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 한국과 일본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왔습니다.
같은점 : 한국과 일본은 모두 기존에 실패했던 자국 대표팀 감독을 앞세워서 남아공 월드컵에 도전을 했습니다.
다른점 : 한국은 현실적인 16강을, 일본은 이상적인 4강을 목표로 설정합니다.
같은점 : 양국은 실패를 경험한 감독선임 이후 특색없는 경기력으로 자국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다른점 :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죽음의 조 무패 1위와 지지 않는 축구로 어느정도 비난이 누그러졌지만, 일본의 경우는 월드컵 직전까지 오카다 감독 퇴진을 요청하는 팬들로 신뢰도가 바닦에 이르렀습니다.
같은점 : 한국과 일본 모두 16강에 진출합니다.
다른점 : 한국은 조별 예선에서 어렵게 16강에 진출했고 16강엔 비록 패했지만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경기를 보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쉽게 16강을 진출했고 16강에서는 제가 기억하는 최고로 재미없는 경기로 탈락을 합니다.
같은점 : 월드컵 성공이후 한일양국 모두 감독이 바뀝니다.
다른점 : 한국은 국내파 감독, 일본은 해외파 감독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도전을 합니다.
같은점 : 월드컵 이후 한국과 일본의 축구선수들의 유럽에서 활약상이 전해집니다.
다른점 : 한국은 기존 유럽파 선수나 어려서 부터 유럽에 진출한 유망주가 활약을 했지만, 일본은 월드컵 이후 일본 대표팀 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활발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들을 보면 2010년 한일축구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위에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감독의 첫 데뷔전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상대했던 팀들이었고 모두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것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이렇게 비슷한 상황의 라이벌은 잘만 활용하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관련된 기사중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한국에서 근대 축구가 전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인 19세기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축구와는 조금 달랐겠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먼 옛날 신라시대에도 '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가 농주(弄珠, 둥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다가 옷고름이 찢어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오늘의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간의 시합이라고 할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 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 나라 최초의 축구인 조직인 '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이어 5년뒤인 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회장 박승빈)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 정식으로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별한 장비없이 누구나 즐길수 있는 축구의 특성은 당시 가난했던 우리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으며,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굳센 체력과 강인한 투쟁심은 한국인의 정서와도 일치했다. 여기에 1929년부터 시작된 서울과 평양 축구팀간의 대결인 경·평(京平)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폭시키며 전 국민이 즐기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수는 있는 싹이었다.
일제 말기 강제로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같은해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발을 내딛은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 로써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컵, 킹스컵, 아시안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각종 대회에서 기록한 빛나는 성적과 선수들이 보여준 놀라운 투지와 기동력 으로 인해 한국 대표팀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었으며, 다른 아시아 국가 들에게는 두려움과 경탄의 대상이었다.
1971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제 축구대회인 <박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
세계 각국의 대표팀, 유명 클럽팀이 참가한 가운데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하며 아시아 최고 권위의 축구대회로 성장한 이 대회는 1976년부터는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1980년부터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대회 명칭이 변경되 었다가, 지난 1995년부터 코리아컵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1983년 '수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한국의 프로축구는 축구팬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아시아 최초로 탄생한 본격 프로리그로써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게 프로 축구 출범을 자극하였다.
5개팀으로 시작한 한국 프로축구는 2001년 현재 10개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K리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매주 각 도시에서 펼쳐지는 프로리그는 1999년 한해 총 280 만명의 관중이 몰려들 정도로 전국을 축구 열풍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 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통산 5회) 이 됨은 물론, 세계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의 우수성을 지구촌의 모든 축구 팬에게 과시하였다.
또한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20세 이하) 축구대회에서 한국의 어린 영웅들은 '붉은 악마'란 애칭을 받으며 축구 강호들 물리치고 4위를 차지 하여 한국 축구의 뛰어난 잠재력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했다.
불굴의 투혼과 뛰어난 기동력, 지칠줄 모르는 체력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되었으며, 국가대표팀의 붉은 유니폼은 축구 스타를 꿈꾸는 어린 선수들에겐 최고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79년 차범근의 서독 분데스리가, 1980년 허정무의 네덜란드 리그 진출 이후 국제 무대로 활발히 뛰어들기 시작한 한국 선수들은 최근 안정환(이탈리아), 이동국(독일), 설기현(벨기에) 등 젊은 선수들이 세계적 스타를 꿈꾸며 유럽 각국에서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이러한 자랑스런 한국 축구의 역사는 드디어 세계 최고의 축구 제전인 월드컵 개최로 화려하게 꽃피우게 되었다. 축구 사랑, 나라 사랑의 한마음으로 온 국민이 보여준 뜨거운 열기와 함께 추진된 2002년 월드컵 유치 운동은 결국 1996년 5월 31일 한국과 일본의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는 지난날의 역사로 말미암은 양국의 대립, 경쟁 관계를 청산하고 축구를 통한 화합과 아시아의 자존,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구현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이 땅에 축구가 도입된지 어언 120년.
수많은 난관과 시련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국민의 뜨거운 축구 사랑, 그리고 선수들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빛나는 역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