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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도여행 보고
행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행 14:19-28 /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그 도시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후 성밖으로 끌어다 버렸다.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20) 신도들은 마음을 졸이며 바울을 둘러쌌다. 그러나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으로 들어갔다. [제1차 전도여행 완수] 이튿날이 되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다. 21)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신도들을 얻은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안디옥으로 되돌아왔다. 22) 두 사람은 들르는 도시마다 모든 신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어떠한 박해가 오더라도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23)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 장로를 임명하고 그들을 위해서 금식기도를 드린 후에 그들이 믿음으로 의지하는 주께 장로들을 맡겼다. 24)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 밤빌리아로 갔다. 25) 버가에서 다시 복음을 전한 후에 앗달리아로 내려갔다. 26) 그곳에서 배를 타고 그들은 드디어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디옥은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그들이 처음 길을 떠났던 곳이다. 27) 두 사람은 신도들을 모아 놓고 전도여행 보고를 하는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신앙의 문을 열어 주셨음을 알렸다. 28) 그리고 오랫동안 안디옥에서 신도들과 함께 지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가 복음을 전한 후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받는 박해(19-20a) 성도들은 나태해 지기도 하고 영적 잠을 자는 경우가 있으나 대적 마귀의 공격은 틈을 주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섰는데 이제는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온 신이라고 여겨 제사를 드리자고 했던 무리들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짧은 시간에 감탄에서 격멸로 급격히 돌아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은 줄로 알고 버려진 바울을 보며 둘러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그 사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죽는 법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더베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제자들을 굳게 함(20b-22) 돌에 맞았던 바울은 이튼날 바나바와 함게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며 제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인내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 할 때 이길 힘도 영광도 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을 세움(23-28) 바울은 각 교회에 장로를 택하여 세웠습니다. 금식 기도하며 장로들을 주께 위탁하고 약한 자들을 잘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파송을 받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 1차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 했습니다. 감격과 감사 그리고 찬양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오래 머뭅니다. 우리가 인생여정을 끝내고 드려야 할 보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적용: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를 통해 세상은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며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됩니다. 당신의 삶의 현장이 선교지가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에리카 라인. 이 책에서 저자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매길 때 우리는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제일 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다시 일어서 복음을 전파하며 제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에게 핍박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할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고 천국 소망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13:14 주석참조)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2,5절)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초인하여'의 헬라어 '페이산테스'(* )는 '설득하다'(공동번역)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짐작건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19:26,27). 돌로 바울을 쳐서 - 본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절)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5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13절 주석 참조) 폭행을 당한 듯하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낸 다음 돌로 쳤으나(7:58)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이곳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14:21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하게 이 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19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14:22
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 )는 '힘있게 해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공동번역)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14:23
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갓다. 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 NIV)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전16:16)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6:1-7의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장로를 어떠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 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금식 기도하며...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14:24
비시디아...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13:13,14 주석을 참조하라.
=====14:25
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14:26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섬(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23절에서 언급된 '파라티데미'(* )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파라디도미'(* ) 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13:1-3 주석 참조).
=====14:27
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공동번역)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 본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9:32;11:18) 빌립보에 의해서도(8:4-13)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14:28
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과 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留)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
< 설 교 >
축복 안에 있는 함정은
사도행전 14:14-19 / 박지온 목사
본문을 보면, 축복 안에 실패와 고난과 어려움도 있는데, 이들을 모두 함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엄청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함정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받을 수 있는 엄청난 그릇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 때에 언약을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축복이 크면 클수록 사단은 더 큰 함정을 파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98년도는 참으로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붙잡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여러분들을 큰 그릇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엄청난 기회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타격 속에서도 우리 교회를 붙잡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와 선교로 세계를 살릴 길 위에 세우셨음을 감사합니다. 99년도에는 더욱 힘있게 발을 내디뎌야 되겠습니다.
1. 축복에는 함정이 따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하는 지혜와 명철을 얻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배경에서 우상에 찌들린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라 하고, 바울은 "허메"라고 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는 기적 속에서 사단의 함정이 나온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교만'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할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바나바에게 붙였던 "쓰스"라는 말은 그리스의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 신을 가리킵니다. 메시지를 전한 바울에게 붙였던 "허메"라는 말은 대변인이라는 말입니다. 즉, 루스드라 사람들이 훤칠하게 생겼을 바나바는 제우스 신으로 여겼고, 그 보다는 볼품없었지만 메시지를 전했을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신의 대변인으로 여겨진 바울도 신과 같이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때에 바나바와 바울이 고개만 끄득였더라도 굉장한 추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무리를 말려서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들에게 핍박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죽이게 했습니다. 이것도 함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잡으면 이러한 것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성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 잡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셔서 다시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아팠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리고나서 성에 들어가서 일으킨 자가 바로 평생 잊지못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입니다. 너무 견디기 힘든 순간에도 성령의 은혜로 그 모든 함정들을 느끈히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들의 상황을 보고 받고 장로님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IMF를 통해 받은 충격과 고난도 모두 더 큰 축복의 그릇을 위해 준비하는 함정들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으켜야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기도 하고, 사고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의 때에도 약속을 잡고 나가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미 사역 이후에 한국에 합숙을 받으러 나오려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신년도에는 일본, 미국 뿐만 아니라 남미에까지도 확장하여 세계적 살림을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알아들으실 줄로 믿습니다. 혹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사정도 모르신다고 하실 분이 계실수도 있겠지만, 복음 전하다가 10억쯤 빚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복음을 받아야 할 갈급한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2.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해야 됩니다.
성경을 보니까 축복을 받았는데 이어서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함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함정을 뛰어넘든지 이겨내든지 해야 됩니다.
1. 요셉은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축복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축복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에게 축복권이 있고, 더 나아가 장로님에게도 축복권이 있습니다. 즉, 부모와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과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사이가 벌어지면 축복의 통로가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에게 당장 나온 것이 '가출'의 문제였습니다.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즉, 요셉의 가출은 축복하여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한 함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의 가출은 요즘의 청소년들이 하는 가출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청소년들과는 달리 부모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혹시 가출한 자녀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해 끈기있게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세계 복음화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저도 한 때 가출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앞두고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가출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이 강단에 서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마음에 가출의 결단은 참으로 어려웠었습니다. 가출을 해서 큰형님 댁으로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축복을 받았으나 가출이라는 엄청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때에 창세기 37:1-11에서 받았던 가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계속 받았습니다. 그 축복의 인도 속에서도 노예로 팔리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로 통해 요셉의 마음이 세계적인 마음으로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게도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과 전옥들에게까지 가슴을 둘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함정들을 통해서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IMF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잡고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축복을 위한 준비들이었음을 확신합니다.
2. 신약에서는 초기의 사도들이 바리새파의 혹독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기까지 핍박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유대인들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즉, 핍박의 함정이 유대인들을 유대 안에서 유대 밖으로 밀어내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 여기에서 다락방이 왜 이단으로 결정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락방은 교회론에서 이단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즉, 너무 전도가 안되니까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락방이 교권 속에서 나와서 하나로 뭉쳐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권 밖의 현장이 너무 급박하다보니까 교권 안의 현장인 기관이나 주일학교나 구역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 교회와 현장 교회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니까 이단으로 결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전도해야 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이 땅의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축복을 받아서 세계 복음화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강조해야 합니다. 새끼를 낳지 못하는 1,000마리의 양보다 새끼를 낳는 두 마리의 양이 더 귀합니다. 1,000마리의 양은 계속 줄어들 것이나, 새끼를 낳는 두 마리의 양은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 1,000마리가 되고, 2,000마리가 되고,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성장 원리입니다.)
3. 세계를 살리기 위하여
물질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세계를 살리는데 쓰임받기 때문에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건강, 재물, 일꾼을 주십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요셉은 약속을 받자마자 즉, 축복을 받자마자 계속해서 엄청난 함정이 따랐으나 그 함정에서 연단되어 세계를 살리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외국으로 수출할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 아시고,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을 핍박 속에 몰아넣어서 견디다 못해 밖으로 달아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것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안디옥 교회의 후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을 잡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지혜, 지식, 일꾼, 힘, 건강을 다 부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정주영씨의 글을 좀 읽게 되었습니다. 글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도 가출을 여러 번 했었는데, 세 번째까지는 아버지에게 붙잡혔으나 네 번째는 드디어 성공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산골에서 열심히 일하시지만 늘 식량난을 겪어야만 했던 곳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그러한 어려움 속에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철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정말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는 사상을 통해 오늘이 있게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사상만 있어도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사상이 들어가고, 어려서부터 이 언약을 잡게되면 세계의 재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없습니다. '십일조만 가지고도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십의 구조는 주님을 위해 쓰게 하옵소서.' 이러한 고백이 양심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은 장막을 지으며 돌아다녔습니다. 그것에서 엄청난 재정이 나왔습니다. 전 세계를 위한 언약을 잡고 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글에 '빈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다가 판을 깔고 자니까 하루 이틀은 괜찮았는데 삼일째가 되자 또 빈대가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야에 물을 받아서 침대 다리마다에 받쳐놓자 빈대가 달려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을 켜고 확인을 해보니 벽을 타고 천장으로 기어와서 자기 몸 위에서 낙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길은 있다. 사람에게는 머리가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 잡고 나갈 때에는 오죽하겠습니까? 당연히 지혜를 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곤충에게도 살아나갈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언약을 잡으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없습니다. 정주영씨는 그렇게 해서 한 번 간판을 내 걸으면 '한국을 위해서'라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결국은 모두 해결해내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 부닥치는 사업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값비싼 수업료를 치루는만큼 수입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신념만으로도 낙심치 않고 재벌이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잡고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계를 살릴 재벌이 되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재벌이 되기까지는 낙심하고 낙망할 이유들이 수없이 있을 것이지만, 결코 낙심과 낙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 언약을 잡고 믿음만 바로 가지면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함정은 수업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릇을 넓히는데 필요한 수업료입니다. 신앙의 훈련입니다.
4. 사실적인 기도
이러한 엄청난 언약을 잡고 기도가 사실로 나와야 합니다. 불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묵주를 돌리는 것처럼, 우리는 24시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가 사실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세수하면 세수를 하면서 사업을 하면 사업을 하면서 계속 하나님께 이야기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면 지혜를 주십니다. 빈대에게도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승리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도가 있어야 되고, 믿음으로 십일조에 더하여 헌금을 향한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선교사 파송을 위한 십이조가 되고, 십삼조는 앞으로 지역에 투자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짜 전도할 사람들이 지역을 살려야 합니다. '십일조만 써도 풍족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십시오. 십의 구조는 세계를 살릴 돈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조금만 약속이 바로되면 세계 살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속에서 경제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헌금관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 또한 믿음의 부분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세계 살릴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먹여 살리실 권능의 하나님께서 99년도에 축복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기쁨
행 14:19-20, 27-28 / 이정익 목사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사람은 행복과 보람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행복과 보람은 외부로부터 주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주어집니다. 사람이 하는 일들 중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들을 통해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주 건강한 삶을 살게 되고 건강한 신앙의 삶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앞으로 신앙인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그 소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누리며 보람을 얻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을 주신 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의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내용을 보면 생생한 간증형식으로 현장감 있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생생한 현장 목격자는 루스드라 출신인 바울의 제자였던 디모데였을 것입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로마 식민지로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고참 직업군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군인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유대인들도 소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도바울이 와서 전도를 합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찾아와 집요하게 전도를 방해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웃 마을인 안디옥과 이고니온 지역의 유대인들까지 불러와 방해를 합니다. 싸움은 대부분 상대적입니다. 양쪽이 똑같으니까 싸움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이 싸울 의지가 없으면 싸움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싸움도 쌍방이 똑같으니까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웃 동네 유대인들까지 불러와 합세하면서 싸움이 치열해 졌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고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대로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몹시 약이 올랐을 것이고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은 바울은 졸도했고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냈다고 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치열했습니까.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시내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흥분하였으면 돌로 쳐 죽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날 사도바울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몸이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컷을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바울이 기절한 것을 알았으면 빨리 응급처치를 하려 애를 썼을 것인데 본문은 “제자들이 둘러 서 있었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바울이 이미 죽은 줄 알고 장례 절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때 사도바울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기절했다가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 하루를 보내고 그 몸으로 다음날 더베로 떠납니다.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는 30km의 길입니다. 그 말은 다음날 그 몸으로 70리 되는 길을 걸어서 갔다는 말입니다. 그 장면을 본문은 아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더베로 가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2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충고를 하고 (23)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내 금식기도하고(23) 다시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를 지나 배타고 안디옥으로 가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24)고 했습니다. 이 일을 누가 시킨 일입니까. 돈이 생기는 일입니까, 누가 강제로 시킨다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순전히 자기 스스로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일이 행복하고 즐겁고 할수록 더 보람을 느끼니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생활입니다. 철학자 칼 힐티가 말한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나 사명이나 은사나 좋아하는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고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 입시 때가 되면 아이들 방을 지키고 앉아 밤을 새웁니다. 그런다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시키면 방문을 지키지 않아도 밤새워 공부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그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해 주는 일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 보람은 일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건강한 신앙인의 삶은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맡은 일을 하고 사역을 하고 열심히 일하는 태도는 좋은 태도입니다. 사람은 일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직장에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밤새워 일하는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일하려고 애를 씁니다. 일에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 일도 그냥 일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그 일에 매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 발견
먼저 내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하며 살아갈 때 삶이 행복해지고 이 세상이 건강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사람은 일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나 사명이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하면 허탄한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연예인들이 도박과 마약에 몰두하는 경우가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재능을 가지고 소중히 역할을 못하고 허탄한데 열정을 쏟는 것입니다. 돈을 좀 벌었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해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할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도박으로 마약으로 타락으로 탕진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중년에 이르렀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더 이상 할 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편안한 생활을 하며 매일 누워 살아갑니다. 그리고 먹는 일에 몰두하고 마시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니까 삶에 불균형이 오는 것입니다. 이 삶의 불균형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중년의 위기로 나타납니다. 중년의 때에 각종 질병이 몰려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삶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체중을 늘리게 하라, 허리띠 길이와 수명이 반비례하니까. 술을 많이 마시게 하라, 좋아도 마시게 하고 언짢아도 마시게 하라 그래야 간 기능이 떨어져 일찍 죽으니까. 일없이 편안하게 해 주라, 운동부족으로 수명이 단축되니까. 육식을 많이 하게 하라, 동맥경화나 성인병에 걸리니까. 음식을 짜게 만들어 주어라, 커피로 배를 채우게 하라 특히 자판기 커피를 부지런히 빼 주라. 담배를 계속 피우게 하라, 담배 한 개피 피우면 5분씩 생명이 단축된다고 하니까. 특히 타르나 니코틴이 우리 것 보다 배 이상되는 양담배를 사 주라.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게 하라, 연속극을 보게 하고 끝나면 곧 바로 비디오를 보게 해 주라. 휴가 없이 일하게 하라, 스트레스로 지레 죽도록. 바가지를 계속 긁어 신경을 곤두서게 하라. 이것이 불균형의 삶입니다. 균형이 깨지면 어느 날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균형이 깨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순간도 멈춤이 없었고 앉아있을 시간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 삶에 날마다 새로움이 있었고 의기충천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달려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주어진 일과 은사와 사명의 삶을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이루는 존재입니다.
