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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루가 8,16-18)
“No one who lights a lamp conceals it with a vessel
or sets it under a bed;
rather, he places it on a lampstand
so that those who enter may see the light
말씀의 초대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칙서를 반포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재건하고 자원을 후원하도록 명령한다.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며 성전 재건을 위해 돕는다(제1독서). 등경은 어둠을 밝히려고 있는 것이기에 빛을 숨겨 두지 않는다. 숨어서 한 우리의 선행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등경이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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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가끔 듣는 말에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는 구호일 뿐, 사회 환경은 철저하게 기득권자들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왠지 오늘 복음은 예수님마저도 가진 자를 두둔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깨닫도록 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자와 하느님 나라에서 가진 자는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닙니다. 세상에서는 채우면 채울수록 창고에 곡식이 쌓여 부자가 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세상 것을 버려야 부유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가진 자는 자신을 온전히 비운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세상 것을 비운 자리만큼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움켜잡고 그것을 자기가 가진 줄로 알고 사는 사람은, 사실은 가진 것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온통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세상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만큼 영적으로는 빈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것에 초연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없어 보여도 아무것도 부럽지 않는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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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두는 이는 없습니다. 등불은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등불은 주님이십니다. 등불에서 퍼져 나오는 빛 또한 주님이십니다. 등불과 빛은 하나입니다. 등불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뚜렷이 비추어 주시고, 당신 스스로 그 길이 되십니다. 빛은 조금만 있어도 어둠을 이깁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등불이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올바른 길을 비추어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빛이신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앞장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만일 신앙인들이 등불이신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어두운 길을 헤맬 수밖에 없으며, 자칫 타인의 등불마저도 꺼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등불이시라면, 우리는 그 빛을 가져다가 어두운 곳을 비추어 주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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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두는 이는 없습니다. 방을 밝히려 불을 켜는 것이지, 모양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애쓰지 않아도 결국은 알려집니다. 빛은 조금만 있어도 어둠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등불을 켜는 행동일는지요? 선행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누구나 밝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그저 허허거리며 웃는 이가 밝은 사람은 아닙니다. 밝은 사람은 ‘몸에서 밝은 기운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선행을 베풀며 착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3개월 이상 깁스를 풀지 않으면 근육은 급속히 둔화된다고 합니다. 몸을 움직여 주지 않기에, 뼛속의 무기물이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골이 되는 것이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기도와 선행이 없으면 냉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차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성당 다니는 일이 귀찮아집니다. 영적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등불을 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등불마저도 꺼 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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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거짓말은 탄로가 나고 맙니다. 우리 삶에서 자주 겪는 일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밤에도 대낮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비추시는 빛 속에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12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콩글리시’를 남발하다 벌어진 작은 실수였습니다. 책상 위에 놓으려 ‘스탠드’를 사러 갔는데 점원이 제 말을 도대체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설명을 하자, “Study light!” 하더군요. 영어에서 빛이 나오는 건 ‘light’ 또는 ‘lamp’입니다. 거리를 밝히는 빛은 ‘street light(lamp)’이고 책상 위에 놓고 책을 보기 위해 밝히는 빛은 ‘study light(desk lamp)’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때나 책을 보려 할 때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생에도 빛이 필요하지요. 특히 위기 상황에서 앞날이 막막할 때 자신의 앞길을 비춰줄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 곁을 비추는 빛이셨습니다.(요한 1,19) 또한 빛 자체이시기에 당신을 감추거나 숨기신 적이 없습니다.(요한 18,20 참조)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을 감추거나 숨기려 합니다. 죄를 지은 아담이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처럼(창세 3,8) 사람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거나 숨기려 합니다. 하지만 감춘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숨긴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지요.
영어 좀 한다고 자신만만했던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콩글리시’를 구사하다 순간 당황하고 창피해서 숨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 또 하나를 더 얻고 배운 셈이지요. 영어도 삶도 신앙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숨기보다는 꺼내어 주님의 빛 안에 비춰봐야 하지요. 더 나아지고 싶다면 감추면 안 됩니다. 기준이 되는 것에 비춰봐야 합니다. 신앙의 기준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빛,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비추어 본다면 우리도 그림자에 머물지 않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담아, 다른 이에게 주님을 비추는 등불, 바로 ‘faith light(lamp)’ 말입니다.
등에 불을 밝히자!
