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거6호임진왜란 때 조선인 잡아간 것은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일본 경제규모는 이미 고려시대때 한국을 앞섰고, 전국시대까지는 인구가 앞서는 덕에 경제력도 컸지만 전국시대 종식 후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성하고 교역도 활발해 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때 조선보다 더 발전했죠. 화폐도 쓰이고 교역도 많고 도시도 커지고 사무라이 중심으로 문화산업도 발달해 연극이나 유흥산업 규모도 커지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다녀와서 발달된 문물에 대해 보고한 내용도 있고요.
전국시대 이후에는 조선은 발전이 적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두 나라를 비교하면 도진개찐이라 보기 힘듭니다.
@티거6호위에서 넘사벽이라는 게 어떤 분야에서 쓰였는지 정확히 모르고 그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술적, 문화(규모 면에서), 상업적 발전도를 따져봤을 때는 사실 조선 초기에도 일본이 나았습니다. 세종실록에서 사신단이 보낸 보고에 보면 일본에 다녀와 수차의 사용, 화폐경제, 개인/유료 공중 목욕탕, 상품 진열해두는 상점 등 발전상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지요.
대충 고려 후기때 부터는 일본이 앞섰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양화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걸 빼고 한국-일본만 비교했을 시요.
@Highsis자연환경과 사회구조도 따지지 않는 우열론같은 건 의미없습니다. 대표적인 게 수차의 사용, 목욕탕, 화폐경제지요. 강우량도 살피지 않고, 당시의 기후도 살피지 않으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따지지 않고 막연히 그냥 보기에 나아보인다고 우월하다고 하는 것만큼 말도 안되는 소리는 없어요.
@bookmark수차사용이나 목욕탕은 자연환경적인 요인이 중요하지만, 화폐경제는 그 자체가 경제적 발달의 측도 아닌가요.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화폐경제가 발달한 국가가 당연히 자급자족이나 물물교환에 의존하는 국가보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이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사회구조라면 경제학적 측면에서 그 사회구조 자체가 후진적이라는 것이 될텐데요. 덤으로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의 상업발달을 생각하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유교사상 때문에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고요.
@하히해중국은 명후기에 이미 일조편법으로 전환, 세금의 은납이 진행되었는데 보통 이것만으로도 화폐사용이 농촌까지 퍼져있었고, 경제적으로 결합이 진행되었다고 보죠. 그럼 그 은은 모두 중국에서 났을까요? 15세기에는 일본에서, 16세기 후반부터는 멕시코에서 들어왔습니다. 재화시장의 측면에서보면 일국 내에서 자급자족이었겠지만 화폐시장을 보면 전혀 아니죠. 덤으로 국내에서 자급자족이라고해서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고요.
@하히해일본에서는 17세기에 당시 정권의 중핵이던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무역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무역이 중요하지 않은 국가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질까요?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구조는 일본의 은-(조선)-중국의 생사가 메인이었고, 거기에 조선인삼 정도였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생사와 인삼의 생산이 가능해지자 조일무역의 규모가 확 죽었고, 덕분에 중국에 줄 은이 부족해져서 조청무역규모도 줄었습니다. 설령 자본집약적인 시장경제가 발달하기 전이라고 해도 상업이나 경제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Diogenes화페사용이 경제적 발달의 척도라면 고대 그리스는 중국 조선 일본보다 경제적으로 발달했겠지요. 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에도막부 이전까지 일본은 일본 전역에서 통용될 화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널리 통용된 화페는 명나라 영락전이었죠. 수나라 동전도 그냥 갖다가 쓰고. 외국 돈 갖다가 동그라니까 이거 화페라고 쓰던 상태인데, 이건 일본 내에서도 화페경제가 구축되었다고 말 안합니다. <근세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에서 일본의 대다수 민중이 진정으로 화폐경제에 참여하게 된 시기를 17세기라고 하는건 괜한 게 아니죠.
첫댓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던데다 재위기간도 짧았고, 무리하게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탓에...
재위기간이 짧았다? 재위기간 17년인 태종보다 깁니다.
의도한바는 아니지만 세도정치에 길터주신 분이죠.
24년 재위했으니 재위기간이 짧았다고는 못하지만, 그 후사가 너무 아쉬운 왕이죠. 개인적으로는 이후 상속이 꽤 자유로웠던 표트르 대제가 생각나기도 하고
19세기 위기론도 이젠 지겹네요.
그나저나 지방 장시 감소론 같은 건 한참 전에 논파된 고전 아닌지요?
그럼 뭐하죠 그당시 중국이랑 일본은 넘사벽인데...
@Vv아마게돈vV 아.. 제목만 보고 댓글달면 안되겠네요ㅠ
@BACCANO 근데 청나라는 몰라도, 에도 막부와도 그렇게 크게 넘사벽일 정도로 차이가 났나요?..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조선보다 조금 아래~아주 약간 위 정도의
수준인걸로 아는데?
@티거6호 메이지 유신 전에도 일본이 훨씬 위에요. 상업 규모부터 차이가 큽니다.
@Highsis 흥미롭네요.. 그러면 그것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조선인들을 많이 잡아간 이후부터입니까? 아니면 조선 초기나 고려시대부터 이미 그랬습니까?..