일의 철학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일에 대한 철학이 발생합니다. 하나는 감사함입니다. 현재 주어진 일터에 대한 감사입니다. 건강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좋은 가정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일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발생됩니다. 오늘 사람들이 일터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모두 일 자리를 찾으려고 안달입니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톨스토이는 할 일이 없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분주할 때 싫도록 잠을 자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하루만 싫도록 잠을 자 보십시오. 잠도 정도껏 자야 합니다. 그 이상을 자면 리듬이 깨져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일할 때 보람을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오늘 내가 일하도록 일터를 주신 것이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푸념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아침 출근시간이 행복합니다. 흔히 월요병이라고 해서 월요일만 되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또 출근해야 하나, 지겹다,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있다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뜻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사도바울은 전도하다가 조금 방해가 오면 금방 자리를 접고 다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보냈다면 무슨 전도의 열매가 주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의 전도과정을 보면 방해쯤은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 방해 정도는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그의 앞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하는 일을 너무나 행복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매일 일터로 출근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한발 앞서 나서고 섬기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삶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어느 부목사님이 다 가기 싫어하는 신안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 교회로 임지를 맡아 갑니다. 모두 염려하는데 그는 고집스럽게 그곳을 선택하여 갔습니다. “해외 오지로 선교사로도 가는데” 그 마음으로 갔습니다. 정신이 좋습니다. 영적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생각이 건전하고 사명감이 분명합니다. 마음이 그런 상태이면 하는 일이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보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사역하는 교회는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겠습니까. 그것이 성공하는 삶이고 건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요즘 TV에 달인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가진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들이 수년 동안 외진 주방에서 연마하고 수고를 합니다. 남들은 밝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애를 쓰고 땀을 흘리는데 그 주방장들은 그런 화려한 생활에는 뜻이 없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재능을 보유하려는 것이 뜻이고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는 일에 행복이 있고 기쁨과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한 가지만 잘하는 일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음식 뭐 잘해요” 하고 물으면 “다 잘해요” 하고 대답한다면 그 말은 한 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이 한 말이 있습니다. 응시자에게 "하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노래 춤 연기도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불합격입니다. “다 잘하는데 셋 중 춤을 더 잘합니다”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며 일을 하면 미래는 절로 풀려나갑니다. 성공으로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일부러 성공해야지 한다고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한 가지 일에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일터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향상의 삶이고 발전의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 현재 일하는 일터에 대해서 불만족합니다. 그래서 자꾸 옮겨보려고 안달합니다. 그러니까 삶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직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족함, 행복함, 즐거움은 외부환경에 있는 것 아니고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먼저 뜻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농촌에서 목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농촌의 환경이 아주 열악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현실은 열악하고 고민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불만족해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역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니까 목회 현장에서 마음이 떠나고 사역이 제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농촌목회에서 떠나지 못해 안달하게 됩니다.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농촌 목회를 하려면 먼저 농촌 운동가가 되어야 합니다. 농촌에는 노인들만 있고 젊은이가 없고 비전이 없다고 투덜댈 것이 아니고 노인만 있으면 노인목회를 해야 합니다. 노인 목회는 모드가 간단합니다. 농촌의 노인들에게 년 간 3일 추석날, 설날, 생일날만 되면 고무신 한 켤레와 소고기 한 근을 들고 3년만 찾아가면 끝납니다. 모두 감동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감동이 없는 시대인데 상대가 감동을 받았다면 끝난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내 마음이 행복해야 그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내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섭리의식 그리고 소명의식이 내 마음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때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일을 수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때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며 살아가게 되면 그 일터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주어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들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일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나는 선교사다”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직장에서 나는 이 직장에 파송받은 선교사다라는 의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전도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물어보십시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감히 누구에게 전도하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야 직장인들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어버이 날 부모와 형제들을 앞에 놓고 효도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고향에서 목회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과거를 잘 아는 내 친척들이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내 부모와 형제들이 여기에 와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힘든 상대들입니까. 그들을 앞에 놓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어떻게 큰 소리로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목회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내 목회에 잡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없는 목회자들은 다른데서 신앙생활 잘 하는 형제들과 부모들과 친구들을 다 불러들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직장에서 주님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직장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전도를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으면 나는 왜 전도를 못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를 물어보십시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행복을 먹어야 살고 기쁨을 누려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행복은 내게 주어진 사명과 소명과 은사를 잘 발휘하고 이루며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소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났고 회심자가 일어났고 영접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삶이 가장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믿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행14:19-28 / 이윤재 목사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추석은 가족끼리 모여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이좋은 가족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한 가정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의 생일날 무엇을 선물할까 하다가 마침 공원묘지 싼 것이 있어서 그것을 선물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생일선물로 공원묘지 하나 분양받았다”. 아내가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아니 날 보고 빨리 죽으란 말이야?”. 남편은 매우 서운했습니다. 돈 들여서 샀는 데 아내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또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선물할 생각도 않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생일인데 선물 안 줘요?” 그러자 남편도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선물? 당신 작년에 선물한 것도 안쓰고 있잖아?”. 작년에 선물했던 것은 묘지였습니다. 부부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나이먹으면 별 차이가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부부만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써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나이가 40대가 되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50대가 되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60대는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진다. 70대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아진다. 80대는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90대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합시다. “있을 때 잘 합시다”.
그러나 나이가 얼마든 배웠던 안 배웠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죽어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믿음은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첫 번째 믿음은 영적인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생활속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마치 문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 27절 보실까요? 행14: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다같이 “믿음의 문”. 왜 성경은 믿음을 문으로 표현했을까요? 예루살렘은 문이 많은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현재 8개의 문이 있습니다. 남쪽에 2개, 서쪽에 2개, 북쪽에 3개, 동쪽에 1개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역사성이 있는 문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서쪽에 있는 욥바문을 지나 학교로 갔습니다(사진).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요 출구입니다. 문은 사이에 있습니다. 문은 사이에 있고 중간에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은 목적지가 아니고 통과지입니다. 누구나 문을 통해 들어가지만 문으로 가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문으로 들어갑니다. 최종 목적지는 문이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믿음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듯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갖기를 원합니까? 여러분도 믿음을 통해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는 주후 46년에서 48년, 사건은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할 때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터키 남부 안디옥에서 출발했습니다. 키푸로스 섬을 지나 지금의 터키 남쪽 버가에 상륙하여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를 들려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온 코스였습니다. 성경으로는 사도행전 13장, 14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3장에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출발했지만 미신과 우상숭배로 쪄든 키푸로스 섬에서 첫 번째 시련을 당합니다. 마술사 엘루마가 바울 일행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고 육지로 올라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도착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쫓겨납니다(사진2). 그런데 그 이고니온에서도 핍박합니다. 14장 5절입니다. 행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돌려드니”. 여러분, 바울의 고난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선교를 떠나는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하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선교하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왔는 데 거기까지 사람들이 와서 괴롭힙니다. 오늘 말씀 19절입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설령 종교가 달라 마음이 안 맞았다 해도 사람이 떠나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따라 쫓아 왔습니다. 요즘 원정 도박, 원종 출산 하는 데 원정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트라까지 17km,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42km가 됩니다.
지금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닙니다. 터키는 산이 높습니다. 그 높은 산을 넘어 수 십킬로를 바울을 쫓아 왔다면 그들을 얼마나 악심을 품은 것입니까? 바울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결과 바울이 과연 죽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이 죽었고” 했는 데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폭도들이 돌에 보니까 이미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죽은지 알고 밖에다 버렸습니다. 결국 바울이 일어났지만 바울은 이 정도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칠흙같은 고난의 때에 바울이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왜 바울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믿음을 말합니까?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겨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아무데서나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속에서 생깁니다. 우리 중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난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 “환란”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환란의 헬라어는 “들립시스”입니다. 이 말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 심적, 육체적 고통, 영적 고통,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환란”은 밖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을 통과해야 합니다. 환란을 통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불가항력적 고통이 오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을 절대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지 하나님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고난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는 방법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좋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고난당할 때입니다. 제가 제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믿음이 좋았던 때는 역시 고난당할 때입니다.
한번은 고3때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데 자취방에서 가스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뒤늦게 친구들이 송장을 메고 병원으로 갔는데 얼마 있다 제가 깨어났습니다. 내일 모레면 시험보는 데 시험도 못보고 병원에 누어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시험만 보면 일류대학에 붙는다고 할 때입니다. 사람의 미래가 사람 마음대로 됩니까? 마음대로 안 됩니다. 처음엔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의 폭풍이 지난 후 깨달았습니다. “아, 인생이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제가 하나님께 부름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좋은 말로 불러서는 안되는 고집센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저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한 문을 막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또 한 번 역시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교통사고로 입원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 사고를 당했으면 죽었어야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 낭떨어지 위에서 두 자동차가 충돌했습니다. 설날, 부모님 뵈러 고향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네 식구가 다 차에 탓었습니다. 사고 나기 10분전까지도 가족끼리 웃고 떠들었습니다. 누가 인생의 10분 후를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 제사지내고 밤새 못잤던 한 남자의 차가 골짜기 저 쪽에서 죽음의 질주를 하고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차를 보았지만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을 알고도 피하지 못합니다. 몰라서 못 피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못 피합니다. 평소에 운전 잘한다고 큰 소리 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몇 달을 있는 사이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때는 제가 목회할 때고 그나마 한참 잘 나갈 때입니다. 누가 막습니까? 누가 인생에 불쑥 찾아오는 환란을 막습니까? 못 막습니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어도 받기에 따라 유익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익입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유익입니다.
제가 작년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목사님 몇 분과 유대 광야를 횡단했습니다(사진). 사실 유다광야는 제가 오랫동안 횡단해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유다광야는 이스라엘 한 복판에 남북으로 90킬로, 동서로 20킬로 되는 작지 않은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적 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도 다윗도 예레미아도 아모스도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곳에서 훈련받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이 숨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샅샅이 뒤지지 시작했습니다. 엔게디. 하길라, 마온, 성경에는 다윗이 광야에서 겪었던 이야기가 15개 나옵니다. 삼상에서 삼하까지 다윗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피해서 숨었던 동굴 이야기만 네 번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죽을 뻔한 이야기도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그 중 1/3이 다윗이 광야에서 체험한 고난을 배경으로 쓴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오랫동안 광야에 두셨습니까? 다윗이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시편의 그 많은 고백은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안정되고 다윗은 편안해졌습니다. 그때 그 편안한 왕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다 안 좋은 사건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둘 다 다 다윗이 편안할 때 일어났습니다. 편안하면 다툽니다. 편안하면 범죄합니다. 그 중에서 밧세바 사건은 다윗을 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하면 망합니다. 편한 데도 하나님도 잘 섬길 수만 있다면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에 믿음의 다섯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 “신뢰”입니다. “여혼아를 신뢰하라”. “신뢰”는 “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어린아기가 엄마품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몸을 기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의지”입니다. “의지”는 지팡이나 보조기를 몸에 끼고 걷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두번째입니다. 신뢰와 의지는 갖되 갖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명철”입니다. 명철은 우리의 지적 능력입니다. 지식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4.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인정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지도”란 말은 “길을 곧게 한다”는 말입니다. “I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 “내가 지그 재그로 난 네 길을 반드시 펴주겠다“.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인생 광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계 3대 종교가 광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유대교는 모세를 통해 시내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는 세례요한, 예수님을 통해 유대광야에서 나왔습니다. 이슬람교는 모하멧을 통해 아라비아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는 고난을 의미하지만 거기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만 광야에 있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말씀 속에서 자라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박해당하고 돌에 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고난은 바울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 음성에 순종하게 됩니다. 14장 1-9절에 구원받은 앉은뱅이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자 “일어라 걸으라” 소리쳤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소리치자 일어났습니다. 9-10절입니다. 행14:9-10,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많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여기서 “들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들었다”는 말은 “듣다”의 미완료과거로서, 단지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잘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뜻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온 그가 이제 막 살 기회가 생겼는 데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살고 죽는 순간인데 대충 듣겠습니까? 집중해서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의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13장과 14장에서 자주 나온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입니다. 모두 15번 나옵니다. 13장에서 10번, 14장에서 5번 나옵니다. 바울은 다른 말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고 그 말씀이 들려올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래전 교회에 한 신자가 나왔습니다. 세상 일로 고난을 많이 당하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돈도 많이 벌고 학벌도 높은 여성이었습니다. 이 분이 하도 인생고가 많고 되는 일이 없으니까 누가 교회나 나가보라고 해서 자기 발로 교회 나왔습니다. 얼마동안은 잘 나왔습니다. 얼굴도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자 한 두 번 빠지더니 점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무 어려워 누가 교회나가보라고 해서 교회 나왔는데 나는 하나님이 금방 나에게 행복과 마음의 기쁨을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가도 그저 그렇고 마음의 기쁨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종교를 믿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모든 종교가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혹시 제가 성경을 펴고 말씀드려도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4장을 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어번 읽은 후에 물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머리가 좋은 그 분은 금새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시네요”. “그래요. 세 번 유혹받았죠. 한번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또 한번은 높은 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내가 받아주겠다. 마지막은 나에게 절해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네게 주겠다”. “이 모든 유혹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잘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지요. 돌이 금방 떡이 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금방 받아주고 절만 하면 천하의 모든 영광 금방주고. 마귀는 뿔달리고 삼지창들고 서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빨리 성공하는 길로 유혹하는 그 무엇이죠. 지금 성도님이 서 있는 자리는 인생 광야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있었죠. 누구나 광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있을 때 우리가 받는 유혹은 있죠. 그것은 제발 빨리 이 광야에서 자유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성도님이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앙의 세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어요, 마귀의 지름길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아요. 예수님이 마귀에게 했던 세 마디는 모두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복종했죠.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이르셨죠. 성도님은 교회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한 6개월이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마음에 담았나요?” 아니요.“ ”말씀을 모르니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니 믿음이 안 생긴 것이죠“.
