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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 810~ 859 )①가 젊은시절 한때 출가하여 대중(大中)이란 법명(法名, a Buddhist name) 을 받고 '향엄선사(香嚴禪師, 미상~898 년)'③제자로 있을 때이다.(It was when Emperor Seonjong of the Tang Dynasty was once a Buddhist monk and was a disciple of Hyangum Preceptor under the Buddhist name of Daejung)
그 절에는 수좌(首座)인 '황벽스님'②이 매일 정성스레 예불(禮佛)를 드리고 있는데 '대중스님'이 '황벽스님(黃檗 希運, ?~850)'께 물었다.(In that temple, the chief monk, Hwangbyeok, was sincerely offering a Buddhist service every day, and the public monk asked Hwangbyeok.)
"부처에게서 찾지 않고 법에서 찾지 않고 예불만 하여 무엇을 찾을 게 있겠소?"(What can I find if I don't look for it from the Buddha, not from the law, but from the courtesy?")
"부처에게서 찾지 않고 법에서 찾지 않고 그러면서도 항상 이렇게 지극한 공경(恭敬, respect)과 하심(下心, bottom center)으로 절을 해야 청정법신을 닮아 간다네." "절은 해서 무엇 하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절만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 아니오?"(He did not seek it from the Buddha and did not seek it from the law, but always with such extreme respect and inferiority You have to bow to become more like the clean law." "What's the point of bowing? Isn't it foolish to bow without looking for anything?")
그때 '황벽스님'은 벌떡 일어나 '대중스님'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대중스님'은 "이런 난폭한 자가!"하고 얼이 빠져 있는데 "이런 경우는 난폭하다느니 친절하다느니, 따질 때가 못 된다!"하며 연속으로 두 대를 더 후려쳤다.(At that time, "Master Hwangbyeok" jumped up and slapped "Master Popular" on the cheek. "Master of the Public" says, "What a violent man!"In this case, it's either violent or kind, It's not the time to argue!"I hit two more cars in a row.)
호되게 뺨을 맞은 대중스님은 그 후에 환속하여 '선종황제'가 되였는데, 그때 뺨을 때려준 황벽 스님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After being slapped hard, the monk returned and became Emperor Seonjong, It is said that he always felt grateful to Monk Hwangbyeok for slapping his cheek at that time.)
삼라만상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인데, 그를 관(觀)하는 우리의 주관적(主觀的, subjective) 사고(思考, cerebration)가 환상(幻相, illusion)과 욕망(慾望, desire)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것이다. (Samramansang is the god of clean law, That's when we realized that our subjective thinking about him was imbued with fantasy and desire.)
신하들은 '황벽선사(黃檗禪師)'에게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권유를 했지만, '선종황제'는 오히려 '취행사문'이라는 호(號)를 하사했다고 한다.(The servants urged the "Hwangbyeok Preceptor" to be severely punished, It is said that Emperor Seonjong rather gave the title of "Chwijeomun.")
불교에서는 열심히 도(道)를 닦으려 노력하면 상근기(上根器, Full-time equipment), 도(道)를 반신반의(半信半疑, half in doubt)하면 중근기(中根器, Middle-earth period), 도에 관심이 없거나 부정하면 하근기(下根器, Lower root period)로 나눈다.(In Buddhism, if you try hard to practice Taoism, you will find a full-time position, If you are half-believing about the Do, it is divided into Junggeungi, and if you are not interested in the Do, it is divided into Hageungi.)
'선종황제(宣宗皇帝)'가 하근기(下根器)였다면 지난날 황벽선사(黃檗禪師)의 일에 괘심죄를 적용하여 엄벌에 처했을 것이다.(If "Emperor Seonjong" was Ha Geun-ki, he would have been severely punished for applying the crime of disgust to Hwangbyeok's work in the past.)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체벌(體罰, physical punishment)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자녀 교육을 보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하근기(下根器)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스승(師)을 스승으로 보지 않고 근로자(勤勞者, employee)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The seriousness of dealing with the issue of corporal punishment in today's educational field, Ha Geun-ki's parents who can't see their children's education further, Isn't it because they don't see their children's teachers as teachers, but only as workers?)
8.15해방 후 6.25 전쟁을 격으면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시면, 부모님은 "선생님! 우리 아이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사람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하셨다.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during the Korean War after the liberation of August 15, when my teacher visited my home, My parents said, "Teacher! Please make a person by hitting my child with a whip.")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욕심 많은 천방지축 개구쟁이들이 처음으로 공동생활을 배우는데, 잘못하는 것들을 따끔하게 바로 잡아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Now that I think about it, that's when greedy naughty boys learn to live together for the first time, I am sincerely grateful to the teacher for correcting the things I do wrong.)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데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 어린 시절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바로 잡아주시기 위한 선생님의 체벌(體罰, physical punishment)이야말로, 진정 고마운 사랑의 매임을 깨달아야 한다.(It is said that the habit of three years old goes to eighty, but from a distant perspective, The teacher's physical punishment to correct the wrong thoughts and behaviors of childhood, You have to realize that you are truly grateful for love.)