-김찬선신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정말 등불을 켜서 덮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자신이 가진 등에 불을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안다면,
그 등불이 진정 사람들의 어둠을 비춰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등불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덮어버리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등의 모양, 기능, 성능은 다 다르지요.
화려한 등이 아니어도 되고,
밝기가 좀 떨어져도 나는 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리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뭐랄까?
복음의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열 달란트가 아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그 사고방식입니다.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욕심이 엄청나서 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과소평가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은총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등불을 덮어버리는 또 다른 유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기름을 채우고 불을 붙이는 수고라면 수고,
희생이라면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남을 위해 하려는 열정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그 자신이 어둠일 테니
남을 비추는 등불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 등에 불을 밝히도록 합시다.
등불 같은 사람
고대 팔레스타인의 주택은 등불 하나로 온 집 안을 밝힐 수 있는 구조로 |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 ?
- 김동욱 부제-
요즘 세상은 ‘자본주의’ 라는 사조가 대단히 강력해 보입니다. 많은 정치 철학가들의 오랜 문젯거리였던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자본주의’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인 듯합니다. 사실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고, 없는 사람들이 더 빼앗기는 모습은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옛날 예수님께서 사셨던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봉건주의 사회에서도 있었으며, 가깝게는 우리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복음 말씀이 이런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까요 ? 예수님께서는 “잘 헤아려라.”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가질 것인가 ?’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요 ?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온갖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재산과 자손은 그에 따른 보상이었습니다. 곧 어떤 사람이 많은 재산과 자손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역으로 그의 믿음이 신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보면 간교한 사탄은 재물에 대한 인간의 마음과 욕심을 이용해 예수님을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마태 4, 8 – 10 참조) 이런 것을 보면 믿음이 신실하다고 해서 꼭 재물이나 다른 것을 더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 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빛을 가진 사람은 그 빛을 숨기지 않고, 또 숨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빛이십니다.(1요한 1, 5 참조) 대 데레사 성녀가 말하듯,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직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이 빛을 가진다면 더 받아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양승국신부-
<추억의 등불>
등불,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물건이지요. 등불, 말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전기보급률이 그리 높지 않던 시절, 해가 넘어가면 집집마다 등잔에 불을 붙였습니다.
기름 냄새를 배경으로 라디오에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그렇게 어린 시절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요즘은 그 용도가 사뭇 다릅니다. 피정 집에서, 카페에서, 분위기 잡는데, 아니면 묵상기도 프로그램 진행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예수님 시대에 등불은 야간생활에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등불을 사용해보신 어르신들 기억나실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바닥에 두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켜서 서랍 속에 감추어놓지 않았습니다. 침대 밑에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했다면 살짝 맛이 간 사람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등불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높이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올려두는 등경(등잔걸이)이란 것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칭하는 등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실 때 비밀리에, 비공개석상에서, 끼리끼리, 속닥속닥, 그렇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언제나 타당하고 보편적이었기에, 진실하고, 공정했기에 늘 거침없고 당당했습니다.
이런 그분의 가르침은 속성상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나 은혜로운 생명수 같은 가르침이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만 갇혀 있기에 너무나 아깝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세상 이편 극단에서 반대편 극단까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져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상향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좀 더 많은 급여, 좀 더 높은 지위, 좀 더 안락한 생활, 좀 더 많은 권력, 좀 더 풍요로운 인생...
그러나 예수님 삶의 특징은 우리와는 반대로 ‘하향성’입니다.
“높은 곳에서 맨 밑바닥으로, 승리에서 패배로,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칼 바르트)
예수님의 사목의 정점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 그 무력함 가운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계속 내려가시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탄생하십니다. 아직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이 있는 한 편히 계실 수 없으셔서 끊임없이 하향하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등불이 되어라
-김봉술 신부-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갑니다. 이 길은 훤한 길일 수도 있고
어두운 길일 수도 있고, 바른 길일 수도 있고 꼬불꼬불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평탄한 길일 수도 있고 가시밭길일 수도 있고, 오르막길일 수도 있고
내리막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는 우리는 시발점도 모르고 종착점도 모른 채
걸어가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 자를 나그네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신앙의 나그네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철저한 신앙인으로 살면서 명예와 출세를 멀리하고
겸손과 검소한 생활을 하신 분, 엄격하고 올곧고 철두철미하면서도
따뜻하고 온화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분, 스승, 시인, 철학자, 수필가로
사셨고 하느님께 철저한 순명과 믿음의 생애를 사신 아름다운 신앙인이신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느껴보세요.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 나그네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
-장수정-
아침에 마루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면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햇빛에서 부유하는 먼지가 숨 막힐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고 탁자 위의 먼지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무지 햇빛 속에선 집 안의 지저분한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 마음이 편치 않다. ‘청소를 시작해야 되겠군.’ 할 수 없이 걸레를 집어 든다.