그때부터 그 분이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좋아하는 조급증을 버리고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 분은 후에 권사님이 되었고 새가족 양육, 일대일양육등에 큰 힘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최고 유혹은 한번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망합니다. 쉬운 길, 지름길을 좋아하지 말고 정도로 가야 합니다. 정도는 이것입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고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나니”. 하나님의 아들도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복숭아, 사과나무도 3년은 자라야 열매맺고 중국산 대나무는 5년 되기 전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5년동안 쉬지 않고 거름주고 물주면 5년이 된 날, 갑자기 2주만에 15미터가 자랍니다. 믿음은 말씀속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본래 바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 어디를 가서도 전도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점점 자라고 ㅇ있었습니다. 믿음은 정체적인 것이 아니라 성장지향적인 것입니다. 엡4:13절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최고로 믿음이 자랄 때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믿음은 어떻게 자랐습니까? 사용함으로 자랐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랑도 사용하면 커지고 믿음도 사용하면 자랍니다. 천하의 바울이라도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고 안디옥에만 앉아 성경을 연구하고 있었다면 그는 좋은 믿음의 사람을 되었겠지만 위대한 순교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시인”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내가 수백개의 진리들을 알고 있어도 “그렇게 말할 때 까지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믿는대로 말하고, 둘째 말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표현되고 표현하면 그대로 됩니다. 사랑은 사랑한다 말하게 하고 사랑한다 말하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망설임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없슴의 표시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말하면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우연히 시편을 읽다가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아무에게나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아의 속량을 받은 자”. 속량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말해야 합니다. 말하면 좋은 것은 우선 자기 자신입니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 장애물을 뚫고 나오는 비결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말씀했습니다.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내가 아는 진리를 나만 알고 있으면 나만 살립니다. 한 불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나와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구원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예수믿고 구원받고 보니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다. 왜 예수믿는 사람은 자기 혼자 믿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 작년 영국 런던에 갔을 때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을 방문했습니다. 그 성당에서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입니다(사진). 이 그림은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을 그린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은 문밖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문은 여태껏 열린 적이 없습니다. 문앞에는 잡초가 자라고 손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있고 손에는 못이 박혀 있습니다. 옷은 제사장의 옷을 입었고 초를 들고 계십니다. 이 그림을 한참 바라보는 데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눈입니다. 그 눈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입니다. 이 발을 자세히 보면 방향이 돌려져 있습니다. 마치 지금 떠나려고 몸을 돌린 모습입니다.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오래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우리의 심령 앞에서 주님은 너무 오래 기다린 것 아닙니까? 문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교회 나와 몸만 앉아 있지 말고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믿음의 문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족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여러분 아파트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판교 영혼들의 믿음의 문을 열렸습니까? 이번 가을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번 새생명축제가 바로 그때입니다. 시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문들아, 열릴지어다.
사명자의 삶
사도행전 14:19-28 / 김경년 목사
여러분,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중에 1위는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 그녀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녀의 이런 영향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서 가난과 아픔 속에 자랐지마는 혼자 공부하면서 성경의 모세를 통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는 책에 보면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❶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❷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❹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생명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사명은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본문 19절 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을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여기 보면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招引)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페이산테스’라는 말로 무리를 설득하다, 충동질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처럼 그렇게 죽이려 했습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자 그들은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버렸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3~27)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다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베로 향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리빙스턴이 한번은 아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졸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나 보니까 몸에 발톱자국만 몇 개 나있고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왜 살고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사명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명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14:11-13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이 내용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동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입니다.
이때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큰 대접을 받고, 위대한 스타나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으면서 간신히 말렸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그 이유는 ❶ 사람이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요, ❷ 또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요, ❸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들의 잘못된 행동을 강력하게 저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2:21-2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광을 가로챈 헤롯 왕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회사에서 승진을 했거나, 병을 고침 받았거나, 사업에 성공을 했거나, 집을 구입했거나, 취직을 했거나,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았거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오직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이 잘 안되면 조상 탓을 하거나,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 시골에 어떤 교회에서 할머니 한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본인의 신앙고백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님, 목사님이 질문하시면 대답을 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요?”그러면 “예,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대답하세요. 그래서 세례를 받기 전에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요?” 그 때 할머니는 두 번도 생각지 않고 “예,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이렇게 대답을 해서 모든 교인들이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이 잘 안되면 내 탓인 줄 알고 더욱 성실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은 바울과 바나바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 했던 곳이요,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한 곳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고 싶을 것인데 두 사람은 다시 그곳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여기서 ‘권하고’라는 말은 파라칼룬테스인데 이 말은 격려한다, 세운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 친구들 간에, 성도 간에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어떤 교회에 화재가 나서 예배당이 불에 다 타버렸습니다. 경찰은 화재의 원인이 방화인지, 전기 누전인지 알기 위해서 교인들과 목사님을 상대로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수시로 찾아와서 목사님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교회가 불이 난데가가 조사까지 받으니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그 때 장로님 한분이 찾아와서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장로가 책임을 지는 곳이니 제발 목사님께 부담을 더 이상 드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모든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회를 다시 건축하고 날마다 아름답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로가 세워주고 격려하는데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없겠습니까?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루더루이안
정 우목사 / 행 14:19-21
요즈음 젊은이들이 쓰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조어를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1. “현영 주세요”합니다. 현영, 현금 영수증 달라는 것입니다.
2. “아아 주세요”합니다.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달라는 것입니다.
3. “저 친구는 갈비야”합니다. 갈비가 뭐예요? 갈비집 갈비가 아닙니다. ‘갈수록 비호감’이라는 뜻입니다.
4. “저 친구는 갑분띠야”라고 말합니다. 닭띠, 소띠, 하듯이 갑분띠가 있습니까? 그런 띠가 아닙니다. ‘갑자기 분위기 띠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몇 개 맞추셨어요? 다 맞추셨습니까? 저는 처음에 한 개도 못 맞췄습니다.
오늘은 ‘루더루이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루더루이안’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제 1차 선교여행을 합니다. 지나간 경로가 있었습니다. 그 경로의 첫 글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로의 첫 글자입니다. ‘루(루스드라), 더(더베), 루(루스드라), 이(이고니온), 안(안디옥)’
오늘 본문에는 열심 있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바울 입니다. 열심 있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죽이려는 사람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일행을 죽이려는 열심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 유대인들입니까? 이곳 루스드라에 있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소위 원정 온 유대인들입니다.
여러분, 바울을 죽이려는 데 있어서 이들의 열심을 보십시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 왔다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얼마나 떨어졌을까요? 한 4km 정도 떨어졌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23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대구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약 5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경기도 이천까지의 거리입니다. 고속도로가 없습니다. 말을 타고 온 것이 아닙니다. 걸어왔습니다.
얼마나 열심입니까? 바울을 죽이려고 그 먼 길을 걸어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도 그런 열심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갔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약 250km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보다 20km 더 먼 거리입니다. 바울은 더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은 율법 때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우리가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율법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히 진리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 말을 유대인들에게 적용한다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방향이다.’방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소용없습니다.
이런 책이 있습니다.『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네』하완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제목이 좀 그렇지요. 이 사람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소위 투 잡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족이 없었습니다. 행복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디를 향해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일까?’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가는 길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하던 모든 일도 그만 두었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방향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제는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둘째, 루스드라 사람들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그들이 바울을 돌로 쳐죽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무리와 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입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즉 헬라 사람들입니다. 루스드라의 본토인, 즉 헬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지난 주일날 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걷게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하고 온 신이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 있었을까요? 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유대인들이 충동질했다고 바울을 돌로 쳐 죽이니 말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루스드라에는 12 가지 신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12개의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마다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에는 그런 신들의 모양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에는 그런 신들로 인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설교를 합니다. ‘그런 신들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그러자 그 일에 종사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왜요? 자기들의 수입원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 아이 하나를 고쳐주었습니다. 귀신을 내쫓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고용했던 주인이 바울을 고소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왜 바울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수입원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그동안 귀신 들려 점을 쳤는데, 이제는 정신이 온전하니 점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돈 앞에도 장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돈 앞에 이렇게 쉽게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미국에 아마존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브랜드 가치로 세계 1위입니다. 창업주의 전 부인이 있습니다. 매킨지 스콧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 세계 인구 중 7억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86억불(9조 5천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다음 말이 더 감동이었습니다. “나는 내 금고가 텅 빌 때까지 나누겠습니다.”돈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 루스드라 헬라 사람들은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심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
첫째, 다시 일어나는 바울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바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상한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피가 낭자합니다. 사람들이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 생각햇습니다. 그래서 그를 성문 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아마 거죽대기로 둘둘 말아서 끌어 내쳤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새로 믿기로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 전할 때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20절 상반절에 보니, 이 사람들을‘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자들이 바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분 밖으로 갔습니다. 장례를 어떻게 치룰 것인가 의논하기 위해서 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모두들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20절 상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런데요, 그 순간, 바울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거죽대기에서 갑자기 일어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일어나’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아니스테미’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수동태의 단어입니다. 바울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바울을 일어서게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그를 일어나게 해주었을까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손잡아 주실 때마다 새롭게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입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실 때입니다. 마태복음 8장 15절입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입니다. 마가복음 5장 41-42절 상반절입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주님께서 손잡아 주신 사람들마다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도 일어났고, 베드로의 장모도 일어났고, 죽은 회당장의 딸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 죽었던 바울도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손잡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주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제인 마르크 제프스키라는 30세 미국 여성이‘아메리카 갓 탤런트 대회’에 나왔습니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 대회’는 미국 NBC 텔레비전 방송사가 주관하는데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초대형 콘테스트 쇼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 제인이라는 여성이 나왔습니다. 그녀는 자작곡인‘It is okay(괜찮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부르기 전 심사위원들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이 노래는 나의 마지막 해 노래일지도 모릅니다.’30세의 젊은 사람이 마지막 노래일지 모르겠다고 하니 심사위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암 3기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폐와 간 그리고 척수에 암세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놀란 심사위원들이“미안하다.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부를 노래 제목처럼 ‘It is okay(괜찮다)’고 몇 번이나 심사위원들을 진정시켰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절망적인 처지이지만 그녀가 부른 노래의 가사는 우울하지 않습니다. 절망적이지 않았습니다. ‘It is okay(괜찮다)’, ‘It is all right(좋다)’는 희망적인 가사로 가득찼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심사위원들이“노래 잘 불렀다, 그래 건강상태는 어떠냐?”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생존확률은 2%랍니다.” 깜짝 놀란 위원들에게 말합니다. “2%는 0%가 아닙니다. 2%는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그러자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이 사람의 손을 잡고 계신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제인이라는 사람을 검색해보았습니다. 그녀는 기독교대학을 나왔고,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시길 가도합니다.
여러분, 어렵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손도 잡아주셔서 일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살리려는 열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열병입니다. 그는 27번이나 열병에 걸려 생사의 길목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또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그를 돕는 원주민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병에 걸리면 그동안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리빙스턴이 말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가 죽은 후입니다. 누가 그의 성경책을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존귀하신 분의 약속의 말씀’그는 이 말씀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주님은 리빙스턴의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리빙스턴은 주님께서 자기의 손을 붙잡고 계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두 종류의 열심을 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잘못된 열심인 유대인들의 열심입니다. 둘째, 주님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열심입니다. 그런데 바울보다 더 열심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입니다. 사도 바울을 절대로 놓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그 열심이 오늘도 우리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이런 손길, 이런 사랑, 이런 은혜, 기억하심으로 승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의 열심
정 우목사 / 행 14:19-23
미국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수식어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농구의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농구를 너무너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농구의 황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를‘농구의 황제’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를 뭐라고 불렀을까요? ‘농구의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단한 찬사입니다. 미국 국민들에게 물었습니다. “미국 역사 상 최고의 선수는 누구입니까?”1위가 마이클 조던이요, 2위는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요, 3위는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어느 기자가 마이클 조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농구를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어릴 때부터입니다.” “어릴 때 하루 몇 시간씩 연습했습니까?”조던의 대답입니다. “시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시계를 본 적도 없습니다. 지칠 때까지 했으니까요. 아니면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연습했거든요.”
이 기자는 다음 날 신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농구의 신이 된 것은 그의 현란한 플레이와 기술, 체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에 있었다.”열심과 열정이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는 세 주 전에 유대인들의 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약 230km 떨어져 있습니다.(지도)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당시 무슨 고속도로가 있었겠습니까? 자동차를 탔겠습니까? 걸어서 왔습니다. 도보로 한 열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사도 바울의 열심은 이들보다 더 합니다. 어떤 점에서 열심이었는지 말씀 가운데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 전하는데 열심>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고 230km를 걸어서 루스드라에 왔습니다. 이들은 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에게 돌을 던지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판단하여 바울을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바울을 통한 선교 역사는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바울을 장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제자들이 바울을 장례하기 위해 성 밖으로 갔습니다. 바울 가까이에 갔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눈물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말을 아십니까? ‘죽인공은 죽지 않는다, 사명이 남아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주님은 바울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벌떡 일어납니다. 이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런데요, 이 장면이 감동을 줍니다. 우리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바울은 일어나자마자 형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루스드라로 들어갑니다. 머리가 온통 깨졌을 것입니다. 온몸은 피투성이였을 것입니다. 다리는 절뚝절뚝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갑니다. 루스드라가 어떤 곳입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다시 그곳에 갑니다. 그 몸으로 말입니다. 왜 다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이유는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장면이 더 감동을 줍니다. 20절 중반절입니다.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죽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는데 더베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을까요? 144km 떨어졌습니다.(지도) 144km면 우리 미암교회 이 자리에서 정확히 대전역까지의 거리입니다. Tmap에서 대전역을 쳐보십시오. 정확히 144km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뚝거리면서 더베까지 갔습니다. 뭘 타고 간 것이 아닙니다. 걸어서 갔습니다.
그런데 언제 갔을까요? 루스드라에서 충분히 쉬고, 치료 받은 후에 갔을까요? 아닙니다. 20절에‘이튿날’갔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도행전은 아마 100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더베로 간 날이, 죽다 살아난 바로 다음 날, 즉 이튿날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이튿날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 가는데 그 거리가 144km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한 몸이 아닙니다. 몸 여기저기가 다 아팠을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행을 했습니다. 왜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한 후에 그리고는 이제는 역순으로 왔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더베에서 루스드라로, 루스드라에서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말입니다.
바울의 열심과 열정을 보십시오. 그를 생각하니 저는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바울처럼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일에 정말 열심히 해야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면 주신 사명에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면의 열심>
조금 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바울은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돌을 던졌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울의 전도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바울이 돌에 맞고, 성 밖으로 내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낙심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계속 믿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권면하기 위해 루스드라에 갔던 것입니다.
우리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은 루스드라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이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다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소위 희랍 신화나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입니다. 그 신들이 자기들을 구원해 주고, 인도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 중에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믿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오, 그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새로운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믿음을 전해준 바울이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어야 할 것인가?’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이 믿음’, 즉 ‘이 새로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머물다’는 단어는‘뿌리를 깊이 내리다’는 뜻입니다.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비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러면 나무들은 어떻게 합니까?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쪽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뿌리를 더 깊이 내립니다. 그래서 비바람과 폭우를 견디어 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어려움이 오고, 환난이 온다할지라도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게 했고, 가게 문을 닫게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계속 믿고 살아야 할지, 회의감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감히 사도 바울처럼 말씀드립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계십시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도 겪어야 한다.
2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은 이들에게 고난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고난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겪어야 한다’는 말씀을 영어성경(NIV)에서 보면, ‘mus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must’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의 유익입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환난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환난을 면제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다 만사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를 순금같이 만드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많은 불순물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들을 잘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것들을 끄집어내게 하셔서 우리를 순금 같이 되게 하십니다.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귀한 사람들로 말입니다.
