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예식장에서 써먹었던 놋으로된 촛대와 한지로된 족자
천안시 문화동에 있던 수정 예식장이 이사 가는날, 이삿일을 거들어 주고 얻어온 촛대와 족자인
데 촛대는 1950년대, 예식장에서 예식을 치를때 쓰던것이라고 한다
그 예식장은 오래전에 폐쇄 되었지만, 예식장 안에는 예식을 치를때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0년대 예식장에서 써먹었던 놋으로된 촛대
1950년대, 저 촛대가 있었던 천안시 문화동 수정 예식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저 촛대앞에서 백년가약을 맺었을것이다
그리고 그때 백년 언약을 맺었던 사람들은 지금쯤 80이나 90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셨거나, 아니
면 이미 저 세상으로 가셨을것이다. 아마 저 촛대 앞에서 손고락을 걸며 영원을 다짐 했었을듯
싶다
1950년대 예식장에서 써먹었던 놋으로된 촛대
50여년전, 예식장에서 예식을 치를때 쓰던 놋으로된 촛대이다. 그리고 촛대 뒤에는 나비모양으
로 문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화투장에 나오는 장미속의 나비들과 흡사하다
1950년대 예식장에서 써먹었던 놋으로된 촛대
1950년대 예식장에서 써먹었던 돈통
그래도 저것이 50여년전에는 최고의 아날로그 제품이였을듯 싶다
예식장 주인 할매가 쓰던 실패와 인두
예식장 주인 할매와 할배는 지금 돌아가시고 안 계시다. 지금 살아 계셨으면 100세 정도 되었을
듯 싶은데, 그 할매가 20세 시절에 시집와서 썼었던 물건이라고 하니까 저 실패와 인두는 80년
정도 된것으로 추정이 된다
인두는 화롯불 속에 집어넣었다가 뜨겁게 달구어지면 모시옷이나 삼베옷등등을 다리던 기구이다
예식장 주인 할매가 쓰던 소쿠리, 반짇고리
이 물건도 예식장 할매가 시집와서 쓰던 물건이였다고 하니까 80년 정도된 물건들인듯 싶다
소쿠리는 껍질을 벗겨서 엮은 그릇으로, 옷감을 짜듯이 씨실과 낫실로 서로 맞물려 교차하여
짠다. 그리고 마무리 할때는 소쿠리의 몸통에 짠것과 같은 가늘은 대나무 껍질로 마무리 짓는다
소쿠리나 광주리는 테를 맨 부분이 절단나기 쉬우므로, 저렇게 날로 사용된 대를 길게 뽑아 엮으
면 아주 튼튼하다. 음식을 담아 말리거나 음식을 만들 재료를 담는데 사용하는 그릇이다
짜임새가 촘촘하여 좁쌀 같은것을 담아도 빠지지 않기때문에 물에씻어 물기를 빼는데는 그 당시
저 소쿠리가 최고의 제품이였었다
예식장 주인 할매가 시집와서 쓰던 소쿠리, 채반, 반짇고리
채반은 싸리나무나 대나무껍질을 벗겨 만든 제품인데, 옛날에는 7~8월 농사일을 끝낸다음 싸리
를 베어다가 저런 채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반짇고리는 실, 바늘, 가위 등을 담아 두었다가 바느
질할때 사용하는것으로 종이나 대나무등을 이용하여 만든다, 그리고 옛날에는 혼인식때 신부가
가지고 가는 혼례품으로 양단이불과 함께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예식장 주인할매가 시집와서 쓰던 쌀통과 가구
예식장 주인 할매는 현재 돌아가시고 부재중이신데, 지금 살아계셨으면 100세가 되셨을것이다
그 당시 20세도 채 못 되어 시집 오셨다고 하니까, 저 가구들은 1920년대, 그러니까 80년전에
그 할매가 쓰던 가구였다
예식장 주인 할매가 80년전에 쓰던 차단스와 꽃 병
예식장 주인 할매가 80년전에 쓰던 다과상
예식장 주인할매가 80년전에 원적갈때 쓰던 도시락 통
원적이란 소풍을 뜻하는것이며, 옛날에는 소풍 간다는 소리를 "원적간다" 라고 했다고 한다
예식장 주인할매가 80년전에 원적갈때 쓰던 도시락 통
1960년대 문화방송 라디오에서 방송했던 전설따라 삼천리
출판후 독자의 반응은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도 남았습니다
청취자의 총애를 받고 자라온 "전설따라 삼천리"는 이제 최고의 청취를 가진 프로로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청취자 여러분들의 사랑과 충언의 덕분이라 생각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전설따라 삼천리" 2부를 여러분의 앞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문화방송에서는 청취자 여러분의 성의에 보답 하고자 한층 더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그동안
여러분의 문의에 일일히 회답드리지 못한점 이기회을 빌어 사과 드립니다
-한국 방송문화 주식회사 사장 조승출 -
이상 "전설따라 삼천리"의 편집 후기 중에서...
