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낮에 세상을 붙들고 밤에는 자신을 붙드는 것 같습니다. 두 끼 다이어트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5일째 돌다리 근처 <명태어장>을 찾아갔는데 주말이라고 30분 웨이팅을 하고서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맛이있어도 50대 때만해도 패스할 일인데, 내가 30분을 웨이팅해서 한 끼를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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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양푼 동태찌게를 어머니-명옥-희정과 함께 먹었었는데 바로 옆에 코다리 찜이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노오란 호박죽은 컬러 만으로도 군침이 돕니다. 선친과 할머니께서 늙은 호박을 긁어 찹쌀 넣고 호박 죽을 죽여주게 끓여주셨어요. "우리 해석이 호박죽 먹자! " 소싯적 모친은 무서웠고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우리 패밀리 중에 가장 살거웠던 것 같아요. '명태‘ 라는 가곡을 두 번째 접했는데 무슨 가사가 이리도 멋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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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깊은 물에서 잡히는 물고기...명태를 쓴 작가는 누구일까요? 명태를 얼리면 동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바짝 말리면 북어, 여기다 소금을 살짝 뿌리면 작태, 얼리고 녹이고 반복해서 껍질이 검어지면 먹태가 됩니다. 하나 빠졌네요. 얼리지 않고 가장 신선한 상태의 명태를 생태라고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미나리 넣고서 끓여 준 생태 생각에 침이 다 꿀꺽거립니다. 미나리가 없으면 쑥갓을 넣기도 하지만 후추는 항상 많이 넣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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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는 70년대 백 원에 4마리를 사다가 우리 8식구가 겨울을 샜을 것입니다. <정든집>시절 어머니표 생태 찌게가 그리울 때면 종종 양푼 동태찌게를 찾습니다. 코다리, 북어찜은 왕십리, 안성에서 가끔 먹었고요, 먹태는 포천 엘리팝'할 때 맛 들였는데 한 2년 동안 못 먹어보았어요. 그리고 짝 태는 정읍에서 처음 먹어본 맛이 먹태랑 비슷하더이다. 에예공 !다음에 코다리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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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면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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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크-하!)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있으리라
명태(허허허) 명태라고 (음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있으리라>>
2.
명태는 왜 자신의 이름만 남기를 바랐을까? 글은 명태 한 마리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묻는 철학 에세이입니다. 처음에는 두 끼 다이어트와 허리 운동, 명태어장 웨이팅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글이 점점 어머니의 생태찌개, 할머니의 호박죽, 그리고 한 편의 가곡으로 이어지면서 음식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기억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생태찌개는 이제 없습니다. 할머니의 호박죽도 다시 맛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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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맛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맛은 사라졌는데 기억은 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의 철학입니다. 가곡 「명태」의 화자는 명태이지만, 사실은 인간을 말합니다. 명태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다가 그물에 걸립니다. 그리고 여러 모습으로 변합니다. 생태, 동태, 북어, 코다리, 먹태….생물학적으로는 같은 명태지만 삶의 과정 속에서 이름이 달라집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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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청년, 부모, 노인…. 몸은 계속 변하지만 동일한 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명태는 "변형"을 통해 자기 존재를 완성합니다. 가사의 마지막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명태는 자신의 몸이 없어져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몸의 보존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가 되고, 누군가의 안주가 되고, 결국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역설이 있습니다. 명태는 먹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모"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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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없어지지만 의미는 남습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는 베르그손의 지속과도 닿아 있습니다. 생명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과하면서 이어집니다. 또 들뢰즈의 생성처럼, 존재는 고정된 실체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과정입니다. 글과 가사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30분을 기다려 코다리 찜을 먹는 지금의 자신을 보며 "이것 자체가 변화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예전의 나는 그냥 지나쳤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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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나는 기다릴 줄 알고, 맛을 음미할 줄 알고, 어머니를 떠올릴 줄 알고, 한 마리 명태에서 삶을 읽어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늙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읽는 깊이가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가곡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거창한 성공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겠다는 것도, 영웅이 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외로운 밤에 시가 되고, 한 잔 술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 소박한 고백 속에는 한 가지 삶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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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름이 남는 방식일 것입니다. 당신의 글은 명태를 먹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결국 어머니의 기억과 노년의 변화, 그리고 '몸은 사라져도 의미는 남는다'는 존재의 철학으로 나아갑니다. 「명태」는 생선을 노래한 가곡이 아니라, 소모되는 삶 속에서도 누군가의 기억과 위로로 남고 싶어 하는 인간의 노래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몸인가, 삶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남긴 의미인가?
2026.6.29.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