장을 봅시다.

 

히 6:10-2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하나님은 불의치 않으신 분이라고 하지요.

불의치 않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옳지 않은 말은 하지 않는 분이란 말입니다.

즉 한 입으로 두 말을 못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분이 우리를 섬긴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섬겼고 지금도 섬기고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을 하셨고 그 구원을 이루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걸 섬김이라고 해요.

 

히브리서 강의를 할 때 이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섬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 말을 했더니 어떤 목사가 항의를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느냐고,,,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피조물을 섬긴단 말이냐!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지 라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돌보는 것을 말해요.

이건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을 말해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돌보지 않으면 죽어요.

그러므로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섬김과 달라요.

우리가 아는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긴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해요.

 

성경의 섬김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돌보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은 이 원리를 우리의 가정 속에 그대로 심어 놓았어요.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섬김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불의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불의 할 수가 없어요.

그 이름을 위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을 번복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가 되셔서 우리를 낳고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입니다.

핏덩이로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돌봄으로 살아가듯이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에 조상이 될지니라 는 말씀은 내가 너를 반드시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고 말겠다는 하나님의 자기와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걸 맹세라고 합니다.

 

맹세란? 하나님이 하나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을 말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변개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맹세로 확증하여 주셨어요.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 될 수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죄인들에게는 생경한 말이에요.

죄인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하고 춤을 추어요.

인간들이 하는 약속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조석으로 변해요.

 

이러한 인간들의 습성에서는 하나님의 맹세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구원도 불안한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구원을 주신 적이 없어요.

마귀가 준 구원이에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마귀가 준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행실에 따라서 구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좀 착하게 살았다 싶으면 천당에 가는 것 같은데 나쁜 짓을 하고 악하게 살았다고 하면 이러다가 구원이 잘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은 믿을 것은 없고 행할 것만 있어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살까?

결국 관심사가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세전 언약을 말하면 짜증을 내요.

구원이 창세전에 이미 확정 된 것이라고 하면 싫어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비아냥거리듯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다 작정했으면 우린 할 일이 없네!

그럼 교회 다닐 필요도 없고!

예수 믿을 필요도 없겠네! 라고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비아냥거림 속에 정답이 있어요.

 

맞아요.

구원을 위해서 교회 다닐 필요도 없고!

구원을 위해서 예수 믿을 필요도 없어요.

 

구원은 내가 뭘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는 선물이에요.

내가 교회 다니거나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 다녀도 되고 예수 안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예수 믿을 필요가 없고 교회 안 다녀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일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행위로 따내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 예수 믿을 필요도 없고 교회 다닐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새겨들으세요.

 

하나님은 구원 얻을 자에게 예수를 믿게 해 주세요.

교회를 다니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는 다니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입니다.

이게 없는 자는 구원 받은 자라고 볼 수가 없어요.

 

초대교회를 보세요.

성령을 받으니 교회로 모이잖아요.

성령을 받으니 예수를 증거하잖아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구원 받은 자로서 당연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이건 마치 전기가 공급이 되니까 불이 켜지고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과 같아요.

 

언약이란? 그 자체가 완성이고 완료에요.

왜냐하면! 언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이루어가는 것이지 언약의 대상자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하신다고 약속을 하면 그 자체로 아브라함의 구원은 완성이고 완전하고 완료가 된 것이에요.

다만 구원이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미 완료적 형태로 이루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중간에 잘려 나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누려’ 라는 코너가 있어요.

여기에 보면 자그마한 식당을 하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부자가 누리던 것들을 누려 보기로 하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부자 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웨이터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전에 자기들의 식당 손님들을 대하던 모습들이 습관적으로 나와서 도리어 웨이터를 손님처럼 대하게 됩니다.

 

결국 내용은 ‘누려’ 라는 제목과는 반대로 실상에서는 반전으로 누리지 못하고 섬기는 것으로 나타내서 청중들을 웃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마치 이 시대 교인들의 신앙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원을 주셨는데 그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신앙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우린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리곤 은혜 아래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옛 습성이 그대로 습관처럼 배어 있어요.

그래서 은혜 아래서도 율법적 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율법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율법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신앙의 주체가 자기가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내가 이루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내가 이러다가 구원이 짤리는 것은 아닌가?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작하여서 자기 행동거지 뜯어고치는 수준으로의 회개를 하는 겁니다.