하나님 나리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도 겪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2,000년 전 바울이 루스드라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맡김의 열심>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루스드라를 비롯하여 그가 다시 방문하는 곳마다 전도했습니다. 장로들(지도자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모든 교인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이들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들도 오래 동안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작별하고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언제 다시 이곳들을 방문할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들을 떠나면서 걱정과 근심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장로들이 과연 교인들을 잘 지도할 수 있을까? 교인들은 새로운 믿음에 따라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까? 이들은 고난에 잘 견딜 수 있을까?’염려와 근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열심을 보십시오. 23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것도 맡깁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주님께 맡긴 사람은 더 이상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이상 물질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맡깁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사도 맡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 맡겨야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제가 언젠가 안식년 때 하와이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와이 코나에 갔는데, 코나는 세계 4대 커피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코나에 있는 열방대학에 갔습니다. 열방대학(예수전도단)을 설립한 분이 로렌 커닝햄 박사입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열방대학을 시작할 때입니다. 이분이 주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습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환상입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켜 열방에 선교사로 보내는 환상입니다. 그래서 그는 굉장히 큰 사업의 제안도 포기했습니다. 또한 자기 교단 본부로 가서 목사직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고속도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깨어보니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 앞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기어가서 보니 아내는 이미 호흡이 멎어 있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로렌, 이래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느냐?” 로렌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예,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목숨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조금 후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아내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 마침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아내는 여러 날 수술을 받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커닝햄 박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역사하셔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갔을 때는 교통사고가 난 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 그때도 사모님은 건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도 열심이었지만 바울 사도는 더 열심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요, 또한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도 겪어야 한다고 권면했기 때문이요, 그리고 염려와 근심이 가득한 형편 속에서도 그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바울의 열심 같은 이 열심으로 승리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소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
행 14장 19~28절 / 김명혁목사
오늘 아침 설교의 내용을 세 마디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세상 곳곳에 심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 박자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선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포 삼열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포 삼열 선교사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심어 놓으셨던 사람들인 길선주, 이기풍 한경직 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다음에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북쪽의 이방 땅을 바라보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가이사랴에 전하셨고,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의 피난민들과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복음을 안디옥에 전하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결국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북쪽으로 전해졌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복음이 안디옥으로부터 서쪽으로 즉 소 아시아로 전해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복음 전파의 주역은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그 조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과 눈과 손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곳곳에 심어 놓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복음이 어떻게 소 아시아에 전해졌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복음이 소아시아에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쌔”(행13:2-5). 소 아시아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세우시고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제나 봉사나 전도나 선교를 할 때 우리가 착하고 훌륭해서 우리가 원해서 하는 줄로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진행도 마무리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고 성령님께서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사도 바울의 고백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보내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수리아의 안디옥을 떠나 배를 타고 구브로 섬에 이르러 살라미와 바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쌔”(행13:2-5). 두 사람은 다시 성령의 보내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소 아시아의 안디옥에 이르러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가 곳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실제로 복음을 전한 분은 주님 자신이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소 아시아의 중심부에 있는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도 실제로 복음을 전한 분은 주님 자신이셨습니다. 그 내용이 행14:1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을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여기 한 절에 주어가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두 사도가’가 주어인데 다음에는 ‘주께서’가 주어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은 분명히 두 사도였는데, 그곳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은혜의 말씀을 전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셨다고 지적했습니다. 두 사도는 도구에 불과했다고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이것이 복음 전파의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두 사도가 말씀을 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은혜의 말씀을 전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을 더 합니다.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이어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에 가서 복음을 전한 다음 저들을 파송했던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친 것이었습니다. 두 사도가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한 모든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행14:27,28). 여기서 두 사도가 지적한 것은 소 아시아 선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일어난 일들이었다는 것이었고, 이방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믿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도가 선교사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저들을 보내신 분은 성령님이셨고, 두 사도가 말씀을 전했는데 실제로 말씀을 전하신 분은 주님이셨고, 두 사도가 수고를 많이 했는데 실제로 선교의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의 주역은 성령님과 예수님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두 사도들이 당한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소 아시아에 전파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행14:19). 복음이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전도자들의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소 아시아 선교는 두 사도들이 당한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두 사도들을 통해서 이적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선교 사역은 두 사도들의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행13:50).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핍박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5-7). 이고니온에서의 핍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14:19-21). 루스드라에서의 핍박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소 아시아 곳곳에서 전도하다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핍박해서 쫓겨난 일도 있었고, 돌로 치려고 해서 도망을 친 일도 있었고, 어떤 때는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적으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적을 수단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고난의 삶과 고난의 죽음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14:19-21).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쉬지도 않고 이튿날 더베로 달려가서 복음을 전한 이유는 자기가 하루라도 쉬면 그만큼 복음이 덜 전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상처 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더베 성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상처 투성이가 된 바울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핍박과 고난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으니”(고후1:8-9).
이기풍 목사님도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모래 사장에 쓸어져 있는 이기풍 목사를 해녀가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 가까이 하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다라 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복음화는 물론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기풍 목사와 윤함에 사모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 아시아의 복음화도 물론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 아시아의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렇게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복음 전파는 전도자들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로 이루어집니다.
셋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소 아시아에 받아드려 졌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소 아시아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고, 둘째로는 두 사도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로 이루어졌지만, 셋째로는 소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리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복음을 듣고 받아드릴 사람들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강변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받아드릴 사람들을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조축국씨, 조원자씨, 전영신씨, 사현자씨, 백명희씨, 김명숙씨, 김광자씨, 유홍숙씨, 한화룡씨, 조경애씨, 심옥초씨, 권중국씨, 채희병씨, 정소영씨, 박달안씨, 정정례씨, 최행덕씨, 백혜란씨, 이원배씨, 황규종씨, 신혜식씨 등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고 영생 얻을 자들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두 사도가 소 아시아 곳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을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의 문을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구브로 섬의 바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는 그 곳의 총독 서기오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행13:12). 두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비방과 방해가 많았지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14:1). 두 사도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는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는지라"(행14:8-10). 두 사도가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제자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14:20,21).
지금까지 소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이 전해졌고, 둘째로는 두 사도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고, 셋째로는 소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리므로 복음이 그곳에 받아드려 졌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을 전하실 때에도 주도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 마포 삼열 선교사 등의 핍박과 고난과 수고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이기풍이 던진 돌에 턱이 부서지는 고통도 당했습니다. 그러니 마포 삼열 선교사를 통해서 길선주 이기풍 한경직 등이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변에 복음을 전하시는 일도 주도하셨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흑암과 사망이 깃들고 있는 절망의 땅에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핍박과 고난과 수고를 아끼지 않을 전도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윤주홍 선교사는 아프간에 가서, 황인범 군은 캄보디아에 가서, 손영삼 선교사는 집시들에게 가서 고난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복음과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이 믿을 수도 구원 얻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셔서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일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핍박과 고난과 수고도 아끼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 이해하기
행 14장 19~28절 / 이정익목사
언젠가 단편을 묶어 펴낸 문학선 집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단편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체 사장이 젊고 유능하고 환경이 아주 좋고 부자였고 잘 생겼고 예쁜 아내와 딸을 두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삶의 조건을 보면 아주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어느 사원이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생각을 해 보니까 자신은 그중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비교해 보니까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고 빈약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젊은이가 사장 집을 점거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인질삼아 인질극을 벌입니다. 마침내 무장 경찰이 출동하여 대치하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동원되어 자수하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때 이 젊은이가 울부짖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왜 너는 혼자 세상에서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있냐, 그런데 나는 뭐냐, 나는 왜 그 많은 것 중에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냐? 이놈의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고 울부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기왕에 조건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 조건들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에 꼭 성공하고 잘되고 인간답게 살고 신앙의 삶을 살도록 보장한다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그런 조건들을 너무 선호하고 우상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 보다 더 큰 은혜와 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살아가는 길이고 또 인정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신뢰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셔서 지금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그것이 축복의 인생이고 그것이 성공의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능력 있고 유능하고 잘 생기고 좋은 환경의 사람들만 골라서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우리들은 모두 외면당한 인생들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수행한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모두 약점 투성이인 사람들만 골라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은 인간의 생각과 기준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은 이런 식입니다.
I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야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조건 환경 학벌 외모를 보고 다 살펴보고 마침내 완벽한 사람을 골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고르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을 주겠다, 그리고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약속이 푸짐하고 풍성합니까. 그랬으면 우선 젊고 건장한 남자를 골라야 하고 부인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여인을 골랐어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르신 사람이 나이 75세인 아브라함이었고 그 아내는 이미 단산한 여인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단산이 아니고 그 여인은 애초부터 불임여인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려면 매년 두세 쌍둥이를 낳아야 하는데 이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부를 선택해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과 너무나 다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위대한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모세를 생각할 때 우선 위대하고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출애굽 할 때 300만 명이 넘는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해서 가나안까지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지도력이 특출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모세는 결코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의 결정적인 하자가 말을 잘 못하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네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한사코 나는 할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말솜씨가 없었기 때문에 고집을 부렸던 것입니다. 애굽에 가서 바로와 중대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데 말솜씨가 없으니 무슨 협상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못가겠다고 버티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말솜씨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평할 때 앞에 나서서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가 말솜씨가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아론을 곁에 붙여주면서 굳이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시키시는데 왜 이런 사람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 잘하는 아론을 시키면 잘 할 텐데 하나님은 아론을 모세 곁에 두고 굳이 모세를 불러서 네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다른 점입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41명중 다윗이 가장 탁월한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다윗은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삼상 16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가서 이새의 아들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가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왕을 삼으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준수할까”하고 생각하며 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너는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는 중심을 보는 여호와니라“ 그 말은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주 보잘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새의 집에 도착해 보니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새의 첫 아들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살펴보니 모두 용모가 준수하고 다 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이 외에 또 없느냐 하고 물으니 말째 아들이 하나가 더 있는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아버지가 생각해도 다윗은 왕감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지 준수한 용모를 가진 많은 아들들 다 배제하고 가장 왜소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차이점입니다. 이정도면 하나님이 무엇을 추구하시고 무엇을 먼저 보시는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은 한결같이 키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학벌을 보고 환경을 보고 조건을 봅니다. 그래서 나중에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II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그것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좋은 예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 한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만큼 완벽했다는 말입니까. 그도 역시 하자 투성이의 사람입니다. 우선 고후 10:10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평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글을 읽으면 무게가 있는데 그를 직접 만나보면 약한 체구에 말은 어눌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바울도 언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우선 말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전도자로 사람을 고르시는데 말을 잘 못하는 사도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말을 잘 못한다고 위축되지 마십시오.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흉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말을 잘하는 것이 흉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이 너무 느리다고 흉을 봅니다. 충청도 사람이니 느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갈매기도 경기도 갈매기는 빠르고 날쌘데 충청도 갈매기는 충청도 사람 닮아서 느리다고 흉을 봅니다. 그래도 나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흉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바울도 말을 잘 못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큰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못했는가 하면 행전 20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드로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밤에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밤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창틀에 까지 걸터앉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없게 하는지 재미없는 설교가 또 한없이 깁니다. 그래서 재미없는 설교를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창틀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이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말을 못한다고 흉을 보니까 고후 11장6절에서 응수하기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거기다 생김새도 유별났습니다. “바울의 행적”이라는 책을 보면 사도바울의 생김새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작은 키에 대머리고 눈썹은 일자 눈썹에 시력이 좋지 않아 아주 두터운 돋보기안경을 썼다”고 했습니다. 외모는 볼품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도 길에서 이런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1차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그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바나바를 쓰스신이라고 불렀고 바울은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쓰스신은 신중의 신인 제우스신입니다. 바나바가 잘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제우스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울을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메신은 제우스신을 위해서 심부름 하는 신입니다. 거기다 바울은 몸에 병까지 있었고 심한 안질에 간질까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랑할 것이 없어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런 사도바울을 선택하여 사도로 삼으십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사도바울의 중심과 충성심과 그의 진실함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진실한 인간이었습니다. 참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건장하고 잘생긴 사람들 다 놓아두고 그런 약한 사도바울을 불러내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진실하고 충성스럽고 중심 있는 사람이었는가 하면 오늘 읽은 사도행전 14:19절 말씀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행 중 루스드라에 들러서 전도를 합니다. 그때 그곳에 바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 몰려와서 온갖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까딱도 하지 않고 전도하고 가르치니까 유대인들이 악에 바쳐서 마침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동구 밖에 내다 버리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 돌무더기 속에서 정신이 돌아온 사도바울은 그 돌무더기 헤치고 나와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14:20을 보면 성안에서 하루를 쉬고 그 이튿날 바울은 그 몸으로 더베로 떠납니다. 더베는 그곳에서 250리 길인데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그 길을 걸어서 갑니다. 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하루 더 쉰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 몸으로 떠나는 바울을 모두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저는 다리로 길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2천 km 나 되는 길을 걸어서 1차 전도여행을 마쳤고 또 3천 km 나 되는 길을 걸어서 2차 전도여행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순교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참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이 모습을 생각하면 참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일어나 또 전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마 바울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 오직 십자가, 오직 복음만 가득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온갖 약점이 있고 쇠약하고 왜소하고 말이 어눌한 사람인데도 그런 바울을 택해서 사용하신 것일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위인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사도바울처럼 행복하게 살아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갈등도 없고 할까 말까하는 주저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의 행복입니다. 오직 충성과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정말 행복한 신앙인은 이렇게 예수께 사로잡혀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말하자면 사도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붙잡혀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할까 말까하는 여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말 때에 가서 고백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 하고 만족스럽게 고백했습니다.