@티거6호 임진왜란 때 조선인 잡아간 것은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일본 경제규모는 이미 고려시대때 한국을 앞섰고, 전국시대까지는 인구가 앞서는 덕에 경제력도 컸지만 전국시대 종식 후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성하고 교역도 활발해 지면서 전체적으로 봤을때 조선보다 더 발전했죠. 화폐도 쓰이고 교역도 많고 도시도 커지고 사무라이 중심으로 문화산업도 발달해 연극이나 유흥산업 규모도 커지고...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다녀와서 발달된 문물에 대해 보고한 내용도 있고요.
전국시대 이후에는 조선은 발전이 적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두 나라를 비교하면 도진개찐이라 보기 힘듭니다.
@티거6호 위에서 넘사벽이라는 게 어떤 분야에서 쓰였는지 정확히 모르고 그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술적, 문화(규모 면에서), 상업적 발전도를 따져봤을 때는 사실 조선 초기에도 일본이 나았습니다. 세종실록에서 사신단이 보낸 보고에 보면 일본에 다녀와 수차의 사용, 화폐경제, 개인/유료 공중 목욕탕, 상품 진열해두는 상점 등 발전상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지요.
대충 고려 후기때 부터는 일본이 앞섰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양화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걸 빼고 한국-일본만 비교했을 시요.
@Highsis 자연환경과 사회구조도 따지지 않는 우열론같은 건 의미없습니다. 대표적인 게 수차의 사용, 목욕탕, 화폐경제지요.
강우량도 살피지 않고, 당시의 기후도 살피지 않으며,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따지지 않고 막연히 그냥 보기에 나아보인다고 우월하다고 하는 것만큼 말도 안되는 소리는 없어요.
@bookmark 수차사용이나 목욕탕은 자연환경적인 요인이 중요하지만, 화폐경제는 그 자체가 경제적 발달의 측도 아닌가요.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화폐경제가 발달한 국가가 당연히 자급자족이나 물물교환에 의존하는 국가보다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이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사회구조라면 경제학적 측면에서 그 사회구조 자체가 후진적이라는 것이 될텐데요.
덤으로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의 상업발달을 생각하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유교사상 때문에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고요.
@하히해 중국은 명후기에 이미 일조편법으로 전환, 세금의 은납이 진행되었는데 보통 이것만으로도 화폐사용이 농촌까지 퍼져있었고, 경제적으로 결합이 진행되었다고 보죠.
그럼 그 은은 모두 중국에서 났을까요? 15세기에는 일본에서, 16세기 후반부터는 멕시코에서 들어왔습니다. 재화시장의 측면에서보면 일국 내에서 자급자족이었겠지만 화폐시장을 보면 전혀 아니죠.
덤으로 국내에서 자급자족이라고해서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고요.
@하히해 일본에서는 17세기에 당시 정권의 중핵이던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무역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무역이 중요하지 않은 국가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질까요?
당시 동아시아의 무역구조는 일본의 은-(조선)-중국의 생사가 메인이었고, 거기에 조선인삼 정도였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생사와 인삼의 생산이 가능해지자 조일무역의 규모가 확 죽었고, 덕분에 중국에 줄 은이 부족해져서 조청무역규모도 줄었습니다.
설령 자본집약적인 시장경제가 발달하기 전이라고 해도 상업이나 경제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Diogenes 화페사용이 경제적 발달의 척도라면 고대 그리스는 중국 조선 일본보다 경제적으로 발달했겠지요. 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에도막부 이전까지 일본은 일본 전역에서 통용될 화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널리 통용된 화페는 명나라 영락전이었죠. 수나라 동전도 그냥 갖다가 쓰고. 외국 돈 갖다가 동그라니까 이거 화페라고 쓰던 상태인데, 이건 일본 내에서도 화페경제가 구축되었다고 말 안합니다. <근세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에서 일본의 대다수 민중이 진정으로 화폐경제에 참여하게 된 시기를 17세기라고 하는건 괜한 게 아니죠.
조선에 가망따위는 없음. 역사는 결과로서 평가받아야지 If가 끼는순간 그냥 놀이감으로 전락합니다
@하히해 내가 못할 이유 없네요
@율무차 아예 틀린 말씀도 아니지요..;; 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다 말기에는 가망이 없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저 당시 중국과 일본도 상황이 좋지않았거든요. 참고로 저 당시 일본은 텐메이 대기근이 일어났고, 중국은 건륭제 시기였죠. 거기다 미국삼의 등장으로 대외 교역이 축소되었으니....
몇년만 더살았어도....후우...
개인적으로 그냥 정조도 조선의 망국화에 일조한 사람으로 보는지라...
정조는 고려의 공민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려나요?
근데 댓글들에 수차만 나오고 수레는 언급이 없는게 좀 아쉽네요.ㅅ.
수레는 길도 수레 갈수 있는 규격에 맞춰서 뚫어두고 했는데 정작 함경도 이외 다른 지방에서는 잘 안쓰인 기묘한 상황이었죠.
@aaaa aaa 수레는 고구려의 오파츠였던 겁니다!
조선 군주들 중에서 광해군 다음으로 과대평가된 인물이라고 봅니다.
자뻑이 심한 거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라서 그런가보다 넘어갈 수 있지만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건 조선 멸망의 중대한 원인의 하나로 보여서 좋은 평가를 해주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