등불로 묘사된 예수님의 말씀은 내 마음밭을 비추는 빛이다.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음속을 비춰보면 내 행동의 숨은 의도·거짓말·악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빛 속에서 먼지가 부유하듯 교만과 탐욕의 티끌이 내 마음속에 둥둥 떠다닌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빛을 싫어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지.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8,18ㄱ) 하고 말씀하신다. 등불을 켜서 내 마음밭을 환히 비추어 숨은 악이 드러나게 하려면(8,16-17 참조), 그래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8,18ㄴ 참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헤아려 보라고 말씀하신다.
몇 해 전 함께 일하던 수녀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 묵상 방법이 생각난다. 수녀님은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그날의 복음을 함께 읽자고 했다. 우리는 복음을 한 번, 경우에 따라 두 번 큰 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골랐다. 왜 그 말씀을 선택했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붙임쪽지(포스트잇)에 선택한 성경 말씀을 크게 적어 책상 앞에 붙여 놓는 것으로 아침기도는 마무리되었다.
수녀님은 일에만 파묻혀 지내지 말고 때때로 쪽지의 말씀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에 되새기라고 했다. 복음 말씀이 내 마음밭을 비추고 그날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하라는 뜻일 게다. 나는 그때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라는 시편 말씀을 실감했다.
수녀님은 주님의 말씀으로 내 발 앞을 비추어 가며 하루의 여정을 걷는 아주 쉬운 실천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너무 쉬워 오히려 소홀히 여겼던 건 아닐까? 수녀님이 다른 부서로 가신 뒤에는 몇 번 혼자 하다가 흐지부지 손 놓아 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부터 다시 수녀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복음을 읽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골라 쪽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화장실에 갈 때,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커피를 마실 때, 문의전화에 응답하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쪽지를 꺼내 읽는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말씀이 빛이 되어 마음속을 구석구석 비추어 준다. 내가 염려하고 집착하는 것의 정체가 차츰차츰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여전히 나는 그것들을 없앨 수도 없고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는 데서 위로를 받는다.
回光返照
-김찬선신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한 동안 이 말은 마태오 복음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는 말씀과 겹쳐져서 이해되었습니다.
“등불”은 “너희 빛”과 같은 뜻이 되고
“너희의 빛”은 “너희의 착한 행실”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말라는 말씀은
나의 선행,
나의 덕성,
나의 장점,
나의 능력을 감추지 말라는 뜻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전에 저는 저를 자랑하는 것이 될까봐
저의 장점과 능력을 계발하지도 않고
선행과 달란트를 감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달란트를 묻어두었다가 혼이 난 관리인의 비유 말씀을 듣고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나의 달란트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고
더 나아가서 나의 장점도 적극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 나의 선행도 필요하다면 숨기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등불”이나 “너희의 빛”이
과연 저의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말씀을 보면 일단은 그렇습니다.
저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 발의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문을 보면 안 좋은 얘기로 도배되어
어떤 사람은 아예 뉴스를 보지 않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썩을 대로 썩어
도저히 구제불능인 것 같아 너무도 암울한데
제가 어떤 좋은 일을 한다면
저의 선행이 비록 태양 빛 정도는 못 되도 이런 세상에 등불은 되겠지요.
문제는 선행이 어디서 오느냐,
빛이 어디서 오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發光體인지 反射體인지의 문제입니다.
회광반조(回(廻)光返照)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은 해가 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을 밝히는 것,
또는 꺼지기 전에 마지막 섬광을 터뜨리는 것을 말하지만
선불교에서 이 말은 빛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비추라는 뜻입니다.
내면 성찰의 뜻도 되겠지만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빛을 받아야 빛을 내는 존재라는 뜻이 있고,
그러므로 빛을 내기 위해서는
빛을 원천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있는 선,
우리가 실천한 선행,
이것은 모두,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至上 善, 모든 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받아 지니게 된 선이요,
선하신 하느님 德에 할 수 있게 된 선행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소회 데레사를 너무 사랑하여
프란치스코와 데레사 영성을 따르는 소화 자매 수녀회를 창설한
김 준호 선생은 프란치스코의 이런 정신을
회광반조와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적으십니다.
