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5,34-42
복 음 :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분별력分別力의 지혜
-모든 덕행의 어머니는 분별력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분별력에 지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우스개 말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분별력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컫는 말입니다.
공동체 책임자의 우선적 자질도 분별력에 있습니다.
분별력의 지혜요 분별력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64장 아빠스를 세움에 대하여'에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 있고 절도 있게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 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바로 베네딕도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분별력(discretio)’은 과격하거나 지나치지 않음이요,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절도있는 태도입니다.
베네딕도는 분별력의 중용을 모든 덕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합니다.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공동체 책임자들은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예수님의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복음 후반부에서 빵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표징의 의미를 참으로 깨닫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그들의 오해는 그 표징을 지상정치와 관련지은 데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민족해방자로 오해하여 억지로 메시아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다.’
광야에서 예수님께 대한 세 번째 유혹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바로 이와 흡사한 유혹을 단번에 정리하신 예수님의 분별력입니다.
위기를 직감한 예수님은 이들의 유혹에, 열광하는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분별력의 결단을 내려 즉시 산으로 물러나십니다.
홀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며 영육을 충전시켰음이 분명합니다. 생각나는 두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하여 때로 예수님처럼 외딴곳에 물러나 삶의 중심을 잡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함이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말라는
노자의 말씀도 같은 맥락의 분별력의 지혜를 말합니다.
정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떠날 때 잘 떠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자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 바리사이 역시 ‘분별력의 대가’임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의 일로 혼란해지 최고의회 분위기를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단숨에 정리해 버립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로 건드리지 말고 때가 될 때까지 하느님께 맡기고 기다리며
‘그냥 버려두는 것’이 분별력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경솔히 서두르다가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사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 그것이 현실이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기는 것도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모든 덕행의 어머니가 분별력입니다.
정보와 지식이 홍수시대, 복잡하고 유혹이 많은 일상에서
진짜 본질적 단순 소박한 삶을 살기위하여
비단 공동체의 책임자뿐 아니라 누구나 분별력의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선사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분별력있는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이런 사랑의 관상적 삶에서 샘솟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제 막 더하기 빼기를 배우는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과가 열다섯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다섯 개를 먹었습니다. 이제 몇 개가 남았을까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다섯 개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열다섯 개 중에서 다섯 개를 먹었어. 그렇다면 먹지 않아서 남은 사과가 몇 개일까?”라고
다시 설명하면서 물었지요. 그래도 이 아이는 자신 있게 “다섯 개요!”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빠가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어요.”
이 대답도 틀린 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빠의 논리와 선생님의 논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수학적인 개념을 알려 주는 것이고, 아빠는 생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둘 중에서 어느 것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스포츠 경기를 좋아해서 보다보면, 종종 비디오 판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심판의 위치에 따라서 내린 판결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결을 위해
비디오를 되돌려서 정심인지, 오심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심판만을 평생 했다고 해서 단 한 번도 오심을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심판의 보는 위치에 따라서 오심도 분명히 나올 수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틀렸다고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하는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이 많은 군중을 보신 주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는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지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라고 하지요.
2018년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7,580원이니까 8시간 노동으로 생각했을 때,
1데나리온은 6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나라 시새로 1,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것도 얻어먹는 처지에 이렇게 큰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습니다.
주님의 관점으로는 가능한 일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도 많고 틀린 것도 많지만,
주님의 관점인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내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가능한 일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의 관점인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마련해 주셨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 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향곡선을 그려오던 예수님의 인기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차차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표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단순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참조)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의 ‘소용없음’마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이라는 식탁에서
매순간
사랑의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순간이
특별한 순간입니다.
재대로 먹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하느님 생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과 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친히
빵이 되시어
흩어진 우리를
한 데 모으십니다.
나누는 사람이
가장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꺼이 누군가의
빵이 되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이들입니다.
삶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을 살리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의 자리는
성체성사의 자리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모든 것에서
감사를 나누는
따뜻한 부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식탁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오늘의 빵이 되십니다.
부활의 삶은
다시 살게 하는
빵의 밥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나의 작은 긍정이 기적의 씨앗이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잘 아는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 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를 지었습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긍정적인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그 곳에 기적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더 잘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 흰 종이 가운데 매직으로 점을 찍으시더니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점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검은 점은 이렇게 조그맣고 흰 바탕은 이렇게 넓은데 왜 검은 점만 볼까?
항상 살아가면서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다른 복음에서처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시지도 않고
그저 어디서 살 수 있는지만 물어보십니다. 그럼에도 필립보는 돈 걱정부터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아도 물론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말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을 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됐다!’라고 느끼셨는지, 기적을 행하실 결심을 하시고 사람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위한 재료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재료란 바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지만, 실제로는 안드레아의 아주 작은 긍정이었던 것입니다.
안드레아가 완전히 부정적이었다면 빵과 물고기가 조금 있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의 아주 작은 긍정을 보시고 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 꿈은 자기의 치아가 하나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습니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나중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는데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습니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으면 부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어두운 면이 많아지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어두운 면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둠이나 부정적인 면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면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일수록 밝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런 긍정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복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
사라진 빵 한 개의 비밀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전합니다.
갈릴래아 북서쪽 타브가에는 ‘오병이어 기적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앉게 하신 다음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셨다는 바위 위에 제단 기초를 세우고,
3세기경에는 그 제대 앞에 ‘오병이어 모자이크’까지 새겼다 하여 그렇게 불립니다.
그런데 타브가의 오병이어 기적성당 모자이크에 그려진 빵의 수를 세어보면 정확히 네 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빵 다섯 개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왜 모자이크에는 네 개만 조각해 넣었을까요? 모자이크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복음사가가 잘못 기록한 걸까요?
어쨌든 ‘타브가의 오병이어’는 복음서가 기록하는 것과는 다르게
네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니, ‘사병이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타브가의 모자이크가 말하려는 것에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습니다.
즉 그려지지 않은 한 개의 빵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려진 빵 네 개와 스스로 빵이 되신 예수님을 합치면 다섯 개의 빵이 됩니다.
결국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성체가 되어 당신 자신을 나누어주신
예수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거지요.
어쩌면 그 사라진 빵 한 개는 지금, 성체를 모시고 사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성체를 모시는 우리를 통해 지금도 계속됩니다.
생활성서 ‘소금항아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