참 기쁨, 참 감격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나옵니다. 데이비스 핀크(David Fink)라는 의사가 “신경불안으로부터의 해방”(Release from nervous tension) 이라는 책에서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Four tranquility balance)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사람이 지극히 안정된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조건이 네 가지로 일, 놀이, 사랑, 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4가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벌 때, 취미를 가꿀 때, 음식을 먹을 때 모두 내 건강을 위해서 하자하고 목적을 두면 그것이 결국 나의 건강과 평화와 연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병이 나고 평화가 안 옵니다. 그때는 내 몸을 건강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하고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모두 나에게 두지 말고 높은 뜻과 높은 사명과 연결될 때 진정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만족하게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나 외모나 조건을 너무 따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자꾸만 속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과 충성심과 진실함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점 투성이인데도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고 바울을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인가. 나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고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일하는 사람
김 조목사 / 행 14:19-28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갑작스러운 일로 우리를 당혹하는 일도 많고 불안하게 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전 세계인의 이목이 한반도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9.11사태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국에 없으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 동네 이웃교회 목사님이 내일 은퇴예배 드리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취소하는 연유가 건강했던 장남이 피곤하여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병원에서 심장마비 되어 소천한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허탈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거룩한 사역을 다 이루기에 최선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나를 통해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염려, 근심, 주께 맡기시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어 드리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안디옥교회로 귀한하여 선교보고를 하는 장면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설립, 성장시킨 두 사도를 세워 선교사로 파송한 후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과 환란이 심하였으나 사명을 잘 감당하고 더베에서 돌아오기 시작하여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로 계획적인 방문으로 다시 믿는 자 모여진 교회에 “믿음을 굳게 하라”고 교육하고 일군을 세워 교회를 더욱 굳게 하고 안디옥 교회의 환대를 받으며 오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선교보고를 하는 두 사도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19-23, 27절)
교회 부흥의 필수요건은 선교와 교육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 13장 이하에서 파송 받은 두 사도가 많은 곳에서 선교하며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심지어 돌아 맞아 죽은 것 같은 때도 있었으나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했고 돌아오는 길에도 교회에 들려 믿음에 굳게 서라고 교육하며 오늘날 교역자와 같은 장로들 세워 교회를 다스리도록 교육적 사명을 감당했으니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게 했으며 특히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은 유대인이란 작은 눈을 전 세계를 보게 하는 것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남의 마음으로 기쁘시게 시원하게 해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25:13) 하셨습니다. 충성된 자란 진실한 사람이요,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요,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전파가 내 사명인 줄 알고 충성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많은 환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22, 23절)
“우리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는 말씀은 초대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주신 것으로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핍박과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 하려면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 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세상사에 적당하게 속고 속이며 살면 괜찮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니(갈5:24) 많은 어려움 있습니다. 그러기에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좁은 문을 찾는 이가 적다했습니다. 사단과 세상과 싸워야 하고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일에 수많은 고통과 환란이 있겠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힘과 능력주시며 앞서 가서 그 길을 평탄케 하시니 그 어떤 것에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 힘, 재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의 굴에서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건져내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전도 여행에 어려웠던 것을 고후 11:23-30에 매를 수 없이 맞고 돌로, 태장으로 파선함으로 여러 가지 위험 만났고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시고 “내가 부득불 자랑하리나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하셨습니다. 삼락교회의 영원한 표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118:6)는 말씀으로 엄청난 환란을 이겼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 하셨느니라”(요8:29)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모든 환란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환대와 위로와 쉼을 얻게 됩니다. (27, 28절)
하나님이 함께 하신 선교보고 한 후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하셨으니 이는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뜨거운 환영과 위로 받았음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렸을 때(행9:43) 고넬료 가정에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더 머물기를 요구 받은 것(10:48)과 같은 것으로 환대와 위로 받은 것이요, 또한 그 동안의 전도여행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재충전할 수 있는 휴식인 쉼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을 하는 사람이 마냥 어려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으나 때로는 예수님도 전도하고 돌아와 식사할 겨를이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잠깐 쉬어라”(막6:31) 하셨습니다. 일 많이 한 사람에게 앞으로 더 일할 힘을 얻으라고 일한 자에게 안식 주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겠다 하셨으니 하나님이 함께 일한 사람 분명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계21:4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 모든 눈물을 씻기시게.....라고 하셨으니 주를 위한 일에 더욱 용기가 나고 소망이 생겨나고 평안이 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최선 다해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과 쉼에 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두 사도들이 1차 전도여행에서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이라 하셨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 선교와 교육의 사명 잘 감당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할 것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 어떤 환란이 있어도 넉넉히 이겨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덧입으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을 하는 자 하나님이 외면 아니하시고 크게 환대 하시고 위로와 사랑 베푸시고 쉼을 주시니 소망 굳게 하여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승리자요, 복된 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돌에 맞고 다시 일어나 전하다
행 14장 19~28절 / 김영규목사
루스드라에서의 봉변
오늘도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두 가지 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기적입니다. 그 내용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
루스드라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16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서울서 대전 정도의 거리입니다. 당시는 고속도로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던 시절입니다. 반대자들은 이 먼 거리를 단숨에 쫓아 왔습니다. 말을 타거나 도보로 걸어서 상당히 여러 날 걸려서 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큰 반감을 품었는지, 혹은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 갈 태세였습니다. 바울도 한 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죽이려고 쫓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군중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좌우를 분별치 못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무리들의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절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과 모양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지 않아 돌변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요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 군중들의 여론이란 오뉴월 보리밥처럼 쉽게 변질됩니다. 단 며칠 사이로 좋아하다가 싫어하다가 합니다. 이런 여론을 믿고 정치를 한다면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만일 광야 시절의 모세가 여론을 따랐다면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리석은 군중들을 선동했습니다. 군중들은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바울을 죽인 사람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습니다. 죄의식도, 어떤 긍휼도, 책임감도 없었습니다. 요즘 그렇게 인권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북한 정권이 수많은 백성을 굶어 죽이는 데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행세하지만 또 다른 인권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당시와 똑 같은 일이 최근에도 벌어졌습니다.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말라티야’라는 터키의 중동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래 전부터 터키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독일 출신 틸만 선교사와 현지인 네자티와 우르가 무참히 칼에 찔리고 난자 당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는 당시 나이 46세로 세 자녀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네자티는 37세로 예수님을 영접한지 7년이 된 신실한 신자였고, 우르는 32세의 미혼으로 믿은 지 2년이 되는 신자였습니다. 다섯 명의 범인들은 19세 20세의 대학생들입니다. 이들은 이슬람과 터키를 지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처럼 위장하여 교회에 침투하여 얼마간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가 범행 당일 사무실에 침입하여 틸만 선교사님과 두 현지인을 붙잡아 결박했습니다. 그들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손가락을 칼로 자르면서 협박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알라 앞에 무릎을 꿇으라! 이를 거부하자 온 몸을 칼로 찔렀습니다. 입과 항문 코를 칼로 찢고 흘러나온 창자를 칼로 잘랐습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이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님은 156군데를 칼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네자티와 우르 역시 무수히 찔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이 전 지역에 보도된 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의 장례식에 당당히 참석하여 무언의 시위를 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님의 아내인 수잔나는 딸 미카엘(13), 미리암(8), 아들 루카스(11)와 함께 터키의 ATV에 나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범인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로 무엇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복음은 어디서나 환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반대가 무서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마귀에게 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가로막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주님은 자기 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냥 순탄하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가? 굳이 고난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복음은 오히려 확실하게 전파되고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10:16-18) 오늘 복음 때문에 반대에 직면해 있습니까? 반대 정도가 아니라 망신을 당하고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나요? 그렇다면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임을 아시고 소망을 가지세요. 왜냐하면 복음은 반대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력하게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일어난 바울
돌에 맞아 죽은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20상) 바울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다는 말(ajnivsthmi)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고, 죽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은 양자를 다 의미합니다. 바울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넘어진 자리, 버려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돌로 치던 자들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 밖에 내다버렸습니다.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은 바울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둘러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났다 해도 무수한 돌에 맞아 넘어졌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서 거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었었다면 더더욱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났습니다. 바울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라 주님이 일으키셨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에 들어가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복음의 일군이 맞아 죽도록 놔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일으키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고난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바울이 이 고난의 목록을 기록한 목적이 뭡니까? 내가 이렇게 많은 고생을 했었노라고 알리자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리려고 이 목록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났으며, 자신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이 엄청난 반대와 시련, 고통 중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겼습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안심하세요. 주님께서 신분보장을 확실하게 해 주십니다. 천하에 그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친히 나를 일군으로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뽑아 놓으시고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내가 지극히 힘든 상황에 빠지면 주님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나를 격려하십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주님은 내가 주님의 일을 마칠 때까지 시종 함께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10)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주 안에서 다시 일어나세요.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일어났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8:15)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9:6-7)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9:25)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눅8:54-5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눅6:8)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7:14-15)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불구에서 일어났습니다. 낙심 절망에서 일어났습니다. 관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무기력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의지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연한 기적으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심으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일으키실 의지와 뜻이 있으십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일어나세요. 모든 환난의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모든 사람들이 죽은 줄 아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세요. 주님이 일으키십니다. 일어나서 쌩쌩하게 다니세요. 복음을 위해서 용기 백배 하여 일어나세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전도는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복음 전도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복음 전도는 계속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20)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20-21상) 우리의 관심은 바울의 고난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이 얼마나 잘 전파되었는지 관심이 있으십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었으면 이제는 그만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다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뽑으실 때부터 그런 계획으로 뽑으셨습니다. 본래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습니다. 직선거리로 215km, 굽은 길로 가면 30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열심히 특심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그런 열심을 내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약 30여년 이상을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사랑하시는 것 이상으로 세상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일에 가장 아끼는 종이라도 죽게 하셨습니다.
보세요. 더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반대자들의 폭력이 더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돌에 맞고도 다시 일어난 바울을 또다시 돌에 맞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의 즐거움입니다. 많은 시간 반대자들에게 시달리며 복음을 전했지만, 때로는 평온한 중에 복음을 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할렐루야! 더베 전도의 소중한 열매가 또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이오와 데모데를 얻은 일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행 20:4) 돌팔매질을 두려워 않고 전도한 결과 더베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계속됩니다. 특히, 주님은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복음은 많은 곳에서 반대에 부딪칩니다. 전도자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돌에 맞아 죽고, 목베임을 당합니다. 오늘날에서 지구상 곳곳에서 복음 전파를 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예멘에서, 이라크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에서 북한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순교의 피를 통해서 주님은 영혼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과거에 이런 순교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도자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내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구원 받아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까? 반대를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은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불신 가정 속에 보내셨습니다. 불신 직장에 보내셨습니다. 불신 친구들 속에 이웃들 속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담대히 증거 하세요. 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까? 용기를 내세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반드시 열매를 주십니다. 기대하세요. 주변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천국 백성이 되는 날을 바라보세요. 주님은 오늘 내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참고 견디면서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축복의 열매들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보냄을 받은 자
행 14장 19~28절 / 최응희목사
오늘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녀관은 생물학적으로 혈통을 이어간다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믿음을 이어준다는데 있습니다. 자녀를 내가 낳았으니 내 자녀라는 소유의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내게 맡겨주셨다는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녀관입니다. 자녀를 내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내 계획에 맞추려고 하고, 심지어 내가 못다 한 한을 그로 통하여 풀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독립된 인격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고, 그의 바른 삶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 영혼을 믿음으로 세워주기 위해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언제나 하나님은 '그 일'--그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를 보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호켄 다이크'라는 학자가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벌써 오래된 책입니다만 당시에 아주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호켄다이크는 지금까지 교회는 '모이는 교회'였지만, 이제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이는 교회'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언제나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만듭니다. 믿음의 열심은 모이는 열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열심히 모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찬양하고, 모여서 힘을 얻습니다. 신앙의 훈련이란 우선 모이는 훈련입니다. 좋은 믿음, 열심있는 믿음은 성도들이 모이는 그곳에 내가 있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성도들이 있는 곳에 항상 여러분이 있었습니까? 믿음의 힘은 열심히 모이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런데 '흩어지는 교회'무엇입니까? 흩어지는 교회란 열심히 모인 성도들이 사명을 가지고 세상가운데로 흩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히 모여서 믿음의 불을 붙였으면 그 믿음의 힘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로 파송을 받아 나아가야 합니다. 흩어지는 교회란 사명을 가지고 삶의 현장, 생활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명이 없이 흩어지는 성도들은 열심히 모였다해도 아무 능력이 없는 무심한 무리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흩어지는 교회'는 사명을 가지고 흩어지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명은 무언가 주어진 일감을 가지고 보냄을 받아 가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은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σ)'-- 사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입니다. 가정으로, 직장으로, 세상으로, 지금 이곳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사도는 바로 그런 믿음으로 생명을 던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열성분자들에 의해서 돌을 맞고 기절하여서 사람들이 성밖으로 내쳐버리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내쳐버렸지만,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고통과 모욕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가 그 일을 하라고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 바울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도의 정신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무엇을 하라고 세상으로 보내십니까?
1. 그 일(직업)을 하라고 보내십니다.
교회개혁(종교개혁)의 세가지 구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둘째는 오직 성경으로만, 셋째는 오직 은총으로만, 입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만인사제직입니다. 당시에는 성직자와 일반 신도가 엄격히 구분되었습니다. 성직은 거룩하고 일반 세상의 직장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인사제직 이후 누구나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존재라는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세상일도 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는 것이 만인사제직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의 일들도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라고 나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일을 하는 것은 그 일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야채장사를 하는 사람이면 바로 그 야채가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고치는 사람이면,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내 돈벌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냄을 받은 사람의 태도요 마음입니다. 나는 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을 바로 그렇게 내 지능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고 헌신하게 하고자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그것이 사명의 마음이요, 보냄을 받은 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라고 나를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2. 복음 전하라고 보내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꼭 예수 믿으라고 목소리를 높여야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는 곳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직장에서 내가 사명을 가지고 성실하게 잘 감당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직접전도--직접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전도방법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확신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선행전도--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협력하는 일, 그런 일들도 전도하는 일입니다. 직접 예수 믿으라고 말은 안했지만, 나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3) 물질전도--내가 직접 어떤 일을 할 수 없지만, 전도하는 일을 위해서 물질적으로 협력할 때, 이 또한 전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빠서 직접 참여하지 못해도 전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물질을 공급하는 일, 국내나 국외에서 복음 전하는 사업을 위해 헌금하는 일, 더 나아가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 이 모든 것들도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어렸을 때 조그만 수술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병원을 갔습니다. 개인병원 수술실에서 그 의사는 소리내어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게 주신 기술로 수술하지만 고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수술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의사를 보고 깜짝 놀라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5-6살 쯤 되는 아이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쪽지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받아보니 전도지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 의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그것이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내게 주신 직업이나 직장, 가정, 자녀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요, 그 일을 하라고 그곳에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언제 어디서나 복음전하는 자의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흩어지는 교회가 되라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모두 사도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흩어져 '보냄을 받은 자'로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참 교사를 찾습니다
행 14장 19~28절 / 오정호목사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일학교(主日學校/Sunday School) 모든 교사들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랑하면서 사랑 받고, 감동을 끼치면서 감동을 받는 교회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한국교회의 가슴 아픈 현상 중에 하나가 교사를 일종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3D업종”으로 보고 그 직분을 기피하는 경향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먼저 공급받아 우리 아이들의 영혼과 미래를 마음에 꿈꾸면서 섬기는 교사야말로 주님 앞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이런 면에서 교사의 직분은 어떤 직분보다도 믿음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참 교사는 누구인지에 대해 몇 가지 삶의 원리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참 교사는 자신을 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19~20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고난을 증거 할 때 이들은 바울을 무척 핍박했습니다. 안디옥, 이고니온이란 도시에서까지 좇아와서 여러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향해 돌질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담대하게’ 전도했습니다. 복음의 소중함을 알뿐 아니라 복음을 외치는데 따르는 위험도 능히 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멸시와 하대(下待)를 당하고 돌멩이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죽은 줄 알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바울은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고 다시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흔적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에 교회와 교사들이 치러야 될 희생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참된 교사의 정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교사는 말로만 일하지 않고 삶으로 값을 치릅니다. 먼저 자기를 가르치는 데에 철저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복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의 삶으로 먼저 이 복음을 검증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위력이 있으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자신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남들도 복음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모든 교사들과 성도들은 먼저 주님의 복음으로 자신을 잘 가르치는 영적인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학의 명제중 두드러진 명제는 “배우기를 중단하면 가르치기를 중단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침에 있어 자신을 먼저 진리로 가르친 참스승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여전히 자신을 잘 가르치는 교사가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둘째, 참 교사는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는 열정 있는 사람입니다(21~23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오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1절).
바울은 복음을 계속 전하면서 그 속에서 복음 전도자의 삶을 끊임없이 살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의미를 좀더 확대해석하면 사람을 세우는 것(Raising the people)입니다.