“달이 스스로 빛이 없지만
태양의 반조로 빛이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는 절대의 지혜와 자비가 없지만
하느님의 德을 채 받으면 지혜의 빛이 반조됩니다.
마치 지구 스스로의 열은 부족하여도
태양의 열을 받은 후에 만물의 생명을 길러낼 수 있음 같이
사람 스스로의 지혜와 자비만으로는 부족하여도
성스러운 임의 지혜를 받은 후에 諸德이 완성되어
천지로 더불어 양육하게 되나이다.
그러므로 자력의 德과 타력의 德을 합할 때
한 인격이 되나이다.
합심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해와 달 사이의 햇빛과 달빛 같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덕도 똑 같이 완성하게 되나이다.
곧, 큰 빛과 작은 빛이 합할 때 그 빛이 완전해지나이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립시다.
-유영일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짤막한 세가지 교훈의 말씀을 연결없이 모아놓은 단절어 집성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부터 25절에는 이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이 세가지 단절어를 설명해 봅니다.
먼저 이 말씀들의 상황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명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첫번째 말씀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은 그릇으로 가리워지거나 침상 밑에 들어가 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듯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도 드러내야 할 것이며 때가 되면 밝히 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지만 십자가 위에서는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 놓는 등경은 십자가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등불이신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나라 정치가들, 공무원들과 재벌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격언이 동서고금에 널리 퍼져있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은 드러나지 않을 비밀은 없습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전파를 독촉하고 격려하기 위해 다른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6-27; 루카 12,2-3)고요.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어서는 부족합니다. 명백히 드러나게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절어로서 예수님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와 금화의 비유 등으로써 복음서에 여러번 나오는 말씀입니다.(마태 25,29; 루카 19,26 참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리는데에 잘 활용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 큰 일을 하며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도 있고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격언도 있듯이 현재 영적인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조금 가진 것마저 종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은 더욱 더 그 신비를 잘 깨닫고, 마음을 닫은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가지 단절어를 통해 예수님의 교훈을 알아듣도록 합시다.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신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내고 널리 알리는 신자일수록 영적으로 부유해지고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오늘은 옛날이야기 하나로 시작하여 봅니다.
어떤 부잣집에 한 도인이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습니다. 부자는 워낙 이름난 도인인지라 푸짐한 저녁을 대접하고는 사랑채에 묵어갈 수 있도록 했지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넌지시 묻습니다.
“당신이 바른 길을 걷는데 그 누구도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길을 가야 할까요? 그래도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실성한 사람이 아닐까요?”
부자의 이 말에 도인이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집에 있는 하인들 중에서 어떤 하인은 당신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다른 하인은 당신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하인을 더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부자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재빨리 대답했지요.
“당연히 내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하인이지요.”
부자의 이 대답에 도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 또한 실성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군요.”
그 누구도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옳다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삶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만을 행하면서, 정작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솔직히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빼앗길 것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에,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꾸짖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앞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선에 따라서 행동하는 이중적인 모습들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빛이라는 것은 나의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빛을 가렸을 때는 어떨까요? 내가 보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빛이 있어야만 내가 세상에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이라는 빛을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이기심이라는 그릇으로 덮어 놓거나, 욕심이라는 침상 밑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빛이 있음으로써 나의 모습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것인데, 내가 빛 위에 올라서면 빛이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주님 앞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아갔을까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대충 일하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숨은 증거자
-최혜영 수녀-
회의를 위해 조치원의 ‘예수의 작은 자매회’ 피정집을 다녀왔습니다.
소리없이 숨어서 노동을 하시며 관상생활을 하시는 수녀님들을 뵐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세라피나 수녀님은 요즘 공익근로로 유원지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모두 “이분들이야말로 참 좋은 몫을 택하셨다”고 말하지만, 워낙 고된 생활에 철저한 청빈생활을 하다보니 지원자가 많지 않아 한국에 진출한 지 50주년을 넘어섰지만 회원이 3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진다는 복음 말씀처럼 숨은 일을 하시는 수녀님들의 증거생활은 어떤 말이나 업적보다 큰 것 같습니다.
