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용분해 : A. 자신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구하심(1절)
1.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심 (1a절)
2. 그리하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하심 (1b절)
B. 자신을 보내신 성부의 목적을 이루었음을 고하심 (2-4절)
1. 성부께서 택한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성자에게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사실을 진술하심 (2절)
2.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진술하심 (3절)
3. 하나님 아버지의 명하신 바를 예수님 자신이 이루어
이제 자신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다고 고하심 (4절)
C. 이제 자신도 창세 전에 성부와 함께 누렸던 영화를 되찾길 구하심 (5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아침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고 험한 고통의 길을 우리를 위해 가시고자 하심에, 오늘 아침 우리의 가슴을 다시한번 여미게 되는 아침입니다. 이제 우리의 다 함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찬양하십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17:1-5절 말씀으로 수난 전날 다락방 고별 기도의 초반부로서의 자신과 성부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제17장은 13-17장까지 이어지는 다락방 강화를 완결짓는 부분으로서,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 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다락방 고별 기도 기사입니다. 이 기도를 ‘대제사장적 기도’ 라고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은 종교 개혁 시대의 루터교 신학자인 데이비드 화이트러스(Daivid Chytraeus, 1530-1600년)인데, 이 기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목전(目前)에 두고서 인류 구속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헌신의 기도라는 점에서, 그리고 남겨질 제자들과 미래의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라는 점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것은 타당합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예수님의 기도 중에서는 가장 긴 것으로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이 함께 있어, 그 기도의 모든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하신 기도였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14-16장까지 이어진 마지막 고별 설교를 마치시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는 구약에서의 모세의 증거의 노래 (the Song of Witness. 신 31:31-32:44) 를 연상시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과 40년 광야 생활 기간의 지도자로서 그 사명을 다한 하나님의 종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긴 고별 설교를 선포하고 난 이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 예언의 노래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모세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背敎)와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였다면, 예수님은 그 기도를 통해 제자들 및 미래의 신약 교회의 거룩함과 일치 및 그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그 분위기가 결코 암울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의 영광에 대한 기대감과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을 본받은 거룩한 신약 공동체의 장엄한 비전으로 충만하여 있습니다.
좀더 세부적으로 내용을 살펴보자면, 먼저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자 자신과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성자(聖子)의 영광은 성부(聖父)의 영광과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부에게서 발현(發顯)된 영광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며, 그 영광은 다시 성부를 영화롭게하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통해 성부께서 맡기신 구속 사역을 완성하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서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동시에 자신이 2위 하나님으로서 창세전부터 성부와 함께 누리던 영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성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성부의 영광을 구하는 이 기도는,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 뿐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영광을 동시에 보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히 12:2),
이어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로, 제자들을 위한 중보의 내용은 주로 제자들의 보전 (Preservation) 과 진리의 말씀에 의한 거룩함 (Sanctification) 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전은 내적, 외적 두 가지 측면에서의 보전인데, 한 가지는 내적 분열로부터의 보전으로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외적 요소로부터의 보전, 즉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0-26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까지를 포함한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부분에서의 기도의 뚜렷한 주제는 ‘하나됨 (Unification)’ 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기를 구하십니다(21절). 곧 성자와 성부 사이에 온전한 일치가 있음같이 성도 상호간에도 진정한 일치가 있기를 원하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성도들이 일치되기를 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부와 성자간의 일치는 성도들 상호간의 일치 및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일치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질(Divine Substance) 에 있어 하나가 되신 일치이지만, 성도들 상호간, 혹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신적 본질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치를 위한 기도의 스케일은 광대하며, 그 의미는 너무나 심오합니다. 이 기도는 곧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체로 하나가 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23.24.26절).
실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예수님의 심오하고도 원대한 구속사의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through it and beyond it)’ 이루어질 많은 것들을 보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와 회복될 자신의 영광,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구속받은 백성들이 이루게 될 거대한 우주적 교회의 비전이 우리 주님의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승리의 영광 앞에 놓인 십자가가 부담스럽기에 지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원한 장래의 영광을 볼 수 없기에 이 땅에서의 거짓된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고, 구속받은 교회의 거룩한 일치됨의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작은 일에 분열하고 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묵상함으로써, 왜곡되고 편협한 신앙의 비전을 바로잡고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정의가 나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도대체 영생이란 무엇이며,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두 가지 아는 것으로 정의하셨습니다. 하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한 분은 구원의 주체가 되시고, 한 분은 구원의 근거와 통로가 되시기 때문에, 이 두 분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아는 것이니이다’로 번역된 원어는 관찰과 경험에 기초한 앎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땅에 오사 육체로 사신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영생의 근거가 됨을 잘 알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대인들의 거센 배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있는 유일한 통로가 예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이시며(요1:14),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요 1:18).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요14:9).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빌 2:6)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히1:3).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관찰하고 경험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혹자는 이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성경이라든지, 그밖에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문서들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료들만으로는 그분에 관해서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아무리 많은 재료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고찰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앎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 지식을 얻으려면 예수님에 관한 경험이 필수적이며, 믿음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즉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나 주장을 단지 신뢰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이것은 그분과 매우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은 이를 ‘영접’ (요1:12) 이라는 말로 묘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자신의 인생 속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을 지배하던 ‘나’ 의 자리에 그분을 모셔들이고 그분의 종으로서 살고자 하는 결단이 곧 진실한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믿음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 누구이든지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참된 신(神) 지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서 예수님 혹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이들이 가진 지식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하였지만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자랑이 거짓인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마11:27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