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적으로 우호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은
남들의 불편감에 천성적으로 더 잘 반응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남들을 도우려는 행동 패턴을 보이곤 합니다.
성격심리학에서는 모든 성격을 "중립적"으로 규정하며,
어떤 성격이든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가령,
우호성이 높은 사람들, 즉, "착한" 사람들은
그들이 지니는 친사회성으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남들에게 투입하는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과도하다는 측면으로 인해,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볼 여력이 부족해진다는 단점 또한 지니게 됩니다.
착한 사람들의 자기 희생마저 불사하는 이러한 특징이
개개인의 정신적 웰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매우 많기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과도하게 높은 우호성을 보정함으로써 밸런스를 맞춰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안타까운 건, 사람들한테 그렇게 데이면서도
결국엔 또다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착한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착한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좀처럼 끊어내지 못하는 데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지만,
타인과 나 사이에서 건강한 밸런스를 맞춰나갈 수 있죠.
기버(giver)의 숙명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착한 사람들일수록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넘쳐나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누려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언제나 녹록치 않습니다.
기버의 정반대라고도 볼 수 있는 테이커의 존재 때문이죠.
테이커(taker), 즉, 극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ex. 나르시시스트)
자, 테이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내 안위를 위해서 누군가를 이용해 먹고 싶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착한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자기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스레 시선이 착한 사람들 쪽으로 가게 되겠죠?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그 곁에서 장단만 잘 맞춰주면 얼마든지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식으로 착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성격파탄자들의 제1순위 표적이 되고 맙니다.
※ 정말로 무서운 점은,
우호성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높은 인류애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성격파탄자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사람이 어떻게 그래??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그리고, 양의 탈을 쓴 늑대, 즉, 가식적인 면모를 지닌 성격파탄자들일수록
착한 사람들의 이러한 빈틈을 기가 막히게 파고 들어가 자기에 대해 의심조차 할 수 없게 공작한다.
이 때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과정 중 하나가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기버와 테이커 간의 이러한 관계성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테이커에게 휘둘리면서 기버가 당연히 위협 의식을 느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기버 쪽에서 테이커에게 과몰입을 하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테이커에게 계속해서 주기만 하는데,
오히려 테이커와의 관계를 점점 더 돈독하게 여기게 된다는 거죠.
도대체 왜???
그 이유는 바로 "노력의 역설"에 있습니다.
최고의 사회심리학자 중 한 명인 Elliot Aronson은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뭔가를 얻은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같은 걸 획득한 사람보다 그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그만큼 가치있기 때문에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역설.
인간관계에서 노력의 역설은,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더 노력의 수혜자를 가치롭게 여기게 만듭니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건 나인데,
어째 점점 더 상대방에게 목을 매게 되는 건 또 나인 것이죠.
사이비 종교가 길거리에서 잠재적 신도를 타게팅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운데,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을 내뱉으며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 달라 할 때,
이걸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는 사람일수록 기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단 기버를 끌어들이게 되면,
기버는 성격 상, 자신이 들어간 집단에 어떻게라도 헌신할 가능성이 높겠죠.
그렇게 집단을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노력의 역설로 인해, 그 집단에 갖게 되는 애착심이 강화되는 겁니다.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뭔가를 얻은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같은 걸 획득한 사람보다 그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게 된다.
길거리에서 포교를 하게 되는 과정은 굉장한 자괴감과 수치심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일들을 통해 누구 하나라도 포섭에 성공해서 집단으로부터 인정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은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전도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집단에 과몰입하는 속도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입장에서는,
적절하게 포장만 잘 해 준다면,
쥐어짜면 쥐어짤수록 얼마든지 신도들을 자발적으로 과몰입시킬 수 있는 구도인 것입니다.
노력의 역설은 일종의 "인지부조화"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아닌 것 같더라도,
내가 일단 이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 대상이 그만큼 가치롭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속내는 다정한 사람이야.
기버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꺼림직함을 느꼈다한들,
기버의 뇌는 그 대상에게 투입된 노력을 계산하며, 그 노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만한 결론을 창출해 버립니다.
우리의 뇌는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관입니다.
뇌의 입장에서는,
이만큼 노력을 기울였으면, 당연히 노력에 합당한 결과가 나와야만 하는 겁니다.
아무리 꺼림직하더라도, 어떡해든 합리화를 시킴으로써 내 노력들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한 작업들이
내 뇌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우리는 노력이 투입된 대상물을 반드시 사랑해야만 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 우호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분들께 꼭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드리는 편입니다.
"사람에게는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이 있고,
관계에서는 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해요.
이 둘이 한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 있는 관계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고 볼 수 있거든요.
때로는, 내가 주는 기쁨을 거두어 들여서라도 반드시 이 밸런스를 맞춰줘야만 해요."
내가 아무리 많이 주는 대상일지라도,
상대방 또한 나에게 많이 주고 있다면, 노력의 역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반면,
나는 딱히 받는 게 없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관계를 절대 놓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 관계는 노력의 역설이 지배하는 불균형적 관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곡된 마음인 것이죠.
투입된 노력 때문에 우리의 뇌가 강제로 그 대상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 뿐,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가치로운 게 아닐 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딜레마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내가 이제껏 투입한 노력의 가치를 한 번 배제해 보세요.
이 사람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
이 사람은 나에게 얼마나 헌신했는가?
내가 들였던 공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고 나면,
생각 외로 존재감이 퇴색되는 주변 인물들이 꽤 나오게 된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무명자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hsune
첫댓글 크...오늘도 너무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내가 주는 기쁨을 거두어 들여서라도 밸런스를 맞춰야 된다는 말씀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