1992년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 이고니온(코니아)에 들렀을 때이탈리아와 프랑스 출신의 두 분 수녀님만이 성 바오로 성당을 지키고 계셨는데 가톨릭 신자라고는 딱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역할은 이슬람 이웃들의 좋은 벗으로 친교를 나누며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도 세계 각지에 파견되어 그 땅의 가장 미천한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써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
-김덕진-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30년 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되어 8명의 목숨을 형장의 이슬로 앗아가고, 수백 명을 구속시켰던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해온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다. 참여정부에 들어서서 ‘과거사 진상규명’이라는 큰 화두가 사회에 던져졌고, 찬반논쟁이 국회는 물론 언론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인혁당 사건과 군의문사 사건, KAL`858기 사건 등의 진상규명 활동을 하며 유족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 곁에서 지켜본 유족들의 지난 세월은 말 그대로 눈물의 역사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자식들을 건사하며 살아온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서대문 사형장 앞을 지날 때마다 통곡을 한다. 살점 같은 아들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에 보냈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려받은 군의문사 가족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오열을 한다. 이분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혀내어 누군가를 처벌하자는 것도 보상을 받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속시원하게 풀어줄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이고 빨갱이로, 군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바람만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다. 혹자는 지난 일이니 덮어두자고도 하고, 이제 와서 들추어내는 것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일일 뿐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족들을 만나 그들의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본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행히 국정원 내부의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하며 진실을 고백했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많고, 그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진다.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그러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이회진신부-
대체적으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소극적인 편입니다.
“혼자만이라도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 뭐”하고 생각하거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조용히 지내야 해” 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도 그렇고, 수녀님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조용합니다.
뭐 좀 시끄럽게 할라치면 “왜 저러나?”하는 반발을 받기 싶죠.
어쩌면 천주교가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조용한 편이어서 그런지, 말없고 조용한 편인 천주교의 모습이 좋긴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이 고요하고 내향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성당에나 다니면서 기도나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때로 우리 신자들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침묵으로만 대응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람이 지닌 내적 고요에 근거한 “겸손”의 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침묵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외짝 교우 중 자매님만이 성당에 다니는 경우
많은 경우 남편이나 시댁의 눈치를 보며 겨우 겨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주일이나 평일에 성당에 가려고 하면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죄진 사람처럼 빠져나와 도망치듯 성당에 와서는
정신없이 미사를 드리고는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갑니다.
그러다 성당에 가는 게 들키면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남편이나 시댁 어른으로부터 “성당에 가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뭐가 좋아서 그렇게 허구한 날 쫒아 다니냐?”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좀 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당당해졌으면 합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남편이나 집안 식구가 우리에게 “성당에 가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말할 때,
“성당에 다니니까 내가 당신을 이제까지 데리고 사는 거야!”
“성당에 다니니까 그래서 이런 살림에 사랑으로 이해하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겁니다.”
라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신앙이 무엇을 주고 있는지 드러냈으면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태도는 분명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신앙은, 믿음은 어떤 것이냐?”라고 물을 때,
자신이 지닌 신앙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지닌 신앙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은 미사에 자주 나오고 어떤 단체에 가입해 활동을 많이 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생활 안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끼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거리에 나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거리에 나가 성당 소개 책자를 나눠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무엇을 줍니까?”하고 세상이 물을 때,
여러분이 지금 느끼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깊은 사랑과 이해심으로 밝게 빛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천주교 신자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소극적인 신앙의 삶은 분명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잘못된 신앙 습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그렇게 감추는 사람은 믿음을 잃어버릴 위험 또한 늘 가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자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신앙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환하게 비추시길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빛이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세상이 여러분에게 물어본다면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십시오.
“나는 이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빛을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더 이상 여러분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만은 않겠습니다. 왜 사냐고 물으면 당신을 알기에 새 세상을 보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아멘.”
별빛 되기
-조성풍 신부-
어렸을 적 방학이 되면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때에는 밤이 되면 등잔불을 밝히곤 하셨습니다.
방문 밖이 어둑어둑해지면 켜지는 등잔불은 방안의 어두움을 서서히 몰아내주었습니다. 어두움을 이겨내는 것은 어두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빛을 비춤으로써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달빛이나 작은 별빛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올바로 알아 실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실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별빛들이 모여 미리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는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 등불을 등경 위에
-김웅태 신부-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루가 8,16-18)
이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며, 생활 속에서 의례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구태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평안하고 올바로 살자면 밝은 빛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어두움을 밝혀주고, 다치거나 헤메지 않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구원의 말씀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구원의 등불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내 자신의 믿음의 등불을 가려 두거나 덮어두어서는 안되며, 다른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 주는 역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구원의 등불의 역할을 하자면, 어려움과 고난이 으례히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에 따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닭장에 10마리의 흰 닭을 넣으면서 1마리는 누런색의 닭을 넣었더니, 10마리의 닭은 자기들과 다른색의 닭을 그냥 놔두지 않고, 계속 쫓고, 쪼아 결국은 죽이더란 것이다.
