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이씨 시조 이민도,조선태조때 개국공신
시조: 이민도(李敏道)
<氏族의 연원>
시조는 이민도(李敏道). 조선 태조조 개국2등훈·순충분의좌명(勳·純忠奮義佐命)·개국공신(開國功臣)·시호(諡號)는 직헌(直憲), 중국 농서(隴西)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元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東來), 1392년 조선개국 때 공을 세웠다.
상산(商山, 尙州의 옛 이름)군으로 봉해졌고, 조선인(朝鮮人)으로 동화(同化)케 하기 위하여 이태조의 명령으로 본관을 농서(隴西)에서 상주(尙州)로 하였다. 그러나 계세(繼世)는 중국사람인 이환(李換)으로부터 시작, 이민도(李敏道)를 3세로 하고 있다.
그리고 1987년 발표한 경제기획원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상산이씨(商山李氏)와 상주이씨(尙州李氏)가 별도의 본관성씨(本貫姓氏)로 분류되어 있으나, 이는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 상산(商山)이므로 같은 본관 성씨다.
<本貫地 연혁>
신라의 사대국(沙代國), 혹은 사불국(沙佛國), 법흥왕(法興王) 때 상주(尙州)로 고쳤고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洛郡), 경덕왕(景德王) 때 상주(尙州)로 바꿨다.
고려 성종 때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영남도(嶺南道)를 관할했다. 뒤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상주안무사(尙州按撫使)를 두었다가 성종 때 목(牧)으로 고쳐 조선시대까지 내려왔다.
조선 고종32년(1895)에 군(郡)으로 개혁했다.
본주(本州)의 주 성씨는 李, 金, 朴, 周, 黃씨 등이 있었고 산양(山陽)의 경(庚) · 신(申) · 채(蔡)씨, 화령(化寧)의 任 · 高 · 方 · 張씨, 청리(靑里)의 沈씨, 평안(平安) · 평산(平山)의 方씨 등이 있었다.
<주요 世居地와 변천>
시조공이 상주(尙州), 곧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짐으로써 상주이씨(尙州李氏)의 관향이 되었으나 그곳에 세거한 사실은 뚜렷하지 않다.
그런 때문인지, 5세손 이창윤(李昌胤) 이하 직계종손인 이공무(李恭茂)의 후손은 경기도 시흥(始興)에 세거하였음이 밝혀졌는데, 18세손 이재로(李載老) 대까지 그곳에 살아왔다.
그리고 이창윤(李昌胤)의 둘째 아들 이신무(李信茂)가 전주판관(全州判官) 등을 역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진안(鎭安)에 세거의 터를 잡아 9세손 이성임(李聖任) 대까지 번연(繁衍)하였고, 10세손 이정길(李廷吉)은 남원(南原)에 자리를 굳혔다.
이천길(李天吉)은 임실(任實)에 터를 잡아 18세손 이재풍(李載豊) 대까지 확고한 세거의 터를 누렸는데, 그 뒤 여러 곳으로 확대되어 갔다.
임천파(林川派)의 시작은 10세손 이태길(李泰吉)이 인조 때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피하여 임천(林川)에 이거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세손 이한광(李漢光) 대에도 확고한 세거지가 되었다.
광주(光州)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4세손 이영신(李永新)이 옥과(玉果)로 이거해 간 것이 연유가 되어 광주파(光州派)의 뿌리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水原, 鎭安, 南原, 屛巖, 舟川, 林川, 任實 등지가 상주이씨(尙州李氏)의 세거지가 되어온 것이다.
결국 상산이씨(商山李氏)는 서울에 세거하기 시작하다가 자손이 仁川 · 果川 · 水原 등 경기지방에 확산되어 살게 되었고, 鎭安 · 任實 · 扶安 · 林川 등지까지 씨족세가 확대되었다.
1930년 충남 부여(扶餘) 양화면(良化面) 원당리(原堂里)에 34호, 족교리(足橋里)에 25호가 살고 있던 것으로 밝혀져 있고, 1980년데에도 부여군(扶餘郡) 일원에서 번거하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는 조선 태조1년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예조전서(禮曹典書)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거쳐 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렀다.