= 華谷·孝菴의 좋은글 중에서 =
* 주석(註釋)
① ② 당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 810~859, 제16대 황제, 재위:846년~859년)와 황벽스님(黃檗 希運, ?~850)
[요약]
당나라 선종 이침(唐 宣宗 李忱, 810년~859년)은 당(唐)의 제16대 황제(재위:846년~859년)이다. 헌종(憲宗)의 13황자로 목종(穆宗)의 이복 동생이며, 선대 경종이나 문종, 무종에게는 숙부가 된다. 휘는 침(忱), 조명은 이(怡)이다. 846년에 보위 등극하여 1년간 이덕유(李德裕) 국상겸 승상의 대리청정을 거친 후 847년에서 이후 859년에 향년 49세로 붕어할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선종의 어머니는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锜)의 시첩(待妾)이었던 정씨(鄭氏)로,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가 귀비(貴妃)로 책봉되었고 선종을 낳았다.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때문에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절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양준(琼俊)이라 하였는데, 절에 있던 승려 제안(濟安)이 선종의 거동을 알아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송고승전》).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 등은 이러한 선종의 행동을 당시 선종의 존재를 황위에 대한 잠재적인 라이벌로 여겨 그를 제거하려 했던 조카 무종을 피해 출가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근거는 없으며, 당시 수많은 서출(庶出) 황족의 한 사람이었던 선종이 과연 무종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라이벌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宦官) [[마원지|마원찬]](馬元贄)에 의해 이례적으로써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이에서 침으로 바꾸었다.
선종을 옹립한 마원찬 등의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牛僧孺)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 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채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선종은 당시 [[토번|티베트]](吐蕃), [[위구르]](回纥)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병사를 보내 하황(河湟) 땅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무종과 마찬가지로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13년(859년), 무종과 같은 [[단약]](丹藥) 남용으로 인한 중독 증상으로 50세에 사망하였다.
[본문]
당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가 젊은시절 한때 출가하여 대중(大中)이란 법명(法名)을 받고 '향엄선사' 제자로 있을 때이다.
그 절에는 수좌(首座)인 '황벽스님'이 매일 정성스레 예불(禮佛)를 드리고 있는데 '대중스님'이 '황벽스님'께 물었다.
"부처에게서 찾지 않고 법에서 찾지 않고 예불만 하여 무엇을 찾을 게 있겠소?"
"부처에게서 찾지 않고 법에서 찾지 않고 그러면서도 항상 이렇게 지극한 공경(恭敬)과 하심(下心)으로 절을 해야 청정법신을 닮아 간다네.
"절은 해서 무엇 하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절만 하다니 어리석은 짓이 아니오?"
그때 '황벽스님'은 벌떡 일어나 '대중스님'의 따귀를 철썩 때렸다.
'대중스님'은 "이런 난폭한 자가!"하고 얼이 빠져 있는데 "이런 경우는 난폭하다느니 친절하다느니 따질 때가 못 된다!"하며 연속으로 두 대를 더 후려쳤다.
호되게 뺨을 맞은 대중스님은 그 후에 환속하여 '선종황제'가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려준 황벽 스님에게 늘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삼라만상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인데 그를 관(觀)하는 우리의 주관적(主觀的) 사고(思考)가 환상(幻相)과 욕망(慾望)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것이다. 신하들은 '황벽선사'에게 엄벌을 내려야 한다고 권유를 했지만 '선종황제'는 오히려 '취행사문'이라는 호(號)를 하사 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열심히 도(道)를 닦으려 노력하면 상근기(上根器), 도(道)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 중근기(中根器), 도에 관심이 없거나 부정하면 하근기(下根器)로 나눈다.
'선종황제'가 하근기(下根器)였다면 지난날 황벽선사의 일에 괘심죄를 적용하여 엄벌에 처했을 것이다.
③ 향엄선사(香嚴禪師, 미상~898년)
당나라 때의 승려. 법호(法號)는 지한(智閑)이고, 청주(靑州, 山東 益都) 사람이다. 처음에 백장회해(百丈懷海)를 따라 출가했다. 나중에 위산영우선사(潙山靈祐禪師)를 뵈었지만 맞지 않자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다. 우연히 산속에서 풀을 베다가 조약돌이 대나무에 맞아 내는 소리를 듣고 확연히 깨달은 바 있어 위산의 비지(秘旨)를 증득하고 그 법을 이었다. 등주(鄧州) 향엄산(香嚴山)에 살면서 법화(化法)를 널리 시행하니 제자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후세 사람들이 향엄선사(香嚴禪師)라 불렀다. 성품이 엄근(嚴謹)하고 말투가 간략하면서 분명했다. 게송(偈頌) 200여 수를 남겼는데, 널리 성행했다. 시호는 습등대사(襲燈大師)다. <끝>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大慈大悲하신 부처님 온누리에 慈悲光明을 비춰주시길 간절히 所望합니다. 감사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효안(孝菴)박규택(空認 大法師) 시인님의 좋은글 "빰맞은 황제(皇帝),
emperor)(an emperor slapped in the face)" 즐감하고 갑니다.
이번주는 희망차고 향기롭고 즐거운 한주 되세요....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