참 교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또한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은사의 재능을 전부 드려서 인내하며 다른 사람을 세워야 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교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절). 예수 믿으면 세상적으로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편식(偏食)시키는 것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면목(眞面目)과 정체성(正體性)을 강조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면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필히 고난과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 해줄 정도로 복음의 정체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복음의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복음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세우려다가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립보서 1:29). 우리가 은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어려움 당하는 것도 역시 주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가르치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 참 교사는 동료 교사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사도행전 13:1).
교사들 사이에서 팀웍(teamwork)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려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팀웍을 이루고 함께 복음과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기뻐하는 영적인 가족의식이 있는 사람이 그가 속해있는 가정과 직장을 변화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 선교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교사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동료교사들과 더불어 너무나 아름답게 팀웍을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복음전도자로서도 복음의 동역자들과 훌륭한 팀웍을 이루었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표지(標識) 중 하나는 서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교사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립보서 2:29). ‘영접한다’와 ‘존귀히 여긴다’는 단어는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교사는 서로 서로 존중하고 영접해야 됩니다. 여러분! 먼저 교회에서 여러분의 인격과 신앙 그리고 맡은 직분에서 인정받으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회에서도 존중받으며 살 것입니다.
넷째, 참 교사는 성령과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27~28절)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7~28절).
주일학교 교사는 상식과 지식만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육은 인격적인 성령님이 개입하셔야 가능합니다. 상식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상식적인 사람이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가르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시대는 성령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쓰시는 사람은 성령님의 음성을 말씀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사도행전 13:2~3, 참고: 16:6).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그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의 탁월한 지식과 경험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랐습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상식에 머무는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삶의 증거와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사도 바울은 소명감이 분명하고 능력 있는 교사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참 교사’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사도 바울이 참 교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한마디로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사’였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교사는 예수님을 닮은 교사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가슴깊이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높이는 교사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맡은 일꾼으로서 먼저 주님의 복음으로 자신을 잘 가르치는 영적인 성공자가 됩시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기쁘게 감내(堪耐)하면서 복음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다른 사람을 세워나갑시다.
동료교사들끼리 서로 존중하고 기뻐하면서 멋진 팀웍을 이루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욱더 주님을 닮아 가는 ‘참 교사’가 됩시다. 우리교회 주일학교 현장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만남의 현장이 되게 합시다.
우리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어 쓰임 받는 교사와 부모로 섭시다.
유아부에서 고등부까지의 409명의 교사들과 대학 청년부의 성경공부 인도자, 그리고 희망부의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이들을 위한 기도후원자가 됩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려면
행 14장 19~28절 / 신성종목사
저는 세례 문답을 할 때 꼭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라고 답변을 합니다. 여러분 너무 유치한 질문 같습니다만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건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죽음에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요 방향이요 비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지난 일년 동안 살아온 방향은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네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살아왔거나 둘째는 하나님 나라를 등지고 살아왔거나, 셋째로 하나님 나라 주변에서 빙빙 돌면서 살아왔거나 넷째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과연 나는 금년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왔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등지고 살아왔는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에서만 빙빙 맴돌면서 살아왔는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아왔는가?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하나인가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설교를 들으시면 본인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잠깐 있다가 가야하는 여관이요 우리 인간은 이 여관에 머물다가 가야 하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 어디로 인가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천국에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환난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예외 없이 다 환난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맹수가 있고, 물이 없어 갈증이 있고, 독초가 도처에 있고, 길이 없어 험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1.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첫째로 22절에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내가 죄가 없는데 왜 환난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환난은 죄 때문에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의롭게 살려는 사람에게,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환난이 더 많이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이 옵니까?
먼저 [경제적 환난]이 다가옵니다. 주일 성수 하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일을 성수 하려면 수입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경제적 환난이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건강의 환난]도 옵니다. 정치적인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신앙적 환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우상숭배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세속화의 조류 속에서 타협과의 싸움이 심각합니다. 또 인종차별에서 오는 환난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2. 왜 우리는 환난을 겪어야 하는가?
환난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오는 것도 없지 않지만 우리의 [자고 함을 막기 위해서] 올 때가 있습니다. 고후 12장 7절에 보면 바울의 체험적 고백이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환난이 올 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11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우리를 훈련 즉 [연단을 시키기 위해서] 환난이 올 때도 있습니다. 롬 5장 3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저는 별명이 잡초입니다. 너무도 많은 환난 속에서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그 구체적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세 가지의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신명기 8장 2절, 구약 274페이지를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1) 너를 낮추시며, (2) 너를 시험하사, (3)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1) 환난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너를 낮추시며”, 즉 겸손훈련(요셉, 모세, 등)을 위해서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겸손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그러나 겸손 훈련이 덜 되어서 결국 왕의 직분을 다윗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모세가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겸손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어려서는 배가 고파서 고난을 당했고, 그 후에는 고학을 하면서 공부한다고 고생을 했고,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교수로 있으니까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고난을 주셨습니다. 겸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보석을 담는 상자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새 해에는 더욱 겸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다음은 “너를 시험하사”, 즉 신앙의 시험 때문에 환난이 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60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지만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 통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앙도 없었고, 깨끗하지도 않았고, 인내심도 없었고, 게다가 항상 원망하고 불평만 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들에게 시험을 엄격하게 보아서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듭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시험하십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시험하듯이 우리들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사탄이 하는 시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탄은 우리들을 멸망시키려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축복하려고 시험하십니다. 그리고는 합격한 후에는 자격증을 수요하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3) 끝으로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순종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에게도 그랬습니다. 선악과는 바로 순종여부를 측정하는 판단의 저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순종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순종여부를 알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다가 왔을 때에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마시고, 감사하면서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3. 환난을 이기는 비결은?
(1) 22절의 말씀대로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해야]”합니다.
이 세상에 믿음 이상의 승리의 비결은 없습니다. 믿음에 거하려면 마음을 약하게 가지면 안 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마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모든 환난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2) 다음은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서로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23절에 보니까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장로의 선택을 통해서 환난을 극복했습니다. 성도의 교제나 교회의 조직은 바로 이런 협력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로들을 세웁니다. 왜 세웁니까? 그들이 자격이 충분해서가 아닙니다. 자격은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3) 다음은 23절에 “금식기도 하며”라고 했습니다.
금식은 겸손훈련으로서 가장 적합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금식이 최고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 6절에 보면 금식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4) 끝으로 23절 하반절의 말씀대로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라고 했습니다.
“은행에 예치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3절에 보면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 아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마침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4. 이렇게 할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의 축복이 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의 제목이요 내용이었고, 마지막 설교도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비유의 내용도 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면 가장 큰 동상이 있습니다. 가가린 동상입니다. 그는 하늘 어디에 가도 신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다고 했을 때, 그 나라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보람이 있고, 풍성함이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좀더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구절이 심령의 천국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원문에 보면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들 중에](among you)라는 말로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서 밑으로 수직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이고, 셋째는 그들이 사는 영토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영토 적으로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차원적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차원의 세계인 천국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서간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곳을 바울은 [삼층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 지상을 포함하여 확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다 타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서 천국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월평 동산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다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어 그 안에서 살기를 축원합니다.
(2) 다음은 27절에 보니까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문이 열립니다. 믿습니까? 문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 문중에는 좋은 문도 있지만 들어가지 말아야 할 문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회의 문(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 계 3:8)
하늘의 문(말 3:10)
음부의 문(욥 17:16), 사망의 문(시 9:13), 멸망의 문(마 7:13)
소망의 문(호 2:15), 의의 문(시 118:19), 생명의 문(마 7:14)
천국의 문(계 21:12)등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월평동산교회의 성도들에게는 2003년에는 기회의 문과 하늘의 문과 기도의 문과 성공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맺는 말
우리의 삶은 초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은 절대로 안 주십니다. 또 환난을 당할 즈음에는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십니다.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격려하고 구역 식구들끼리 서로 도와줍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로의 귀환
행 14장 19~28절 / 서금석목사
옛날 중국 어떤 왕이 저녁에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왕후도 같이 참석하여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방안에 켰던 촛불이 다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틈에 한 신하가 왕후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왕후는 놀라서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지르고 그 사람의 갓끈을 쥐어 뜯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목을 잡은 고약한 놈의 갓끈을 내가 잡아 뜯었으니 갓끈 떨어진 놈이 내 손목을 잡은 놈이다" 이때 왕이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불은 조금 있다가 켜라.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갓끈을 떼라" 이 말에 모든 신하들은 다 갓끈을 떼었습니다. 왕후의 손목을 잡았던 신하는 왕의 관대한 마음에 감동하여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는데도 좀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내 상식에 맞지 않은 이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지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어떨까요? 100%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볼까요? 아니겠지요? 시각을 바꾸었으면 좋겠어요. "교회는 병원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요 너나 할 것없이 부족한 것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내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때마다 피하려 하거나, 욕하려 하지 말고 '저 사람에게 정말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교회에 왔구나' 생각하며 더 따뜻하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그리하면 주님게서 여러분에게 더큰 기쁨과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책망이나 외면이나 미움보다는 더 큰 관심과 은혜속에 모두가 성숙해 지는 교회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화에 나왔던 왕처럼 신하의 잘못을 덮어줄 줄 아는 여유를 가져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19절을 봅니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엿던 사람을 고쳤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하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겨우 말렸더니 그후에 드디어 또 일이 터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괴롭히고 핍박했던 유대인 박해자들이 뒤따라 왔습니다. 거리가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군중들을 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쳤습니다. 전도도 열렬하지만 박해도 대단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죽은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냈습니다.
1. 바울에게서 보는 놀랄만한 세가지
"20제자들이 둘러섰을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1) 돌맞고 실신했다가 깨어나서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돌로친 사람들이 죽은줄 알았다고 햇으니 아마도 실신햇던 모양입니다. 실신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돌로 친 사람들. 보통 아니지요. 상상해 보세요. 사람을 죽을때까지 돌로 친다는 것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독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죽은줄 알고 둘러서서 슬픔과 걱정에 싸여 있었는데, 그 순간 바울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바울을 돌로 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유히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돌로친 유대인들도 보통이 아니지만 일어나서 다시 성으로 들어간 바울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여 줍니까? 박해가 전도를 막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생명의 도를 막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전도는 이미 목숨을 건 전도였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람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2)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다시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죽을 정도로 돌에 맞았으니 그 몸이 온전했겠어요? 상처도 났을 것입니다. 멍든 곳도 있을 것입니다. 붓기도 했을 것입니다. 몸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어디 산좋고 물좋은 곳에 가서 몸이 회복될때까지 조용히 쉬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더베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목회자이고 평신도이고 때때로 주님의 일, 사역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빈다. 밤낮쉬지 않고 일해도 별 열매가 없을 때, 얼마나 어깨에서 힘이 빠집니까? 그래서 주저앉고, 쉴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죽도록 돌에 맞고도 다음날에는 다시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납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머리가 숙여지는 일 아닙니까?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 하다가 이런 저런 시련에 부딛칠때마다 그냥 주저 앉기 보다는 오늘 바울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시한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3) 핍박받던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의 종점은 더베였습니다. 더베를 |끝으로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가는데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거쳐서 귀로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모두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대단한 핍박을 받았었습니다. 자신을 돌로 쳤거나 치려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그곳에 갔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이 있던 곳이나 물건은 다시 가거나 보기도 싫지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군대 다녀온 사람들 제대하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쪽보고서는 소변도 안 보겠다" 생각만 해도 싫다 이겁니다. 배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지겹도록 먹던 옥수수 - 보기만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생명의 위협을 받던 그곳을 다시 갔습니다. 대단하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2. 바울의 선교전략, 갈때-전도, 올때-양육
바울이 왜 생각하기도 싫어할 정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곳을 다시 거쳐서 안디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실제로 길리기아 다소를 거쳐가면 훨씬 가깝기도 했고 길리기아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었으니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확고한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갈때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고, 귀로에는 다시 일일이 만나서 확인하고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22절 23절 보시겠습니다.
"22제자들이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구체적으로 양육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권면을 했습니까?
(1) 마음을 굳게 하라
바울은 먼저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믿게 되긴 했지만 그러나 결코 편하게 믿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대를 이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을 향하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뭐라고 권면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닐터인데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할 터인즉 너는 굳세고 용감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바울은 지금 개종자들에게 권면하고 잇는데, 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동과 확신에 차서 개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감동은 식어지고 의심도 생기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가?' 거기다가 주변에서 개종자들에 대해 한두마디 하면 혼란까지 옵니다. '믿어도 하나를 믿어야지,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랬는데' 이러면 마음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고나서는 한동안 세심하게 돌보며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먼저 믿은 사람이 도와 주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꼭 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양육의 첫단계입니다.
여러분. 처음 믿다 보면 의심도 많이 생기고 조그만 일에도 흔들리기가 쉽다는 사실을 아시고 처음 믿는 사람들을 꼭 붙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2) 믿음에 거하라
바울은 믿음에 거하도록 권했습니다. 흔히 신앙생활하다보면 혼란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몰라서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 같지만 온전한 얘기는 못됩니다. 제대로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믿음을 도와 줄수는 있어도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구원은 아는 지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2:6-7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6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 들였으니 그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여러분은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골로새서2:6-7은 제자양육의 근거로 삼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에 예수 안에서 살아라. 예수 안에 뿌리를 내려라. 가르침 받는대로 살아라는 얘기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뿌리가 깊게 내려야 줄기가 바로 설 수 있지 않습니까? 혼자 설 수 있도록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양육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중요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연륜도 무척 중요합니다. 지난 부흥회의 주제는 「믿음의 가문을 세우라」였습니다. 대를 이어 예수 믿는 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2대 3대 4대 5대 대를 이어 예수 믿는 것, 가문에서 목회자가 나오고 장로님이 나오는 것 영광된 일입니다. 본인들도, 자녀들도 영광스럽게 알아야 합니다. 바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굳게 내려 흔들리지 않고 예수 안에서 가르침 받은 대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복된 믿음생활 아니겠습니까?
(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본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한 것도 모자라서 루스드라까지 돌을 들고 쫒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울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뒤에서 옷을 지키며 사주했었고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 200km나 떨어진 곳까지 극성스럽게 쫓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되었습니까? 이제는 자기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핍박하면 됐지 루스드라까지 쫓아와?'하고 말할 처지자 못되는 것 아닙니까?
바울 자신도 참 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바울은 자기가 겪었던 고난을 설명합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破船)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꿂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육체적인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12:7을 보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집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육체의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만 받았을뿐 질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평생 병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9:27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내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바울은 다른 사람은 구원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실존적 위기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목회자와 전도자가 가질 수 있는 내적인 고민이 아닙니까?
이런 환난을 체험했고 또 체험하고 있는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왜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아니 바울이 왜 환난을 당하며 묵묵히 견디어 냈습니까?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바다에도 빠졌습니다. 강도도 당했습니다. 굶기도 했습니다. 병에도 걸렸습니다. 바울의 신앙생활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견디면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견디어 냈습니까? 비결이 무엇입니까?