이와같이 동물의 세계에까지 자기들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의 생활을 보여 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의례히 따르고, 누구에게는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가고, 그러기에 오늘의 수많은 순교 선열들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해도, "우리가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를 알고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서 이 삶을 살고, 그래서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하는 부끄러워 하거나 물러나지 말아야 할 믿음의 의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무라기보다는 구원과 후세를 아는 이들의 특전으로 알고 기꺼이 실행해야 함을 주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등경 위의 등불
-강영구신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대에게
저는 요즘 신영복 교수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기초 개념을 강의하는 중에 위(位)와 응(應)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아떨어져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위(位)는 ‘자리’를 말합니다.
등불이 등경 위에 있으면 득위(得位)-제자리를 차지함-하여 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 있으면 실위(失位)-제자리를 잃음-하여 아무리 밝게 빛난다 해도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만물은 고유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불의 자리가 등경 위인 것처럼,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자식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사제의 자리, 수도자의 자리, 평신도의 자리가 있고, 직장에서는 사장의 자리, 간부의 자리, 평사원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가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득위(得位)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응(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말하지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라도 불 꺼져 있다면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제 구실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대통령답게 말하고 처신하지 못하면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제(司祭)라는 지위 하나로 큰 소리 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제답게 살고 처신할 때 빛을 낼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비출 수 있습니다.
양(洋)의 동서(東西), 시대의 신구(新舊)를 넘어서서 진리(眞理)는 하나로 통합니다.
행복한 추석 연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양승국신부-
<당신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성공하는 길은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봤습니다. 유명작가나 예술가가 되어 사회에 이름을 날리는 것일까요? 물 좋은 자리로 인사 발령받는 것일까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일까요? 큰 본당이나 수도원의 책임자가 되는 것일까요? 일하는 직원만 해도 수 백 명이나 되는 병원이나 대규모 복지시설, 혹은 큰 학교의 책임자 자리에 앉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겠지요.
수도자로 성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높이높이 올라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주님 안에 사는 것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시는 바와 같이 수도자로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의 은은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등불은 어떤 것입니까? 어두운 방 한가운데, 촛불 한 자루 달랑 켜놓는 것, 혹은 백열등을 켜는 것과 등불을 켜놓는 것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입니다.
등불을 켜놓으면 왠지 분위기가 포근해집니다. 부드러워집니다. 따뜻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거룩해집니다.
수도자로 잘 사는 길은 등불처럼 사는 길입니다. 등불처럼 사는 수도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등불 같은 수도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자취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그 등불 같은 그 수도자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는 등불이란 바로 예수님 그분 자체를 의미합니다. 구원의 빛으로 오신 메시아 그분 자체이자,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주신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만의 주님이 결코 아닙니다. 나만 사랑하셔야 하기에 침대 밑에 감춰두거나 그릇으로 덮어 두어야 할 존재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활활 타오르는 한줄기 강렬한 빛이 되어 세상 한 가운데 높이높이 올라가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활활 타올라야 할 세상의 등불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면 너무도 볼품이 없습니다. 한없이 부족합니다. 지극히 나약합니다. 형편없습니다.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볼품없는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란 촛불 한 자루가 켜짐으로 인해 완전히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부족한 우리 삶이지만 우리 각자의 초에 그리스도가 점화됨으로 인해 우리는 그럴듯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 안에 살아감으로 인해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형편없지만 주님으로 인해 더 없이 아름다운 존재,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자.