 

회개란? 나를 보는 것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마치 탕자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해요.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타지(他地)에서 백날 난 잘못한 인간이야!나 같은 놈은 아들 자격이 없어!

그러고 넋 놓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존심 다 버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에요.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바깥에서 잘못 했다고 맴 도는 것은 후회이지 회개가 아니에요.

후회와 회개는 달라요.

 

후회는 마음으로 반성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몸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후회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몸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회개에는 반드시 몸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언약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해요.

쉬운 말로 내 꼬라지 보지 말고 예수 믿는 것이에요.

우린 내 꼬라지를 보면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어요.

우리 몸뚱이는 미친년 널뛰듯이 조석지변으로 변해요.

 

아무리 다짐하고 각오해 보세요.

그게 얼마나 가는가?

우리는 우리 몸을 이기지 못해요.

 

우리 몸뚱이는 편하고 좋은 걸 찾아요.

항상 다고 다고 해요.

이게 우상성이거든요.

 

우상성이란?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찾아도 자기 몸뚱이를 편하게 해 주는 목적으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겐 신은 이용대상이에요.

이게 죄에요.

 

인간들에게 신의 존재는 이것 이상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이를 고발하는데 사용당한 자들이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은 가지고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를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구원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 속에 착한 역할을 맡은 자와 악한 역할을 맞은 자가 섞여 있듯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구원 받은 자는 이런 자이고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저런 자들이라는 것을 시청각 교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약 이스라엘은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우리가 잘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져요.

 

어떤 가지가 감람나무에서 찍혀 나갔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믿지 아니하므로 찍어 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아! 우리도 믿지 않으면 짤려 나가겠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여요.

 

이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럼 어떻게 하지!

자기 쪽에서 안 짤려 나갈 방법론을 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육에 속한 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뽑아내는 일을 하세요.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도 있었지만 신약의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을 법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합니다.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구분해요.

법 아래 있는 자는 법으로 대하시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은혜로 대하세요.

 

알다시피 우리는 법 아래서 태어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본능적으로 법이 작동을 해요.

이 법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말씀을 듣더라고 그 말씀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주체(主體)가 되어서 받게 만들어요.

즉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고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게 되면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하면 짤려 나가지 않을까 라는 방법론을 강구하게 되어요.

결국 자기 조건을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나는 마땅히 잘려 나가야 할 자인데!

어떻게 잘려나가지 않고 참 감람나무에게 붙어 있는 거지!

아! 뿌리가 나를 보존해 주고 있구나!

나를 붙여주고 있는 그 원인을 바라보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 간에는 해석하는 것이 완전하게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쪽은 자기 가능성으로 해석하게 되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일하심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성경은 인간의 이성적 해석을 금지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문자적 해석을 금한다는 말입니다.

문자는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에요.

 

성령이 문자라는 그릇 속에다가 하나님의 뜻(일)을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보는 것은 육적 해석이 되고!

문자 속에 담겨진 내용을 보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되어요.

육적 해석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해석은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말로 할게요.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보이면 육적 해석이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셨지를 보게 되면 성령의 감동에 해석이에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한마디로 언약의 책인 것입니다.

 

언약(言約)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자기 의지를 말씀에 묶어 놓았다는 의미에요.

쉬운 말로 내가 이렇게 할게! 라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하나님이 하나님하고와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을 지킬 주체가 누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어디다가 펼치는가 하면 역사에다가 펼쳐요.

우리 몸에다 적용하고 펼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펼치기 위하여 만든 장소에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도가 다하면 폐기 되어요.

 

역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역사를 마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세요.

이를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언약을 위하여 역사가 창조 되었다고 하였잖아요.

그럼 그 언약을 역사에 펼치시고 이루어 가시는 분은 누굴까요?

당연히 언약을 하신 하나님이시지요.

 

그럼 성경을 언약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 성경의 내용을 누가 이루어 가실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시지요.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중심 사상이 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해방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나, 출바벨론이나, 사사기서에서의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건짐 받는 것은 모두가 다 구원을 설명해 주는 시청각 교제인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건져냄을 당하는 것이에요.

건져냄을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조건은 따지지 않아요.

 

이건 마치 여러분들이 바닷가에 깔려 있는 자갈들 속에서 얼마를 집어오는 것과 같아요.

다 같은 돌이에요.

그 중에서 건져짐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성격이 이와 같아요.

모든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건져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구원하시지만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이는 생래적(生來的)으로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 하는 것이 없어요.