로마서8:18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현재 고난이 대단해도 참을 수 있다. 왜? 영광이 비교할 수 없도록 크기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은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는 조화와 같습니다.
대부분 예수 믿게 되면 만사형통의 복만 가르칩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과 영광도 있지만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고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은 한마디로 강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즈음 수술하고 낳은 아기와 자연분만을 통해 낳은 아기의 차이에 대해 얘기합니다. 자연분만을 통해 낳은 아기가 더 참을성이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태어날 때 고생해본 아기가 세상 어려움을 참는 인내력이 더 강하다는 것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환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을 통해 강하게 되고 환난을 겪으면서 자기 부정을 통해 겸손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환난을 없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이기게 해 주는 힘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양육하고 영적 지도자를 택하여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장로들은 누구에게 부탁했습니까? "믿는 바 주께 부탁하고" 세상 책임져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주님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잡아 주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3. 바울의 귀환보고
24절에서 26절까지 보면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 드디어 출발했던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27-28절은 간략한 선교보고입니다.
"27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1)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는 상상해 보면 대단한 무용담이 될 것도 같습니다. 가는곳마다 복음을 전할 때 대단한 역사도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가는곳마다 무지한 박해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잘 볼보았습니다. 1년이 넘는 동안 5천리 전도여행에서 한일도 많건만은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또하나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 안디옥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모아놓고 선교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파송해 주고 기도해 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하는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병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도 많이 생기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간증듣지요?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는 입이나 듣는 귀는 언제나 은혜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2)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유대인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음을 보고했습니다. 기독교가 이제는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확실하게 뻗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적인 보고입니다.
(3)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도 같이 믿는 사람이 있어야 힘이 나는 법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었다고 했습니다. 짐작키는 성도들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음식도 나누고 선교경험도 나누고 그리했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경험은 대단히 귀한 경험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선교사들이 있지요? 선교사들이 귀국하면 초대도 하시고, 음식접대도 하시고,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선교보고를 잘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제목도 생기고, 선교사들이 얼마나 신이나고 힘이 되겠습니까?
<정 리>
성도 여러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마무리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 힘써 뿌리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 환난이 오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 환난이 오히려 홀로서서 견딜 수 있는 강한 능력이 되기도 합니다.
·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렇게 열매가 열렸다.
복음의 씨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많이 뿌리고 참고 견뎌 좋은 결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끝마무리 잘하는 신앙인
행 14장 19~28절 / 김필곤목사
옛날에 짚신을 삼아 장터에 나가 파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답니다. 장터에 나란히 앉아 전을 벌이고 파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것은 쉽게 팔리는데 아들의 것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비교해 볼 때 아무리 봐도 기술에 차이가 없는데 어째서 자기 것이 팔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임종 때 아들이 애원하며 물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제발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아버지가 숨이 넘어가면서 해 준 말은 “털”한 마디였다고 합니다. 아들이 짚신을 다시 꼼꼼히 비교해 보니 아버지 것은 부푸러기가 잘 다듬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비법은 끝마무리였다고 합니다. 상품가치는 끝마무리에 있다고 합니다. 끝마무리는 1%의 수고가 들어가지만 100%의 효과가 난다는 것입니다. 상품 뿐 아니라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대인 관계도 그렇습니다. 끝마무리가 좋아야 합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지막 마무리를 잘 못하면 사람들은 그 잘못한 것만 기억하고 그 직장은 추억의 직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끝마무리를 잘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사역을 끝마무리하는 장면입니다. 이제까지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살라미, 바보, 앗달리아, 버가, 비디시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까지 갔다 다시 돌아서 이고니온, 비디디아 안디옥, 버가, 앗달리아,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 와 선교 보고를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직장을 마무리하고 다른 직장을 가는 것처럼, 한 학교를 마무리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처럼, 인생을 마무리하고 천국에 가는 것처럼 한 차례의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모든 일에 있어서 끝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교훈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끝마무리를 잘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마지막까지 변화는 하지만 변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끝이 안 좋은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변절입니다. 배반입니다. 초심을 잃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절됩니다. 위기가 오면 변절됩니다.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변절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끝마무리를 잘 하려면 신앙의 변절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절개와 지조를 명예에 팔아 먹고 돈에 팔아먹고 쾌락에 팔아 먹고, 권력에 팔아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추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변화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살펴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고 합니다." 굳게 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무엇인가에 부가적인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뿌리를 깊게 하기 위해,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믿음 안에 거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은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고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 때는 주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승리를 약속하더니 갈 때는 핍박을 말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변절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입니다. 사람은 같아도 상황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복음을 선포했지만 이제는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장로를 세워 위탁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전술과 전략은 얼마든지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부한 자에게는 부한 자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왜요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변절은 예고하고 다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이유를 가지고 자신도 모르게 변절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테가 쓴 '고셰 신부의 불로 장생주'란 꽁트가 있습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재정이 바닥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뾰쪽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깨어져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로 딱따기를 쳐서 기도시간을 알리곤 했습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가난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수도원의 재정상태를 늘 가슴아프게 생각 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하에,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 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가 빚은 불로 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리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뾰쪽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습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님의 서품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매일 그 술을 시음해보다가,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을 하는 고셰 수사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면서 거기에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조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 왔을 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 원장이나 수도사처럼 변절되어서도 안되고 고셰 수사처럼 변절되어 서도 안됩니다. 사명을 잃어 버린 변절자, 신앙을 잃어 버린 변절자, 목적을 잃어 버린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변화를 멈추어서도 아니됩니다. 변화를 멈추는 순간 성숙과 성장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2. 후퇴는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 중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악감을 품은 자들이 돌로 쳐죽이려고 하자 도망 나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앉은 뱅이를 일으키자 그들 바울과 바나바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군중들은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버렸습니다. 그러나 살았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 성에 들어갔다가 이튼 날 바로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피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이면 전술입니다. 후퇴하는 것이 반드시 포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시 그 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죽음으로 인생을 마칠 것을 원하였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더베에서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많은 제자를 삼았습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는 아닙니다. 지뢰가 있으면 피해가야 합니다. 지뢰가 있는 줄 알고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만용이고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폭풍이 불면 다음날 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은 쉬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은 비겁도 아니고 변절도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보십시오. 26절을 보십시오. 표준 번역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총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행 14:26)" 처음 출발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와서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맡긴 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마무리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피값을 주시고 사신 인생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입니다. 시험 한 번 잘 못보았다고 포기해서는 않됩니다. 사업 한 번 실패했다고 결혼 한 번 잘 못했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후퇴는 있을 수 있으나 후회나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68세 할아버지와 62세 할머니고 대입 고입 검정고시를 보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72세 유정숙 할머니가 "내 마음의 기도 무지개로 피어오르고"(자유지성사 발간)라는 시집을 내어 등단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릴 때는 기가 다리에 있다가 청년 때는 생식기로 중년 때는 배로 노년 때는 입으로 올라와 죽을 때가 되면 눈으로 가 인생을 하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다리를, 청년은 생식기를, 중년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를 즐겨하고 노년이 되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단지 생각만 많아지고 말만 많아져 잔소리만 하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져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쓸데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기도로 할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을 보십시오. 76세 때 수상에 다시 올랐고, 78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젊은이답게 일하였습니다. 38세에 선교 사역을 시작한 씨바이쩌는 77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집념을 불태우다가 77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뉴욕주 롱 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감리교회의 찰즈 맥코이 목사는 71세에 새출발을 했습니다. 인도 선교사 한 분이 설교를 한 후 교인들에게 선교사 지망을 호소했습니다. 한 사람도 희망자가 없자 담임목사인 맥코이 목사의 의향을 들었습니다. "71세라도 늦지 않았소?"하는 질문에 "늙은 나무에 더 좋은 열매가 맺힐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날 결심하고 선교사가 된 맥코이 목사는 86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5년간을 중국의 아편 중독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쏟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나이는 절대로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로 계산되어서는 안되고 사람의 나이는 그 사람이 이룩해 놓은 일에 의해 계산되어져야 한다. 달리 아무것도 헤아릴 것이 없을 경우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 사람이 살아온 햇수를 헤아리지 말라."고 미국의 철학자 란프왈도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타티안은 98세에 그의 거작 "르판트의 전쟁"을 그렸으며 미켈란젤로는 80이 넘어서 그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90세에 가나안을 찾아갔습니다. 모세는 80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80세가 넘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85세가 된 갈렙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평안히 안주하기보다는 아낙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정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의지하며 나아가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수14:7-12)
애늙은이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이제 나이 10대, 20대 후반이라고, 이제 나이 30대, 40대, 50대라고 마음이 팍 늙어버린 애 늙은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다 잃었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나님 쓰시기에 부족하다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요세 이런 이야기 있지 않아요. 평등시리즈 유머 말입니다.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부한 거 다 말짱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압니까? 애들 부르는 노래를 압니까? 40이 되면 옛날에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평등화가 온다' 고 합니다.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화가 온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는 생긴 사람있고 좀 안생긴 사람있지 50이 넘으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 배나오고 얼굴을 주름 지고 한국 사람 감자 모양으로 둥글둥굴하고요 맛사지 해봐도 별거 아니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은 성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남녀가 다 섞여버려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책이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데서나 춤추는 것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70이 되면요 건강의 평등이 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만, 건강 못한 사람도 그만, 어차피 다 그만큼 그만큼 늙어간다고 해요 80이 되면 재물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90이 넘으면요 생사의 평등이 온다고 해요. 살았으나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기는 것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누렸으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남겼느냐 얼마나 베풀었느냐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야 합니다.
3. 맡김 받은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맡기신 분의 일을 해야 하고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나와 내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무슨 보고를 합니까? 27절 보십시오. 많은 회중들이 모였습니다. 영웅담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루스드라에서 앉은 뱅이를 일으킨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보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당 엘루마를 눈멀게 한 일을 만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는데 살아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여 이렇게 큰 일을 하였다고 하나님을 말하면 은근히 자신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합니까? 신유 은사 받았다고 병을 고쳐 주고 나중에는 고침받은 사람들 집을 다 바치게 하여 땅사고 공장하고 기업만드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재림한다고 해 놓고 자기는 8억 짜리 집사고 감시 초소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 내고 자기 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출세를 위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용하는 것처럼 단지 교회만 나닐 따름이지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 이용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신앙 최고 좋은 것처럼 비판은 잘합니다. 교회가 어떻고 목사님이 어떻고 비판은 참피언입니다. 비판한다고 세금내는 것은 아니니까 자유이겠지만 자신의 모습은 비판 하는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 다 끝마무리가 좋지 않습니다. 사울의 끝마무리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성령으로 출발한 그가 악령으로 끝마무리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일을 맡겼는데 그것으로 자기일 했기 때문입니다. 집착이 생기고 교만해지고 안하 무인이 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까? 결국 그 자식이 비참하게 죽고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지 않았습니까? 아간을 보십시오. 같이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탐욕 다스리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돌무더기에 묻히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보십시오. 좋은 일 하려다가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세벨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IQ 높은 연못가의 개구리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연못가에 있던 개구리 중에 IQ 높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에게‘야! 여기 나뭇가지가 있는데, 네가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나는 다른 쪽 끝을 물고 있겠다. 네가 나무를 물고 날면, 나는 더불어 날겠지, 내가 하늘을 날 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니!’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새는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개구리는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개구리들이 부러워하면서“야,그런 기발한 생각을 누가 생각했니?”라고 물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있던 개구리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누가 하긴 누가 해,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개구리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개골개골하면서 땅에 떨어져 장렬한 죽음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끝마무리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덤으로 사는 인생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먹든 마시는 무엇을 하던 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이 고백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신발 한 켤레의 사랑>(요단)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정거장에서 기차를 탔다고 합니다. 기차가 출발한 지약 10분쯤 지났을 때,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경련을 일으키며 의자에서 기차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마구 몸을 뒤틀며 무섭게 떨었습니다. 간질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청년이 그를 의자 위로 들어 올려 눕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머리 밑에 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바클레이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친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질이 오는데, 바로 이틀 전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빨리 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이 친구와 저는 월남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입니다. 이 친구는 영국인이고, 저는 미국인입니다.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우리 둘은 모두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의 한쪽 다리는 날아가 버렸죠." 이야기를 계속하며 바지를 걷어 올리는데 자세히 보니 의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바로 자기 옆에서 터진 수류탄으로 인해 한 쪽 가슴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구조하러 오던 헬리콥터는 베트콩의 포화를 맞고 추락 해 버렸지요. 우리에게는 죽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두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더니 내 군복을 움켜잡고 나를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가슴에 박힌 수류탄 파편 때문에 신음했습니다. 나는 결국 죽을 몸이니 그냥 놔두고 가라고 계속해서 말렸지만 그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하면서 악착같이 나를 끌고 갔습니다. 자기 혼자 살 길을 찾기에도 필사적인 상황에, 그는 결국 나를 이끈 채 정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출되었지요." 그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3년 전 나는 이 친구에게 간질 증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침 독신이었기에, 미국의 집을 팔고, 은행의 돈을 찾아서 친구를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왔습니다. 이 친구에게는 언제나 곁에서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나는 친구와 늘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껏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바클레이는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조금도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나를 위해 해 준 일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 오실 때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끝마무리 잘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내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은혜로 주님의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탈랜트가 있고 장관이 있고 박사가 많고 재벌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일하는 교회입니다. 비록 셋방살이 하면서 옮겨 다닌다 하여도 10명이 모인다 하여도 수만명의 가라지가 모여 움직이는 교회보다는 복음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여 주님의 일을 하는 교회가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일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맡겨준 일을 하는 사람이 끝마무리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마지막 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복음 전파의 승리할 사람
행 14:21~28 / 피종진목사
종말의 시대에 사탄은 성도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최후로 발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여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 하루가 천년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도의 가장 큰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사탄이 가라지를 뿌려서 영혼들을 멸망시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생명을 걸고 순교의 피를 흘린 복음 전파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생명을 내걸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의 승리할 사람이 되려면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행 14:8).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 앉은뱅이는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일어서라고 명하니, 그가 회복되어 벌떡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행 14:9,10).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마귀도 쫓아낼 수 있고, 병든 자와 앉은뱅이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 치유 이적을 보고 두 사도를 신으로 오해하고 숭배하려고 했습니다(행 14:11~13). 그러나 두 사도는 숭배 받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이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행 14:19,20).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았지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1,22)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머물러 있을 것을 권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했습니다(마 28:19). 우리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는 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위해 각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고 기도와 금식을 한 후, 그들이 믿는 주님께 그들을 돌보아 달라고 맡겼습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있는 복음 전파, 기도가 있는 신앙생활은 승리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사탄이 강하게 도전해오기 때문에 반드시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특별히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과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금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복음 전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차 전도여행 완료
정용섭목사 / 행 14:21-28
여행보도의 근거(?)
오늘 본문은 전체 28장에 이르는 사도행전의 반 토막이 정확하게 끝나기도 하고, 사도행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바울 전도 여행의 일차분이 끝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바울의 전도여행에 관한 자료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그리고 그 자료는 얼마나 정확한 것이며, 그 자료와 저자의 추정 보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앞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기도 했고,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이런 문제가 우리의 공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굳이 자세하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약간 비정상적인 본문 전개와 맞물려 있는 부분만 간단하게 검토하자.