1960년대 문화방송 라디오에서 방송했던 "전설따라 삼천리"
전설 따라 삼천리 제 2부
서기 1967년 9월 5일 초판 발행
편저 - 한국 문화방송 주식회사
발행인 - 석정식
조판 - 이우 인쇄사
대표인판 - 평화당
발행처 - 동서 문화원
서울 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124
정가 370원
- 이상 "전설따라 삼천리" 책 뒷장에 쓰져져 있는 안내문 -
김일엽의 "청춘을 불 사르고" 란 책. 1962년에 초판 발행
이 책은 원래 내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아니라 천안 문화동의 수정 예식장 이삿집 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책이다. 오래된 고서 한 20여권을 얻어 왔는데 그 중 김일엽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선각에서 발행을 했고 이중 케이스로 되어 있으니까, 그때 당시 저
책값이 200원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만원도 훨씬 넘는 가격일것이다. 그러니까 45년 동안 물가가
50십배도 훨씬 더 올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일엽의 대표적 저서이자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초판 발행본 원 본이다
청춘을 불사르지 못하면 생사을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이 없다는 일엽 스님의 말씀은
요즘에도 구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 고서에서 발췌한 김일엽의 시 한편 옮겨본다
으서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불같은 정열을 토해내고 난 뒤에 찾아오는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한 33세<혹은38세 였다고 하기도함>의 일엽은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하여 見成巖<견성암>에서 머리를 깍았다 한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처럼 그 옛날 인적이 없었던 산길 백리 수덕사에 사연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도 수 없이 많았겠지만, 나는 수덕사에 갈때마다 언제나 두 여인이 떠오르게 된다
한 분은 <청춘을 불사르고 >의 저자 김일엽 스님이고
또 한 분은 수덕여관에 머무르던 신여성 여류화가 나혜석이다
일엽스님.1962년도에 발간된 "청춘을 불사르고" 의 머리단 표지
이 사진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엽스님의 45년전 원본 책자를 폰카로 직접 찍은 것이다
왼쪽사진은 출가했을 당시이고 오른쪽 사진은 출가전 모습이다
< 이 사진은 얼마전 선물로 받은 一葉禪文 이란 책자에 있는 사진을 폰카로 직접 찍은 것이다
2001년 수덕사 발행 >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金元周>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3.1
운동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화 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하여 잡지 <新女子>를 창간하고 시인
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한다
신여성 일엽은 당시 사회적 국민윤리에 도발을 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세간 사람들의 입에
서 입으로 숱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한다
그 당시 일엽은 구 시대의 낡아빠진 세습 속에서, 억압받고 주눅들었던 여성들을 대변하여 투철
한 자기 정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분이다
그런 치열한 정신으로 구 시대의 낡은 세습의 벽을 허물고자 안간힘을 다 하였으나 여자라는
인간적인 한계와 그 당시의 완고했던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고뇌 할 수밖에 없었다
활화산처럼 활활 뜨겁게 타오르던 정열이 다 소진되어 허탈해 하고 있을때, 수덕사의 만공선사
라고 하는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고, 만공선사로부터 영원히 꺼지지 않고 사는 큰 가르침을 얻게
되어 불가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다
한창 젊은 정열이 넘쳐흐를때 일엽이 쓴 " 청춘을 불사르고"의 책에 담겨 있는글중에서 "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 라는 글을 하나 옮겨 볼까 한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
혼마져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져 남아요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
1928 년 4월 壽松洞 旅舍에서
<1962년 文宣閣에서 발행한 일엽 인생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 에서 발췌>
1928년 이라면 그 당시 일엽의 나이 33세 되던 해이다
그러니까 33세에 출가를 했다면 이 글을 쓴 그해에 곧바로 덕숭산 수덕사로 입산했다는 이야기다
천안시 문화동 예식장에서 이삿짐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고 가구들
예식장 주인 할매와 할배는 지금 돌아가시고 안 계시다. 지금 살아 계셨으면 100세 정도 되었을
듯 싶은데, 그 할매가 20세 시절에 시집와서 썼었던 물건이라고 하니까 저 가구들은 80년은 족히
되었을듯 싶다
천안시 문화동 예식장에서 이삿짐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고 가구들
천안시 문화동 예식장에서 이삿짐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고 가구들
천안시 문화동 예식장에서 이삿짐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고 가구들
천안시 문화동 예식장에서 이삿짐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고 가구들
이삿짐 일을 거들어주고 얻어온 1920년대 고 가구들을 기름걸래로 닦아 이렇게 집구석에 배치를
시켜 놓았더니 그래도 꽤 운치 있게 보인다
어떻게 보면 서울의 인사동 골통품집 같아 보이는데, 이곳은 골통품집이 아니라 내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는 집구석이다
첫댓글 촛대도 멋있고 원목색의 조그만 서랍장 나뭇결 무늬가 아름 답습니다.저는 원목의 나뭇결 무늬만 보면 뿅~간다는,,,ㅎ
이삿짐을 거든 거시 아니라 싹 싸짊어지고 나섰그마... 딴 거는 냅두고 실패나 담에 올 직애 챙기다 주게나... 아그들 땡크놀이 배기 줄라고 찾아 봐도 요새는 안 배기더랑깨... 요런 것들이 어울리기 시작허먼 그 방 쥔도 다 삭아간다는 증거여~! ^^
나사장 반갑 그만이라우 잉 *^* 옛것은 존거여
너무 좋은것 많이 올려 주시고 잘보관 하셔요 제마음에 드느것도 있내요 감사합니다 좋은구경
에고~ 탐나는것도 많아라. 나먹통아님님 이사는 언제 갈라요? 내가 가서 도와주고싶어서.. (뭐 얻어올려는 욕심이 보이지라? ㅎㅎㅎ)
고상한 취리네 향연이 고향의 향기가 나는듯 인생은 연기속에 그윽한 역사가 살아 고을의 삶의 고뇌가 우리네 사슴에 피워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