다 그 놈이 그 놈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인간의 조건은 선택을 당하는데 조건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 뿐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요.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상고해 봅시다.

그럼 짤리고 붙여지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배척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자긍하면서 엄위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랑하던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법 아래 거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무엇을 자랑하였나요?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어요.

율법 지킴을 자랑했어요.

 

자신들은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모세가 준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모순인가 하면!

아브라함 자체가 부르심으로 된 자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의 조건을 보고서 부르신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어요.

 

아브라함의 가문이 좋아서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착해서도 아니에요.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셨어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입을 때는 율법이 없었어요.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율법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행실과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 자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에요.

그럼 아브라함 후손들도 당연히 자기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율법지킴의 여부와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혈통과 율법 지킨 것을 자랑했어요.

율법을 지킨 자신들은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 같은 죄인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율법 지킴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어 놓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아브라함과 다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부르셨어요.

그런데 그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조건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가 아브라함 후손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지킴이라는 자기 행함이라는 법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이런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은 자기 행위를 들고 나오는 자가 아니라 은혜를 앞세우고 나오는 자야!

너희들이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를 들고 나오는 것은 나는 아브라함 후손 아닙니다 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야!

 

내가 온 것은 너희들처럼 자기 행위로 나오는 자들을 골라내려고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서 혈통이나 율법지킴과 같이 자기 조건으로 나오는 자들을 이스라엘 속에서 제거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솎아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이 놈들은 이스라엘 속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이걸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들이 밤에 가리지를 뿌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뽑아내신 것입니다.

 

야! 너 아브라함 후손 아니야!

너 왜? 여기 있는데! 하고선 좇아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오늘 본문에서 엄위에 거하다가 찍혔다고 합니다.

 

엄위(嚴威)란? 법이에요.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자들은 필요 없어요.

못 들어가요.

 

예수가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에요.

예수님이 참 감람나무인데!

은혜의 나무에요.

그러니까 법을 들고 온 자들은 예수라는 나무에 합당치 않지요.

그래서 제거한 것입니다.

 

이 놈들은 마치 산에 가면 큰 소나무에 칭칭 감겨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칡넝쿨과 같아요.

소나무도 아닌 것이 소나무에게 기생하여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 주인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칡뿌리를 삭둑 잘라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은 예수라는 참 감람나무를 이 세상에 보냈어요.

이 참 감람나무는 은혜라는 나무에요.

뿌리에서 각 가지들에게 은혜라는 진액을 공급해요.

그러므로 뿌리에 붙어 있는 가지에게는 은혜라는 진액들이 뚝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법을 뚝뚝 흘리는 가지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 이상 하다!

법이 나올 리가 없는데!

그러면서 그 가지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칡넝쿨처럼 나무에 붙어서 기생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잘라낸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 가정사 이야기로 해 봅니다.

아브라함 집에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라는 이들과 약속으로 난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은 겉으로 보기엔 구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속에 흐르는 피가 달라요.

이스마엘 속에는 법이라는 피가 흐르고,

이삭 속에는 은혜라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낳은 자식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에요.

아브람은 법 아래서 난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은혜 아래서 난 사람이에요.

 

한 인간 속에 아브람이라는 인간과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낳은 소생은 죽이고, 아브라함이 낳은 소생은 살리세요.

 

누가 아브람의 소생이고!

누가 아브라함의 소생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그들 속에 흐르는 피 즉 법과 은혜로 구분해요.

아브람의 소생에게는 법(엄위)이 흐르고!

아브라함의 소생에게는 은혜(인자)가 흘러요.

 

하나님이 부르신 아브라함의 집안은 은혜의 집안이에요.

그러므로 그 속에 은혜가 흐르는 자식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법이 흐르는 자식을 남겨 두면 집안은 온통 법으로 칠갑을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집안에서 법이 흐르는 이스마엘을 쫓아내서 분가를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로 나타납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두 부류가 있어요.

육으로 따르는 자들과 영으로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육으로 따른다는 말은 스스로 나온 자들을 말하고 영으로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나온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나온 자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예수를 따른다고 자기 의를 자랑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으로 나온 자들은 예수가 불러 주어서 나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불러주신 그 은혜를 증거 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나온 자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도 자기 자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엄위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반대로 부르심을 입고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이 불러 주신 것을 고마워합니다.

이걸 인자에 거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모양은 같은데 그 내용은 달라요.