일단 1차 여행은 나머지 2,3차 여행에 비해서 매우 단조롭다. 지역적으로 볼 때도 2,3차는 그리스 지역으로 확장되었는데 반해서 1차는 키프로스 섬과 비시디아에 한정되었다. 물론 그들이 자신들의 전도 프로그램에 따라서 그렇게 움직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다른 성서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도 역시 사실보도가 아니라 저자의 해석이 관건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오늘 본문을 따른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데르베’에서 가서 전도한 다음에 왔던 길을 거꾸로 리스트라, 이고이온, 안티오키아, 베르게, 아딸리아를 거쳐 그곳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이런 여행 흔적이 조금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원래 출발지인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마지막 장소인 데르베까지의 여정을 도표로 그린다면 아마 ‘ㄷ’ 모양일 것이다. 그들은 데르베에서 시리아 안디오키아로 직접 내려올 수 있는 지름길을 마다하고, 이 지름길에는 훗날 2,3차 여행에서 전도한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완전히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그들은 왜 굳이 먼 길을 돌아왔을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어떤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저자가 1차 여행에 관한 자료를 그렇게 풍부하게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학자들에 따라서 설왕설래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아주 간략한 여행일지와 몇몇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80-85년)의 신앙에 근거해서 이 전도 여행을 보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참고적으로 헨헨에 의하면 1차 여행은 15장의 예루살렘 협정 이후에 일어났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예루살렘 협정의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저자가 그에 앞서 편집해 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행 이야기가 완전히 픽션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전승된 이런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보도에는 공동체와 저자에 의해서 일정한 정도로 해석된 내용이 첨부되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한다.
이런 문제들이 오늘 성서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성서를 읽고 은혜 받으면 충분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텍스트의 실체적 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도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은혜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보다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이 훨씬 중요하고, 훨씬 본질적이다.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해서 성서 텍스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살려냄으로써, 또는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진리와 만나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성서 ‘텍스트’라고 말하지 않고, 그 텍스트의 ‘지평’이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라. 텍스트는 공동체와 저자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편집, 각색될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혹은 텍스트를 끌어가고 있는 어떤 힘들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그 힘, 생명의 힘, 그 영, 거룩한 영의 자기 계시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텍스트의 형식에 매달리지 말고, 그 내면으로 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 내면의 길이 지평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 안에, 또는 텍스트 사이에 약간의 오류나 모순이 개입해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축자영감설은 텍스트의 ‘지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음이다. 오늘 본문의 지평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
바울과 바나바는 여행 일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은 리스트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등지에서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22절) 권면하였다.
그들은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본문을 아무런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게 될 어떤 곳을 의미하는 게 틀림없다. 이것은 일종의 종말론적 진술인 셈이다. 우리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는 지금 자기가 전해들은 여행보도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는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가? 그 당시에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묵시문학과 어떤 유사성이 있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구약신학, 신약신학, 초기 기독교사, 조직신학의 해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학문적인 부분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들은 왜 하나님의 나라와 시련을 연관시키고 있을까에 대해서만 짚어보자. 이 문제를 우리의 신앙생활과 연결시킨다면 기독교 신앙과 고난의 연관성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고난 없이도 우리는 기독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세계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개념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세상의 생명 형식과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의 세계가 이미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세계가 무엇인지, 또한 어떻게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지에 대해서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의 눈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매우 단순한 명제에 집중하는 것인지 고도의 사유능력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반론 말이다. 요즘 잘 나가는 대개의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매우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구도에서 신자들의 삶과 만나게 하고 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이미 완료된 상품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린 생명의 힘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건 생명의 신비를 맛본다는 것인데, 이런 사유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처음 출발지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27절 말씀을 읽어보자. “두 사도는 안티오키아에 이르자 온 교회 신도들을 모아놓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와 이루어 주신 모든 일과 또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일을 보고하였다.” 오늘 이런 보도를 읽는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약에 누가가 없었다고 한다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여행은 잊혔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늘 그렇다. 그 당시에 별 것이 아니었지만 훗날 위대한 사건이 되기도 하고, 그 당시에 대단한 것처럼 비쳐지던 것이 훗날 별 것 아닌 것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이 사건이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기리 빗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그 당시에 누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인타오키아 신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보고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셨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보도는 바울과 바나바 사건에 대한 누가의 해석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건과 해석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양측이 똑같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던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 사건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석한 누가 모두 기독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을 감당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이런 고백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은 늘 종속 변수이고 하나님만 상수라는 뜻이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라. 이스라엘 전승은 그들 개인의 위대성에 시선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했다.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겠지만, 원시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아닌가로 인한 갈등이 매우 심각했었다. 그 당시 주류라 할 수 있는 팔레스틴 공동체는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부활의 예수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행 1:8) 증인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보도에 따르면 원시 기독교가 이방인 선교를 시급한 과제로 여겼을지 모른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런 보도는 이방인 교회가 일정한 정도의 궤도에 오른 이후에 내린 해석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그리고 거기에 있는 신도들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28절). 바울과 바나바는 왜 1차 전도여행을 끝낸 다음에 곧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오래 지체했을까? 1차 여행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는 1차에서 너무 고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방인 설교가 별로 급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것을 아닐까? 그들은 이제 선교보다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안정시키는 게 훨씬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모르는 가운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있던 누가의 간접적인 보도만 접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가지 개연성을 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안티오키아 교회가 이방인 전도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의 관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거의 무의미, 불가능, 불필요할 것만 같았던 이방인 전도의 단초가 구체화, 가시화했다는 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이 다시 찾아간 곳
행 14장 21~25절 / 김영규목사
바울이 귀로에 다시 방문한 곳
본문은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의 반환점에서 귀로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더베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재방문합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1) 그리고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더베는 길리기아로 내려가는 관문입니다. 거기서 곧바로 길리기아로 가면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직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굳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 귀환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되돌아오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박해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적대적인 유대인 과격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폭도들과 적대적인 관원들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번 했습니다.(19절) 이고니온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관원들이 바울을 모욕하고 돌로 치려 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으며,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냈습니다. 밤빌리아의 버가 역시 난관을 당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요한 마가가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되돌아 간 前歷이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곳에서 전염병이 돌았다고 하기도 하고, 무슨 재난을 당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런 힘든 곳을 다시 방문한 것은 바울의 대단단 결단입니다. 바울은 왜 이런 곳을 다시 방문했을까요? 특히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재방문 한 이유가 뭘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처음 믿은 신자들을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 도시들에서 상당한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행14:1,3-4)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13:43-44)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행13:48-49) 이렇게 처음 믿고 거듭난 신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어떤 삶의 표준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 생활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녀들이 믿음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양육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방문하여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합니다. 첫째는 성도들 개개인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주로 개인의 심령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주로 목회자를 세우고 조직화 하는 일입니다. 이제 바울이 어떻게 이 두 가지 일을 했는지 그 내용을 살펴 보면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이며 내적인 믿음의 강화
바울의 첫 번째 사역은 개인적이며 내적인 믿음의 강화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믿음의 핵심을 깨우쳐주는 일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의 초신자들에게 믿음의 두 가지 핵심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는 권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22상) 초신자들의 약점은 쉽게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신분이 취소되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실족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믿음의 초보에서 자라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반복하여 실족을 거듭하다가 겨우 구원받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바울은 이런 점을 염려하면서 새로운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권하다”(parakalevw)는 말은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지역은 소위 말하는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바울이 이 지역에 보낸 편지에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쉽게 신앙이 변질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따라갔습니다. 다른 복음이 뭘까요? 순수한 복음이 아닌 뭔가 색다른 것이 섞여 있는 복음. 복음이 아닌 복음들. 요즘도 보면 불교, 유교, 이슬람교와 뒤섞인 기독교가 있습니다. 결코 순수한 복음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한 것은 바로 유대교적 교훈이 섞인 복음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음식을 가려 먹고, 절기를 지키고, 성결 규례를 지켜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아마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유대교를 원조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원조들이 지키니까 뭔가 유익하리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산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 중에 가장 잘 못된 것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 백성이라는 공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수 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는 말에 발끈했습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8:33)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법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으니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따르지 않고 마귀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외식,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를 거부하는 모습, 특히 메시아를 통한 속죄를 배척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어떻게 행했는지 역사를 보세요. 출애굽 후에 광야 생활을 하면서 60만 명의 장정 중에 단 두 사람만 제외하고 다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가나안 입주 후에 처음 300여년은 무정부 무원칙 무원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을 팔아먹고 제멋대로 살다가 수 없이 고난을 당한 시기입니다. 사울 왕정이 시작되고 다윗 왕국으로 계승되었지만 300여 년이 지속되다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산지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오늘날 엄격한 의미에서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은 없습니다. 즉, 혈통 때문에 하나님 자녀가 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속죄 때문이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통한 속죄만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만이 죄인을 하나님 자녀로 구원합니다. 바로 이 믿음이 본문이 말하는 “이 믿음”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구원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을 통해서 은혜를 누리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이지, 결코 내가 무슨 공로를 쌓고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은혜로 시작했다가 공로주의로 변질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고 감격해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천국을 얻고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쯤 지나면 주일 성수, 새벽기도, 성경 읽기, 십일조 생활 등등의 경건 생활에 익숙해집니다. 경건해지는 것은 좋으나 그것 때문에 축복을 받는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사는 이유는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요, 주님을 닮기 위한 성화의 목표 때문입니다. 결코 그것 때문에 어떤 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는 모든 축복은 오직 예수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한 때문입니다. 남보다 기도 많이 했다고 자랑하고, 남보다 성경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고, 남보다 헌금 많이 했다고 자랑합니다. 자랑까지는 좋은데 나만 못한 사람들을 깔봅니다. 바로 여기에 변질된 복음의 함정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복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복음으로 사세요. 처음 믿을 때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복을 받다가, 점점 지나면 내가 행한 것 때문에 복 받는다는 생각으로 바뀌면 곤란합니다. 물론 잘못하면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축복이 행함 때문이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축복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 믿는 신자들에게 바로 이점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 거하라!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고부동의 목표입니다. 성도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은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세상 모든 환난을 이겨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네팔에서 오신 두 분의 귀한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힌두교도들의 미움을 사고 있습니다. 때로는 공산주의자들이 협박하고 테러를 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악한 귀신들 때문에 가족들이 계속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변함없이 예수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잘 되는 것도 하나의 목표이긴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세상에서 꼭 고생만 하라고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 나라인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당시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지역의 교인들은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들, 혹은 이웃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과연 이 박해를 견딜 수 있을까요? 그들이 시련과 고난을 이길 힘은 오직 목표를 잊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들어와서 바라보는 목표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3:2)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좀 잘 되면 천국이 보이질 않습니다.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할 생각에 빠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25년 동안 쭉 지켜봤습니다. 혹시 세상 떠날 때에 뭔가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지? 아무도 없어요. 훗날 뭔가 남겨놓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소용 없습니다. 죽으면 없어져요. 재산, 권세, 명예, 이름, 다 마찬가집니다.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미국사람 앨범을 본 적이 있습니다. 꽤 잘 정리된 가족 앨범이 왜 벼룩시장에 나왔을까요? 가족을 기리기 위해 앨범을 만들었을 겁니다. 아들 딸 대에는 잘 보관이 되었겠지요. 손자, 증손자에 이르면 조상이 누군지 별 관심이 없어요. 짐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시장에까지 흘러 나왔겠지요? 예수 믿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목표를 잃지 마세요. 세상살이에 팔려 낙심좌절 하지 마시고, 너무 희희낙락 하지도 마세요. 세상은 잠깐 거쳐 갈 뿐입니다. 목적지를 잃고 살면 우왕좌왕 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강조합니다.
공동체적이며 외적인 교회 조직의 강화
바울의 두 번째 사역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외적인 조직의 강화입니다. 그 일의 첫째는 바로 목회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23) 성도들이 믿음을 지켜가려면 개개인의 신앙적 강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설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목표를 확고히 가지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도록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특권이요, 천국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생활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난 성도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새로 세워진 교회공동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합니다. 바로 교회의 지도자, 목회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장로”는 목회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장로를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택하다”(ceirotonevw)는 말은 손을 뻗치다는 뜻인데 아마 안수를 가리키는 말 같습니다. 어떤 영문 성경은 “to choose by a show of hands;”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도들의 거수로 선택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을 때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일곱 집사를 뽑을 때는 회중들이 선택(ejklevgomai, select)을 했습니다.(행6:5)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께서 지시를 하셨습니다.(행13:1) 그러나 갈라디아 지역의 지도자를 어떤 식으로 뽑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회중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뽑았을 것이고,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임명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만일 모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만일 여호수아가 아니었다면 가나안 전쟁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만일 사도 바울이 아니었다면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들을 사용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일반인이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뭘까요? 지도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물론 대형교회들을 보면 조직으로 움직여집니다. 누가 오든지 가든지 조직은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는 변화됩니다. 교회 조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입니다. 누가 지도자인가에 따라 영성이 좌우되고, 삶이 좌우됩니다. 오늘날 권위가 무너진 사회에서 지도자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습게 여길 위치가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나 목회자 될 것 같지요? 아무나 강단에 서면 설교 잘 할 것 같지요? 아무나 그저 심방하고 말씀 가르치면 목회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는 세워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넘어졌습니다. 교회는 지도자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를 알아보고 세우는 것도 교인의 사명입니다.
둘째로, 지도자를 세우는 절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임직을 위해 두 가지 중요한 절차를 밟았습니다. 첫째는 금식 기도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주님께 부탁하는 일입니다. 요즘도 직분자를 뽑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금식기도까지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간혹 금식기도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뽑기 전에 좋은 사람 뽑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뽑아 놓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금식은 주께 부탁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요즘도 교인들이 지도자를 뽑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교인들을 위해 설교 잘 하고 목회 잘 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 목회자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부탁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본문은 목회자 자신을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악한 무리들로부터 목회자를 지켜주시고, 주님이 목회자를 맡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교회의 축복은 목회자를 주님께 맡기는 데 있습니다. 목회자를 인간적으로 맡으려는 생각이 교인들을 교만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정윤교회에서 평생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싶으시다면 목회자를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세요. 그냥 맡기지 마시고, 금식기도 하면서 맡기세요. 주일마다 설교가 은혜로울 겁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겁니다.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이 이어질 겁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을 재방문 했습니다. 이유는 새로 믿는 신자들, 새로 세워진 교회를 든든히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첫째로, 성도 개개인을 위한 격려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결코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에 관심 갖지 말고 순수한 복음에 관심을 가지세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은혜 받고 축복 받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목표를 확고히 하라는 권면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목표가 확실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오늘 이 목표를 찾으세요.
둘째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지도자를 뽑는 일입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교회가 좌우되고 성도들의 삶이 좌우됩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 금식기도 했습니다. 뽑기 전에 금식할 뿐 아니라, 뽑은 후에 금식했습니다. 우리도 목회자를 위해 금식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를 우리가 맡으려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은혜 넘치는 삶이 이어지지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