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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 32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고전 10: 3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고전 10: 32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1]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1)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이...기네스데'(*)는 '거침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의 뜻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요 두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고전 10: 3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
1]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의 환경에 적응시켰다.
* 고전 9: 18-22 –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특히 그는 9: 22에 기록된 대로 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
* 갈 1: 10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Grosheide)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본 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 갈 2: 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박조준 목사
본문 23-24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적극적인 윤리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믿음이 강한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령, 우리 가정에서도 형제 간에 어떤 일로 다툼이 있어서 동생이 형에게 맞아서 울게 되면 동생을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다는 데는 잘못이 없습니다. 먹을 수 있습니다. 가(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에 대한 문제는 아닌데 이런 일로 인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의 지론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윤리인 사랑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은 육신적인 영양 공급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했습니다.
먹는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거나 먹지 않는다고 해서 큰 손해가 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은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속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식물 그 자체가 속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서 주관적으로 속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15절에 보면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기의 양심에 상관이 없다 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식물을 그들 앞에서 먹으면 약한 사람의 양심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상하게 되고,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나 개인의 신념에 있어서는 정당하고 가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랑의 견지에서는 정당한 것이 못됨으로 덕이 되지 않고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생각하고, 있는 자보다 없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 편에서 보면 강한 자, 약한 자, 있는 자, 없는 자를 구분할 수 있고 차별해서 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누구나 다 똑같이 생각하시고 똑같이 대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주님께서는 약한 자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는데 강한 자들이 식물 하나를 금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약한 자들을 근심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심령이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생존 경쟁의 세상이요 적자 생존의 세상이기 때문에 강한 자는 약자를 눌러 버리고 무시해 버리려는 풍토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그런 면에서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다”고 하면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덕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덕은 지식이나 기술보다 귀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올리는 데는 재주와 두뇌가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 일을 처리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업을 하는 데는 재주보다도 덕성이 더욱 필요합니다. 머리보다도 인품이 중요합니다. 지능 지수보다도 삶의 바른 자세가 중요합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불성실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신용과 덕망을 잃고 사회에서 설 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패배자로 전락해 버립니다.
평범한 두뇌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성실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면 언제 어디서나 신망과 환영을 받고 사회에서 크게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큰 기관을 책임지고 운영하고 계시는 분이 사람을 채용하는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은 다 우수한 것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입사 시험을 치르고 최종 면접을 하는데,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 오히려 삶의 자세 면에서 실망을 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 보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식과 기술이 전부가 아니지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고 물으면 거의 많은 사람이 책을 별로 읽지 못했다는 대답을 하고 “신문을 들면 어디부터 보느냐?”고 물으면 스포츠 면부터 본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해도 읽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신문을 들면 큰 제목이라도 훑어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자기 분야는 좀 더 자세히 읽어서 알고 있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스포츠 면을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그 분은 면접 때 그런 대답을 하는 사람은 그 성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실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재주보다 덕망이 필요합니다. 옛날 공자 선생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씀을 했습니다. 덕 있게 사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의 주변에는 언제나 동지가 있고 따르는 자가 모여들고 도와주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사람은 “덕윤신(德潤身)”이란 말을 했습니다. 덕은 우리의 몸을 윤택하게 합니다. 몸에서 봄바람 같은 덕이 풍기고 성실의 기(氣)가 감도는 사람은 반드시 사회에서도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덕이 없는 재주, 양심이 결여된 노력, 성실이 부족한 두뇌는 결국 고등 지능범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머리나 재주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속임수는 절대로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성실과 신의는 인생에 있어서 승리케 하는 으뜸가는 무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계속 배웁니다. 그러나 “나는 배웠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대는 실력 경쟁의 시대요, 능력 본위의 사회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어디서나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사람은 많지만 인재는 드뭅니다. 그 자리에 없어서 안 될 사람, 무슨 일을 맡겨도 마음 놓을 수 있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야 합니다. 인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격변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과 이론이 분출하는 시대입니다. 낡은 이론이나 지식은 얼마 안 가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창의적으로 적응하려면 매일매일 새로운 정신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청년 디모데에게 권면하면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하면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야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습니다. 쉬임없이 분투 노력하는 사람만이 유능한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배우고 공부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1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과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 속엔 위대한 힘이 잠자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잠재력과 가능성을 개발할 책임이 있습니다. 삶이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요, 성장하는 것이요, 향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학교요, 우리는 학생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성장하고 비범한 인재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자세가 어떠했습니까? 그는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높은 경지의 신앙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내가 이제는 다 이루었다’고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육신적인 교만은 꺾어 버리고 겸손한 자의 자세로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좇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승리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벧후 1: 5-10).
이것이 경건의 훈련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못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나 유익하지 않을 때 안 하는 것이, 할 수 있으나 덕이 되지 않을 때 안 하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입니다. 로마서 1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 가지는 신앙의 자유를 말하는데 그것이 약한 자의 비방의 대상이 되고 거쳐서 넘어지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라는 것이 칼빈의 해석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유익하지 않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도 가(可)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가한가를 생각할 뿐 아니라 무엇이 유익하며 덕을 세우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개인의 생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이것을 해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서 그의 거룩함과 위로와 구원에 방해가 안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가하다고 생각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행하기 전에 나의 유익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도 고려해야 합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 고기 파는 사람에게 이것이 혹시 제물인가 물어 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4-5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고, 디도서 1장 15절에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27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의 초대에 응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간적인 제도나 예의는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불신자의 잔치 집에 앉았을 때는 묻지 말고 앞에 차려 놓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따지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질문으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그것이 제물이라고 말하면 알게 한 사람과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내 양심이 아니라 말한 사람의 양심입니다. 먹어도 되지만 남을 넘어지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에서 일반적인 규칙을 정하고 특별한 경우에 적용합니다. 31-32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농가에 들렸더니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온 것을 알지 못하며, 나는 무엇 하러 온 것을 알지 못하며,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때 루터는 고쳐서 “나는 어디서 온 것을 알며, 나는 무엇 하러 온 것을 알며, 나는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라고 읽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사명감입니다. 어떤 사람은 흔히 기계론을 말하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뒤집고, 기고, 걷고, 말하고, 자라고, 결혼하고, 자식 두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기에서 아무런 도덕적인 책임을 느끼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목적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먹기 위해 왔다는 사람, 일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 공부하기 위해 온 사람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해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첫 문제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 오게 된 목적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는 다음 세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땀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먹을 것을 구하는 기생충 같은 인생입니다. 둘째는 개미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합니다. 셋째는 꿀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개미처럼 부지런할 뿐 아니라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열매를 맺게 해 주고 꿀을 날라줍니다. 말하자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세상에 광명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이웃과 사회에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이 얼마나 보람된 삶이겠습니까? 열심히 벌어서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살다가 간다면 거미처럼 없어야 될 기생충적인 존재는 아니라고 해도, 그런 사람은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닙니까? 꼭 있어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며 사는 사람, 세상에 있어서 안 될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그저 나만 알고 나만 먹고 사는,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사는 사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세상에 없어서 안 될 사람으로 살도록 기도합시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했습니다. 열매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역사는 본보기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간음과 불평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그런 제사에 참여하여 귀신들과 교제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셋째,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덕의 중요성이 있다. 덕이란 것은 남의 유익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할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남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