한 쪽은 자기 자랑거리로 삼고!

한 쪽은 감사해요.

 

오늘 본문을 육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원래 이스라엘을 구원 했는데 이 놈들이 말은 안 들으니까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구원 했다 라고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이건 창세전 은혜 언약인 선택 사상에 맞지 않아요.

 

창세전 언약은 행위 구원이 아니고 은혜 구원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 자는 절대로 잘려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로 구원 해 놓고 너 왜? 행실이 그 모양이야! 라고 하면서 잘라낸다고 하면 애당초 구원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잘잘못을 따져서 주어지는 행위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세전 언약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 구원이에요.

이걸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로마서 9장을 봅시다.

 

롬 9:6-1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은 지금 이스라엘 속에서 넘어진 자들이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건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란 것을 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이스라엘 속에 또 이스라엘을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란 것을 안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 중에서도 육신으로 난 자가 있고 약속으로 난 자가 있다는 거에요.

또한 약속으로 난 이삭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택을 입은 자만이 참 이스라엘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참 이스라엘이 바로 야곱과 같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작정을 하였어요.

그가 누구인가 하면 야곱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야곱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야곱의 행실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선택으로 주어진 구원은 야곱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애초 야곱의 구원이 야곱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변덕만 부리지 않으면 야곱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없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야곱의 구원은 확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구원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로 지켜 주세요.

법으로 대하면 야곱의 행위로 잘려 나갈 수 있지만 은혜로 대하세요.

 

왜? 은혜로 대하십니까?

이는 법으로 대하면 야곱은 구원을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은 야곱하고 직접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야곱처럼 창세전에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대로 때에 따라서 적용을 하여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말이에요.

 

만약에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잘못으로 잘려나갔다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도 장담 할 수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려 나갔어요.

이러면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도 장담 할 수가 없는 것이 되잖아요.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었어요.

이건 아브라함 후손과 같은 거에요.

그런데 아브라함 후손들이 잘못해서 잘려나갔어요.

그럼 우리도 잘못하면 잘려 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이건 아니지요?

맞아요.

이런 구원은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 속에서 잘려나간 자들을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잘려 나간 것으로 보면 안 되어요.

거꾸러 생각하세요.

원래 참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이 이스라엘인 척 하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가짜로 들통이 나서 잘려 나간 것이라고 보시란 말입니다.

 

가짜들이기 때문에 엄위에 거하고 산 겁니다.

자기 행위를 의로 붙잡고 잘난 척 한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있을 땐 몰랐는데!

불꽃같은 예수님 앞에 서 보니까 거짓으로 발각이 난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방인에게 적용해 보세요.

 

이스라엘 속에서 율법지킴이라는 자기 행위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꼴값을 떨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발각당하고 잘려나간 자들이 있었잖아요.

이걸 역으로 말하면 이방인들 중에서도 자기 꼬라지를 보고 우리는 천국 백성 아니야 라고 절망하고 있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서는 은혜 안에서 법으로 살다가 잘려나간 자들이 발생을 하였듯이, 이방인 중에서도 법으로 살았는데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발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착각은 자기들만 하나님 백성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나요?

이는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선택해서 선민 삼아 주셨잖아요.

그리고 그 선민의 증거로 율법을 받았어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처럼 선택을 입은 민족이 없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을 입고 보니까 아브라함 속에 이미 이방인들의 구원이 그 속에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하나님은 애당초 육적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에요.

창세전에 온 세계 민족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의 선택 속에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생겨날 참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겨날 참 이스라엘은 혈통이나 율법 지킴과 같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은혜로 부르심을 입음으로 되어요.

 

그러니까 참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은 엄위에 거하지 않고 인자에 거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잘남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인자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한다는 말이에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하였는지는 그 스스로가 무엇으로 사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법 아래 있는 자는 법으로 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은혜로 살아요.

마치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것과 같아요.

 

법으로 살면 그 사람은 법에 사람이고!

은혜로 살면 그 사람은 은혜에 사람이에요.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요?

은혜 안에 있는 자에요.

그러니까 참 이스라엘은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서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고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가지가 맺는 것이 아니고 뿌리에서 공급해 주는 생명의 진액으로 맺는 것입니다.

 

뿌리가 가지를 보존해 주어요.

가지는 뿌리가 보내주는 것을 드러내 줄 뿐이에요.