그가 공조(工曹)에 있을 때 건국초의 시무삼장(時務三章) 상소문을 올려 왕이 이를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현신(賢臣)을 가질 것, 둘째 간사(奸邪)한 무리를 멀리할 것, 셋째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숭배하고 사교(邪敎)를 멀리할 것 등이다.
이태조의 총애를 받던 이민도(李敏道)는 직헌(直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따라 태조가 친히 사시(賜諡)한 것이다.
5세손인 참판공(參判公) 이인홍(李仁弘)의 아들 이성임(李聖任)은 명종15년에 태어나 선조16년 무과에 급제하고, 全州 · 金山 · 淸道 · 珍山 · 珍島 등 여러곳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선조27년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있을 때 아버지의 상중(喪中)임을 무릅쓰고 곽재우(郭再佑) 장군과 연합하여 왜군을 섬멸하였다. 왕은 그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청풍당3자호(淸風堂3字號)를 내리고 친필로 사호(賜號)를 휘호(揮毫)하였으며 죽은 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청풍당(淸風堂)의 아들 이순길(李順吉)은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인조14년 병자호란 때 南原 · 任實 · 淳昌 등지의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의 창의(倡義) 동지를 열거하면, 황정직(黃廷稷) · 한경생(韓慶生)을 비롯, 임실(任實)의 김원구(金元矩) · 김원중(金元重) · 이흥부(李興浮) 등과 70여 사림들이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南原 · 鎭安에 살고 있다.
청풍당(淸風堂)의 셋째아들인 통덕랑(通德郞) 이언길(李彦吉)은 4男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이 이익표(李益標)이고, 충의위(忠義衛) 익표(益標)의 아들 여옥(汝玉)은 현종10년에 태어났는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문학으로 이름을 얻었다.
이여옥(李汝玉)은 상북면(上北面)에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지방의 미풍양속을 길렀다.
이여옥(李汝玉)의 2남 정석(井錫)은 학문과 행실이 훌륭하여 헌종 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증직(贈職)하였고, 정석(井錫)의 아우인 성석(星錫)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門人)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이성석(李星錫)의 아들 영근(永根)은 학문이 숙달했을 뿐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여 헌종은 그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贈職)하였다.
이영근(李永根)의 아들 광효(光孝)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되 효성으로 하여 사림(士林)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광효(李光孝)의 3男인 종삼(宗三)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門人)으로 순조7년에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영민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그는 여산송씨(礪山宋氏)와 혼인하였는데, 불행히도 20세에 고인이 되어 송(宋)씨 부인은 청상과부로 그를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시부모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자(養子) 윤성(潤性)을 들여 평생을 수절하였다.
이윤성(李潤性) 또한 효성이 자자하여, 어머니는 열부정려(烈婦旌閭)로, 아들은 효자정려(孝子旌閭)로 일문(一門)을 빛냈다.
이윤성(李潤性)의 손자 구현(龜鉉)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한말(韓末)의 석학 연재(淵齋) 송병준(宋秉濬)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학문이 뛰어나 문집 5권을 남겼다.
한편 상산이씨(商山李氏)에는 다른 성씨에서 보기 드문 2忠8孝1烈과 자선(慈善)이 있다.
그중 2忠은 임란창의(壬亂倡義) 이성임(李聖任)과 병자창의(丙子倡義) 오산(烏山) 이순길(李順吉)이고, 8孝는 명종조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인홍(李仁弘), 도사공(都事公) 이명길(李命吉), 지평공(持平公) 이인, 좌랑공(佐郞公) 李弘繼(숙종조), 호산공(湖山公) 李達孝(정조조), 참의공(參議公) 李潤性(철종조)이며, 1烈은 이종삼(李宗三)의 아내인 宋씨부인이다.
특히 정조 때의 호산공(湖山公) 이달효(李達孝)는 사선대(四仙臺)의 유래를 남기게 한 인물로 이곳에 호산정(湖山亭)을 건립하였다.
이윤성(李潤性)의 두 아들 재형(載炯)과 재문(載文)도 효성이 지극하여 재형(載炯)은 동몽교관(童蒙敎官)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추증(追贈)받았으며, 재문(載文)은 희릉참봉(禧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출처 개벽일꾼의 블로그
[출처] 상주이씨 시조 이민도,조선태조때 개국공신