-박상대 신부-
우리는 지난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가 8,4-15)를 묵상했다. 이 복음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그리고 "비유의 설명"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가 선호하는 하느님나라에 관한 비유이다.(마태 13,1-23; 마르 4,1-20)
그러나 복음이 전하는 비유의 서두를 보면 무엇에 관한 비유인지 전혀 눈치를 챌 수 없다. 물론 비유의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서로 다른 조건에 떨어진 씨앗이 그 조건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은 뻔한 일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와 그 설명을 따로 제자들에게만 밝혀 주심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임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늘나라의 신비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10절)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선 제자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전적으로 제자단에게만 한정되어 머물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 복음의 "등불의 비유"(16절)가 필요한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등불과 같이 등경에 올려진 채 빛나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등불의 비유"에서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16절)는 말씀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등불을 켜는 이유가 바로 빛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불에 비유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아직은 비유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17절) 그러나 이 신비는 곧 드러나야 하고, 또 드러나서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을 때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즉, 십자가는 등경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등불로서 세상을 밝히 비추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의 마지막 구절로 넘어가 보자. 우선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18절)는 말씀을 소유재산에 대한 새로운 분배정의, 즉 "물질적인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원리로 알아듣는다면 실수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진 것" 이란 물질적 소유를 뜻하지 않는다. 소유는 소유인데 신비에 관한 지식의 소유를 말한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통찰함으로써 얻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관리하는 일이다. 관리는 신비에 대한 인식과 믿음, 그리고 증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론적 보상률이 추가로 적용된다.
종말론적 보상률이란 복음서 모두가 즐겨 쓰는 개념으로서,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밝히는데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진 사람은 가진 만큼보다 더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줄로 알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가지고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등불>(루까 8, 16-18)
-유 광수신부-
루가는 8, 10절에서
우선 등불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등불이란 어둠에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마치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배들의 길을 안내해주는 등대처럼 등불은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빛이다. 따라서 등불은 등불 자체로 어둠을 비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등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빛은 예수님이시다.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요한 1,4.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루가도 즈가리야의 입을 통해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78-79)라고 노래했고 시므온을 통해서도 "계시의 빛"(루가2,32)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란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자기 안에 받아들여 빛이신 그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바로 빛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곳이다. 만일 교회가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다면 다른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 교회의 특성은 그리고 교회가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으로 존재해야 이유는 바로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함이다. 교회의 이런 사명은 이 세상 극변에 까지 그리고 이 세상 마칠 때까지 해야할 의무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누가 이 위대한 사명을 수행해야하는가? 물론 복음선포의 사명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명이고 의무이다. 그래서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하면서 파견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코전 9,16)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코전9,23)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오늘 날 우리가 등불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등불을 켜는 작업을 해야 한다. 등잔에 등불을 켜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선 기름을 부어야 한다. 그리고 불을 붙여야 한다. 등잔에 기름을 넣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18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름이 없으면 탈 수 없듯이 말씀을 듣지 않으면 등불을 켤 수 없다.
나 자신이 빛은 아니다. 빛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빛이신 예수님은 오늘 날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따라서 빛이신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일 때 내 안에 작은 빛이 타오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등불을 켠다."는 것은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말씀의 뜻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할 것이며 그러면 자연히 말씀의 빛이 발산하게 될 것이다.
신자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한다면 꺼진 등잔일뿐 결코 빛을 비추는 등불은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정치, 경제, 법조계, 의료계, 학교, 언론계 등에 있지만 그들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인으로서의 빛을 비추지 못하니까 빛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각각 자기 자리에서 등경 위에 켜 놓은 등불처럼 빛을 비춘다면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두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등불을 켜면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지 않는다. 아니 둘 수가 없다. 그러나 꺼져있는 등잔은 한쪽 구석으로 쳐 박아 두거나 아니면 마치 골동품처럼 장식용으로 쓰여질 뿐이다.
등잔은 등불을 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등불로 사용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나는 법이다. 등불이 아니라 꺼진 등잔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특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덮어져 있거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띄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속성상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등불은 그 자체로 빛을 비추게 되어있다. 등불을 켰으면 그 자체로 이미 주위를 비추고 있는 것이지 주위를 비추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본질상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불인 것이다. 빛이신 말씀이 살아 있지 않은 교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활화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꺼진 등잔일 뿐 등불은 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가에 따라 우리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나게 해야하고 감추어진 것은 훤히 나타나게 해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생활화 함으로써 서서히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이 알려져 훤히 비추도록 해야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걸음이며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생활해야하는 이유이다.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내 안에서 숨겨져 있고 감추어 있을 것이다.
이런 신앙생활은 나 혼자에게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코 빛으로 나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메이며 살도록 놔두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신앙 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많은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사용하지 않을 때 결국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고" 이 은혜를 잘 사용하는 이는 즉 하느님의 말씀을 알려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이는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