그러니까 가지가 맺는 것은 나의 뿌리는 이것입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가지가 은혜라는 열매를 맺었어요.

그럼 그 뿌리가 은혜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강아지는 강아지 짓을 하고 사람은 사람 짓을 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 짓을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면 법에 속한 사람이고!

은혜로 살면 은혜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잘난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하는가요?

이는 구원이 우리가 잘나서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짜로 받은 것이니까 잘난 척 나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난 척 나댄다는 것은 자기가 얻어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선물로 받았어요.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잘난 척 하지 말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것이지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것 조차도 자랑거리가 되면 안 되어요.

그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을 보면 업신여기게 되어요.

유대인들 중에서 잘려나간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었어요.

율법지킴이라는 것을 가지고 세리와 창기들을 깔보고 업신여긴 자들이었어요.

 

이게 교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야지 법을 드러내면 안 되어요.

나 같은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지!

못난 자들 앞에서 나 잘났지 자랑하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본인이 지금 은혜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에요.

은혜라는 참 감람나무로부터 짤려져 있으니까 은혜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가 공급하는 것은 은혜에요.

그러므로 참 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토하여 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나는 지금 무얼 토해내고 있는가요?

은혜인가요?

자랑인가요?

 

복음 아는 것이 자랑스러우면 반드시 남보다 우월하다는 법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어요.

난 아는데!

넌 모르지!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게 된단 말입니다.

마치 복음 아는 것이 자기 실력이라도 되는 냥 거드름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으로 복음을 가리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는 자랑거리가 분명하지만,

그 복음이 사람을 장악하면 자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어요.

저 놈이 법을 토해내는가?

아니면 은혜를 토해내는가?

 

은혜를 토하여 내면 인자에 거하는 자로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자이고!

법을 토해내면 엄위에 거하는 자로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하지 않은 돌감람나무인 것입니다.

 

우린 원래 법 아래서 살던 돌 감람나무였어요.

그 땐 법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을 붙이셨어요.

접붙임을 당하였지만 아직도 돌 감람나무 기질이 남아 있어요.

 

처음엔 접붙임을 당해도 여전히 돌 감람나무 행세를 해요.

그런데 뿌리에서 참 감람나무의 진액인 은혜를 가지에게 공급을 합니다.

법이라는 돌 감람나무의 모습에서 참 감람나무의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참 감람나무의 모습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법 아래 살던 돌 감람나무였어요.

법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인 예수라는 은혜의 나무에 접을 붙인 것입니다.

 

뿌리에서 은혜라는 예수의 생명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없던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긍휼이 나오고 사랑이 나옵니다.

 

이건 우리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생산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공급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글자 그대로 성령이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봅시다.

 

갈 5:18-23=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잘 보세요.

너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참 감람나무에 접을 붙인 자라고 하면 참 감람나무의 인도를 받아서 돌감람나무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돌감람나무 아래서는 법으로 살았어요.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일과 육신의 쾌락을 쫓으며 살았어요.

그런데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하고 난 후로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살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안 하던 짓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성품적인 것들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지 할 법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합니까?

이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뿌리가 진액을 가지에게 공급하듯이 말이에요.

뿌리가 가지에게 진액을 공급하면 가지는 뿌리가 보내준 진액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해요.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히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맺히듯이,,

참 감람나무인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들에게서는 인자(은혜)라는 열매들이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이에요.

예수의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자는 반드시 그 복음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유출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성품적인 것들이 나오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 예수님 성품적인 것을 한 마디로 은혜라고 해요.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는 인자라고 합니다.

 

은혜를 토해낸다는 말은 인자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반면에 법을 토해낸다고 하면 엄위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가장 쉬운 말로 할게요.

우린 예수를 몰랐어요.

예수를 모를 땐 마귀의 것을 토해내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예수를 믿으니까 예수의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것들이 나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증거에요.

 

예전 같으면 법이 화살처럼 빠르게 튀어나와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였는데 지금은 서툴기는 하지만 이해와 용서가 나오고 긍휼이 나오고 있어요.

많고 적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서 없던 예수님의 것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들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믿음을 확인해 보세요.

난 지금 무엇을 토해내고 있는가?

인자인가요?

엄위인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노 아래 있던 자를 은혜 아래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돌 감람나무였던 자를 예수라는 참 감람나무에게 접을 붙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시오니 주께서 우리를 끝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용서 받았기에 용서하고 은혜 받았기에 은혜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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